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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3년(2013)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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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신앙 : 천신신앙 속의 의례, 제천의식(祭天儀式)(2)

천신신앙 속의 의례, 제천의식(祭天儀式)(2)

 

 

글 교무부

 

  하늘[天]에 대한 인식은 고금을 막론하고 인간 사유의 원형으로서 숭배되어 왔다. 우리 민족 또한 고대 신화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요소 중 하나가 하늘을 지고신(至高神)의 존재로 의식했다는 점이다. ‘단군신화(檀君神話)’의 환인(桓因)은 ‘하늘’ 또는 ‘하느님’이라는 우리말의 음역(音譯)이며, 환인의 아들로서 태백산에 강림한 환웅(桓雄)도 ‘하늘’이라는 발음에서 그러한 일면을 볼 수 있다. 게다가 건국 시조, 다시 말해 새로운 공동체의 수장이 된 인물들은 거의 예외 없이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왔거나 아니면 하늘의 자손이라는 신화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천신의 현현(顯現) 내지 하강은 고대인의 신앙 속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그 같은 믿음에서 나온 숭배는 제의를 통하여 가장 뚜렷하게 나타났다. 곧 부여(夫餘)의 ‘영고(迎鼓)’나 고구려의 ‘동맹(東盟)’, 예(濊)의 ‘무천(舞天)’, 삼한(三韓)의 기풍제(祈豊祭)와 추수감사제 등이 거기에 해당한다.
  이처럼 ‘하늘’에 대한 믿음과 숭배는 당시의 ‘정치’ 현상의 존재양태, 즉 ‘제정일치(祭政一致)’시대의 존재를 상징적으로 전달해주고 있다. 지난 호에서 언급했듯, 환웅이 태백산 신단수 아래 세웠다는 신시(神市)01는 ‘제정일치’ 단계에서 군장[君長: 임금 혹은 주수(主帥)]으로서의 권능과 제사장으로서의 제주(祭主)를 동시에 발휘하던 신성한 장소였다. 환웅의 아들인 단군을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고 한 데도 이 두 가지 능력이 함께 나타남을 가리킨다. 여기에 담긴 ‘정치’의 모습은 종교와 정치가 아직 분화되기 이전의 모습, 즉 ‘신정(神政)일치 사회’라 하겠다. 하지만 공동체 규모가 점차 더 크게 확대되고 정치와 제의가 기능적으로 분화하면서 천신은 각기 다른 영역을 맡게 된다. 곧 종래의 군장이 정치적 통치자와 천제를 주관하는 제사장을 겸했다면, 삼한시대의 군장은 정치 사회적 통치자로서 역할만 하였고, 각종 제의는 전문적 사제(司祭)인 ‘천군(天君)’이 맡았다. 또한 ‘천군’은 정치지역과는 달리 별도의 종교지역인 ‘소도(蘇塗)’를 관장하였다. 다음과 같은 사료들에서 그러한 내용을 찾을 수 있다.

 

  “여러 국읍에 한 사람을 세워 천신에 대한 제사를 주제하게 하였는데 이를 천군이라 한다. 위지에 이르기를 여러 국읍에는 별읍이 있으니 소도라 한다. 나라가 망하여 도망가 모두 소도에 이르면 이를 잡지 못하였다. 소도에는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걸어 귀신을 섬긴다.(諸國邑各以一人主祭天神 號爲天君 又立蘇塗, 魏志曰 諸國各有別邑 爲蘇塗 諸亡逃至其中 皆不還之 建大木以縣鈴鼓 事鬼神)”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

 

  위의 사료를 통해 볼 때 천군은 소도를 주관했던 제사장이자, 공동체의 번영과 안녕을 위하여 규칙적인 제천의식을 집행하는 종교적인 지도자였다. 천군의 주도 하에 의식이 거행되는 날은 그야말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행해지는 제사이자 동시에 큰 축제였다.02 마치 화합과 안녕을 다지는 우리네 마을 굿판을 연상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소도는 고대 그리스 제우스의 거주처인 올림퍼스나 오늘날의 바티칸에 비견할 수 있는데, 일종의 신성불가침의 지역으로 여겨져 죄인이 도망가서 숨더라도 그들을 잡아가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큰 나무’라는 구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03 곧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솟대가 마을의 성(聖)과 속(俗)의 공간을 구분짓는 경계표인 것처럼, 소도의 큰 나무는 솟대가 갖는 그런 속성의 모체(母體)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자적인 천군이란 존재와 큰 나무의 표시는 제정일치에서 벗어난 제정분리를 말해준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서 고조선의 단군왕검은 제정일치의 사회를 반영하고 있음에 비해, 삼한 사회의 천군이란 존재는 제사장으로서의 기능만을 가진 제정분리의 사회를 대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천의식은 삼국시대에 접어들어 왕을 정점으로 한 지배체제(중앙집권체제)가 형성되면서, 왕이 직접 주관하기에 이른다. 이에 따라 천군은 문헌에서도 확인하기 힘든 직무가 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 중 고구려의 제천의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는 귀신(鬼神) · 사직(社稷: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 영성(靈星: 하늘을 주관하는 별)에게 제사지내기를 좋아한다. 10월에 하늘에다 제사 드리면서 크게 모이는데 이름이 ‘동맹(東盟)’이라고 한다.(高句麗 好祠鬼神社稷靈星 以十月祭天大會, 名曰東盟)” (『삼국사기(三國史記)』 「제사지(祭祀志)」)

 

  여기서 제의의 명칭을 동맹(東盟)이라 한 것은 고구려의 건국자 동명(東明)과 관련이 깊다고 한다. 동맹은 고구려 천신과 더불어 국조신(國祖神)에 대한 제의로서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삼한과 달리 왕실에서 왕이 제의를 주관한 것은 제의의 공개적인 전시를 통해 자신이 천손의 후예라는 위용을 드러냄으로써 통치자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측면은 백제04와 신라05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다 보니 천군의 위상은 자연히 정치 사회적 중심권에서 벗어나 음성적인 사제자 · 치병자 · 예언자인 무당으로 격하되었고, 하위신인 잡신이나 인물신 등을 모셨다.
  고려시대에 이르면 국가의 대사(大祀)로 치러진 원구(圜丘: 천자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라는 유교식 제천의식을 만나게 된다. 곧 천명을 받은 고려의 왕이 직접 명(命)을 준 천신에게 유교적인 길례(吉禮)의식을 통해 풍요를 기원한다는 의식이다. 이는 조선왕조와는 달리 고려가 자주성을 지녔음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아직 유교적 이념이 고려사회 전반에 관철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주지하다시피 유교적 관념에 있어서 제천의식은 천자만이 할 수 있는 의식이고, 제후국에는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원구에서의 제천의식은 정월 첫 신일(辛日)에 풍작을 비는 기곡제(祈穀祭)와 4월 중 적당한 일자에 행해지는 기우제(祈雨祭)의 형태로 나뉘어 행해졌다. 하지만 고려 중엽 후, 유교 이념의 색채가 짙은 신흥사대부 계층의 등장과 더불어 원(元)나라의 간섭 하에 놓이면서 실질적으로 제천의식은 행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렇다고 제천의식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어서 민간차원에서는 간접적으로 표출되고 있었다. 곧 민중들은 그들의 제의공간인 산이라는 특정 장소에서 천제를 지냈다. 하늘과 맞닿아 있는 산은 하늘을 대리하는 상징으로 여겨졌기에 산신(山神)은 소우주화된 천신으로 간주되었고, 산신제(山神祭)는 천제로 받아들여졌다. 이때 제주(祭主)는 천군의 뒤를 이은 무당이었다. 국가차원의 천제를 왕이 주관했다면, 민중차원의 천제는 무당이 주관했던 것이다. 단군신화를 비롯하여 가야 · 신라 · 고구려 등의 개국신화를 보면 한결같이 하늘에서 천신의 아들이 높은 산에 강림하여 산신과 연결된 점이 그러한 연유다. 이것은 ‘천신 → 산정강림(山頂降臨) → 산신’으로 이어지는 신성(神聖)의 계통도가, ‘단군 → 천군 → 무당’이라고 하는 사제(司祭)의 흐름과도 일맥상통함을 나타낸다.

 

  다음 호에는 우리 민족 고유의 제천의식이 조선시대에 들어와 음사(淫祀)로 치부된 경위를 찾아보고, 조선 말엽에 등장하는 신종교가 지고신에 대한 신앙전통과 제천의식을 그대로 반영하였던 것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나아가 우리 종단이 민족종교라고 표방하는 명확성을 천신신앙과 제천의식을 통해 찾아보기로 하겠다.

 


◈참고문헌
서대석, 『한국 신화의 연구』, 집문당, 2001.
이부영, 『한국의 샤머니즘과 분석심리학』, 한길사, 2012.
이지영, 『한국의 신화 이야기』, 사군자, 2003.
전영배, 『땅 끝 하늘 끝의 의미 1, 2』, 한글한자문화, 2006
주홍성, 『고대조선에 있어서의 천신숭배와 관념론적 세계관의 형성』, 원광대종교문제연구소, 1991.
최종성, 『숨은 천제, 조선후기 산간제천 자료를 중심으로』, 한국종교학회, 2008.
『한국민속대사전』, 민족문화사, 1993.
『한국민속의 세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7.
허홍식, 『한국 신령의 고향을 찾아서』, 집문당, 2006.
황패강, 『한국신화와 천신』, 단국대학교 어문논집, 1998.

 

 


01 천신(天神)이 정사(政事)를 보는 도읍이자 천신에게 기도하고 제사를 드리는 제단이기도 하다.
02 “5월에 모종을 끝마치고 나서 귀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많은 사람이 떼를 지어 노래 부르고 춤추며 술을 마셔 밤낮을 쉬지 않았다. 그 춤추는 모양은 수십 인이 함께 일어나서 서로 따르며, 땅을 낮게 혹은 높게 밟되 손과 발이 서로 응하여 그 절주는 마치 탁무(鐸舞)와 같았다. 10월에 농사일이 다 끝나고 나면 또 같은 놀이를 했다.(五月下種訖 祭鬼神群聚歌舞飮酒 晝夜無休 其舞數十人 俱起相隨踏地低昻 手足相應 節奏有以鐸舞 十月農功畢 亦復如上)”(『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03 고대에는 방울과 북이 솟대 위에 앉은 새의 대체물이기도 했다. 특히 두 사물은 무당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북을 치면서 무당은 망아경 속으로 들어가 영계(靈界)로 여행을 하였다. 방울 역시 신령을 호출할 때나 상교(相交)할 때 사용되었고, 지금도 무당들이 점괘를 뽑을 때 방울을 이용하는 경우를 쉽게 접할 수 있다.
04 “백제는 매년 사시의 중월(仲月)에 왕이 하늘 및 오제(五帝)의 신을 제사지낸다. 그 시조 구태(仇台)의 사당을 나라 도성에 세우고 해마다 네 차례 제사지낸다.(百濟 每以四仲之月 王祭天及五帝之神 立其始祖仇台廟於國城 歲四祠之)”(『삼국사기(三國史記)』 「제사지(祭祀志)」)
05 『수서(隋書)』 「열전(列傳)」에 신라는 “매년 정월 원단(元旦)에 서로 하례(賀禮)하는데, 왕은 이날 연회를 베풀어 뭇 관원의 노고를 치하한다. 또 이날에는 일신(日神)과 월신(月神)에게 제를 올린다(每正月元旦相賀 王設宴會 班賚羣官 其日拜日月神).”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볼 때 신라는 제천의식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정월 초하루에 일월신(日月神)에게 절하였다는 것에서 신라 역시 하늘을 숭상하는 습속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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