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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4년(2014)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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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수(宿) 신명 : 두(斗) 별을 관장하는 두무(杜茂) 신명

두(斗) 별을 관장하는 두무(杜茂) 신명
 
 
 
글 대순종교문화연구소
 
 
 
두수(斗宿)

  두수(斗宿)는 28수 가운데 여덟 번째 별자리이다. 그리고 각항저방심미기(角亢氐房心尾箕), 즉 동방(東方) 청룡(靑龍) 칠수(七宿) 다음의 두우여허위실벽(斗牛女虛危室壁) 북방(北方) 현무(玄武) 칠수(七宿) 가운데서 첫 번째 별자리이다. 이 별자리의 주된 별(主星)은 6개로 동물은 해태(獬豸)이다.01 해태는 시비(是非)와 선악(善惡)을 판단(判斷)한다는 상상(想像)의 동물로 부정한 사람을 보면 뿔로 받는다고 알려져 있다. 동방 청룡 칠수 별자리의 이름은 용의 형상에서 비롯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앞으로 계속해서 연재될 북방 현무 칠수와 남방(南方) 주작(朱雀) 칠수(七宿), 서방(西方) 백호(白虎) 칠수(七宿)의 경우에는 관련 동물의 형상에서 유래된 경우가 많지 않다.
  두수는 별자리의 형태가 두(斗)와 같다고 하여 이름이 붙여진 것인데 북두칠성과 구분하기 위하여 남두(南斗)로 불렀다. 두수를 의인화 할 때 북방두목해성군(北方斗木獬星君)이라 하면서도 그 모습은 남두성군(南斗星君)의 형상인 것은 이런 까닭이다. 일반적으로 북두(北斗)는 사(死)를 주관하고 남두(南斗)는 생(生)을 주관한다고 알려져 있다. 남두성군은 붉은 옷을 입고 있으며, 한 손에는 생사부(生死簿)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붓을 쥐고 있는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옛 사람들은 남두성군의 생사부에는 모든 생령(生靈)의 수명이 기록된 것이라 믿었다. 이 믿음에서 비롯된 설화는 한국과 중국에 널리 알려져 있는데 남두성군을 잘 대접하여 그에게 수명 연장을 청원했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02
 
 
후한의 창업공신 두무

  두(斗) 별을 관장하는 두무[杜茂(?-43)]는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BCE 2-CE 58)를 도와 후한(後漢)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창업공신이다. 자(字)는 제공(諸公)으로 남양군(南陽郡) 관군현[冠軍縣, 현재 하남성(河南省) 등현(鄧縣) 서북] 사람이다. 두무는 경시제가 유수를 행대사마(行大司馬)로 삼아 하북 평정을 명령한 이후부터 그를 따른 인물로 중견장군(中堅將軍)에 임명되었다. 유수가 정벌에 나설 때면 두무는 언제나 그를 수행하였다. 두무처럼 처음부터 광무제를 보필한 장수는 드물었다. 후한 창업에 대공을 세운 중흥 28장들은 주로 하북 평정 과정에 편입된 장수들이 많았다.
  25(건무 1)년 유수가 장수들의 추대를 받아 후한의 초대황제로 즉위하니 이가 곧 광무제이다. 광무제는 즉위한 후 두무를 대장군에 임명하고 낙향후(樂鄕侯)에 봉했다. 두무는 북쪽으로 오교(五校)를 진정(眞定)에서 공격하고 나아가 광평(廣平)을 평정하였다.
  26(건무 2)년 광무제는 두무를 다시 고형후(苦陘侯)에 봉했다. 두무는 중랑장(中郞將) 왕양[王梁, 방(房) 별을 관장]과 함께 위군(魏郡), 청하(淸河), 동군(東郡)에서 오교를 공격하여 그들의 군영과 보루를 무너뜨렸다. 자신들의 근거를 상실한 오교의 자칭 대장군이나 지절대장(持節大將) 30명은 두무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두무의 활약으로 세 개 군의 도적들이 소탕되었다. 이렇게 도적들이 소탕되자 이들의 준동(蠢動)으로 끊어졌던 도로가 다시 연결되어 사람과 물자의 소통이 가능해졌다.
  이듬해인 27(건무 3)년 광무제는 두무를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에 임명하고 패군(沛郡)을 공격케 하니, 그는 망현(芒縣)을 점령하였다. 이때 서방(西方)에서 다시 반란이 일어났다. 서방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들은 교강(佼彊)03을 맞아들였다. 29(건무 5)년 봄 두무는 포로장군(捕虜將軍) 마무[馬武, 익(翼) 별을 관장]를 이끌고 서방으로 진공하여 수개월 만에 그곳을 함락시키니 교강은 동헌(董憲)에게로 도망쳤다.
  두무의 활약으로 동쪽이 평정되자 광무제는 31(건무 7)년 조서를 내려 병사를 이끌고 진양(晉陽), 광무(廣武, 太原郡에 속함)로 가서 흉노의 노략질을 대비하도록 했다. 33(건무 9)년 두무는 안문(雁門) 태수인 곽량(郭涼)04과 함께 노방(盧芳)05의 장수 윤유(尹由)를 번치(繁畤)에서 공격하였다. 윤유가 공격당하자 가람(賈覽)이 호(胡)의 기병(騎兵) 만여 명을 이끌고 그를 구원하러 왔다. 두무가 이에 맞서 싸웠으나 패하여 병사를 이끌고 루번성(樓煩城)으로 후퇴하였다. 이때 노방은 고류(高柳, 산서성 陽高縣)를 근거지로 삼고 흉노와 연합하여 자주 변방을 노략질하였다. 광무제는 노방 공략을 위해 수차례 군대를 파견했지만, 북방의 군사대국인 흉노의 지원을 받고 있는 노방을 제거하는 데 실패했다. 
  36(건무 12)년 광무제는 단충(段忠)을 보내 여러 군(郡)의 죄수들을 이끌고 가서 두무에게 배속케 하여 북쪽 변방을 지키게 하였다. 두무는 변방의 사졸을 징발하여 초소를 짓고 봉화를 수리하여 흉노의 침입에 대비했다. 또한, 각종 군수품과 생필품을 모아서 군사들에게 공급하고 변방의 백성들에게도 나누어주니 감사 인사를 전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두무는 또한 둔전(屯田)06을 경작하여 수레로 식량을 운반, 공급하였다.
  이보다 앞서 윤유가 안문에 침입하여 가단(賈丹), 곽광(霍匡), 해승(解勝)을 사로잡고 이들을 장수로 삼아 함께 평성(平城)을 수비하였다. 그런데 가단 등이 공모하여 윤유를 죽이고 안문태수 곽량에게 출두했다. 곽량은 즉시 광무제에게 보고했다. 광무제는 그들 모두 열후(列侯)에 봉하고, 군수물자, 비단, 옷감을 두무와 곽량의 군대 및 평성의 백성들에게 하사토록 명령하였다. 이때부터 노방의 성읍들이 점점 항복해 오기 시작했다. 여기에 곽량이 순씨(郇氏)에게 아부했던 세력을 몰아내고 한 달여 만에 안문은 안정을 찾았다. 계속해서 세력이 꺾인 노방은 드디어 흉노에게 도망갔다. 광무제는 곽량의 아들을 발탁하여 중랑(中郞)으로 삼고 자신의 곁에서 보위토록 하였다.
  37(건무 13)년 광무제는 두무의 식읍을 늘려주고 수후(脩侯)에 다시 봉했다.
  39(건무 15)년 두무는 참거향후(參蘧鄕侯)로 봉해졌다.
  43(건무 19)년 세상을 떠났다.
 
 

01 萬民英(明) 原著, 『圖解 星學大成 第一部: 星曜神煞』, (北京; 華齡出版社), 2009, p.415.
02 『삼국지연의』를 보면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관로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관로는 역학에 통달한 인물로 풍향과 날씨, 사람의 수명을 미리 내다 보고 관상도 잘 보는 것으로 유명했다. 어느 날 산책을 하던 관로가 조안이란 청년의 관상을 보고, 사흘 안에 죽을상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관로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던 조안의 아버지가 그에게 살려 달라고 애원하였다. 이들의 청을 외면할 수 없었던 관로는 술과 고기를 준비해서 자신이 정한 장소에 가면 두 사람이 바둑을 두고 있을 터이니, 그들에게 잘 접대하고 나서 부탁해 보라고 일러주었다. 조안이 관로가 말한 날짜에 정한 장소에 가니 과연 두 남자가 바둑을 두고 있었다. 조안은 그들의 옆에서 고기와 술을 접대했다. 바둑에 열중한 그들은 조안이 준비한 술과 고기를 먹게 되었다. 두 남자는 자신들이 접대를 받았다는 사실을 바둑이 끝나고서야 알았다. 조안은 관로가 일러준 대로 이들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이들은 이미 조안에게 대접을 받은 것을 난감해 하면서 그의 청을 들어 주었다. 남쪽에 앉은 사람이 장부를 꺼내어 보고 조안에게 말했다. “자네는 19세에 죽을 운명이었으나 내가 그 앞에 구(九)를 써넣어 주겠다. 이제 자네는 아흔 아홉 살까지 살 수 있네. 관로에게 가서 앞으로는 천기를 누설하지 말라 전하게” 이야기를 들은 청년이 집으로 돌아와서 이를 관로에게 전했다. 관로는 “북쪽에 앉아 있던 남자는 북두성, 남쪽에 앉아 있던 남자는 남두성이다. 남두성은 사람의 생명을 다스리고, 북두성은 죽음을 다스리지.” 이 이후에 관로는 천기누설을 두려워하여 다른 사람의 점을 함부로 쳐주지 않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이때는 정북창이 관로를 대신한다.
03 산양[山陽, 현재 산동성(山東省) 금향(金鄕) 서북(西北)] 사람. 왕망의 신나라 말년에 서방(西防)에서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 23(경시 1)년 양왕(梁王) 유영(劉永)에 의해 횡행장군(橫行將軍)에 임명되었다. 26(건무 2)년 합연(蓋延)에게 패배하여 호릉(湖陵)으로 도망갔다가 29(건무 5)년 동헌(董憲)에 귀의했는데 오한(吳漢)에게 패하여 한군(漢軍)에 항복했다.
04 자(字)는 공문(公文). 우북평(右北平) 사람으로 신장이 8척, 힘에 세고 용맹했다. 비록 무장이나 경서에 통달했던 까닭으로 지략이 뛰어났고 변방의 사무에 밝아 북방의 유력 인사였다. 처음에는 유주목(幽州牧) 주부(朱浮)의 병조연(兵曹掾)이었는데 팽총(彭寵) 격퇴에 공을 세워 광무후(廣武侯)에 봉해졌다.
05 자(字)는 군기(君期). 안정(安定) 삼수[三水, 현재 감숙성(甘肅省) 고원(固原) 北] 사람. 왕망의 신나라 말년에 전한 무제의 증손자 유문백(劉文伯)을 사칭하여, 삼수 속국(屬國)에 사는 강족(羌族), 호족(胡族)과 함께 군사를 일으켰다. 경시제가 장안에 이르자 그를 기도위(騎都尉)에 임명해 안정 서쪽을 진무(鎭撫)토록 했다. 경시제가 패망하니 삼수지역의 호걸들이 그를 상장군(上將軍) 겸 서평왕(西平王)으로 세우고 사신을 보내 서강(西羌), 흉노(匈奴)와 화친하게 했다. 이때, 그는 자신을 전한 무제의 증손자라고 사칭했으므로, 흉노는 그를 한나라 황제에 임명했다. 이후, 도읍을 구원(九原)에 정하고 흉노와 함께 북쪽 변방을 자주 침략하여 광무제가 여러 번 군대를 파견했으나 정벌하지 못했다. 36(건무 12)년 그의 부장(部將) 수욱(隨昱)이 모반을 일으키자 흉노로 달아났다가, 40(건무 16)년 고류(高柳)에 들어와 살면서 한나라에 항복하기를 청해 광무제가 대왕(代王)에 봉했는데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자를 데리고 흉노로 달아났다. 10년 뒤 흉노 땅에서 병사(病死) 했다.
06 군대가 머물러 수비하면서 농사를 짓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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