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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1년(2011)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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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기 : 제2회 북경 국제학술 회의에 다녀와서

제2회 북경 국제학술 회의에 다녀와서

 

 

 

연구위원 박병만

 

 

  

  낯선 세계를 접한다는 것은 약간의 두려움은 있지만 상당히 매력 있는 일인 모양이다. 작년에 이어 두 번째의 북경출장이지만 여전히 며칠 전부터 새색시마냥 마음이 설렌다. 8월 22일 우리 일행(교무부장 외 연구위원 6명, 종교문화연구소 7명)은 북경대학에서 열리는 동아시아 도문화 국제학술회의[東亞道文化國際學術硏討會]에 참석차 김포공항을 출발했다. 비행기 안에서 약 1시간 40분 후에 북경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들렸다. 커피를 마시며, 장장 3,000리 길을 밟아 두 달 만에 북경에 도착했다는 연암선생 01에 비하면 ‘우리는 좋은 세상 만나 엄청난 호사를 하는구나!’ 생각하는 사이, 어느새 창밖으로 흐린 북경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작년 학술대회에서 만났던 북경대 대학원생 두 명이 나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며 전세버스로 숙소인 북경대학중관신원호텔[北京大学中关新园宾馆]로 안내했다. 이번 학술대회는 작년에 이어 두 번째 열리는 것이다. 동아시아 3국(한ㆍ중ㆍ일)의 종교학자 및 관계자들이 모여 3국이 전통적으로 공유해왔던 ‘도문화’라는 범주에서 관련 내용들을 연구ㆍ발표하며, 토론 속에서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고 인식의 지평을 열어나가며 나아가서는 3국의 협력과 발전의 밑거름이 되고자 하는 취지에서 열리는 대회이다. 둘째 날은 학술대회, 셋째 날은 도교관련 유적지 답사로 일정이 짜여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학술대회장(북경대학 영걸교류중심)으로 갔다. 낯익은 얼굴들도 눈에 띄었고, 안면이 있는 사람끼리 서로 인사도 나누며 대회장 분위기는 사뭇 진지하면서도 화기애애했다. 참석인원은 50여 명 정도로 작년과 비슷했다. 김훈(북경대 종교문화연구원 부원장) 교수의 개막식사와 『전경』 중문(中文)판 감수를 맡은 바 있는 로우위리에( 楼宇烈, 북경대 종교문화연구원 명예원장) 명예교수의 축사를 시작으로 하루 일정의 학술대회가 시작되었다.

  먼저 하치야 쿠니오(蜂屋邦夫, 동경대) 명예교수는 주제강연에서 ‘도가(道家)와 유가(儒家)의 활동으로 도는 도덕으로서 사람에게 선험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규율인 동시에, 우주의 본원을 보여주는 외재적 법칙이라는 양면을 가지게 되었다.

즉, 도는 우주와 인심(人心)을 향하여 열린 체계인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인류에게 있어서 대단히 훌륭한 것이 아닐까?’라는 요지로 노익장을 과시하며 약간 어눌한 중국어로 발표하였다.

  강돈구(한국학 중앙연구원) 교수는 ‘동아시아의 종교문화’라는 제목의 발표에서 “서구에서는 ‘종교문화’에 해당하는 용어로 ‘religion and cul-ture(종교와 문화)’와 ‘religious cul ture(종교문화)’가 구분되어 사용되고 있고, 한ㆍ중ㆍ일 삼국이 사용하고 있는 ‘종교문화’라는 용어도 각기 다른 개념으로 쓰여지고 있다. 특히 중국의 경우, 종 교는 앞으로 없어져야만 할 것이라는 마르크스주의적 종교이해가 팽배하여 종교가 가지고 있는 문화적 가치만은 그래도 인정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 ‘종교’라는 용어보다 ‘종교문화’라는 용어가 선호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며 ‘종교문화’ 개념에 대한 각국의 인식 차이에 대해 설명했다.

  또한 ‘도교 정신에 대하여’(尹志華, 중국도교협회 부편집장), ‘한국 선도의 유래 변화와 재인식’(김성환, 실학박물관 학예실장), ‘메이지문화 연구에서의 신도(神道)’ (小川原正道, 게이오대학 법학부 준교수) 등의 논문 발표와 학술대회 말미에 『전경』과 관련한 논문 발표가 있었다. 먼저 훠커궁(霍克功, 종교문화출판사 편집부) 주임은 “중국의 도교가 유교와 불교의 사상을 수용하여 삼교합일의사상적 체계를 갖추고 있는 것처럼, 대순진리회도 한국의 신종교로서 유ㆍ불ㆍ도교와 기독교 사상을 수용한 오교합일의 사상을 갖추고 있는 듯하다.”라고 하였다.

 

 

 

  차선근(대순종교문화연구소) 선감은 ‘『태평경(太平經)』의 해원결(解冤結)과 대순진리회의 해원상생 비교연구’라는 제목의 발표에서 “『태평경』이 원(冤)의 근본 요인을 인간, 특히 군주에게서 찾고 이를 바탕으로 인간계의 차원에서 원의 해결 방안을 모색한다면, 대순사상은 원의 근본 요인을 우주의 구조적 모순에서 찾고 우주적 관점에서 원의 해결 방안을 제시한다. 이런 점에서 대순사상의 해원상생은 『태평경』의 해원결보다 그 규모나 범위, 실천 방법 측면에서 더 포괄적으로 전개된다.”라고 말했다. 아울러 “대순사상에 도교적 요소가 많이 발견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순사상을 도교와 완전히 일치시켜 서술하는 것에는 무리가 따른다.”라고 했다.

  이어서 치우우(裘梧, 북경 중의약대학교 인문학원 강사)는 “『전경』에 팔문둔갑, 육정육갑 등은 둔갑술(遁甲術)에 관한 용어이다. 둔갑술은 도교의 법술로서 중국 사회에 광범위하게 응용되었으며, 중국의 역사ㆍ사회와 종교(특히 도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둔갑술이란 작은 관점에서 볼 때 『전경』의 내용 가운데 일부분은 중국 도교 문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라고 말했다. 또한 『전경』 중의 둔갑술의 내용에 대한 분석을 위해서는 둔갑술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며 둔갑술의 기원과 발전에 관한 내용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마지막으로 총평시간에 김훈 교수는 “이 학술대회의 명칭에 사용한 ‘도문화’라는 용어는 동아시아 정신문화의 가장 핵심적이고 상징적인 구호이며, 정감적으로 접하기가 제일 쉽고, 모두가 접근 가능한 개념이다. 다도(茶道)나 서도(書道) 등은 우리와 가깝지 않은가. 만약 ‘종교문화’라고 바꿔 놓으면 여기 모인 우리의 마음이 정감적으로 가까워질까?”라고 여운을 남기며 이 학술대회의 발전을 기원했다. 이날 참석자들은 서로 다른 문화와 인식의 차이를 공감하였고, 어떻게? 그리고 왜? 다른지에 대해 알려고 노력했으며, 그것을 통하 여 서로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작년에 북경에서 열린 『전경』 중문판 출판기념회를 기점으로 중국 측 인사들에게 대순진리가 전해지게 되었지만, 이번 훠커쿵 주임이나 치우우의 발표에서 보듯 그들은 그들의 전통과 사상에 의해 형성된 세계관으로 우리의 진리를 이해하고 판단한다. 그들이 아무 편견이나 선입관 없이 대순진리를 바르게 인식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물론, 물샐틈없는 도수(度數)에 의해 새 기틀이 열려 도전님께서 뜻하시는 포덕천하 (布德天下)가 가까운 장래에 이루어지리라 믿지만, 성사(成事)는 재인(在人)이라 하지 않으셨는가. 도전님의 뜻을 받들어야 하는 도인의 한 사람으로서 무한한 책임감을 느끼며, 그들이 대순진리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는 더더욱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셋째 날, 도문화와 관련한 유적지 답사를 위해 북경에서 서남방으로 288km 떨어진 곳에 있는 하북성 석가장(石家庄) 녹천시(鹿泉市) 소재 포독채(抱犢寨)를 방문할 계획으로 아침 일찍 버스에 올랐다. 가는 길에 포독채 근처에 있는 도관(道館)인 십방원(十方院)에 주지의 초청으로 방문할 예정이라 한다. 일정이 무척 빡빡하게 느껴졌다.

  버스는 북경 외곽으로 빠져 고속도로에 이르렀다. 도로에 간간이 화물 차량 몇 대가 보일 뿐이다. 차창 밖으로는 가도 가도 끝없이 광활한 평원만 펼쳐진다. 온통 옥수수밭뿐이고 고구마나 다른 농작물을 심어 놓은 게 종종 보인다. 포플러나무가 드문드문 서 있는 사이로 십여 채의 농가가 보이는 것이 어렸을 적 우리나라 농촌의 정경과 별 차이가 없다. 300km를 달려왔는데 온통 옥수수밭의 평원이라니 탄성이 절로 나왔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녹천시에 도착했다. 조그마한 시골의 소도시다. 거리에 과일을 파는 노점상과 자전거 수리상 등이 보이고 바로 앞에 십방원 패루가 보인다. 패루 앞에 주지(李明道)를 비롯한 도사 10여 명이 나와 우리를 환영했다. 십방원은 청나라 때 이 지역 현령에 의해 세워진 하북성의 대표적인 도관이라 한다. 먼저 삼청전(三淸殿)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원시천존(元始天尊), 영보천존(靈宝天尊), 도덕천존(道德天尊: 태상노군)을 모셔 놓았다. 삼청전을 지나 안쪽으로 삼조전(三祖殿)이 있었고, 우측에 관운장을 모신 재신전(財神殿: 현재 중국의 민간에서는 관운장을 재신으로 숭배하고 있음 ) 이 있었다 .

 

 

 

  삼조전에 들어가니 중앙의 여동빈(呂洞賓)을 비롯하여 전진교(全眞敎)의 개조(開祖) 왕중양(王重陽)과 중양의 제자인 구처기(丘處機)의 상이 모셔져 있고, 천장에는 팔괘의 문양을 중심으로 빙 둘러서 28수(宿)에 상응하는 28위(位)의 신명이 그려져 있었다. 마침 주지의 배려로 여러 남녀 도사들이 거행하는 도교의식을 볼 수 있었는데, 장중한 음악 연주와 어울려 숙연하면서도 경쾌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중국의 도교는 원(元)나라 이후 크게 전진교와 정일교(正一敎)로 재편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십방원 내의 하북성도학원(河北城道學院)이란 건물의 식당에서 이곳 도사들이 일상적으로 먹는 만두와 채소요리, 계란탕으로 점심을 먹었다. 오래된 식탁과 의자, 소박한 식단이 이곳 도사들의 검소한 생활상을 엿보게 했다. 도관 내부는 잘 정돈되어 있었고 별유동천(別有洞天: 신선이 산다는 도교의 이상향을 뜻함)이라고 쓴 둥그런 문 밖으로 아담한 정원과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듯 낡고 허물어진 건물 여러 동이 보였다. 아마도 예전에는 비교적 규모를 갖춘 도관이었으리라 생각된다. 바쁜 일정으로 주지와 여러 도사의 환송을 받으며 서둘러 포독채로 향했다.

  버스로 10여 분을 달려 포독채로 오르는 입구에 당도하였다. 우리는 케이블카 두 대에 분승했다. 발아래로는 연화산(蓮花山)의 산봉우리와 포독채를 오르는 남쪽 계단이 보이고, 봉우리 하나를 넘자 앞에 포독채 전경이 보인다. 마치 거대한 부처가 누워있는 듯하다. 산정에 오르니 산을 둘러싸고 장성(長城)이 있으며 평탄한 평지(면적: 약 12만 평)에 잘 자란 나무와 풀이 우거져 마치 선경에 오른 듯하다. 이곳은 해발 580m로 사방이 바위 절벽으로 둘러싸이고 기이한 경치를 가졌다 하여 ‘천하기채(天下奇寨)’로도 불린다고 한다. 옛날에는 이곳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송아지는 가파른 산길을 오를 수 없어 사람들이 송아지를 안아서 이곳까지 데려왔다고 하여 포독채(抱犢寨: 안을 포, 송아지 독, 작은 성 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먼저 남천문(南天門)을 지나 한신(韓信) 장군을 기리는 한신사(韓信祠)에 이르렀다. 사당 안에는한신과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의 내용을 담은 금칠벽화가 있다. 한 신이 조(趙)나라와 결전을 벌이는 도중 물이 매우 부족하였는데, 하루는 하얀 사슴이 땅을 파고 있는 것을 보고 그가 활을 쏘았다. 하지만 화살은 돌에 박히고 말았고 돌에 박힌 화살을 뽑자 그 속에서 물이 솟구쳤다고 한다. 이에 군사들은 기쁨에 넘쳤고 이로부터 이 지역을 백록천(白鹿泉)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여기서 녹천시(鹿泉市)의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서남쪽 16km 지점에 한신이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조나라와 싸워 이겼다는 강이 있다고 하는데 가보지는 못했다.

  한신사를 나와 장성을 따라 동쪽으로 돌아 10여 분을 걸어 청나라 강희제 때 세웠다는 도관 금궐궁(金闕宮)에 들렀다. 삼청궁(三淸宮) 앞뜰에 장삼풍[張三豊: 명나라 때(추정)의 도인으로 무당파의 개조]이 심었다는 복숭아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는 나라가 위험에 처하면 말라 죽었다가 나라가 흥성하게 되면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우리는 금궐궁을 나와 전설에 견우와 직녀가 살았다는 우랑직녀가(牛郞織女家) 02와 세계에서 유일무이하다는 산정(山頂) 지하 오백나한당(五百羅漢堂)을 견학하고 일정에 쫓겨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하산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계단을 따라 내려오고 싶은 충동을 뒤로한 채….

  다시 오던 길을 되돌아 북경으로 향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녹천시내의 모습은 1980년 대 초반 우리나라 지방 소도시의 정경과 비슷해 보였다. 오토바이, 리어카, 자전거 그리고 차량이 혼란스럽게 지나다니고 허름한 상가와 세련되지 못한(우리나라와 비교해서) 간판들. 북경 중심가의 모습과 비교해 보면 지역ㆍ계층 간의 빈부격차가 심하다는 게 실감 났다. 한때는 대중화(大中華)의 나라로 우러러보았던 중국, 하지만 이제는 우리보다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많은 중국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왠지 마음 한구석이 뭉클해졌다.

  버스 안에서, 하늘과 땅이 맞닿아서 구름만이 아득한 하북의 평원을 바라보며 이 드넓은 평원에도 상제님의 덕화가 선양되어 감화와 기쁨의 울음소리로 한바탕 메아리치기를 기원하는 사이, 어둠이 깔리며 북경의 야경이 점점 시야에 가까이 들어왔다.

 

 

 


01 연암(燕巖)은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호이다. 그는 삼종형(三從兄)인 정사(正使) 박명원(朴明源)의 자제군관 자격으로 1780년 5월 25일 한양을 출발하여 요동을 거쳐 3,000여 리의 길을 밟아 8월 1일 북경에 도착했다가, 다시 북경 동북쪽 400리 떨어진 곳에 있는 열하(熱河)까지 다녀와서 10월 27일 한양으로 돌아왔다. 이 여행을 다녀와서 쓴 책이 『열하일기』이다.

02 견우(牽牛)와 직녀의 전설은 여러 나라에서 전승되고 있는데, 이곳 포독채에 살았던 사람들은 견우가 바로 송아지를 안아 올렸던 최초의 사람이라 믿고 있다. 고구려 벽화 천정에도 견우와 직녀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포독채의 경우 안내인의 설명에 따르면 견우ㆍ직녀 전설이 성립된 시기가 명나라 때라고 한다. 시기적으로 우리나라가 크게 앞서고 있으며 고구려연구회 회장인 서길수 교수도 우리가 원조라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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