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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4년(2014)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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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수(宿) 신명 : 방(房) 별을 관장하는 왕양(王梁) 신명

방(房) 별을 관장하는 왕양(王梁) 신명
 
 
 
글 대순종교문화연구소
 
 
 
방수(房宿)
  방수(房宿)는 28수 가운데 네 번째 별자리다. 그리고 각항저방심미기(角亢氐房心尾箕), 즉 동방(東方) 청룡(靑龍) 칠수(七宿) 가운데서도 네 번째 별자리다. 별자리의 주된 별(主星)은 4개로 동물은 토끼다.01 방수는 동방 청룡 칠수 전체를 용으로 볼 때 용의 복방(腹房, 배)에 해당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방수를 가르켜 ‘천사(天駟)’라고 불렀는데 이는 방수의 주성(主星)이 되는 별 넷을 수레를 끄는 네 마리 말에 비유한 것이다.
  방수를 의인화하여 방수성군(房宿星君)이라 부르는데 정기(精氣)가 극성(極盛)하며, 손에는 장극(長戟, 창끝이 두 가닥으로 갈라져 있는 창)을 지닌 모습에 얼굴은 토끼 형상으로 표현된다.
 
 
후한의 창업공신 왕양
  방(房) 별을 관장하는 왕양(王梁, ?-38)은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BCE 2-CE 58)02를 도와 후한(後漢)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창업공신이다.
  왕양은 자(字)가 군엄(君嚴)이고 어양(漁陽) 요양(要陽, 현재 河北 灤平 西北) 사람이다. 그는 군의 하급관리로 있다가 태수 팽총(彭寵,?-29)03의 부름을 받아 호노령(狐奴令)04이 되었다. 이후 왕망는 합연[蓋延, 삼(參) 별을 관장], 오한[吳漢, 저(氐) 별을 관장]과 함께 병사를 이끌고 남진하여 광아(廣阿, 하북성 隆平縣)에서 당시 경시제(更始帝) 유현(劉玄, ?-25)05의 명으로 하북 평정의 임무를 띠고 있었던 유수를 만나 편장군(偏將軍)에 임명되었다.
  왕양, 합연, 오한이 유수를 따르기로 하고 자발적으로 행동한 것은 특기할 만한 사안이다. 이미 난세로 접어든 정국에서 민심은 한나라의 부흥을 기대했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적임자냐 하는 것이었다. 이미 경시제 유현이 있었고, 자신을 전한의 11대 황제인 성제(成帝, 재위 BCE 32-7)의 아들 유자여(劉子輿)라고 주장한 왕랑도 세력을 증식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유수를 만난 적도 없고 그로부터 구원 요청도 받지 못한 이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인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이 당시 유수의 세력은 미미했다. 그러나 유수는 곤양대전에서 소수의 군대로 왕망의 대군을 무찌른 실력을 보여주었다. 또한, 그는 자신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덕을 베풀어 민심을 수습하였다.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도 있듯이 이러한 민심의 향배가 바로 왕양과 같은 이들이 유수를 따르도록 한 이유였을 것이다. 
  왕양과 합연, 오한의 합류는 이제 겨우 자기 세력을 형성해 가고 있던 유수에게는 천군만마와 같았다. 유수는 이들의 도움으로 왕랑의 근거지인 한단(邯鄲)을 함락시켰다. 그 공으로 왕양은 관내후(關內侯)의 작위를 받았다. 이후 왕양은 유수를 수행하여 하북(河北)을 평정하고 야왕(野王)의 현령(縣令)에 임명되었다.
  한단 평정 이후 유수는 경시제의 소환명령에 불응하면서 자신만의 독자 세력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따라서 지금까지 아군이었던 경시제와의 긴장관계는 불가피했다. 하지만 왕양이 하내(河內) 태수인 구순[寇恂, 우(牛) 별을 관장]과 남쪽으로 낙양(洛陽)을 지키고 북쪽으로 천정관(天井關)을 수비하니 경시제 휘하에 있던 주유(朱鮪)는 감히 출병하지 못하였다. 유수는 이러한 왕양의 공을 크게 인정했다.  
  25(건무 1)년 유수가 후한의 초대황제로 즉위하니 이가 곧 광무제이다. 이때 왕양을 대사공(大司空)에 발탁하고 무강후(武强侯)로 봉했다. 파격적인 발탁이었다. 대사공은 토목공사를 관장하던 직책으로 한대(漢代)에는 삼공(三公)이라 하여 대사마(大司馬), 대사도(大司徒)와 더불어 국가 중요 관직중 하나였다. 현령으로 있던 왕양을 일약 대사공에 발탁한 것은 그에 대한 광무제의 신임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게 하는 일이었다. 
  26(건무 2)년 광무제는 왕양에게 대사마 오한[吳漢, 저(氐) 별을 관장]과 더불어 단향(檀鄕)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이 당시 군사에 관한 모든 일은 대사마의 명령을 받도록 되어 있었으나 왕양은 매번 자신의 근거지였던 야왕현에서 독자적으로 군사를 소집하였다. 광무제는 그가 황제의 명령을 받들지 않는다고 여겨 야왕현에 머물러 있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왕양은 이러한 황제의 명령을 어기고 자신의 뜻대로 군대를 진군시켰다. 광무제는 노하여 상서(尙書) 종광(宗廣)을 보내서 군중(軍中)에서 왕양을 목베도록 했다. 그러나 종광은 차마 그를 죽이지 못하고 수레에 태워 수도로 압송했다. 왕양이 수도로 압송되어 오자 광무제는 그를 용서해 주었다. 한 달 후에 광무제는 왕양을 중랑장(中郞將)에 임명하고 집금오(執金吾)의 일을 맡도록 조처했다.
  광무제는 후한 창업 공신들의 작위(爵位)를 끝까지 지켜주고자 했던 군주였다. 그는 전한(前漢)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공신들의 말로가 비극적이었던 사례를 잊지 않았고, 후한 창업에 공을 세운 이들에게 관대한 처분을 내렸다. 왕양이 두 번씩이나 황제의 명령을 어겼음에도 사면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광무제의 관대한 처분 덕이었다. 또한 광무제가 왕양을 서울로 압송한 이후 그를 사면(赦免)하고 중앙의 관직과 임무를 맡긴 것은 참으로 아랫 사람을 아끼는 사려 깊은 조처였다고 할 수 있다. 왕양의 성격상 지방에 두게 되면 똑같은 문제를 반복할 여지가 있으므로 이를 사전에 봉쇄하기 위한 조처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후 왕양은 북쪽에서 기관(箕關)을 지키다가 적미(赤眉)의 잔당을 공격하여 굴복시켰다.
  27(건무 3)년 봄에 왕양은 다시 오교(五校)를 공격하여 신도(信都), 조국(趙國)까지 추격해서 그들을 대파하고 모두 평정하였다. 그해 겨울, 광무제는 사자를 보내 왕양을 전장군(前將軍)06에 임명했다. 28(건무 4)년 봄, 왕양은 비성(肥城), 문양(文陽)을 공격하여 평정하였다. 나아가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두무[杜茂, 두(斗) 별을 관장]와 더불어 초(楚)와 패(沛) 지역 사이에서 교강(佼彊), 소무(蘇茂)를 평정하고, 대량(大梁), 설상(齧桑)에서 도적을 소탕했다. 계속해서 왕양은 포로장군(捕虜將軍) 마무[馬武, 익(翼) 별을 관장], 편장군(偏將軍) 왕패[王覇, 벽(壁) 별을 관장]와 길을 나누어 함께 진격하니 일 년여만에 모두 평정하였다.
  29(건무 5)년 왕양은 광무제를 수행하여 도성(桃城)을 구원하고 방맹(龐萌)을 격파하였다. 왕양은 전투가 거듭될수록 더욱 분투하는 장수였다. 광무제는 그를 산양(山陽) 태수에 임명하여 새롭게 편입되는 백성을 진무(鎭撫)케 하고 예전처럼 병사를 거느리게 하였다.
  몇 개월 후에 광무제는 왕양을 불러들여 구양흡(歐陽歙)을 대신하여 하남윤(河南尹)으로 삼았다. 왕양이 수로를 뚫어 곡수(穀水)를 끌어다 낙양성(洛陽城) 아래 대어서 동쪽의 공천(鞏川)으로 흘러 보내려고 하였는데 수로가 완성되었는데도 물이 흐르지 않았다. 31(건무 7)년에 관리들이 그 일로 왕양을 탄핵하니 그가 두려워하며 자신이 이미 늙었으니 쉬게 해 주십사 청했다. 그러자 광무제가 조칙을 내려 말했다.
  “왕양은 이전에 병사를 이끌고 정벌할 때 사람들이 그의 현명함을 칭송하여 그를 발탁하여 경사(京師)의 일을 맡긴 것이었다. 그가 수로를 내자고 한 것은 실로 사람들을 이롭게 하고자 한 것이었으나 많은 노동력을 들였는데도 성공하지 못하니 백성들이 그를 원망하고, 비방하는 자가 생긴 것이다. 또한 그가 관대한 은택을 입고도 겸손히 물러가기를 원하지만, ‘군자는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이루게 해 준다’고 하였으니 왕양을 제남(濟南) 태수로 봉하노라.”
  37(건무 13)년 광무제는 왕양의 식읍을 늘려주고 부성후(阜成侯)로 봉하였는데, 그는 다음해인 38(건무 14)년 세상을 떠났다.

 
 

01 萬民英(明) 原著, 『圖解 星學大成 第一部: 星曜神煞』, 北京; 華齡出版社, 2009, p.407.
02 후한(後漢)의 초대 황제(재위, 25-57). 전한(前漢)을 세운 한고조 유방(劉邦)의 9세손(世孫). 자(字)는 문숙(文叔). 9세에 고아가 되어 숙부 유량(劉良)의 밑에서 성장했다. 1세기 초 외척 왕망(王莽)이 궁정 쿠데타를 통해 전한(前漢)을 타도하고 신(新)을 건국한다. 그러나 왕망의 복고적 개혁 정책이 실패하면서 전국적인 반란이 일어났다. 중국이 혼란에 빠지자 한실 부흥을 바라는 민심을 등에 업은 한 왕실의 후예들의 한 사람이었던 유수는 22년 가형(家兄) 유연(劉縯)과 함께 남양(南陽)에서 호족들과 연합하여 봉기했다. 이후, 곤양(昆陽)에서 왕망의 군대를 대파하고 25년 낙양(洛陽)에서 즉위하여 한왕조를 재건하였다. 이를 동한(東漢), 또는 후한(後漢)이라고 한다. 즉위 이후 10년 동안 경시제(更始帝), 적미(赤眉), 외효(隗囂), 공손술(公孫述) 등 각지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주력하여 36년 전국을 평정했다. 묘호(廟號)는 세조(世祖), 시호(諡號)는 광무제(光武帝)다.
03 남양(南陽) 완(宛, 현재 河南省 南陽) 사람. 왕망 말기에 대사공(大司空) 왕읍(王邑)을 좇아 한군(漢軍)에 저항했다. 경시(更始)가 즉위하고 그를 편장군(偏將軍)에 임명하고 어양(漁陽)태수의 일을 보게 했다. 뒤에 광무제(光武帝)에게 귀부(歸附)하여 건충후(建忠侯)에 봉해졌고, 대장군(大將軍)이라는 칭호가 내려졌다. 광무제를 좇아 왕랑(王郞)과 동마군(銅馬軍) 평정에 종군하여 자신의 공에 대한 자부심 컸었다. 그런데 휘하 장수였던 오한(吳漢)과 왕양(王梁)보다 자신의 처우가 못하다는 불만을 품고 26(건무2)년에 반란을 일으켜 우북평(右北平), 상곡(上谷), 계(薊, 현재 北京 西南) 등을 차지하고 스스로 연왕(燕王)에 올랐으나 피살되었다.
04 한나라 때 설치된 현(縣)으로 위치는 하북성(河北省) 순의현(順義縣)의 동북(東北)이다.
05 자(字)는 성공(聖公). 왕망 말년에 법을 어겨 평림(平林)으로 망명하였다가 22년 평림을 기반으로 한 반란이 일어나자 평림군(平林軍)에 투항했고 23년 호(號)를 경시장군(更始將軍)이라 했다. 이때 평림군의 추대로 황제가 되었는데 유수의 형인 유연(劉縯)의 위세와 명망을 시기하여 그를 죽였다. 한나라의 부흥을 바라는 민심을 업고 왕망을 몰아내고 장안을 차지하였으나 잘못된 정치로 반란이 빈발했다. 왕망 말기에 일어났던 반란세력이 가장 세력이 컸던 적미(赤眉)가 장안을 함락시킨 이후 처음에는 장사왕(長沙王)에 봉해졌으나 후에 사록(謝祿)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06 이전의 장군이란 의미가 아닌 선봉장의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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