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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3년(2013)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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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소개(상제님편) : 상제님·도주님·도전님과 관련한 지명소개

상제님·도주님·도전님과 관련한 지명소개

군산, 군항 편
 
 
글  종단역사연구팀
 
 
 
4. 군산(群山)
 
◎ 해당 『전경』 구절
 
상제께서 군산에 가셔서 공사를 보실 때 “지유군창지 사불천하허 왜만리 청만리 양구만리 피천지허 차천지영(地有群倉地使不天下虛 倭萬里淸萬里洋九萬里 彼天地虛此天地盈)”이라고 써서 불사르셨도다. (공사 3장 30절)
 
◎ 지명 유래와 변천사: 군산의 우리말 이름은 ‘무르뫼’라고 하는데 고군산열도(古群山列島)의 13개 섬이 산 모양으로 늘어져 있어 산의 무리라는 뜻으로 지어진 것이다. 군산은 미륵산(彌勒山)을 근간으로 한 금마(金馬: 전북 익산) 지방에서 서쪽으로 펼쳐지며 북으로는 금강(錦江), 남으로 만경강(萬頃江)의 하류가 흐르는 곳으로 그 모습이 반도형(半島形)이다. 금강과 만경강이 서해에 이르러 바다와 강이 서로 한 물이 되면서 자원을 풍부하게 조성해왔기 때문에 군산을 ‘물의 고향’이라 부르기도 했다.
 
 

  지금의 군산시는 조선 초기(1403년)에 옛 옥구현과 옛 임피현이 합쳐 이루어진 곳으로 금강 하구의 군산진[群山鎭: 고군산군도의 중심인 선유도 수군(水軍) 본부]과 군산창[群山倉: 조세미(租稅米)를 한강연안에 설치되었던 중앙창고로 수송하기 위해 수로 연변(水路沿邊) 또는 연해안 요충지에 설치한 창고]이 있던 곳을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군산은 백제 시대에는 장서량(長西良)이라 하였고 신라의 삼국통일 후 757년에는 옥구(沃溝)라 하여 임피현(臨陂縣)에 속하게 되었다.
  왜구의 침탈이 극심하던 1383년(고려 우왕 6)에 군산창이 위치한 진포(鎭浦: 옛 군산의 명칭)는 최무선 등이 왜선 500여 척을 불태워 진포대첩의 승리를 거두는 등 서해안의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리고 1487년(성종 18)에는 군산진 옆에 군산창이 설치되어 전주 등 7개 고을의 조세를 수납하는 전라도 조운[漕運: 고려·조선 시대에 각 도에서 국가에 수납하는 전세(田稅) 및 대동미(大同米)를 중앙으로 운송하던 제도] 중심지의 하나가 되었다. 1895년 지방제도 개혁으로 군이 되었으며, 1896년 전라북도에 소속되었다. 1899년에 군산포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개항장(開港場: 일정한 지역을 개방하여 외국인의 내왕과 무역을 허용한 제한지역)과 옥구감리서[조선 말기 개항장·개시장(開市場)의 행정과 대외관계의 사무를 관장하던 관서]가 설치되어 옥구부로 승격되었다. 이로부터 이 지역은 인천·부산·마산·목포 등의 항구와 함께 급속히 성장했다.
 
 

  1912년 호남선이 개통되고, 이어 이리(裡里: 현 전북 익산)로 이어지는 철도가 개통됨에 따라 전라도 평야지역의 농산물이 반출되는 관문 역할을 했다. 이러한 성장을 바탕으로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에는 옥구군에서 분리되어 군산부로 승격되었고, 1949년 군산시로 승격했다. 한때 위축되었던 항만기능이 1989년 군산 외항의 건설로 회복되었고, 전주-군산 간 도시권 개발로 전라북도 제1의 상공업도시로 새롭게 발돋움하고 있다. 1989년에는 옥구군 미성읍 일원과 옥도면 일부가 군산시로 편입되어 시의 구역이 확장되었다. 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시행된 전국행정구역개편으로 전형적인 농촌지역이던 옥구군과 군산시가 하나의 도농(都農)통합시를 이루어 새로운 군산시가 되었다.
 
  군산은 1899년 개항하여 도시가 커짐에 따라 1906년에는 옥구부로 이름이 바뀌고 1914년에는 옥구군에서 분리되어 군산부로 승격되었기 때문에 상제님께서 군산에 오셨을 무렵인 1909년에는 전북 옥구부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995년 옥구군이 군산시에 통합되면서 1914년 2.05㎢였던 땅은 수백 배나 커졌다. 군산시는 현재 1읍 10면 16동이 있다. 인구는 2013년 1월 말 기준으로 278,298명(남 141,489명, 여 136,809명)이며 111,275세대이다. 면적은 680.76㎢(기존면적 395.51㎢, 새만금지역 285.25㎢)이다.
 
 
 
 
 ◎ 자연환경: 차령산맥과 노령산맥의 말단부로서 낮은 구릉성 산지가 발달했으나 대체로 낮고 평평한 지역으로 평야가 많다. 시내의 곳곳에는 오성산(五聖山: 228m)·망해산(望海山: 230m)·고봉산(高峰山: 153m) 등이 솟아 있다. 금강과 만경강이 북부와 남부를 이루고 서해로 흘러들며, 동쪽에서 남서방향으로 흐르는 탑천(塔川)이 대야에서 만경강에 합류한다. 서쪽은 서해에 면해 있어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선유도·비안도·신시도·야미도·무녀도 등의 고군산열도의 여러 섬을 포함하여 유인도(有人島)는 16개, 무인도(無人島)는 51개로 총 67개의 섬이 있다.
  통합시 이전의 군산시에 해당하는 시가지 대부분은 해수면 상승에 따른 금강의 토사 퇴적과 해안 연안류에 의해 오랫동안 쌓인 충적지를 이룬다. 또한, 매립된 간석지에 부두와 시가지를 건설했기 때문에, 지반이 약해서 대단위 공장 건설, 시가지의 건물 신축과 하수처리시설의 설치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또한 장항(張項) 사이의 금강 하구에는 토사가 퇴적되어 썰물 때는 대형선박의 출입이 어려워 대안도수제(對岸導水堤) 축조, 뜬다리 설치, 준설작업 등을 하고 있으나 충분하지 못해 1980년 군산 외항을 건설했다. 시가지 내의 하천으로는 경포천(京浦川)이 시내의 중동부를 남북으로 흐르며, 구암천(龜巖川)도 구암동을 동서로 흐르다가 금강으로 모두 유입된다. 경포천의 금강과 합류하는 입구에는 수문이 설치되어 강물의 역류를 막고, 홍수 때는 배수구의 역할도 한다.
  군산은 해안에 접해 있어 바다의 영향으로 겨울기온은 내륙지방보다 비교적 높고, 여름기온은 비교적 낮다. 서해의 습기를 직접 받으므로 내륙보다 겨울강수량이 약간 많고 해안에는 안개가 자주 발생한다.
 
 
▲ 군산 금강 하구둑 (2013.10.9 촬영)
 

 ◎ 문화유산: 군산시에는 국가지정문화재(보물 2), 도지정문화재(유형문화재 4, 무형문화재 3, 기념물 3, 민속자료 1), 문화재자료 3점이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최무선이 발명한 화포로 왜적선 500여 척을 격퇴한 해전지인 진포대첩지[장소: 군산 강변]와 당나라 장수인 소정방(蘇定方, 592~667)이 창건했다는 천방사(千房寺)가 있으며 유교 문화재로는 임피향교 대성전(臨陂鄕校大成殿: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95호) 등이 남아 있다.
 
◎ 『전경』과 관련된 곳: 상제님께서는 군산지역에서 최군숙 종도의 집(임피군), 김성화 종도의 집(임피군 나포면 장상리 군둔마을), 군항(군산항), 말점도(말도)를 다니시며 공사를 보셨다.
 
 
5. 군항(群港)
 
◎ 해당 『전경』 구절
 
상제의 부친께서 이해 七월 초에 동곡에 가서 상제를 찾으니라. 부친은 형렬의 안내로 임피 군둔리(臨陂軍屯里) 김 성화(金性化)의 집에 인도되었으나 며칠 전에 군항(群港)으로 떠나 상제께서 계시지 않았으므로 다시 뒤를 쫓아 군항에서 상제를 뵈옵게 되었도다. 그러나 상제께서 “군항은 오래 머물 곳이 못되오니 속히 돌아가심이 좋을까 하나이다”고 말씀하시니 그 이튿날에 집으로 되돌아가고 상제께서는 군항에 월여를 머무시다가 익산 만중리 정 춘심의 집으로 가셨도다. (행록 3장 32절)
 
▲ 군항 위성사진(출처:  네이버)
 
 
김 광찬·신 원일·정 성백·김 선경·김 보경·김 갑칠·김 봉규 등 여러 종도들이 二월 그믐에 동곡에 모였느니라. 다음 달 이튿날 상제께서 공사를 보시기 위하여 서울로 떠나시면서, “전함은 순창(淳昌)으로 회항하리니 형렬은 지방을 잘 지키라”고 이르시고 “각기 자기의 소원을 종이에 기록하라”고 모여 있는 종도들에게 명하시니 그들이 소원을 종이에 적어 상제께 바치니 상제께서 그 종이에 안경을 싸시고 남기·갑칠·성백·병선·광찬을 데리고 군항(群港)으로 가서 기선을 타기로 하시고 남은 사람은 대전(大田)에서 기차를 타라고 이르신 후에 이것을 수륙병진이라고 이르셨도다…(하략) (공사 1장 17절)
 
 
상제께서 군항으로 떠나시기 전에 병선에게 “영세 화장 건곤위 대방 일월 간태궁(永世花長乾坤位 大方日月艮兌宮)을 외우라”고 명하시니라. 군항에서 종도들에게 물으시기를 “바람을 걷고 감이 옳으냐 놓고 감이 옳으냐.” 광찬이 “놓고 가시는 것이 옳은가 생각하나이다”고 대답하거늘 상제께서 다시 종도들에게 오매 다섯 개씩을 준비하게 하시고 배에 오르시니 종도들이 그 뒤를 따랐도다…(하략) (공사 1장 18절)
 
 
 

◎ 군항이 군산항이라는 근거 내용: 

◎ 지명 유래와 변천사: 오늘날의 항구는 강물이 드나들던 갈대밭이었고, 개항 후 주변의 산을 깎아 메웠다. 1899년(광무 3년) 5월 1일 군산항이 개항하기 전을 살펴보면, 군산은 개항 470여 년 전인 1423년(세종 5년)에는 군산포영이 있었고, 또 1512년(중종 7년)경에는 조세미(租稅米)를 한강연안에 설치된 중앙창고로 수송하기 위해 설치했던 창고인 군산창이 있던 곳이다. 그리고 전북과 충청도의 물자를 집산하고 삼남지역(三南地域: 지금의 금강지역을 뜻함)의 국내 상업번창지이며 조선 3대 시장의 하나인 강경(江景)과 연결된 항(港)이었다. 이렇게 군산항은 서해안의 주요한 항구로 이용됐고, 국내 해상수송이나 국외 교역항의 요충지였으며 또한 군사적 전략 기지로서 큰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군산항도 다른 많은 항구와 같이 개항 전에는 대부분이 자연조건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었을 뿐, 인공적인 근대 항으로 개발 건설된 것은 개항 이후에 이루어졌다.
  군산항의 개항은 고종황제의 세력균형 정책, 독립협회의 자유무역주의에 따른 개항정책 등으로 1895년 5월 26일 군산, 마산, 성진(함경도) 3개 항의 개항에 대한 안건이 정부에서 다수결로 결정되었고 고종황제는 즉시 이를 재가하고 개항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1899년 3월 20일 의정부(議政府)에서 5월 1일을 개항 일자로 결정하였다. 그러므로 군산항의 개항은 일제에 의한 강압적인 개항이 아니라 대한제국이 자율적으로 절차를 제대로 밟고 결정한 개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의 의도와는 달리 일제는 우리나라의 내재적 발전을 위함이 아니라 조선의 식민지적 침탈을 위해 군산의 항만과 도시계획 건설을 모두 그들 마음대로 하였다.
  군산항은 개항 이후 호남평야의 쌀 수출과 일본공업제품의 수입항으로 부산항, 인천항 다음가는 중요한 항구였다. 개항 당시 77명이던 일본인이 1906년에는 2천 50명으로 증가했고 무역량은 수입이 64만 1천 2백 55엔, 수출이 49만 2백 25엔에 달했다. 수입은 거의 생활필수품이었으며 수출은 거의 쌀이었다. 1909년 조선총독부의 조사에 의하면 군산항의 수출입액의 약 90% 이상이 일본을 상대로 한 무역이었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수출 무역이라기보다는 일제가 곡창 호남의 질 좋은 쌀을 수탈해 간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군산항은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경제력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인들의 철수와 일본, 북한, 만주, 중국과의 거래 및 왕래 중단으로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군산 외항은 1979년에 완공되었으며, 1990년대부터 중국 및 러시아와의 교역량이 증가함에 따라 군산·장항국가산업단지 지원과 중부권 화물운송의 거점 항만으로 육성하기 위한 군장신항만 개발을 적극 추진하여 서해 중부권 관문항구로서 성장하고 있다.
 
◎ 『전경』과 관련된 곳: 군항(群港)은 해군 세력의 근거지로 군사설비가 되어 있는 해군 전용 항을 의미하는 군항(軍港)이 아니라  군산항(群山港)을 의미한다. 1905년 상제님께서 한 달 정도 머무신 곳으로 서울로 가시기 위해 종도들에게 기선과 기차를 타게 하신 후 수륙병진(水陸竝進)이라 하신 곳이다.
 
▲ 군산 금강 하구의 갈대 (2013.10.9 촬영)
 
 
 
[참고문헌]
『전경』
『두산세계대백과사전』, (주)두산동아, 2000.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CD GX』, (C)한국브리태니커회사, 2000.
『파스칼세계대백과사전』, 동서문화, 2002.
『군산시사』(上), 군산시사편찬위원회, 2000.
『군산문화 제7편』, 군산문화원, 1993.
『군산문화 제11편』, 군산문화원, 1997.
『군산문화 제12편』, 군산문화원, 1998.
『군산문화 제13편』, 군산문화원, 1999.
『군산문화 제16편』, 군산문화원, 2003.
『한국지명요람』, 건설부 국립지리원, 1982.
『한국지명총람 11』(전북 편 上), 한글학회, 2003.
 이병운, 『한국 행정지명 변천사』, 이회, 2004.
 송호열, 『한국의 지명변천』, (주)성지문화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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