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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2년(2012)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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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기(학술답사) : 중국 사천성의 도교 성지를 다녀와서

중국 사천성의 도교 성지를 다녀와서

 

 

연구위원 신상미

 

 

 

  지난 7월 7일~8일 양일간 중국 북경대학에서 개최된 제3회 동아도문화국제학술연토회에서는 “동아시아 도문화 속의 신선사상”을 주제로 동아시아 전통종교에 관한 학술교류가 이루어졌다.01 우리 일행과 한국, 중국, 일본의 도교 학자들은 연토회가 끝난 후 중국 도교협회의 초청으로 7월 9일~10일 중국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의 도교(道敎) 성지인 청성산(靑城山)과 청양궁(靑羊宮) 일대를 방문하기로 하였다.

 

 

 

사천성(四川省)

  7월 8일 오후 5시 30분에 출발하여 7시 40분 정도에 사천성에 도착하였다. 같은 나라에서 비행기로 2시간 30분 가량 걸리는 정도라니 중국의 영토가 넓은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새삼스러웠다. 저녁에 도착하여 숙소로 향하는 차 안에서 본 사천성의 거리에는 사람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여름에는 너무 더워서 대부분이 일찍 퇴근하여 쉰다고 한다. 사천성은 바다가 멀고 계절에 따라 온도 차이가 심한 곳이므로 예로부터 이러한 악천후를 이겨내기 위해 매운 요리를 즐겨 먹게 되었다고 한다.

  사천성은 중국의 서남지구(西南地區)에 위치하며, 장강(長江) 상류에 있는 성(省)으로 천(川) 또는 촉(蜀)이라 한다. 사천이라는 의미는 경내에 장강(長江)·민강(岷江)·타강(沱江)·가릉강(嘉陵江)의 4대 강이 성내를 흐르기 때문에 유래되었다. 거대한 분지와 고원 형태의 지형으로 외부와 고립된 듯하지만 ‘천부지국(天府之國: 천국의 땅)’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물산이 풍부하다. 그리고 사천성의 수도인 성도시는 ‘유구한 역사의 도시’ 또는 ‘고대문명의 도시’라고 할 만큼 수천 년간의 역사 흔적을 담고 있는 도시다. 우리가 이틀 동안 머물게 될 이곳에서 책에서나 본 성도의 도교 성지를 직접 보게 될 것을 생각하니 잠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었다.

  다음 날 오전 8시에 출발하여 차로 1시간 30분 걸려 청성산에 도착하였다. 청성산은 중국 도교의 발원지 중의 하나로 도교 명산에 속한다. 성도시에서 약 68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도강원시(都江堰市)에서는 15km의 거리에 있다. “청성은 천하의 유곡(靑城天下幽)”이라는 찬사를 받아 온 청성산은 온 산의 임목이 사철 푸르고, 36개의 산봉우리들이 마치 성곽처럼 이어져 있어 푸른 성이라는 의미로 지어졌다. 그리고 황제헌원씨(黃帝軒轅氏)가 이 산을 오악장인(五嶽丈人)으로 봉했다고 하여 옛날에는 장인산(丈人山)이라고도 하였다. 산맥 가운데 가장 높은 봉우리인 노소정(老霄頂)은 해발 1,260m이며 8개의 큰 동굴과 72개의 작은 동굴, 108개소의 경관이 있다. 청성산 입구에 잠시 있으니 청성산을 관리하고 있는 청성산 도교협회 회장인 도장(道長)이 직접 마중 나왔다.

 

 

 

  쟝밍신(張明心) 도장의 배려로 우리 일행은 청성산의 전산(前山)으로 안내자와 함께 산행을 시작하였다. 산행길은 전산과 후산(後山)으로 나뉜다. 우리 일행은 전산으로 가면서 상청궁(上淸宮)을 들러 후산으로 내려가면서 천사동(天師洞)과 건복궁(建福宮)을 들르기로 하였다. 이곳 외의 명소로는 천연도화(天然圖畵), 조양동(朝陽洞), 조사전(祖師殿) 등이 더 있다. 옛날에 후한 시대 장도릉(張道陵)은 이곳에서 치병을 통한 민중의 구제라는 교화방편을 썼다. 도계(道誡)의 실천과 여러 가지 양생적 노력을 권장하였으며 궁극적으로 선인의 경지에 도달함을 이상으로 제시하였다. 오두미도(五斗米道)라고 하는 이 교단은 당시에 사람들이 무술도 배우고 점차 도교의식을 갖추어지자 청성산에 도교사원을 짓기 시작하였는데 무려 70여 동이나 되었다고 한다.

  영화 ‘서유기’의 촬영지로도 알려진 월성호(月城湖)에서 배를 타고 조금 걸어서 케이블카를 탄 후 상청궁에 이르렀다. 이곳의 공기는 마치 여름에 제주도에서 삼림욕을 하는 것처럼 습한 공기와 함께 진한 풀잎 향이 어우러져 마음마저 상쾌하게 해주었다. 곳곳에 독특한 형태의 누각과 정자에 낀 파란 이끼들은 장구한 세월을 보여 주듯 신비로움을 자아냈다. 상청궁은 청성산 제일봉의 동쪽 기슭에 있는 곳으로 전설 속에 신선 도사들이 살던 곳이기도 했고, 제왕(帝王)들이 묵어가는 행궁이기도 했으며 농민봉기군의 본거지이기도 했다.02 상청궁은 처음 진(晉)나라 시기에 건설되었다가 청(淸)나라 시기에 중건되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상청궁에 이르러 우리를 위해 차를 준비하고 기다리는 도사를 만났다. 옛날엔 이곳에 70여 동의 도교사원이 있었고 현재는 40여 동이 존재한다고 알려졌지만, 실제 16동 정도가 남아있으며 120명 정도의 도사가 있다고 한다. 도사와 함께 잠시 대화를 나눈 후 상청궁에서 점심으로 청성산을 대표하는 4가지 보물을 대접받았다. 청나라 황제인 강희제(康熙帝)가 들러 마셨다는 홍차와 직접 재배한 키위로 만든 술, 은행을 넣어 만든 닭고기 찜요리, 각종 장아찌가 그것이다. 특히 가축은 인위적인 사료가 아닌 자연 속에서 방목하여 키우기 때문에 맛이 더 좋다고 한다.

 

 

 

  식사 후 태상노군(太上老君: 노자)과 순양조사(纯阳祖師: 여동빈), 장삼풍(張三豊)03 등의 소상(塑像)과 문무전(文武殿)의 공자(孔子), 관우(關羽) 상을 보고 후산 쪽으로 하산하였다. 오는 길에 후한 말년(25년~220년)에 천사도(天師道)를 창시한 장도릉이 수련과 포교을 했던 천사동에 들렀다. 이 건물 또한 청나라 때 중건되었으며 삼청전(三淸殿), 삼황전(三皇殿), 황제사(黃帝祠)의 세 겹 건물로 되어 있다. 특히 삼청전에는 도교 지고무상(至高無上)의 세 신(神)인 옥청선경(玉淸仙境)의 원시천존(元始天尊), 상청선경(上淸仙境)의 영보천존(靈寶天尊), 태청선경(太淸仙境)의 도덕천존(道德天尊)을 모시고 있다. 이곳에서는 이 신들이 천하의 만사만물을 창시관장(創始管掌)한다고 여기고 있다.

  서둘러 하산하여 처음 출발하였던 장소에 다시 도착하였다. 청성산 입구 옆으로 보이는 건복궁에서 쟝밍신(張明心) 도장과의 면담을 한 후 저녁 식사를 함께 하기로 하였다. 건복궁에 도착하여 둘러보니 1992년에 개축된 정전(正殿) 안에는 영봉자(寧封子)·두광정(杜光庭) 등 두 진인(眞人)의 채색 소상(塑像)이 있었고, 정전 벽에는 삼국시대 촉나라의 도사 범장생(范長生)의 이야기를 담은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도장은 청성산이 도교의 발원지이며, 1982년 제1차 국가급풍경명승구, 2000년 UNESCO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고 2007년 5월에 국가 66개 5A급 여유경구의 하나로 지정되었다고 설명하면서 한국의 5대 종교에 도교가 포함되지 않은 점에 대해 유감이라고 하였다. 한국에 초청하겠다는 우리 측의 제안에는 청성산을 지켜야 하기에 갈 수 없으나 고맙다고 답하였다. 스승께서 청성산은 600년이 지나도 변화 없이 그대로 갈 것이라고 하신 적이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2008년 사천 지진이 일어났을 때 신당에 있는 꽃병 하나도 손상되지 않았다고 한다. 청성산은 모든 소원이 이뤄지는 곳으로 소원을 빌러 오는 사람이 많고 특히 수행하고 있는 외국인도 많다고 하였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식사장소를 옮겨 청성산과 도교에 관련된 이야기를 더 나눈 후 도강원으로 향하였다.

 

 

 

  거의 저녁 7시 무렵에 도강원 입구에 있는 이퇴공원(李堆公園)에 도착하게 되어 구경을 많이 할 수 없었다. 복룡관(伏龍觀)은 문이 굳게 닫혀 있어서 보지 못하고 시원하게 흐르는 물살만을 구경하였다. 도강원은 외강·내강으로 나누어 평상시에는 평야 및 촌락을 흐르는 내강으로 물을 흘려보내고 홍수가 났을 때는 외강으로 되돌려 보내는 시스템을 갖춘 고대 수리시설이라고 하는데 그 지혜가 정말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도강원은 전국시대 말인 256년, 촉군 태수 이빙(李氷)과 그의 아들에 의해 설계되고 주민에 의해 무려 8년간의 노력 끝에 완성된 것이라 한다. 이 시설이 예부터 민강(岷江)의 범람으로 일어나는 홍수를 막아 주어 성도 사람들이 편하게 농사를 지었다고 하며, 오늘날에도 이 일대의 농지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부근에는 촉나라 이씨 부자를 기리는 사당인 ‘이왕묘(二王廟)’가 있다고 하였으나 우리 일행은 내일의 일정을 위해 서둘러야 했기에 그곳까지는 가지 못했다. 공원을 나와 상점거리를 지나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2008년 지진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흔적을 볼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8시에 청양궁을 가기 전에 성도하면 꼭 빼놓지 않고 가봐야 할 곳인 무후사(武侯祠)에 들렀다. 성도는 유비가 황제의 위에 올랐던 장소이자 유비의 아들 유선(劉禪)이 30여 년간 통치했던 촉한의 본거지이다. 남북조시대(420~589)에 만들어졌고, 청대인 1672년에 재건되었다. 면적은 무려 4만 5,400여 평의 넓이이다. 유비의 무덤이 있어 한소열묘(漢昭烈廟)라는 간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곳의 이름은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충무후(忠武侯)라는 시호를 따서 무후사라 한다. 특히 왕과 신하가 함께 모셔져 있는 경우는 거의 없으므로 더 의미가 있는 곳이다.

  두보는 촉한의 승상이자 군사인 제갈공명의 충성심을 사모하여 「촉상(蜀相)」이라는 시를 지었다. 상제님께서도 제갈량의 처사를 높이 사셔서 “천지 종용지사(天地從容之事)도 자아유지(自我由之)하고 천지 분란지사(天地紛亂之事)도 자아유지하나니 공명지 정대(孔明之正大)와 자방지 종용(子房之從容)을 본받으라.”04고 하시면서 그의 공명정대함을 칭찬하셨다. 한편 이곳에는 촉한의 명장인 관우·장비 등과 28인의 문·무관들 상이 무후사를 지키듯 늠름하게 서 있었다. 비갈(碑碣)05이 여기저기에 있고 편액(扁額)06도 건물의 기둥에 많이 걸려 있었다. 다 보진 못했지만, 소장유물이 모두 6천여 점이나 된다고 한다.

 

 

 

  무후사를 나와서 삼국 시기부터 전국적으로 이름이 나 있는 상업 고장인 금리(錦里)를 구경한 후 11시쯤 도교 사원인 청양궁에 도착하였다. 청양궁은 노자(老子)를 기리는 도교 사당으로 지금은 문화공원이라고 불린다. 이곳에서 노자(老子)가 윤희(尹喜)에게 『도덕경(道德經)』을 가르쳤다고 한다. 청양궁은 사천성 서부지역에서 제일 큰 도교사원이며, 건축연대가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한다. 당대에는 명칭이 현중관(玄中觀)이었으며 880년 황소(黃巢)07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희종(僖宗)이 성도로 피난하던 중 이곳을 행궁(行宮)으로 삼아 장안(長安)으로 돌아간 후 청양궁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현존하는 청양궁은 대부분 청나라 때 보수 및 재건되었다.

  우리 일행은 청양궁 도장의 배려로 설명을 들으며 건물을 둘러볼 수 있었다. 산문을 들어서서 걷다 보면 태상노군(太上老君)을 혼원상덕황제(混元上德皇帝)로 봉하여 존치한 곳인 혼원전(混元殿)이 보인다. 혼원전을 지나 삼청전으로 가기 전에는 도교의 교리와 특징을 나타내는 건축물인 팔괘정(八掛亭)이 있다. 바닥은 사각형이고 정자는 원형인 것이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졌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구현한 것이라 한다. 건물에는 태상노군의 화신을 상징하는 81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으며, 안에는 여동빈(呂洞賓)이 모셔져 있다. 아름다운 조형과 정교한 조각, 특히 날아오를 것 같은 2중의 처마가 인상 깊었다.

 

 

 

  팔괘정을 지나 바로 보이는 삼청전(三淸殿)은 청양궁의 주전(主殿)으로 무극전(無極殿)이라고도 한다. 큰 기둥 36개 중에 나무기둥은 8개로 도교의 8대 천왕(八大天王)을 상징하고, 나머지 28개의 돌기둥은 하늘의 별자리인 28수(宿)를 나타낸다고 한다. 삼청전에는 청양궁을 상징하는 황동(黃銅)으로 만들어진 두 마리의 양(羊)이 놓여 있다. 그중 뿔이 하나인 양은 쥐의 귀, 코는 소의 코 형태 등으로 되어 12지지(十二地支) 동물의 특징을 모두 갖고 있다. 또한 노자의 화신으로 병을 낳게 한다는 전설이 있어서 양을 쓰다듬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마침 설명을 듣고 있는 와중에 양 동상을 열심히 만지는 할머니를 볼 수 있었다.

  그 외 도교의 여신인 두모(斗姆)를 모신 두모전(斗姆澱), 노자가 태어났을 때의 모습과 노자가 설법하는 곳이 있는 후원삼대(後苑三台), 옥황상제(玉皇上帝)와 자미대제(紫微大帝)가 모셔져 있는 옥황전(玉皇殿)을 둘러보았다. 유난히 다른 사원과 달리 촬영을 금하였기에 눈으로만 담을 수밖에 없었다. 청양궁 도장을 비롯해서 몇 분의 도사와 함께 식사를 한 후 두보초당(杜甫草堂)에 잠시 들렀다.

 

 

 

  두보는 760년 봄에 이곳 완화리(浣花里)에 초당을 짓고 주거지로 삼았다. 이곳에서 3년 정도 머물며 지은 시가 240여 수 정도 된다고 한다. 깡마른 모습의 50대인 두보를 표현한 상이 인상 깊었고, 청빈(淸貧)하게 살았던 두보의 이미지에 맞게 초당은 소박한 느낌이 들었다. 두보가 떠나고 초당은 열 차례가 넘게 수리와 재건을 했다고 하는데, 현재의 초당은 청대에 준공되었다.

  두보의 시는 조선조 성종(成宗) 12년(1481)에 초간본이 간행되었을 뿐 아니라 과거 시험 주제로도 많이 채택하였을 정도로 널리 알려졌다. 이는 두보의 사상이 유교적이고 군자의 도를 역설했으며 충군애민(忠君愛民)과 인간애(人間愛)의 정신을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시의 구성·표현·운율 등 여러 면에서 출중한 경지였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즉, 두보의 시에는 전쟁의 참상과 백성들의 고난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고, 나라와 백성을 염려하는 마음이 절절히 배어 있다. 『전경』에 율곡이 이런 두보의 율시[律詩: 여덟 구로 된 한시체(漢詩體)]를 이순신에게 천 번 읽으라[두률천독(杜律千讀)]08 고 당부한 것이 있다. 이는 그에게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마음을 한층 더 강하게 지니고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강인한 정신을 지니길 바랐기 때문이었으리라 본다. 40분 정도 관람을 한 후 이번 답사의 마지막 코스인 사천대학(四川大学)을 방문하였다.

  사천이 도교의 발원지인 만큼 도교 연구에 있어 사천대학의 권위는 상당히 높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사천대학 노자 연구원인 잔스촹(詹石窗) 교수가 사천대학 도교·종교문화연구소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사천대학 도교·종교문화연구소는 중국에서 유일한 도교 연구 분야의 국가급 중점 연구기지로 건국 이래 유일한 종교학 중점학과이며 대량의 도교연구자원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각 나라의 도교 관련학자들이 여기에서 연구하고자 오는 경우가 많으며 도교 관련 논문을 추려서 보관하고 있는데, 최근에는 종교학이나 도교보다는 철학을 전공하는 종교인이 많아 철학 관련 논문들이 더 많다는 점이 좀 아쉽다고 하였다. 그리고 도교의 작은 목표는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고 큰 목표는 평화와 건강이어서 현실생활에 많은 도움이 된다는 말씀도 덧붙였다. 우리 일행은 도교와 중국문화, 도사들의 일상생활에 대해 환담을 더 나눈 후 다음날 새벽에 한국으로 가기 위해 일정을 마무리하였다.

 

 

 

  사천대학에서 도교 연구자와 나눈 대화 중에 “학자 중에는 연구만 하는 학자도 있겠지만 진정한 학자라면 수련도 직접 하면서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잔스촹 교수의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이번 학회에서 “일본의 장자 수용”을 발표한 하치야 쿠니오(蜂屋邦夫) 교수도 전진교(全眞敎)에 대해 연구하고자 8년 정도 중국에 머물며 수행에 참여했다고 한다. 나 또한 보고 듣고 체험하는 것보다 더 좋은 연구방법은 없다는 학자들의 말에 동감한다.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뿐만 아니라 타 종교를 이해하고 연구하기 위해서는 그 종교에 대한 수행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다.

  그리고 『전경』에 상제님께서 “…예로부터 신선을 말로만 전하고 본 사람이 없느니라. 오직 너희들은 신선을 보리라….”09 라는 말씀과 여동빈의 이야기10등을 통해 신선에 관한 말씀을 들려주신 적이 있어서인지 중국의 신선 이야기가 그리 낯설지 않았다. 특히 신선이 되고자 수도를 하는 중국 도사의 일상생활은 지역마다 다르겠지만, 주로 새벽 5시에 일어나 아침 공부를 하고 아침 식사를 한다고 한다. 수련하는 시간은 자오묘유(子午卯酉)이며, 9시쯤은 하루 일정이 끝나고 저녁 10시 30분에 30분 동안 정좌를 하고 취침을 하는 단조로운 생활을 한다고 한다. 소식(小食)을 하고 술과 육류를 먹지 않으며 하루에 한 끼 먹는 도사도 있어서 마치 지금의 우리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 같았다. 사회생활과 더불어 수도를 하면서 포덕하는 등 다채로운 생활을 하는 도인들에 비해, 사원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외출을 할 수 없는 도장(道長)과 매일 규칙적으로 일어나 수련하는 도사들의 수도 생활을 통해 혹여 일한다는 핑계로 수도에 게을리 하진 않았나 뒤돌아 생각해보는 좋은 기회였다.

 

 

 


01 『대순회보』 136호, pp.60~65 참고.

02 이수현, 『짱워 중국사천성관광명소』, 중우, 2012, p.56 참조.

03 무당파의 개조로 ‘태극권’을 창시하였다는 설이 있다. 

04 교법 3장 29절.
05 빗돌의 윗머리에 지붕 모양으로 만들어 얹은 비와 그런 것을 얹지 않고 머리 부분을 둥그스름하게 만든 작은 비석인 갈을 아울러 이르는 말.
06 종이나 비단, 널빤지 따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써서 걸어 놓는 틀.

07 875년 수천 명의 추종자들을 모아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켜 중국 전체를 휩쓸었던 반란 지도자이다.
08 행록 1장 32절.
09 행록 5장 25절.
10 예시 6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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