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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수(宿) 신명 : 실(室) 별을 관장하는 풍이(馮異) 신명1

실(室) 별을 관장하는 풍이(馮異) 신명1
 
 
글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실수(室宿)
  실수(室宿)는 28수 가운데 열세 번째 별자리이다. 그리고 두우여허위실벽(斗牛女虛危室壁) 북방(北方) 현무(玄武) 칠수(七宿) 가운데서 여섯 번째 별자리다. 이 별자리의 주된 별[主星]은 2개로 동물은 돼지다. 실수의 속성(屬性)은 화(火)로 별자리의 이름[室]은 북방현무의 몸을 대표한 데서 비롯된다. 실수를 의인화하여 북방실화저성군(北方室火猪星君)이라 하는데 황색(黃色) 옷을 입고 손에는 9개 날이 달린 큰 쇠갈퀴를 들고 있다고 한다.01 
 

후한의 창업공신 풍이
  풍이(馮異,?-34)는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BCE 2-CE 58)를 도와 후한(後漢)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창업공신이다. 풍이의 자(字)는 공손(公孫)으로 영천(潁川) 부성(父城, 현재 河南 寶豊 東) 사람이다. 그는 책읽기를 좋아하여 『좌씨춘추(左氏春秋)』02, 『손자병법(孫子兵法)』03에 능통하였다.
  잠시 후한 건국을 전후한 정세를 살펴보자. 선양(禪讓)이라는 궁정쿠데타를 통해 전한(前漢)을 타도한 왕망(王莽)의 신(新, 8-23)나라는 오래가지 못했다. 정국의 혼란은 왕망의 급진적이고 복고적인 개혁정책이 참담하게 실패하면서 촉발되었다.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한나라의 후예들인 남양(南陽)의 유씨(劉氏)들이 부흥의 기치를 들고 이에 가세했다. 23년 반란 세력들 가운데 일단의 세력들이 남양 유씨들과 결합하여 경시제(更始帝) 유현(劉玄, ?-25)을 옹립하였다. 이때 후한의 창업자 유수는 그의 형인 유연(劉縯)과 함께 봉기군에 합류하였다.  
  이러한 때에 풍이는 군연(郡掾)04으로 5개 현(縣)을 감독하고 있었다. 그는 부성현의 현장인 묘맹(苗萌)과 함께 성을 지키며 유수군에 대항했다. 유수는 영천을 순행하면서 부성현을 공략하였으나 굴복시키지 못하고 건거향(巾車鄕)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런데 풍이가 몰래 자신이 속한 현을 돌아다니다가 유수군에 붙잡혔다. 이때 풍이의 사촌형인 풍효(馮孝)와 같은 군(郡) 출신인 정침(丁綝), 여안(呂晏)은 이미 유수에 투항한 상황이었다. 풍이가 잡히자 이들은 유수에게 그를 천거하여 이들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 자리에서 풍이가 말하였다.
  “저 한 사람의 힘은 강약을 따질 수가 없습니다. 노모께서 성중(城中)에 계시니 원컨대 돌아가 5개 성을 장군께 바쳐 공을 세우고 은덕에 보답하겠습니다.”
  유수는 ‘좋다’고 대답하고 그를 돌려보냈다. 풍이가 돌아가 묘맹을 설득하였다.
  “지금 여러 장수들이 모두 강성하여 일어났으나 횡포한 자들이 많습니다. 오직 유장군만이 이르는 곳에서 노략질을 하지 않습니다. 그의 말과 행동을 보면 보통 사람이 아니니 그에게 귀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묘맹이 대답하였다.
  “우리는 생사의 운명을 함께 하기로 하였으니 삼가 그대의 계책을 따르겠소.”
  이렇게 해서 풍이는 묘맹과 함께 다섯 현을 인솔하여 유수에게 항복하였다. 유수의 입장에서 풍이의 말을 한때의 위기를 회피하기 위한 말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순순히 보내주면서 자신의 신뢰를 보여주었고 풍이 또한 자신의 말을 어기지 않았다. 이후 풍이는 최후의 순간까지 유수를 보좌하며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
  경시제의 여러 장군들 중 부성현을 공략한 자가 10여 명에 이르렀으나 풍이는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이것은 당시의 정세가 얼마나 어지러웠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이미 유수군에 항복한 것으로 경시제의 세력권에 편입된 것이었다. 그러나 경시제의 다른 장수들로선 자신들의 위세를 과시하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에 끊임없이 부성현을 공략한 것이다. 유수는 사례교위(司隷校尉)가 되어 부성현을 지나는 길에 들르니 풍이는 즉시 성문을 열고 술과 쇠고기를 바치면서 그를 맞아들였다. 유수는 풍이를 주부(主簿)05로 삼았다. 풍이는 같은 고을사람인 요기(銚期), 숙수(叔壽), 단건(段建), 좌륭(左隆) 등을 유수에게 천거했고 이들 모두는 연사(掾史)06로 임용되었다.
  경시제가 여러 차례 유수를 하북에 파견하려 하였으나 여러 장군들은 모두 안 된다고 하였다. 이 때 좌승상(左丞相) 조경(曹竟)의 아들 조후(曹詡)가 상서를 지내고 있었는데 두 부자가 요직에 있었으므로 풍이는 유수에게 이들과의 교류를 소홀히 하지 말라고 권유하였다. 그 후 유수가 하북에 파견될 때 조후는 힘이 되어 주었다.
  그런데 유수가 하북에 파견되기 전에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유수의 친형인 유연이 권력 암투의 과정에서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애초에 경시제는 난국을 타개할 만한 지도자가 아니었다. 경시제를 옹립한 이들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하는 데에 방해가 되지 않을 만한 인물을 황제로 선택한 것이다.
  유수의 친형 유연은 그런 경시제에게는 부담스러운 인물이었다. 경시제가 유연을 처형한 것은 그가 특별한 잘못을 범해서가 아니라 권력 투쟁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유수가 곤양(昆陽)에서 왕망의 대군을 크게 물리친 것도 소용없었다. 곤양대전은 중국 전쟁사에서도 소수의 군대가 대군을 물리친 것으로 유명한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유수는 불과 수천 기로 왕망의 42만 대군을 물리친다. 왕망 패망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며 이로 인해 유수는 일약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한다. 하지만 유연의 존재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던 경시제는 이 또한 탐탁하지 않았다. 유연도 껄끄러운데 그의 동생 유수까지 상상도 못할 역사적인 대승리를 쟁취했기 때문이다. 경시제의 두려움은 더욱 커질 수 밖에 없었다. 경시제는 유연의 휘하 장수의 작은 과실을 빌미로 그를 처단했다. 유연의 처단은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평소 사소한 일도 결정을 미루는 일이 잦았던 경시제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이것은 그만큼 유연에 대한 경시제의 두려움이 컸었다는 반증이라고 생각된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숙부 밑에서 성장한 유수에게 그의 친형인 유연은 부모나 다름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유연의 죽음은 정치적으로 예민한 사안이었기 때문에 겉으로 애도를 표현할 수 없었다. 다만 유수 그 자신은 심상(心喪)07을 치르고 있었다. 유수는 술과 고기에 손을 대지 않았으며 그의 잠자리에는 눈물을 흘린 자국이 있었다. 풍이가 이를 보고 홀로 머리를 조아리면서 넌지시 슬퍼하는 마음을 드러내 보였다. 유수가 만류하면서 말하였다.
  “경은 망언하지 않도록 하시오.”
  풍이가 유수에게 진언하였다.
  “천하가 모두 왕씨[王莽]를 고통스럽게 여겨 한나라를 사모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경시제의 여러 장군들은 제멋대로 포학하여 이르는 곳마다 노략질을 하여 백성들이 실망하여 의지할 곳을 잃고 있습니다. 지금 공께서는 오로지 천명에 따라 은덕을 베풀고 계십니다. 걸주(桀紂)08의 어지러움이 있고 난 후에 탕무(湯武)09의 공훈이 있었으며 사람이 오래도록 굶주리고 목마르게 되면 쉽게 포만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니 당장 관속들을 나누어 파견하여 여러 현들을 순행하면서 원한과 응어리 맺힌 것을 다스리게 하시어 은택을 베푸소서.”
  유수는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유수는 한단(邯鄲)에 이르러 백성들의 위무를 위해 풍이와 요기를 속현(屬縣)들에 파견하면서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첫째, 죄수들을 단속할 것.
  둘째, 홀아비나 과부 같이 외로운 이들을 보살필 것.
  셋째, 도망자들 가운데 스스로 출두하여 죄를 고백하는 자들은 사면해 줄 것.
  넷째, 2천석 이상의 재산을 지닌 수장과 관리들 가운데 뜻을 같이 하는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보고할 것.
  이 시기에 한단에서는 왕랑(王郞)이 세력을 급속하게 확장하고 있었다. 왕랑은 그 자신이 전한의 11대 황제인 성제(成帝, 재위 BCE 32-7)의 아들 유자여(劉子輿)라고 선전했다. 왕랑의 이런 선전은 한나라의 부흥을 바라는 당시의 민심을 적절하게 이용한 것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모으기에 충분했다. 왕랑은 순식간에 세력을 모아 천자의 이름으로 주변 제군(諸郡)에 자신의 명령을 따를 것을 요구했는데 많은 군현이 여기에 순응하였다. 
  하북에서 순조롭게 자신의 세력을 확대하여 가고 있던 유수로서는 뜻밖의 왕랑이라는 복병을 만난 셈이었다. 게다가 왕랑이 유수의 목에 거액의 현상금을 걸면서 유수는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왕랑에게 쫓기게 된 유수는 계(薊)에서 출발하여 밤늦게까지 행군하며 어떤 때는 풀밭에서 자면서 요양현(饒陽縣) 무루정(無蔞亭)에 이르렀다. 유수군은 계속된 행군에 지쳐 있었고 날씨마저 매서웠다. 풍이는 콩죽을 바쳐 유수가 요기할 수 있게 하였다. 그 다음날 아침, 유수는 여러 장군들에게 말하였다.
  “어제 공손(풍이의 자)이 바친 콩죽 덕분에 추위와 굶주림이 모두 풀렸다.”
  유수의 말 한마디는 총사령관의 언행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의 일에 충실했던 풍이의 노고를 치하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불만을 잠재운 것이다. 힘든 행군 속에서 추위에 떨었든 유수의 군대는 먹는 것도 변변치 못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여기저기서 불만의 소리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총사령관인 유수가 이렇게 나오는 데에 그 휘하 장졸들 역시 불만을 제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유수군이 남궁현(南宮縣)에 이르렀을 때 큰 비바람을 만났다. 유수는 길옆 빈집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풍이는 땔나무를 해오고 등우가 불을 지피자 유수는 부뚜막에 대고 옷을 말렸다. 이날 풍이는 다시 보리밥과 나물을 올려 요기하도록 하였다. 힘든 과정의 연속이었다.
  유수는 호타하(虖沱河)를 건너 신도(信都)에 이르렀을 때 풍이로 하여금 따로 하간(河閒)의 병사를 모으게 하였다. 풍이는 돌아와 편장군(偏將軍)에 임명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왕랑을 격파한 이후에는 응후(應侯)로 봉해졌다.
 

대수장군(大樹將軍) 풍이
  풍이는 사람됨이 겸손하여 자신의 공적을 자랑하지 않았다. 그는 적을 맞아 싸우는 것이 아니면 항상 다른 진영의 뒤에서 행군했다. 또한, 행군 중에 다른 장수들을 만나면 늘 수레를 한쪽으로 끌어 길을 비켜주었다. 이런 이유로 도로 위에서의 작은 다툼이 큰 싸움으로 번지는 일은 없었다. 풍이가 지휘하는 군대는 나아가고 물러섬에 항상 규율이 있어서 잘 정비된 군대라는 평판이 나 있었다. 휴식시간에 여러 장군들이 모여 자신의 공을 자랑할 때에도 풍이는 항상 홀로 나무 아래에 앉았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대수장군(大樹將軍)이라고 불렀다.
  한단의 왕랑을 격파한 이후에 유수군의 재배치가 진행되었다. 이때 병사들이 모두 대수장군에게 소속하고 싶다고 하니 유수는 풍이를 더욱 중히 여겼다. 병사들이 풍이의 휘하로 가고 싶다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공적을 자랑하지 않는 풍이를 상관으로 하면 최소한 자신의 공적을 가로채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풍이는 철경(鐵脛)을 북평(北平)에서 격파하고, 흉노(匈奴)의 우림흡돈왕(于林闟頓王)에게 항복을 받아냈다. 이후 다시 유수를 수행하여 하북을 평정하였다.
  그 때 경시제는 무음왕(舞陰王) 이질(李軼), 늠구왕(廩丘王) 전립(田立), 대사마(大司馬) 주유(朱鮪)10, 백호공(白虎公) 진교(陳僑)로 하여금 30만에 달하는 병사를 이끌고 하남태수인 무발(武勃)과 함께 낙양을 지키게 하였다. 유수는 장차 북쪽으로 연(燕), 조(趙)를 순행하려고 하였다. 이미 자신의 세력권에 포함된 위군(魏郡), 하내(河內)의 수비는 중요한 과업이었다. 이 지역은 천하대란의 혼란한 정세에서도 화를 피한 곳으로 창고 또한 충실한 곳이었다. 유수는 구순(寇恂)을 하내태수로 임명하고, 풍이를 맹진(孟津)장군으로 삼아 수비에 만전을 기하도록 했다. 풍이는 이질에게 서찰을 보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가 듣건대 밝은 거울로 모습을 비추고 지나간 일로 지금을 알 수 있다 하였습니다.  옛날 미자(微子)11는 은(殷)나라를 떠나 주(周)나라로 들어갔으며 항백(項伯)12은 초나라를 등지고 한나라에 귀의하였고 주발(周勃)13은 대왕(代王)을 맞아들이고 소제(少帝)를 내쳤으며 곽광(霍光)14은 효선(孝宣)을 받들고 창읍(昌邑)을 폐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하늘을 두려워하고 명을 알았으며 존망의 기미를 보고 움직인 사람들입니다. 그런 까닭에 한 때에 성공하고 만세의 위업을 드리울 수 있었습니다. 설사 장안(長安, 경시제)이 아직도 도울만하다고 하여도 세월이 흘러가면 왕(이질)과의 관계가 소원해져서 가까워지기 힘드니 그렇게 되면 그대가 어떻게 한 모퉁이를 점거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장안이 어지러이 무너지고 적미(赤眉)는 접근해오며 왕후들이 난을 일으키고 대신들이 괴리되며 기강이 끊어지고 사방이 붕괴되며 유씨(劉氏)가 아닌 다른 성을 가진 종족들이 다투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소왕(蕭王, 유수)께서 눈서리를 맞으면서 하북을 다스리고 계신 것입니다. 바야흐로 지금 뛰어난 영웅들이 구름처럼 모이고 백성들이 바람에 쏠리듯 기대오고 있으니 빈(邠)과 기(岐)15가 주(周)를 사모했다고 하여도 지금의 상황과 비유될 수가 없습니다. 그대가 진실로 승패를 깨닫고 큰 계책을 정하여 고인의 공적을 거울삼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을 수 있는 순간이 바로 지금입니다. 만약 용맹스러운 장수와 정예병이 성을 포위하게 된다면 그 때 가서 후회하게 되더라도 이미 돌이킬 수 없을 것입니다.”
  이질은 낙양성 방어의 한 축을 맡은 인물로 유수와도 친분이 없지 않았다. 그는 유연이 군사를 일으킬 당시부터 함께한 까닭에 유수 형제와 사이가 가까웠다. 그런데 경시제가 즉위한 이후에 이질은 주유와 함께 유연을 죽이라고 경시제에게 권고하였다. 이질의 결정적 배신으로 유연은 죽임을 당하고 유수는 그런 형의 죽음에 제대로 된 애도를 표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사태가 변하여 장안의 경시제는 적미의 공격 앞에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게 되었고, 반면에 유수는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그로서는 유수에게 투항하고자 했으나 유연을 죽게 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투항을 권고하는 풍이의 편지를 받고 이질은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내게 된다.
  “저는 본래 소왕(유수)과 더불어 생사의 약속을 맺고 한나라 부흥과 흥망의 계책을 함께 하기로 하였습니다. 지금 저는 낙양을 지키고 장군은 맹진을 다스리고 있으니 함께 중요한 요새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이는 천재일우(千載一遇)의 좋은 기회로 우리 두 사람이 힘을 합치면 안 될 일이 없을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소왕에게 저의 우둔한 계책을 진언하여 나라와 백성을 보위하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이질의 편지를 받고 풍이는 북쪽의 천정관(天井關, 산서성 晉城縣에 있는 관문)을 공략하고 상당(上黨, 산서성 長子縣)의 두 개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또한 풍이는 남쪽의 하남(河南), 성고(成皐, 하남성 汜水縣)의 동쪽 13개 현을 평정하고 여러 주둔군들을 모두 평정하니 항복하는 자가 10여 만 명에 달했다. 이 모두는 이질의 암묵적인 용인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때 무발(武勃)이 만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유수군을 공격했다. 풍이는 하수를 건너 사향(士鄕) 아래에서 무발군을 대파하고 무발의 목을 베고 적병 오천여 명을 죽였다. 그러나 이질이 성문을 굳게 닫고 무발의 군대를 구원하지 않았다. 풍이는 이질이 신의를 드러낸 것으로 여기고 사실대로 유수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유수는 이질을 믿을 수 없었다. 이질의 처신을 보면 그는 정치적인 감각이 있는 인물이기는 했다. 그러나 최소한의 신의마저 저버린 사람을 신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유수가 풍이에게 다음과 같이 회답했다.
  “이질은 속이는 일이 많으니 믿을 수 없소. 다른 사람들은 그가 요령 피우는 것을 알 수 없으니 이제 그의 서신을 각 군수와 군위(郡尉)들에게 전달하여 마땅히 경계하고 대비하게 하시오.”
  이렇게 하여 이질의 서신은 유수에 의해 폭로되었다. 유수의 폭로로 이질의 배신을 알게된 주유는 사람을 시켜 그를 죽여 버렸다. 이 일로 해서 성안이 혼란해져 항복하는 사람이 많았다.
  한편, 하남 방어를 구순과 풍이에 맡긴 유수는 북쪽의 정벌에 나서게 되었다. 주유는 주력이 빠진 하남 공략에 들어갔다. 주유는 토난(討難)장군 소무(蘇茂)에게 만여 명의 병력을 주어 온(溫) 땅을 공격하게 하고 그 자신은 수만 명을 이끌고 평음(平陰, 하남성 맹진현의 동쪽)을 공격하여 하남을 협공하였다. 풍이와 구순은 주유의 공격을 적절하게 방어하였다. 이들은 합세하여 소무를 격파하였고, 하수를 건너 주유를 공격했다. 주력이 빠진 하남을 손쉽게 접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주유의 의도는 난관에 봉착했다. 게다가 풍이는 주유를 낙양까지 추격하여 성을 한 바퀴 돌면서 무력시위를 하고 난 후 돌아왔다.(다음 편에 계속)
 
 

01 萬民英(明) 原著, 『圖解 星學大成 第一部: 星曜神煞』, 北京; 華齡出版社, 2009, p.425.
02 『춘추(春秋)』를 해설한 책. 중국 전국 시대 좌구명(左丘明)이 지었다고 하나 명확하지 않으며, 『곡량전(穀梁傳)』, 『공양전(公羊傳)』과 함께 춘추삼전(春秋三傳)의 하나이다. 지금 전해지는 것은 한나라 때에 유흠(劉歆)이 편찬한 것으로, 모두 30권으로 되어 있다.
03 『손자병법』은 고대 중국의 병법서(兵法書)이다. 원본은 춘추 시대 오나라 왕 합려를 섬기던 손무(孫武)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손자병법』은 조조가 원본을 요약하고 해석을 붙인 『위무주손자(魏武註孫子)』 13편이다.
04 연(掾)은 하급관리. 연리(掾吏)는 관아에서 일을 돕는 하급관리를 통칭하는데 아전(衙前) 또는 서리(胥吏)를 뜻한다.
05 문서·장부(帳簿)를 맡은 한대(漢代) 이후의 벼슬.
06 한대(漢代) 이래로 관아에서 장관의 업무를 보좌하던 벼슬이름.
07 상복은 입지 아니하나 상제와 같은 마음으로 말과 행동을 삼가고 조심함.
08 하(夏)나라의 걸왕(桀王)과 은(殷)나라의 주왕(紂王)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폭군의 대명사이다.
09 탕은 은나라를 세운 성탕(成湯), 무는 주(周)나라를 세운 무왕(武王)을 의미한다.
10 회양(淮陽, 현재 하남성 회양) 사람. 왕망의 신나라 말기에 왕광(王匡)과 더불어 녹림산(綠林山)에서 기병(起兵)하였다. 22년 군대를 나누어 남양을 공격하면서 신시병(新市兵)이라 칭했다. 경시제가 즉위하고 난 후 대사마에 임명되었다. 이질(李軼)과 함께 관동(關東)을 진압하고 낙양을 지키며, 당시 경시제와 다른 독자세력화의 길을 걷던 유수에 대항했다. 25년 유수에 항복하여 평적(平狄)장군에 임명되고 부구후(扶溝侯)에 봉해졌다. 후에 소부(少府, 궁중의 의복과 寶貨 · 음식을 관장)에 임명되었고, 그의 작위는 후대까지 이어졌다.
11 미자(微子). 은(殷)나라 주왕(紂王)의 서형(庶兄). 주왕에게 여러 차례 간(諫)하였으나 듣지 않으니 마침내 은나를 떠났다.
12 항백(?-BCE 192). 항우(項羽)의 숙부로, 이름은 전(纏)이고, 백(伯)은 자다. 항우(項羽)를 따라 병사를 일으켰다. 유방(劉邦)이 함양(咸陽)에 들어온 뒤 범증(范增)의 계책에 따라 홍문연(鴻門宴)에서 항장(項莊)이 검무(劍舞)를 추면서 유방(劉邦)을 죽이려고 했다. 그가 전날 밤에 이 사실을 장량에게 알려주고, 당일 날 항장과 함께 춤을 추면서 몸으로 막아 유방이 달아나도록 도왔다. 한나라 건국 이후 사양후(射陽侯)에 봉해지고, 유씨 성을 받았다.
13 주발(周勃). 한(漢) 고조(高祖)의 공신(功臣). 고조를 도와 천하를 평정하였고, 여씨(呂氏) 일가를 죽이고 한실(漢室)을 편안하게 하여, 벼슬이 승상(承相)에까지 올랐음.
14 곽광(霍光, ?-BCE 68). 전한(前漢)의 정치가. 무제(武帝) 사후 소제를 보필, 정사를 집행했다. 소제의 형인 연왕 단의 반란을 기회로 상관걸 등 정적을 타도, 실권을 장악하였다. 소제 사후 창읍왕의 제위를 박탈하고, 선제(宣帝)를 즉위하게 하였다.
15 빈(邠)은 주(周)나라의 서울이며, 기(岐)는 섬서성 기산현(岐山縣)에 있는 산으로 주나라의 발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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