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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3년(2013)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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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보기 : 상제님 강세지(降世地)

상제님 강세지(降世地)
 
연구원 신상미

그리고 그 탄강하신 마을을 손바래기라고 부르며 당시에 전라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全羅道古阜郡優德面客望里)라고 부르더니 지금은 정읍군 덕천면 신월리(井邑郡德川面新月里) 새터로 고쳐 부르도다. (행록 1장 6절)
 
 
객망리는 상제께서 탄강하시기 이전에는 선망리(仙望里)라 하더니 후에는 객망리라 하고 상제께서 화천(化天)하신 뒤로는 신월리(新月里)로 고쳐 부르고 오늘에 이르도다. (행록 1장 7절)
 
 
 
 
  위의 『전경』 내용과 같이 상제님께서 강세하신 곳은 전북 정읍군(井邑郡) 덕천면(德川面) 신월리(新月里)다. 신월리의 위치는 시루산의 동쪽에 있으며 산 남쪽으로 뻗은 등(燈)판재 너머로 연촌(硯村)·강동(講洞)·배장골(拜將谷)·시목동(柿木洞)·유왕골(留王谷)·필동(筆洞) 등이 있으며 그 앞들이 기름들(油野)이다. 그리고 이들의 북쪽에 있는 산줄기가 뻗친 앞들에 덕천 사거리(德川四巨里) 마을이 있고 여기서 이평(梨坪)에 이르는 고갯길을 넘으면 부정리(扶鼎里)가 있으며 그 옆 골짜기에 쪽박골이 있다.01
 
 

  대부분 사람은 상제님께서 강세하신 곳이 현재 ‘증산상제강세지(甑山上帝降世地)’라는 현판이 걸린 전북 정읍시 덕천면 신월리 504(신송길 32)번지로 알고 있다. 그러나 여러 경전의 문헌상에 적힌 상제님 강세지가 조금씩 다르고 현재 알고 있는 강세지가 아닌 다른 곳일 수도 있다는 상제님 양아들인 고(故) 강석환(姜石幻) 씨 부인의 증언에 따라 상제님 강세지에 관한 의문을 풀어보고자 한다. 이에 증산계열의 각 경전과 종교연구 서적에 적힌 강세지를 더 조사하고, 토지대장 기록을 살피며 유00 씨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을 인터뷰하여 상제님께서 강세하신 곳에 대해 좀 더 살펴보았다.
 
 

  상제님 강세 당시 전라도는 북도와 남도의 구분 없이 불리었으나, 1896년(고종 33)을 기점으로 북도와 남도로 분리되었다. 상제님께서 강세하신 1871년, 고부군(古阜郡) 우덕면(優德面) 지역에 속해 있던 객망리(客望里)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문에 정읍군 덕천면으로 변경되었다. 객망리는 상제님 강세 이전까지만 해도 선인독서혈(仙人讀書穴)이 있어 선망리[仙望里, 일명 선(仙) 바래기 마을]라고 불리다가 상제님 강세 시에 객망리(손바래기)로, 상제님 화천(化天) 이후로는 신월리(新月里) 새터로 마을명이 변경되었다. 지금은 신기(新基)마을과 이웃 송산(松山)마을을 합하여 각 마을의 첫 자를 따 ‘신송(新松)마을’이라 한다.02
  신송마을의 뒷산은 모양이 시루를 엎은 모양처럼 생겨 시루산이라고 한다. 그렇게 높지 않은 고도 101m인 시루봉은 신월리와 우덕리에 걸쳐 있으며 시루봉 위에 우덕리(優德里) 산성(山城)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리고 서쪽에는 황토현 전적지가 있고 남쪽에는 매봉이 있으며 북쪽에 신송마을이 있다. 상제님의 증산(甑山)이라는 호(號)도 시리봉03 또는 증산(甑山)으로도 불리는 시루산의 지명을 따서 지었다고 전한다.04
 
 

  『전경』에는 앞의 글과 같이 상제님의 강세지가 전라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현 정읍군 덕천면 신월리 새터)로 되어 있다. 이 주소까지는 다른 경전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다만 『증산천사공사기(甑山天師公事記)』, 『용화전경(龍華典經)』, 『보천교지(普天敎誌)』, 『보천교(普天敎)와 신앙체계(信仰體系)』 등 4권의 서적에서는 상제님께서 상제님의 외가인 서산리에서 강세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중 상제님에 대한 최초의 기록인 『증산천사공사기』를 쓴 이상호(李祥昊) 씨는 1926년에는 상제님께서 외가에서 탄강하셨다고 주장하였다가 후에 『대순전경(大巡典經)』을 쓰면서 신월리를 강세지로 정정하였다.
  그리고 상제님의 진영(眞影)을 모시고 ‘증산상제강세지’라는 현판을 건 집 [아래 내용은 지도 2 참고, 신월리 412-1(①)과 504(③)가 합쳐져 현재 신송길 32임] 외에 총 3개의 서적에서 다른 번지의 주소가 기록되어 있었다. 『한국신흥종교총람』에서는 신월리 540-4, 『증산종단화보3』 제6호에서는 540-2(④), 상제님의 양아들인 강석환 씨가 쓴 『무오 동지 치성 심고문(戊午冬至致誠心告文)』에는 435-1(②)이었다. 『한국신흥종교총람』에서 주장한 주소인 540-4는 지적도에서 찾을 수가 없어서 지적도에 표시하지 못했다. 그리고 총 32권의 경전 및 종교연구 서적에 적힌 상제님 강세지를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았다. (상제님 외가가 강세지라는 4권의 서적과 강세지가 신월리이지만 번지가 서로 다른 3권의 서적, 번지 없이 신월리가 강세지라는 25권의 서적 내용을 구분하여 각각 연도별로 나열하였고 반복되는 한자는 삭제하였다.)

  우선 『증산종단화보3』 제6호에 기록된 신월리 540-2와 『무오 동지 치성 심고문』에 기록된 435-1 에 대해 조사해 보고자 유00(상제님 양아들 강석환 씨의 부인) 씨와 신송마을 사람들을 만나 조사해 보았다. (아래는 사진 3 참고) 신월리 412-1(①)에 사는 유00 씨는 남편에게 현재 상제님 진영이 모셔진 곳이 아닌 우물 위쪽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고 하였다. 아쉽게도 그곳이 어디인지는 명확하게 모르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신송마을 주민에게 물어보고자 우물 위쪽에 사는 전00 씨를 만나보았다. 전00 씨는 상제님 가족이 살았던 흔적을 직접 보진 못했지만 집안 어른들로부터 현재 자신의 집에 상제님 가족이 살았었다고 들었다고 하였다. 그곳이 상제님 가족이 사셨던 곳인지 강세하신 곳인지는 명확하게 모른다고 하였다. 
 
 

  현재 그의 집(신송길 64)은 당시의 신월리 437-1과 436, 435-1을 합친 규모로 당시에 신월리 437-1에는 전00 씨 집안사람들이 살았고, 435-1(②)에는 무극대도를 믿기 위해 전남 해남에서 온 김해 김 씨가 살았다고 한다. 우물에서 제일 가까웠던 436(③)은 상제님 가족이 살았는데 작은 초가집이었고 원래 규모는 대략 27평(89㎡) 정도였으나 새마을운동 때에 길이 앞으로 넓게 생기면서 6평(19.8㎡) 정도가 도로에 편입되어 현재 규모는 더 작아진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전00 씨의 증언은 신월리 435-1(②)이 상제님 강세지라고 주장한 『무오 동지 치성 심고문』을 쓴 강석환 씨와는 사뭇 다른 의견이다.
 
 

  신송마을에 사는 또 다른 마을 사람 전XX 씨에게 상제님 강세지를 물어보니 지금의 강석환 씨 집은 아니고 전00 씨 집이거나, 신월리 540-2라고 들었다고 하였다. 『증산종단화보3』 제6호에 기록된 상제님 강세지와 일치하여 신월리 540-2 주변을 둘러보았다. 신월리 540-2 위로 ‘무극대도(無極大道)’ 현판(懸板)이 걸린 곳이 있었는데 전XX의 증언에 따르면 그곳은 상제님을 모시던 사당이었다고 한다.
 
 
 
 
 
 

  상제님 사당은 1914년 보천교(普天敎)에 입교한 채경대(蔡京大)가 1922년 14명의 신도를 거느리고 보천교를 탈퇴하여 ‘삼성교(三聖敎)’를 세워 별도로 종교 활동을 시작한 곳이다. 그 이후 1936년 무렵에 인도교(人道敎)로 바꾸고 만주로 가면서 사당은 1945년 해방 후 대구출신인 신원목(申源穆, 1903~1984)05이 차지하여 치성을 드리고 수련공부를 하였다. 그러다 그가 1984년에 80세로 작고하면서 흐지부지되었다. 그 이후에는 관리인 고(故) 손양호 씨의 부인이 사당을 관리하였다06고 하나 2012년과 2013년에 답사했을 때는 인적이 없고 다 쓰러져 가는 집과 무성하게 자란 잡초만 볼 수 있었다. 『한국신종교 실태조사보고서』에 의하면 300여 평(991.7㎡)의 대지에 30평(99.17㎡)의 사당이 있고 4채의 부대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현장에서 비교해보니 신월리 542에 있는 30평 정도의 건물에 ‘무극대도’ 현판이 걸린 곳이 사당인 듯했다. 그 외 542, 543에 각각 건물 한 개씩 확인되어 총 2채가 있었다. 2채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이곳이 4채의 부대건물이 있었다는 곳인 듯하다. 토지대장 기록을 보면 신월리 540-2에도 신원목이 주인이었던 적이 있으므로 당시에 사당 외의 부대건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곳은 1924년 무렵 상제님 부친의 형제인 고(故) 강백회(姜百會) 씨를 비롯하여 강 씨 집안이 살았던 곳이다. 1969년에 강석환 씨 사촌인 강XX 씨가 신원목으로부터 다시 사들인 후 1974년에 『증산종단화보3』 제6호가 발행되어 상제님 강세지로 알려졌다. 그러므로 이곳이 상제님 강세지일 가능성이 있다고는 할 수 있으나 상제님 강세지가 우물 위쪽에 위치한다고 한 강석환 씨의 말대로라면 거리가 좀 먼 듯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강00[강석환 씨의 친아버지인 고(故) 강영탁 씨의 당숙]씨 증언에 따르면 전00 씨 집이 상제님 강세지라고 들어본 적은 없고 자신의 집이 상제님 강세지라고 들었다고 한다. 당시의 집은 총 3채로 강00 씨가 사는 집이 본채였으며 바로 옆집인 고(故) 강영탁 씨가 살았던 곳[전북 정읍시 덕천면 신월리 442(현 신송길 36)]과 한집으로 지금의 규모보다 컸다고 한다. 그동안 인터뷰를 하면서 조사한 기록은 다음 표에 정리하였고 상제님 강세지로 추정되는 곳과 신송마을 주변 지역을 지적도에 표기해 보았다.
 
 

 
 
  상제님 강세지로 추정되는 곳은 (아래는 지도 5 참고) 상제님 진영이 모셔진 곳[신월리 504(현 신송길 32)](②) 과 전00 씨 집의 일부분[신월리 436(현 신송길 64)](④), 강00 씨 집[신월리 438-1(현 신송길 34-2)](⑥), 『증산종단화보3』 제6호에 실린 상제님 강세지[신월리 540-2(현 신송길 63)](⑩), 『무오 동지 치성 심고문』에 실린 상제님 강세지[신월리 435-1(현 신송길 64)](⑬) 로 총 5곳이다.
  상제님 진영이 모셔진 신월리 504(②)와 유00 씨가 사는 신월리 412-1(①)은 현재 신송길 32로 합쳐서 한집에 속한다. 유00 씨가 사는 집은 본래 밭이었는데 50년 전에 큰 시누이의 시아버지가 목수를 데리고 와서 같이 지었고, 상제님 진영이 모셔진 곳은 지은 지 100년 정도 된 것으로 진영을 모시기 전에 당숙인 고(故) 강천식 씨가 살았다고 한다.07 이곳에 강석환 씨가 상제님 진영을 모시고 ‘증산상제강세지’라고 현판을 걸어 지금까지 계속 상제님 강세지로 알려졌지만 여러 자료를 비교한 바 상제님 강세지가 아니라고 추정된다. 그 이유는 남편(강석환 씨)이 우물(당시에는 옹달샘)(③) 옆에 있었던 작은 오두막이 상제님 강세지라고 한 적이 있었고, 강세지가 자신이 사는 집이라는 말도 있지만 아니라는 말도 들었다는 불확실한 유00 씨의 증언 때문이다. 당시의 옹달샘은 현 우물의 바로 아래에 있었는데, 불미스러운 일이 있은 후 우물을 메우고 현재의 우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에 강00 씨 집(⑥)과 고(故) 강영탁 씨가 살던 집이 합쳐 한집이었고, 자신의 집 위치가 상제님 강세지라고 들었다는 강00 씨의 주장에는 상제님 강세지라는 근거가 부족하다. 『증산종단화보3』 제6호에 실린 강세지(⑩)는 상제님 부친의 형제인 고(故) 강백회 씨가 1924년 무렵에 살던 곳으로 강 씨 집안사람들이 살았다. 그리고 부친으로부터 이곳이 강세지라고 들었다는 전XX의 증언도 있으므로 상제님 강세지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우물의 위치와는 거리가 꽤 멀다. 
  상제님 강세지로 제일 유력한 곳은 『무오 동지 치성 심고문』에 실린 신월리 435-1(⑬)과 신월리 436(④)이라고 본다. 이곳은 모두 전00 씨 집의 일부분이다. 전00 씨 집은 현재 신송길 64로 옛 주소 신월리 436(④), 435-1(⑬), 437(⑫)이 합쳐져 있다. 그중에서 강석환 씨가 주장한 상제님 강세지는 신월리 435-1(⑬)이고, 전00 씨가 가족들에게 들은 상제님 강세지는 신월리 436(④)이다. 상제님의 양아들인 강석환 씨가 무오년 동지 치성을 올리면서 타인이 소유하고 있는 상제님의 강세지(435-1)를 자신이 확보할 수 있게 심고(心告) 드린 기록08과 비록 거리가 조금 멀지만 우물 위쪽에 해당하는 곳인 것을 보았을 때 신월리 435-1(⑬)이 상제님의 강세지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전북 정읍 덕천면 신월리 436(④)이 상제님 강세지라는 내용이 문헌상엔 없으나 전00 씨가 가족으로부터 전해 듣기를 신월리 436(④)이라고 들었다는 증언과 우물 위쪽에 상제님 강세지 가 있었다고 들었다는 유00 씨의 증언에 따라 우물 가장 가까운 곳인 신월리 436(④) 또한 강세지일 가능성이 높다. 거기다 강석환 씨가 전00 씨의 부친을 찾아와서 신월리 436을 팔라고 여러 번 찾아왔었다고 한다. 자신이 주장한 신월리 435-1이 아닌 신월리 436을 팔라고 했다는 점이 조금 의문이 가지만 알아볼 길이 없다.    
  뭐니 뭐니 해도 이곳을 제일 유력하다고 한 이유는 두 번지 중에 명확히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도전님께서 신송마을을 찾으셨을 때 전00 씨 집을 가리키시며 상제님 강세지라고 하신 증언 때문이다. 그래서 두 번지 중 어느 곳인지 명확하게 알아보기 위해 토지대장 기록을 찾아보았으나 명의가 상제님 부친으로 되어 있지 않아 찾을 수가 없었다. 당시에 심하게 가난하였다는 전00 씨의 증언과 『전경』 교운 1장 43절09 내용을 봐서는 집을 살 형편이 못되어 남의 집을 빌리셨을 가능성이 높다. 단, 신월리 433-1은 토지대장 기록상에 1914년 10월 10일 상제님의 부친[故 강문회(姜文會)] 명의로 되어 있어 상제님께서 화천 하신 후 부친께서 머무셨던 곳임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이렇게 조사한 모든 자료를 정리해 본 결과 전00 씨 집 앞마당인 신월리 436(④) 또는 신월리 435-1(⑬) 두 번지 중의 한 곳이 상제님의 강세지로 추정된다.
 

01 『전경』, 행록 1장 4절 참조.
02 『한국지명총람 12』, 한글학회, 2003, p.400 참조; 『정읍향리지』, 정읍문화원, 2002, pp.441~442 참조.
03 전라도 사투리로 ‘시루’를 ‘시리’라고 한다.
04 「전라ㆍ제주편」, 『한국지명유래집』, 국토지리정보원, 2010, p.193 참조.
05 『범증산교사』와 신월리 540-1, 540-2, 542, 543번지 토지대장에는 신언목(辛彦穆)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06 『한국신종교 실태조사보고서』, 한국종교학회, 1985, p.890.
07 2012년 5월 29일 유00 씨 인터뷰 참조.
08 강석환, 『무오 동지 치성 심고문』, 1978, pp.17~18 참조. 
09 상제께서 공사(公事)를 행하신 후부터 부친도 일상생활에서 의존심을 갖지 않도록 하고 또 평소의 허물을 뉘우쳐 앞길을 닦도록 하고 간혹 종도들로부터 물품이나 그 밖의 도움을 받는 것을 일체 금하셨도다. 그런데 하루는 어느 종도가 상제의 본댁이 너무 협착함을 송구히 생각하여 좀 나은 집을 사드렸도다. 상제께서 이것을 아시고 그 종도에게 꾸짖고 “네가 어찌 나의 부친에게 허물을 만들어 드리느뇨. 아직 나를 모르는 사람들은 나를 불효라고 하겠으나 나는 부모의 앞길을 닦아드리려고 내가 항상 형편을 살피고 있으니 너희들이 부친을 도울 생각이 있으면 나의 허락을 얻어 행하라”고 명하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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