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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고전 읽기의 즐거움 : 『윤문자』(尹文子), 세속적 인간의 긍정과 일자一者의 발견
『윤문자』(尹文子), 세속적 인간의 긍정과 일자一者의 발견
글 신정근
동양고전을 즐겨 읽거나 제자백가에 관심이 많다고 해도 윤문자(尹文子)를 들어 본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덜 알려졌다고 해서 윤문자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이해가 그만큼 공자, 장자, 한비자와 같은 인물 중심으로 치우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사상사가 그만큼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우리는 윤문자를 통해 빼놓은 사상가의 빈틈을 메울 수 있을 것이다. 윤문자는 많이 알려진 바는 없지만 그는 제(齊)나라 사람으로 맹자와 대화를 나누었던 선왕(宣王) 시절에 활약했다. 전국시대 제나라는 오늘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국학진흥원처럼 직하학궁(稷下學宮)을 설립해서 여러 나라 출신의 제자백가를 초치했다. 그곳에서 학자들은 자유로운 연구를 하고 자문에 응하기는 했지만 직무를 수행하지는 않았다. 당시 윤문자도 직하학궁에 참여해서 다양한 사상가와 교류를 한 것으로 보인다.
세속적 인간의 긍정
“세속의 사람들은 칭찬받으면 기뻐하고 헐뜯으면 걱정한다. 이것은 일반 사람의 보편적인 감정이다. 자신과 같으면 히죽히죽 즐거워하고 자신과 다르면 발끈 성낸다.”03
윤문자가 본 사람이란 오늘날 우리가 보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 이 사람에 대해 윤문자는 도덕적 평가 또는 윤리적 접근을 취하지 않는다. 그냥 사람이 그렇다며 담담하게 보고하고 있다. 담담한 보고는 다음처럼 이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상대의 의중을 잘 헤아리는 사람은 칭찬하기를 잘하고 순순히 따르기를 잘한다. 상대가 옳다고 하면 자신도 역시 옳다고 하고, 상대가 그르다고 하면 자신도 역시 그르다고 한다. 즉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따라가고 상대가 싫어하는 것에 맞장구친다. 그래서 현명한 리더가 비록 이치상 올바른 말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반드시 올바른 사람을 가까이 하지 않을 수 있다. 또 현명한 리더가 이치상 의중을 잘 헤아리는 사람을 외면한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반드시 의중을 잘 헤아리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을 수 있다.”04
사람이 도덕적이며 이성적으로 행동한다면 사람은 자신과 상대를 도덕과 이성에 따라 규제하게 된다. 설령 상대가 자신과 아무리 친하다고 하더라도 하는 일이 타당하지 않다면 비판하게 된다. 윤문자는 꾸미지 않는 사람의 실제 모습을 가감 없이 그리고 있다. 사람은 도덕과 이성이 아니라 감정과 당파에 따라 움직인다. 도덕을 기준으로 비판하는 것보다 이해에 따라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것을 좋아한다.
“하늘과 땅 사이에 현명하지 못한 사람이 실제로 많고 친절하고 현명한 사람은 실제로 적다. 이익을 추구하는 감정(욕망)은 현명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더 심하고, 청렴하고 부끄러워하는 감정은 친절하고 현명한 사람일수록 더 강하다. 가령 예의로 친절하고 현명한 사람을 모으고자 한다면 그렇게 해서 얻은 친절하고 현명한 사람은 만 명 중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명예와 이익으로 현명하지 않은 사람을 모으고자 한다면 그렇게 해서 얻은 현명하지 못한 사람은 땅(길)에서 부닥칠 정도로 많다.”05
윤문자는 현명한 소수와 현명하지 못한 다수라는 현실의 조건을 인정한다. 소수가 다수를 계몽하는 방식이 아니라 다수의 존재를 인정하는 방식을 주장하는 것이다. 세속적 가치를 긍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그는 세속 사회를 전제하고서 사회 질서의 수립을 모색한 것이다. 이어서 그는 다음처럼 부연했다. “예의가 군자를 만든다고 하더라도 군자가 예의를 다 갖추지 못하고 명예와 이익이 소인을 통제할 수 있으므로 소인에게는 명예와 이익이 없을 수 없다.”06
독치(獨治)를 넘어 공치(共治) 사회로
선을 하면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따라 하게 못한다면 이는 독선이다. 교묘한 기술을 쓰면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따라 하도록 하지 않는다면 이는 독교(獨巧)이다. 이것은 모두 선과 기술의 이치를 완전히 떨치지 못하는 것이다. 선을 하더라도 대중과 함께 실행하고 기술을 쓰더라도 일반 대중과 함께 능숙하게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선(善) 중의 선이고 기술 중의 기술이다. 그러므로 소중하게 여기는 성인의 다스림은 독치(獨治)를 높이 치는 것이 아니고 대중과 함께 공치(共治)할 수 있는 것을 높이 친다.07
“윤문자는 홀로 선을 하는 독선(獨善)과 홀로 기술을 쓰는 독교(獨巧)를 다시 홀로 다스리는 독치(獨治)로 귀결시키고 있다. 마지막에 그는 이 독치를 여럿이 함께할 수 있는 공치(共治)와 대비시키고 있다. 물론 우리는 이 공치를 인민주권으로 확대 해석할 수는 없다. 그렇더라도 공치의 가치가 낮게 평가될 수는 없다. 윤문자가 성인, 군자 등 소수의 특별한 위인이 선도하고 다수의 인민이 모방하는 사회 질서를 바라지 않았다. 사회 질서의 초점을 다수의 인민이 바라고 할 수 있는 것에 바탕을 두고자 한다. 이로써 다수의 인민을 사회 질서의 외부에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일원으로 포섭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윤문자는 유감스럽게도 인민을 내부로 포섭하고 나서 그 권리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 논의를 하지 않고 있다.”08
“요즘 세상 사람들은 행동은 홀로 현명하고 일처리가 홀로 유능하고 변론은 무리에서 뛰어나고 용기가 대중과 비교되지 않으려고 한다. 홀로 실행하는 현명함은 그것으로 교화를 마칠 수 없고 홀로 유능한 일처리는 그것으로 급무를 깔끔하게 처리할 수 없고 무리에서 뛰어난 변론은 집집마다 찾아가서 설득할 수 없고 대중과 비교되지 않는 용기는 적진을 깨뜨릴 수 없다. 이 네 가지는 혼란이 일어나는 까닭이다.”09
이제 윤문자의 주장은 분명하다. 독현(獨賢), 독능(獨能), 출군(出群), 절중(絶衆)의 논리가 역설적으로 사회 질서를 가져오는 미덕이거나 기능이 아니라 사회 혼란을 가져오는 원인이다. 이는 개인의 탁월성에 바탕한 사회 질서와 완전히 딴판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사람과 함께할 수 없는 개인적 탁월성은 결국 사회보다 개인에 초점을 두게 되고, 그러한 개인들의 권력화로 이어지게 된다. 이 권력화로 인해 질서가 아니라 혼란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성인은 도에 맡겨서 위험 요소를 없애고 법을 만들어서 차이를 조정하여 똑똑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으로 하여금 서로 떨쳐버리게 하지 않고 유능한 사람과 비루한 사람으로 하여금 서로 빼버리지 않도록 한다. 유능한 사람과 비루한 사람으로 하여금 서로 빼버리지 않으면 유능한 사람과 비루한 사람 모두 공을 나란히 세울 수 있다. 또 똑똑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으로 하여금 서로 떨쳐버리지 않으면 똑똑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모두 고려(대비)를 비슷하게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완전한 질서의 기술이다.”10
다수의 인민이 모두 법에 따르게 된다. 이 법은 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가지는 것이다. 이러한 공치의 법 사회에서도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묵적, 상앙, 한비는 능력 중심의 사회를 수립하고자 했지만 업적주의, 결과주의, 국가주의에 빠지게 되면 격차, 소수자 문제를 피할 수 없었다. 윤문자가 해결책을 내놓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윤문자는 똑똑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 유능한 사람과 비루한 사람이 차이 때문에 배제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천인(天人) 도식에서 도기(道器) 도식으로
“모든 일을 전부 하나로 귀결시키고 모든 기준을 전부 법으로 잰다. 하나로 귀결시키는 것은 간단함의 지극함이고 법으로 재는 것은 쉬움의 극치이다. 이와 같다면 완고하고 속이고 귀먹고 눈먼 사람도 모두 예리하고 지혜롭고 귀 밝고 눈 밝은 사람과 함께 사회의 질서를 함께할 수 있다.”13
『노자』에서 “도가 하나를 낳고 하나가 둘을 낳고 둘이 셋을 낳고 셋이 만물을 낳는다”라고 했다.14 노자는 도와 하나를 구분하고 있다. 하나라는 것 자체도 한정된 것으로 보고 있다. 반면 윤문자는 도와 하나 사이의 차이를 두지 않는다. 하나인 도는 구체적인 세계에서 다양한 사물과 사태로 나뉘게 된다. 사물과 사태는 하나인 도와 결부해서 연계성을 가지지 않으면 제대로 된 이름을 가지지 못하게 된다. 즉 이름 없는 기(器)는 잠정적인 존재이고 이름 있는 기(器)가 현실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필자소개: 서울대학교에서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을 배웠고 대학원에서 동양철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유학·동양학부의 교수로 있다. 한국철학회 등 여러 학회의 편집과 연구 분야의 위원과 위원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사람다움이란 무엇인가』, 『공자씨의 유쾌한 논어』, 『제자백가의 다양한 철학흐름』, 『동중서 중화주의 개막』, 『동양철학의 유혹』, 『사람다움의 발견』, 『논어의 숲, 공자의 그늘』, 『중용: 극단의 시대를 넘어 균형의 시대로』, 『어느 철학자의 행복한 고생학』, 『한비자』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백호통의』, 『유학, 우리 삶의 철학』, 『세상을 삼킨 천자문』 『공자신화』, 『춘추』, 『동아시아 미학』 등이 있다. 01 오늘날 전해지는 『윤문자』는 『大道』 상하 두 편과 다른 쪽에 흩어져 있는 단편을 모은 일문(佚文)으로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윤문자를 명가로 보는 견해가 널리 알려진 평가이다.(알프레드 포르케 저, 최해숙·양재혁 옮김, 『중국 고대철학사』, 소명출판, 200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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