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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3년(2013)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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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지명답사 : “여기에서 도주님께서 공부하셨구나!”(上)

“여기에서 도주님께서 공부하셨구나!”(上)

- 통사동 재실, 쌍계사 영주각, 해인사 다로경권 -
 
연구원 곽춘근
 
▲ 쌍계사 영주각(2013년 11월 9일 촬영)
 
 
  우리는 도주님의 50년 공부를 소중한 보물처럼 여기고 그 공부의 중요성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그런데 가끔은 어디에서 어떻게 공부하셨을까하는 궁금함이 든다. 『전경』에는 도주님께서 공부하신 곳이 스무 곳 정도 나온다. 그런데 그 위치를 알기가 쉽지 않고, 가더라도 모르고 지나치게 된다. 이번에 도주님께서 공부하신 곳을 주제로 종단 역사 사진전 준비에 참여하면서 약간의 궁금증을 풀 기회가 생겼다.
  이번 답사의 이틀 일정 중에서 첫날 가기로 한 곳은 통사동 재실(교운 2장 14, 18, 20, 23, 40절)과 쌍계사 영주각(교운 2장 60절) 그리고 해인사 다로경권(교운 2장 54절)이 있던 곳이다. 통사동은 전라도에 있고 쌍계사와 해인사는 경상도 지리산과 가야산에 있어서 차로 이동하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정이다. 더구나 마지막 행선지가 해인사여서 오후 6시 산문이 닫히는 시간 전까지 하루만에 충분히 둘러보려면 그리 넉넉한 일정은 아니다. 그래서 새벽 5시에 출발하기로 하였다.
  여주에서 전북 정읍을 향해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전주에서 원평사거리를 지나 정읍으로 넘어가는 중간에 왼쪽으로 첫 번째 행선지인 통사 마을이 있다. 시계를 보니 벌써 8시가 조금 넘었다. 통사동 재실은 현재 전북 정읍시 감곡면 통석리에 있다. 통석리에는 5개 마을이 있는데 그 중에서 통사 마을과 석정 마을을 합쳐서 통석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통사 마을은 조선시대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가 나왔다고 해서 불린 이름이고, 석정(石亭)마을은 화강암 위에 있는 마을로 그 암반 사이에서 물이 솟아나와 석정 마을이라 하였다고 한다. 통사동 재실은 도주님이 머무시던 당시에는 통석리였지만 통사마을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통사동 재실’이라고 불렸다.
  통사동 재실은 여기에 살던 전의 이씨(全義李氏)가 문중의 선조들께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다. 이곳은 안면도의 우일재 다음으로 도주님께서 공부하신 곳이다. 『전경』에 보면, 도주님께서는 1919년경에 선돌부인의 말씀을 들으시고 둔궤를 찾아와서 이곳에 봉안하셨고, 공부 중이셨던 1920년 2월 17일에는 둔궤가 저절로 열렸다. 또 1921년에 동곡의 구릿골에서 통사동 재실로 상제님의 성골을 모셔오고, 1927년에는 9월부터 석 달 동안 주(籌)를 놓는 공부를 하셨다는 행적이 나온다.
  통사동 재실은 마을 서북쪽 뒷산 기슭에 있다. 예전에는 마을 뒤를 넘어서 올라가는 길이 있었지만 지금은 길이 없어져서 마을을 돌아 복지시설인 만복원 앞마당을 지나야 올라가는 길이 나온다. 여기를 지나 올라가는 길은 재실까지 5분 거리이고 가파르지 않아 쉬엄쉬엄 올라갈 수 있었다. S 자로 굽이진 산길을 따라 가는데 재실에 가까워지자, 오른쪽은 비스듬한 비탈에 듬성듬성 나무와 잡풀이 자라있고 왼쪽은 대나무밭이 약 100여 미터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다.
  통사동 재실이 무너져 가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조금 급한 경사에 땅을 보던 눈이 앞을 향하면서 기대 반 우려 반으로 마지막 굽이를 돌아 올라갔다. 어~? 그런데 건물이 보이지 않았다. 덩그러니 터만 있고 재실은 완전히 무너져서 건물 잔해와 기와가 흙더미에 쌓여 있었다. 휴~! 몇 년 만 일찍 찾아왔더라도 건물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이제는 빈자리에 사진 속의 재실을 상상해 넣어야만 했다. 도주님께서 하신 공부가 중요한 것이지 건물이 중요한 것은 아니겠지만, 이런 곳에서 공부하셨구나 하는 느낌을 조금이나마 얻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 터만 남은 통사동 재실 (2013년 7월 2일 촬영)
 
 
▲ 무너지기 전의 통사동 재실
 
 
  재실은 남향으로 지어졌었는데, 마당에서 정면을 보면 앞이 트여 있고, 조금 앞쪽에 산이 하나 보인다. 건물 터 양 옆과 뒤로 돌로 축대를 쌓고 그 뒤로 대나무를 빽빽이 심어 놓았다. 대나무는 뿌리가 깊고 여러 갈래로 뻗어 흙을 잡아주기 때문에 축대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단다. 그래서인지 흔치 않은 대나무가 재실 올라오는 길목과 재실 주변에 그렇게 많이 있는 것 같다. 재실 앞 쪽에도 축대를 쌓아 둘레에 경계를 지어 놓았다. 전체적으로 약 100여 평 정도 될 듯싶다. 재실은 터를 돋아서 지어졌었고, 양 옆에는 수명이 오래되어 보이는 나무가 장승처럼 서 있다. 오른쪽에는 조그마한 개울이 흐르고 그 곳에 샘이 있는데 옛날에 재실에서 이 물을 떠다가 사용했다고 한다. 도주님께서도 이 물을 사용하셨을 것으로 보인다. 개울을 넘어 갈 수 있도록 통나무가 놓여 있고 마을로 향하는 길이 보인다. 그 길을 따라가자 얼마 못 가서 길은 없어지고 나무와 풀만 무성하여 사람이 다닌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돌아와 재실 터에 쌓인 흙더미를 살펴보았다. 지름이 30cm 정도 되는 기둥들과 서까래였을 나무들이 보이고 기와는 조각조각 깨져 온전한 것이 없었다.
  자료를 조사하다보니 통사동 재실은 1876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재실 상량문에 ‘1876년 3월 16일(음력)에 상량했다’고 적혀 있으니 지금으로부터 100년이 훨씬 넘었고, 도주님 공부하실 때는 지어진지 50년 가까이 된 때가 된다. 100살을 넘겨 이제는 터만 남겨 놓은 통사동 재실. 사람이 드나들지 않으니 세월의 풍상을 이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도주님의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곳이었는데 하는 아쉬움만 남긴 채 내려와야 했다.
 
  다음 행선지는 경남 하동군의 지리산 남쪽 자락에 위치해 있는 쌍계사다. 쌍계사는 1956년 8월에 도전님께서 시봉하여 따라가신 곳으로 도주님께서는 여기에서 7일 동안 공부를 하셨다. 그리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쉽게 공부를 마쳤다고 하시며 “趙鼎山來智異應 一布衣來白日寒(조정산래지리응 일포의래백일한: 조정산이 오니 지리산이 응하고, 한겹 베옷 입고 오니 한 낮인데 차구나!)”이라는 말씀을 남기신 곳이다. 지리산은 산신이 여신(女神)이라는 말도 한다. 하지만 방장산으로 불리며 봉래산, 영주산과 더불어 삼신산(三神山)으로 더 알려져 있다. 통사동 재실에서 쌍계사까지는 약 2시간 정도 걸려 도착했다.
 
▲삼신산 쌍계사라고 쓰여 있는 일주문 (2013년 7월 2일 촬영)
 

  쌍계사는 절 양쪽으로 계곡이 흐른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었다. 이곳 쌍계사는 최치원의 자취와 삼법스님의 창건 설화로도 유명하다. 지금은 진입로가 바뀌었지만 예전에는 왼편에 쌍계(雙磎) 오른편에 석문(石門)이라고 써있는 커다란 바위 사이를 통해 들어갔었다. 또 대웅전 앞에 최치원이 직접 짓고 썼다는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空塔碑)가 있다. 설화에 따르면 쌍계사는 불교 선종을 부흥시킨 육조 혜능대사의 정상(頂相: 머리)을 중국 보림사에서 몰래 가져와 창건했다고 한다. 지금도 혜능대사의 정상은 팔상전 뒤쪽에 있는 금당(金堂)에 모셔져 있다. 삼법스님은 혜능대사의 설법을 기록한 『육조단경』에 기록되어 있는 “내가 입적한 뒤 5~6년 뒤에 어떤 사람이 나의 머리를 탈취해 갈 것이다.”라는 예언을 보고 다른 사람의 손에 탈취되기 전에 선사의 정상을 모셔와 우리나라 만대에 복이 되도록 하리라는 결심을 하고 이 일을 실행하였다고 한다. 삼법스님이 마음으로 “중생들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일이라면 지옥의 고통을 감내하리라.”고 결심한 것은 양심일까 사심일까? 도가 깊지 않아서 아직도 이런 질문은 아리송하기만 하다.
 
▲ 쌍계사 금당 (2013년 11월 9일 촬영)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올라가다 보니 길 왼편에 지리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이 시원하게 흐르고 그 위쪽으로 영화에서나 보던 굵은 대나무가 열지어 있어 고즈넉한 산사의 풍치를 느끼게 했다. 길을 따라 일주문 앞에 다다르니 현판이 특이하다. 보통 산사에서 쓰듯이 ‘지리산 쌍계사’라고 써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삼신산 쌍계사’라 되어 있었다. 삼신산은 불교보다는 선도(仙道)와 관계가 깊은 이름인데 절의 명칭으로 쓰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 방장산(지리산) 쌍계사에는 다른 삼신산인 영주산, 봉래산을 연상시키는 건물이 있는데 봉래당과 도주님께서 공부하셨다는 영주당이다. 방장당도 있는지 찾아보았지만 없었고 대신에 육조 혜능대사의 정상(머리)을 모신 금당 좌우에 동방장과 서방장 건물이 있었다.
 
▲ 쌍계사 팔상전과 뒤쪽에 금당이 보인다. (2013년 11월 9일 촬영)
 
 
  도주님께서 공부하신 영주각을 지금은 영주당이라 부르는데 먼저 이곳으로 방향을 잡아 올라갔다. 일주문을 거쳐 금강문과 사천왕문을 지나서 쭉 올라가면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이 나오지만, 사천왕문을 지나 왼쪽으로 가면 계곡을 건너는 다리가 나오고 계단 위쪽 돈오문 너머에 팔상전이 나온다. 팔상전은 부처님의 전생과 탄생, 수도 과정과 해탈의 일대기를 8폭의 그림으로 그려 모신 곳이다. 이 팔상전 맞은편에 있는 전각이 『전경』에 나오는 청학루이고 왼쪽에 봉래당 오른쪽에 영주당이 있다. 팔상전 올라가는 계단에서 보면 청학루 왼쪽에 영주당이 있다.
 
▲ 쌍계사 팔상전 맞은 편에 보이는 청학루 (2013년 11월 9일 촬영)
 

  그런데 이번에는 영주당을 볼 수가 없었다. 스님들의 수행기간인 하안거(음력 4월 15일부터 7월 15일까지)에 걸린 것이다. 이곳 청학루와 봉래당, 영주당은 승려들이 수도하는 장소라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어 있었다. 답사 계획을 잡을 때도 지금이 하안거라 영주당을 보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라 짐작했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었다. 할 수 없이 봉래당 뒤에 있는 산에 올라가 멀리서 볼 수밖에 없었다. 몇 번 오르내리면서 보았지만 앞을 나무가 가리고 거리도 멀어 꼼꼼히 볼 수가 없었다.(사진은 답사 후 다시 촬영한 것임)
 
▲ 쌍계사 금당에서 바라본 영주당의 전경, 왼편에 살짝 보이는 청기와가 청학루이다. (2013년 11월 9일 촬영)
 
 
▲ 쌍계사 영주당의 모습 (2013년 11월 9일 촬영)
 
 
  영주당은 ㄱ 자형 건물로 한 쪽은 맞배지붕으로 지어졌고 다른 쪽은 팔작지붕으로 지은 모양을 가지고 있다. 건물 크기는 40여 평 정도로 단층이다. 현재 영주당은 승려들의 생활공간으로 주로 이용되어서 그런지 다른 전각과 달리 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런 곳을 도주님께서 공부처로 삼으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지리산에는 화엄사라는 천년이 넘는 고찰도 있는데…. 『전경』에는 지리산과 관련된 어떤 공사인지 나와 있지 않아서 알 수가 없다. 대략 추측컨데 이곳이 삼신산 중의 하나인 지리산과 깊은 인연이 있는 사찰이기 때문이 아닐까? 또 지리산 신명과 어떤 인연이 있지 않을까? 예로부터 삼신산에는 신선이 살고 있으며 불사약(不死藥)이 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상제님께서 행하신 천지공사에 따르면 창생들이 불로장생하며 지상신선이 되어 살아가는 곳이 후천인데, 삼신산은 이 땅에 펼쳐질 후천의 모습을 상징적으로나마 전설 속에 담고 있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도주님께서 지리산과 관련된 공사를 보신 내용에는 이런 의미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영주당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안고 다음 답사지인 해인사까지 약 3시간 정도 걸려 도착했다. 우리나라에는 불·법·승을 대표하는 삼보 사찰이 있다. 불보사찰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통도사를, 법보사찰은 팔만대장경을 소장하고 있는 해인사를, 마지막으로 승보사찰은 조계종을 창시한 지눌스님 이후 16명의 국사(國師)를 배출한 송광사를 말한다. 해인사는 신라 의상대사의 법손인 순응(順應), 이정(利貞) 두 스님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우두산(소머리산, 가야산)에서 초당을 짓고 수행할 때, 신라 제40대 애장왕의 비(妃)가 등창이 난 것을 고쳐주면서 애장왕의 도움으로 창건(802년) 되었다.
 
▲ 해인사 일주문 (2013년 11월 9일 촬영)
 

  주차장을 찾지 못해서 숙박촌이 있는 곳까지 왔다갔다 하다가 도착하니 4시 30분 정도 되었다. 6시 전에 도착하려고 급히 서두른 보람이 있었다. 일주문 주변을 둘러보니 해인사 크기를 짐작케 한다. 일주문 주변이 널찍하고 사방이 탁 트여서 ‘해인사는 대사찰이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계곡 사이나 혹은 산비탈 옆에 세워져 있는 다른 절의 일주문과 위치가 확실히 달랐다. 일주문을 걸어 들어가는데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앞에서 걸어가는 아저씨의 볼멘소리가 들렸다. “아니! 도 닦는 중들이 걸어 다녀야지 왜 우리가 걸어 다녀야 돼?” 덥기도 하고 옆에 가로수가 그늘을 만들어주지도 않는 훤한 길을 가니 그럴만도 하다고 생각되서 웃음이 나왔다.
  1954년 가을 쯤 도주님께서 도전님과 몇 사람들을 해인사로 데려가신 후 3일 동안 공부하셨다. 공부하신 곳은 관음전 뒤쪽에 있었던 다로경권실인데 그곳은 승려들이 차를 마시던 장소였다. 오늘 답사의 마지막 목적지인 관음전을 향해 천천히 올라갔다. 일주문을 넘어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이 있는 곳을 지나가는 데 좀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사천왕문에는 나무로 된 사천왕상이 놓여 있는데 여기는 목조상 대신 사천왕상 벽화가 있었다. 또 사천왕이 있는 문은 보통 천왕문이라 하는데 봉황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봉황문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니 길 오른쪽에 가야산의 산신과 토지가람신(가람은 승려들이 불도를 닦는 곳을 말함)을 모신 국사단(局司壇)이라는 자그마한 건물이 보인다. 안내표지를 보니 가야산의 산신인 정견모주(正見母主-깨달음의 어머니)는 하늘의 신 이비가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는데 큰 아들은 대가야국을, 작은 아들은 금관가야국을 각각 건국하였다고 한다. 갑자기 우리 답사 팀장이 “가야산 산신이 여신이네.”라고 말했다. 지리산 산신도 여신이라는 말이 있는데 산신에 성별이 있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신기하기도 하다.
 
▲ 정면에 보이는 전각에 다로경권실이 있었다. (관음전 뒤편에서 바라본 모습 (2013년 7월 2일 촬영)
 

  국사단을 지나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다 보니 위에 문이 우뚝 솟아 있는데 양쪽으로 3폭씩 심우도가 보인다. 이 문이 속세를 벗어나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해탈문이다. 우리의 숭도문과 비슷한 의미를 담아 세워진 문이다. 해탈문을 나와서 맞은편에 있는 구광루 양쪽을 보면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는데 그 중 오른쪽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관음전이다.

  관음전은    자 형태의 단층 건물이다. 관음전 건물은 반으로 나누어서 오른쪽은 심검당(尋劍堂), 왼쪽은 관음전이라 부른다.  모양의 건물 왼쪽 끝방이 도주님께서 공부하셨던 다로경권실이 있었던 곳이다. 지금은 다로경권실이 따로 없고 관음전과 심검당 전체가 승려들의 수행 공간으로 용도가 바뀌었다. 때문에 출입이 통제되어 있어서 건물 안쪽은 살펴보기 어려워졌다. 알려진 바로는 대략 10평 안쪽의 방 한 칸 정도 크기였다고 한다. 
  현재는 도주님께서 공부하실 때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겠지만, 그래도 내부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외부 건물 모양만 살펴 볼 수밖에 없는 것에 아쉬움이 남는다. 관음전 뒤로 돌아가  자 안쪽의 다로경권실이었던 곳을 살펴보니, 여닫이문 세 짝이 보이고 그 앞으로 스님들이 왔다갔다하며 지나다니는 데 모두 젊었다. 아마도 승가대학의 학승들인 듯했다. 여닫이문 앞에는 좁은 마루가 있는데 1미터가 훌쩍 넘는 높이에 있어서 그 아래 돌계단을 몇 개 밟고 올라가 신발을 벗고 오르게 되어 있었다.
 
▲ 해인사 관음전의 모습. 관음전 뒤쪽으로 연결된 건물이 다로경권실이 있었던 곳  (2013년 11월 9일 촬영)
 

  여기서 도주님께서는 어떤 공부를 하셨을까? 도주님께서 해인사에서 돌아오신 다음날 ‘해인’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으로 볼 때, 해인과 도주님의 공부가 관련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인사의 이름은 화엄경에 나오는 ‘해인삼매’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해인삼매’는 우주의 참 모습을 바다에 비유하여 표현한 것으로 파도가 없는 고요한 바다[海]에 비치는[印] 세계처럼 중생의 번뇌 망상이 멈추어서 번뇌가 없는 깨달음의 경지를 가리키며, 이것이 부처님의 모습이고 우리 중생의 본디 모습이라는 것이다. 도주님께서는 ‘해인’이란 물체나 형상이 아니라 장중인 마음에 있는 상제님에 대한 믿음이라 하셨다. 해인은 바다의 상징적 표현이다. 이 바다는 모든 삼라만상의 근원인 수기이고 천지만물을 지배 자양하는 전기로써 상제님께서 통솔하신다고 말씀하셨다. 곧 해인을 마음에 담는 것은 상제님의 권능을 통해 천지만물과 조화를 이루는 경지로 나아간다는 뜻이 아닐까?
  해인사 경내를 이곳저곳 둘러보고 사명당 입적실로 알려진 홍제암(弘齊庵)을 둘러보니 벌써 6시가 가까워졌다. 아침 일찍 서둘러 하루 종일 바쁘게 돌아다녔는 데도 3곳 밖에 못 보았다. 숙소인 부산까지는 약 2시간 거리. 저녁 식사하고 출발하니 마음이 풀려서일까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눈꺼풀의 힘자랑에 일부러 져주었다. 지는 게 이기는 거다! 하루하루 이어지는 일상 속에서 도주님이 가신 길을 쫓아온 오늘은 참 특별한 날이었다.
 
 
 
[참고자료]
『정읍시사』 정읍시사편찬위원회, 2003.
쌍계사 홈페이지(http://www.ssanggyesa.net/)
해인사 홈페이지(http://www.haeins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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