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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3년(2013)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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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이야기 : (100) 금강산으로의 여정[下] - 이방인의 눈에 비친 금강산

(100) 금강산으로의 여정[下]
 
- 이방인의 눈에 비친 금강산

글 교무부
 
  영국 여성 탐험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1904)은 1894년에 조선을 탐험하던 중 육로를 이용해 천하명산으로 알려진 금강산(金剛山)으로 갔다. 그녀의 일행은 금강산의 서쪽 경계선인 단발령(斷髮嶺)을 넘어 금강산의 3대 대찰(大刹)의 하나인 장안사(長安寺)를 둘러본 후 다음 목적지인 유점사로 향했다.
                        

한국 불교의 현실 - 유점사(楡岾寺) 가는 길

  나는 금강산을 다녀갔던 지인들과는 다른 등산로를 택했기 때문에 조랑말과 짐은 장안사에 두고 떠났다. 산맥을 가로지르는 해발 1,285m의 산보다는 안문재[雁門嶺: 1,088m] 부근에 위치한 유점사를 택했다. 비길 데 없는 날씨에, 보약이나 다름없는 맑은 공기를 마시며 닷새 동안 금강산을 둘러보기에는 유점사 쪽이 나을 것 같았다. 필수품을 운반할 두 명의 짐꾼과 남여(藍輿)01를 끌 가마꾼 둘을 데리고 여행을 하는 동안 여러 승려가 도와준 덕분에 표훈사와 장량사의 암자에 이르는 첫 단계를 무사히 해냈고, 다음 단계는 대략 841m 지점까지 가는 것이었다.
  이곳에서 보이는 한국 제일의 장관은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을 품에 안고 있었다. 확실히 일본에서, 심지어 중국에서도 이토록 아름답고 장엄한 광경은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다. 큰 협곡을 가로질러 장안사 계곡을 지났더니 호랑이가 어슬렁거리며 다닐 만큼 무성한 녹색 원시림 위로 산줄기가 정상을 향해 솟아 있어 누런 화강암 암벽 등성이가 모두 산꼭대기처럼 보였다. 5월의 저물녘에 매료되는 순간, 수많은 꽃나무와 덩굴을 비롯해 봉오리를 여는 꽃망울과 겹겹의 양치식물들이 내뿜는 숨결때문에 천국의 향내가 찬 이슬과 젖은 공기 속에 피어오르고 있었다.
  표훈사(表訓寺)는 폭포의 오른쪽 기슭에 낭만적인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 절은 신축된 것으로 세공, 조각, 도금, 단청으로 꾸며져 있었는데, 이런 장식들은 모두 승려들의 솜씨였다. ‘신심(信心)의 사원’이라는 의미의 현판은 훌륭한 솜씨의 대담한 목조품으로, 중심 소재는 모란이었다. 건축물이 석재나 타일로 되어 있지 않아 세밀한 부분까지 청색·흑색·백색·녹색의 단청과 금박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비록 그것이 원시적이라 해도 천연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또한 ‘심판의 사원’이라고 하여 지옥의 상징들로 가득한 곳이 있었는데, 그중의 한 장면은 사람들이 내세에서 겪게 될 운명이 적힌 책을 여는 것이었다.
  표훈사의 열다섯 승려는 매우 친절했고 그다지 궁핍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중에 한 사람이 솥처럼 생긴 자신의 방을 내게 양보해 주었다. 하지만 그는 끊임없이 방 안을 기웃거리며 들여다보는 것으로 충분한 대가를 챙긴 셈이다. 건물에 걸린 풍경과 범종은 내가 거의 들어보지 못한 톤으로 울리며 은은한 선율을 냈다. 그리고 새벽 네 시만 되면 온갖 모양에 갖가지 소리를 내는 종들이 “자, 기도하는 것이 잠자는 것보다 낫잖아!”라고 하듯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것은 고요한 아침에 요동치는 소음에 가까웠다. 새벽녘의 승려들은 의복을 정제한 채 상당히 유쾌해 보였고, 뭔가 가장된 구석이 있는 이 절의 금욕주의를 깨뜨려버릴 듯한 기세였다.
  이 절의 규율은 우유나 달걀조차 허락하지 않을 만큼 엄격한 채식주의를 지키는 것이어서 어디서도 가금이나 가축을 기르고 있지 않았다. 나는 주인들의 편견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고 차나 밥, 꿀물, 잣, 그리고 잣과 꿀을 잘 버무린 요깃거리로 식사를 때웠다. 이런 단맛 나는 음식으로 가볍게 아침을 든 후에 주지의 대리인이 자신의 할머니를 만나게 해주었다. 여든에 접어든 매우 다정다감한 이 여인은 13년 전에 서울을 떠나 고요한 축복 속에 영면하고자 이 경내에 집을 지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점심을 먹고 나니 손님대접이 융숭했던 그 여인은 내게 굳이 고급 꿀 한 병과 잣 한 자루를 건네주었다. 잣나무에서 열리는 잣은 금강산에 지천으로 널려 있어서 승려들에게는 영양을 보충해주는 중요한 먹거리이고, 사치품으로 대량 수출되는 것이었다. 친절한 부인과 일곱 승려와의 작별인사 후, 절을 떠날 때 주지 대리인은 나에게 부채를 선물하면서 올라갈 방향을 알려 주었는데, 그곳엔 길이 나 있지 않았다.
  금강산은 길이 51.5km, 폭 35.4km에 이르는 범위에 걸쳐 있어 위도 39도의 강원도 지방의 끝자락에 닿아 있다. 북청(北靑: 함경남도 동북부에 있는 읍)에서부터 남쪽으로 동해에 가깝게 뻗어 내린 한반도의 등뼈는 점점 부드러워지다가 돌연 금강산에 이르게 된다. 톱니 같기도 하고 삐죽삐죽하기도 하여 감히 근접해볼 수도 없는 봉우리들이 길게 늘어서 있고, 굉장한 원시림을 품고 있는 산. 한국인들에게 금강산 유람은 여행자에게 확고부동한 명성을 제공해준다. 그래서 많은 서울 사람들은 그 명예를 거머쥐려고 젊을 때부터 벼르고 또 벼른다. 비단 사찰을 순례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에게도 금강산은 유명하다. 그래서 오랜 세월 동안 한국의 시인들은 그 빼어난 아름다움을 경탄해 마지않았다.
  일본처럼 이 천혜의 자연 속에서도 최고의 부지를 소유하고 있는 불교는 일찍이 6세기의 그 낭만적인 현실 도피주의와 끈끈히 닿아 있다. 이 나라 민관(民官) 모두의 의식(儀式)으로 천 년 동안 이어오는 풍습은 이 산의 후미진 구석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지금은 불심이 쇠하여 불교가 존폐의 위기에 처하고 경멸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수많은 관광객과 순례자들이 사찰에 모여들어 구경하는 데 열중했으며, 여전히 많은 신자를 끌어모으고 있었다.
  내가 알기에는, 금강산 등산 코스에 두 종류가 있다. 유독 물살이 급한 계곡을 따라가다가 안문재에서 분수령을 넘어 주요 사찰이나 그 부근으로 가는 코스가 있고, 또 하나는 좀 완만하여 보는 재미가 덜한 코스가 있다. 두 코스 모두 장안사에서 출발해야 한다. 금강산 42개의 절은 400여 명의 비구와 50여 비구니들의 본거지인데 무명이나 삼베옷을 짜 입는 것이 이들의 종교적인 고행에 덧붙여진다. 행자들은 거의 천 명을 헤아린다. 네 개의 주요 사찰 중 둘은 금강산 동쪽에, 나머지 둘은 서쪽에 있으며 이들 사찰에 300명 이상의 승려들이 모여 있다. 높은 지위의 고승들을 빼고는 누구나 바가지를 들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탁발을 하는데, 단 하나 그들의 의상에서 눈에 띄는 특징은 무척 독특한 모양의 모자를 쓰고 염주를 걸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이 집 저 집에서 염불하면 음식이나 숙박, 얼마간의 돈이나 곡식을 내주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다.
  사원(寺院)은 주지들이 관장하는데 이들은 사찰건립의 공에 따라 정해진 1등급이나 2등급의 특수계층이다. 그들은 명목상 매년 선출하나 실제로는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경우 수년간 유임한다. 조정의 명으로 홍살문을 갖는 것이 허락된 절들은 주지를 뽑아 확정 짓는 일이 아니면 정부 당국의 간섭에서 상당히 자유로운 듯했다. 하나의 확고한 신앙으로서 불교를 믿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도 불당을 증축하거나 재건하는 경우에 대부분의 비용은 서울이나 남부지방에서 거둬들여 진다.
  승려의 수를 유지하는 방법에 대해 밀러 씨를 통해 물어보았더니 고아나 가난 때문에 어린 나이에 부모들이 절에 바친 아이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아이들은 승려들에 의해 얼마간의 교육과 수련을 받게 된다. 이런 아이 중에서 속세의 근심과 갈등을 잊고 정말 탈속과 정진의 수도생활에 들어가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장안사에서 내게 자신의 방을 양보해준 창백하고 상냥한 젊은 승려가 이런 유형에 드는 사람이다. 유점사로 나를 데려다 주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여행하는 도중 염주 알 열 개를 하나하나 돌려가며 거의 종일토록 ‘나무아미타불’을 중얼거리곤 했다. 밀러 씨가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으니 “방금 한 거 말이죠? 아무 뜻도 없는 말이지만 자꾸 소리 내서 외면 극락이 가까워집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밀러 씨에게 염주를 건네고 그 신비로운 음절들을 가르쳐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염불을 하면서 염주를 하나씩 집어보십시오. 그러면 극락에 가게 될 것입니다.”
  젊은 승려 중에 몇몇은 신실해 보였다. 또 몇몇 사람들에게 절은 형벌이나 채무의 도피처가 되기도 했다. 평화로운 무위도식을 바라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저 금강산 유람을 왔다가 매료되어 머리를 깎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런 산에 최후의 보루를 마련한 불교는 중국 불교가 도교의 반신(半神)적인 영웅들 밑에서 질식당하고 있는 것처럼 미신숭배로 얼룩져 있었다. 일본 종교개혁의 상징인 문도(門徒)02처럼, 한국 불교에서 현세에서의 정의 실현에 대한 높은 포부와 열망 같은 것은 알려진 바가 없다.
  한국의 승려들은 무척 무식하고 미신적이었다. 불교의 역사나 교의에 대해서, 불교의식의 취지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한 채 대부분의 승려가 그저 ‘몇 마디 음절’만을 ‘공덕’을 쌓기 위해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예불은 그들 자신도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산스크리트어 혹은 티베트어 몇 마디 말을 중얼거리거나 큰소리로 내뱉는 것뿐이었다. 대부분의 승려에 대한 내 인상은 그들의 종교적인 수행이 자신들에게 별다른 의미가 없으며,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신앙심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한국인들은 이런 현상을 일반적으로 불교계의 전체적인 타락에 그 원인을 돌린다. 이 많은 산사(山寺) 중 어디서든 타락의 실재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낭만적이고 고립된 환경에 처한 그들 삶의 질서와 고요하고 평화로운 은신처를 구하는 노인, 헐벗고 굶주린 자들에 대한 자비심, 그리고 무엇보다 정중하고 후한 대접은 나로 하여금 그들에게서 대단한 매력을 느끼게 만들었다. 나는 그들의 결함보다 미덕을 기억하고 싶다. 아름다움을 존중하는 그들을 나는 진정으로 공감할 수 있었고, 절의 빼어난 경관과 사원에 꾸며진 단청과 장식 등 자연과 잘 어우러진 종교예술에서도 공감할 부분들이 많았다.
  장안사에서 유점사로 가는 17.7km가량의 만폭동(萬爆洞) 길은 주로 두 줄기 거대한 계곡의 울퉁불퉁한 바닥이었다. 이 길을 따라가면 낭만적인 경관 속에 있는 세 개의 큰 사찰인 표훈사와 마하연, 유점사가 나온다. 둘에서 다섯 정도의 수행자를 거느린 여러 작은 암자들, 특히 관음보살에게 헌납된 보덕암(普德庵)은 더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이 환상적인 사원은 30m 높이의 절벽 위에 돌출된 건축물이다. 기둥 하나가 사원의 중심을 떠받치고 있었고, 잎사귀가 울긋불긋해진 미나리아재비와 담쟁이가 꽃을 피운 채 그 둘레를 무성하게 감아 올라가고 있었다.
  장안사에서 멀리 떨어진 이 길로는 네발짐승들이 다닐 수 없었다. 그래서 나의 하인은 두 개의 긴 막대기 사이에 가벼운 자리를 깔고 동아줄을 매듭지어 발을 둘 곳을 만든 다음 등나무 줄기로 등받이를 해서 남여를 만들었다. 가볍게 짐을 진 짐꾼과 남여를 메는 가마꾼들이 쓸 만했지만 정작 남여를 탈 주인은 거의 반은 걸어서 가야만 했다.
 
 

  장안사 위에서 합류한 계곡 줄기는 여기저기로 뻗어 올라가 표훈사쯤에서 조그마한 틈바구니처럼 좁혀들고 안문재 기슭에 가면 다시 뻗어 내렸다. 확실히 17.7km에 달하는 이 만폭동 계곡의 이름다움은 이 세상 어디에도 비길 데가 없을 것이다. 장엄한 절벽들, 솟아오른 산악과 산림, 그리고 희미하게 빛나는 잿빛 산정, 층층이 뿌리 내린 소나무와 단풍나무가 푸른 하늘에 맞닿아 한 줄기 실낱처럼 좁혀들었다. 12.2~15.2m 높이의 분홍빛 화강암 바윗덩이, 산정 위에 솟은 소나무와 양치식물, 틈틈이 얼굴을 내민 산나리들이 “와!” 하는 소리를 자아낼 만큼 아름다웠다. 그 둘레에 맑은 물이 맴돌듯 흐르다가 미끄러져 내려가 분홍빛 화강암이 잠긴 분홍빛 여울로 모여들어 에메랄드의 푸른빛보다 더 찬란한 다이아몬드처럼 빛났다.
  수정 같은 물줄기가 모여드는 여울 위에는 다양한 형태로 솟아오른 암벽들이 있었다. 순례자들이 힘들게 작업해 깎아 중국식으로 장식한 바위 표면은 겨우 발을 디딜 수 있을 뿐 여전히 미끄럽고 가파르다. 각오를 단단히 한 등산객들은 승려들이 구멍을 뚫어 못과 레일을 박은 홈을 이용해서 통과하게 된다. 이런 암벽 길에는 불상이 양각된 바윗돌도 있고 바위틈에 자그마한 불당이 꾸며진 곳도 있다. 어느 절벽 위에는 9.1m 폭의 받침대 위에 13.7m 높이의 부처[묘길상(妙吉祥)]가 양각되어 있고 바위에는 등과 계단을 새겨놓았는데, 그 거친 윤곽선을 이끼와 지의류가 덮어 부드러워 보이게 했다. 이 거대한 불상 위로 큰 나무와 환상적인 산정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저 여름의 맛깔스러운 푸름 속으로.’
  이런 묘사는 한갓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황홀경에 빠뜨리는 이 웅장한 협곡은 온통 천혜의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이런 코스는 유럽식 구두로는 갈 수가 없다. 그래서 한국식으로 짚신을 신고 발감개를 했더니 한번도 미끄러지지 않았다. 바위에서 바위로 뛰어야 할 곳이 많았고, 뾰족한 바위의 돌출부를 잡고 가거나 울퉁불퉁한 바위에 달라붙어 거의 발을 쓰지 않고 가야 할 곳도 많았다. 때로는 누군가의 등에 업혀 계곡을 건너야 했고 줄타기를 해서 난간을 건너기도 했다. 급류의 바닥을 건너야 하는 어려움에 맞닥뜨린 곳에서는 어김없이 미끄럽고 경사진 바위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고 그럴 경우 나뭇등걸에 매달려서 건너야 했다.
  우리를 따라온 두 승려는 나에게 무척 정중했고 위험한 곳에서는 손을 내밀어 주었다. 그들은 또 전설, 주로 환상적이고 비범한 바위나 여울, 거대한 불상인 묘길상이나 화룡소(火龍沼), 1592년 왜군을 물리친 용바위 등에 얽힌 불교적인 전설을 들려주며 힘든 행보를 달래주었다.
  세 번째 절을 넘어서면 협곡은 더 험해지고 환상적인 광경이 조금씩 덜해지면서 삼림이 옅어진다. 하늘의 미광(微光)이 흩어진 채 언뜻언뜻 보이고, 급기야는 조금 긴 지그재그 모양의 길들이 이어지다가 안문재의 탁 트인 풀밭으로 이뤄진 정상에 이르게 된다. 그 위에는 자두나무와 배나무, 벚나무와 진달래, 철쭉나무가 즐비해 있고 아래쪽으로 가면 이름 모를 꽃들이 무수히 피어 있다. 그 장관이란 아름다움의 여신이 처음으로 얼굴을 붉히고 태어나는 것 같았다. 서쪽으로 가면 잿빛 화강암과 깊은 골짜기, 호랑이가 어슬렁대는 숲이 푸른 장막 뒤로 사라져간다. 동쪽으로 가면 짙은 삼림이 옅어지면서 1,200m 아래 푸른 동해가 아득히 보인다.
  동쪽으로 하산하다 보면 거대한 소나무와 전나무가 우거져 있다. 그중 얼마쯤은 껍질이 형편없이 벗겨져 있고, 꽃들이 드리워진 녹회색의 석송(石松)이 길게 뻗어내려 숲을 구슬퍼 보이게 했다. 아래로 지그재그 모양의 길을 쭉 따라가다 보면 멋진 계곡이 나 있는 바위협곡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 계곡 바닥의 커다란 ‘웅덩이’는 용이 목욕을 했던 곳인 듯한데, 용들의 습성이란 분명코 지상의 인간들보다 훨씬 더 청결했을 것이다.
 
 
유점사(楡岾寺)

  수많은 골이 진 지붕과 새롭고 고급스러운 외양을 갖춘 대찰 유점사로는 퍽 아슬아슬한 다리를 건너야 갈 수 있었다. 다리를 건너자 수세기를 이어온 주지들의 유골을 다소 엄격한 모양의 부도(浮屠)에 안치해 놓은 장지(葬地)가 있었다. 목적지인 유점사에 이르자 승려들은 우리 일행을 맞이하는 데 난색을 보였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 우리가 2~3일 동안 머무를 방을 몇 개 내주며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나중에 안문재까지 우리를 데려다 준 한 젊은 승려는 일요일에 밀러 씨에게 자신의 방을 양보해주면서 “불도에 정진하는 데는 큰방보다 이런 곳이 더 조용하지요.”라고 말했다.
 
 

  나는 힘든 한 주를 보낸 터라, 다음 날은 좀 조용히 쉬고 싶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70명의 비구와 20명의 비구니 말고도 거의 200명에 이르는 불목하니03와 목수에게 금강산을 여행하는 최초의 유럽 여성은 대단한 볼거리였던지, 나를 구경하는 데 몰두해 있어서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쉴 틈이 없었다. 부엌에서 불을 때면 내가 묵는 방의 바닥이 너무 뜨거워서 장지문을 닫은 채로는 도저히 있을 수가 없었다. 날씨조차 더운데 수많은 승려와 불목하니, 목수가 문이 열려 있을 때마다 들끓어 한참씩 닫아걸곤 했던 탓에 나는 거의 질식할 뻔했다.
  밀러 씨와 주지, 몇몇 고승은 불교와 다른 종교를 비교하며 토론을 벌였다. 그들은 불교의 교리가 아무리 작은 미물이라도 살생하지 않는 반면, 서양인들은 동물들의 삶을 무시하고 탈속과 구원에 이르는 금욕을 중시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물론 승려 중에서도 의(義)를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사람보다 명백히 드러난 죄도 방치하는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한편, 유점사에는 영리하고 민첩한 소년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도 대부분 일찍 삭발한 상태였다. 삭발하지 않은 아이에게 우리 통역인 이체온 씨가 닭고기 한 조각을 주었더니, 아이는 자신이 불제자라며 사양했다. 그러자 언짢은 기색을 한 노승이 사람들이 보지 않을 때는 먹어도 괜찮다고 면박을 주었지만, 그래도 그 아이는 받아먹지 않았다.
  유점사의 청동 범종은 14세기에 주조된 정교한 작품으로 조잡한 목조 건물의 흙마루 위에 걸려 있었다. 먼지 낀 구석에 걸린 창호지 등이 흰색 옷을 입은 젊은 승려를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는 종 주위를 돌고 나서 아주 리듬감 있는 목소리로 염불을 되뇌면서 줄에 매달린 나무를 움직여 커다란 종의 측면을 30분 동안 쳤다. 그리고 육중한 종을 쥐고 또 다른 염불을 외우며 더 한층 명상에 열중한 채 무겁고 리듬감 있게 종 주위를 돌며 종을 쳤다. 점점 더 빠르게, 점점 더 크게 광적인 소리가 터져 나올 때까지 쳐서 그는 거의 탈진할 지경에 이르렀다. 마지막으로 세 번의 엄청난 굉음을 내고 나서야 예불은 끝났다. 그 굉음은 가장자리가 20cm 두께이고 가운데는 비교적 얇은 금속인 종을 침으로써 나오는 것이다. 그 종소리는 탑과 마당을 흔들고 골짜기를 온통 굉음으로 울리게 할 정도여서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그 젊은 승려가 나를 ‘상상의 방’이라고 하는 큰 건물로 안내해주었다. 그곳에는 한 승려가 석고로 된 촛대에 단 하나의 촛불만이 밝혀진 제단 앞에서 염불하며 사슴뿔로 된 작은 종을 치고 있었다. 제단 위에는 땅 위로 솟아오른 나무뿌리를 나타내는 조잡하고 기이한 나무 조각품이 놓여 있었고 그 사이에 53개의 불상(佛像)이 앉거나 서 있었다. 한밤중의 어슴푸레함처럼 퍽 인상적인 이 거대한 상징은 역시 투박함과 힘을 담고 있었다. 목조품 아래에는 세 마리의 위협적인 용이 있었는데 그 얼굴에 제작자는 고통과 패배의 표정을 담아놓았다.
  이 제단에 얽힌 전설은 이렇다. 53인의 승려가 인도로부터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한국에 왔을 때 이곳에 이르러 몹시 지쳐 줄기가 옆으로 뻗은 나무 밑의 우물 주위에서 쉬고 있었다. 이때 세 마리의 용이 우물에서 나와 이 승려들과 싸우기 시작했는데 그 과정에서 승려들이 나무가 넘어질 만한 거센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도력으로 용을 이긴 승려들은 각자 나무뿌리 위에다 불상을 하나씩 만들었는데 나중에 이것이 제단이 되었다. 승려들이 용들을 우물 속에 가두고 그 위에 거대한 바윗덩어리를 올려놓고 절터를 닦은 뒤 절을 세운 것이다.
 
 

  갓 지어진 절의 ‘개인 숙소’는 응접실과 작은 개인용 방, 그리고 거주자들을 위한 제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모두 무척 깨끗했다. 그러나 이 편안하고 사치스러운 삶은 반년도 채 지속하지 못한다. 몇몇 승려를 제외하고는 모두 바랑 하나에 바가지 하나를 들고, 울퉁불퉁하고 질퍽하며 먼지 나는 한국적인 삶의 길을 걸어가야 했다. 더러운 숙소도 마다치 않은 채, 탈속한 것과 불교적 신념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끼니를 구걸해야 하고, 지상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부터 오는 욕설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연례적인 방랑을 떠나야 한다.
  유점사를 떠나기 직전에 늙은 주지는 우리를 퍽 깔끔한 자신의 방으로 초대해 직접 정중한 식사 대접을 해주었다. 기름기 많은 잣과 꿀을 듬뿍 넣어 만든 떡, 쌀을 튀겨 꿀을 바른 유과, 중국식 사탕 과자, 꿀 그리고 꿀차에 잣을 띄워서 내놓았다. 이 견과류의 기름은, 강요된 채식생활을 하는 동안 결핍된 동물성 지방을 보충해주었다. 그러나 풍부한 식물성 지방과 꿀은 이내 물리게 하였다. 그래서 주지는 우리를 대접하는 데 소홀한 것이 아닌가 하고 염려했다. 이 산사에서의 일반적인 문화란 불교에 원천을 두고 있는 것으로 그 자상한 접대나 배려, 행동거지의 온후함은 한국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그 꼿꼿한 공자의 후예들이 가진 교만함과 오만방자함이나 자만심과는 아주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모든 승려와 헤어지고 짐꾼들이 정중한 작별인사를 해왔을 때 어떤 노승들은 얼마간의 거리까지 우리를 배웅해 주었다.
  금강산 북동쪽 기슭에 위치한 대찰 신계사(神溪寺)로 뻗은 잘 닦인 길을 따라 경사면을 내려온 후에 우리는 그곳을 떠나 다시 거칠고 힘든 서쪽 길로 갔다. 그러자 동해의 밝은 미광이 비치는 듯하더니 이내 거대한 바위와 떡갈나무, 만병초(萬病草)로 가득 찬 수풀 속으로 들어섰다. 불규칙하고 이지러진 돌층계를 힘들게 오르내리니 해발 1,128m의 기조령에 이르렀고, 그 다음부터는 맨숭맨숭하고 별 볼거리도 없는 길을 따라 몇 시간이고 지루한 행군을 해야 했다. 잘 닦인 오솔길이 나왔고, 소나무 숲을 헤쳐나가자 아름다운 장안사 고원에 이를 수 있었다. 장안사의 젊은 승려가 우리 짐을 자신의 방에 조심스럽게 보관해 두었다. 그러나 펄펄 끓는 듯한 방바닥은 상자 속의 초를 녹여 마치 당밀처럼 만들어버린 탓에 사진기 용구들 사이로 스며들어 그것들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렸다. 하느님!!!
 
 
이번 호를 끝으로 <금강산 이야기>의 연재를 모두 마쳤습니다.
그동안 <금강산 이야기>를 애독해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01 의자와 비슷하고 뚜껑이 없는 작은 가마. 승지나 참의 이상의 벼슬아치가 탔다.
02 일본에서 진종(眞宗)을 신봉하는 농민집단을 말한다. 진종은 천태종, 진언종 등이 봉건영주에게 기생하며 스스로 거대한 귀족영주가 되어가던 구불교를 비판하고 지방 농촌의 문도들을 포섭하면서 교세를 확장한 교단이다,
03 절에서 밥을 짓고 물을 긷는 일을 맡아서 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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