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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5년(2015)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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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다시 읽기 : 도주님의 선조

도주님의 선조
 
 
글 대순종교문화연구소
 
 
도주의 부친은 휘가 용모(鏞模)이고 자함은 순필(順弼)이고 호는 복우(復宇)이며 조부는 홍문관정자(弘文舘正字)로 있다가 을사년의 국운이 기울어감에 통탄한 나머지 피를 토하고 분사하였도다.(교운 2장 2절)
 
 
  15세에 봉천명(奉天命)하시기 전부터 도주님은 비록 어린 나이셨지만 구국제민(救國濟民)의 뜻을 품고 계셨다고 전해진다. 도주님의 조부와 부친께서도 구국(救國)의 정신이 투철했던 분들이셨고, 가문 역시 대대로 충절의 기상이 드높았기에, 도주님 50년 공부의 계기가 되는 구세제민의 대지(大志)를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가문의 충절 정신을 알아보는 것도 하나의 방편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번 호에서는 조부(祖父)와 부친(父親)의 배일사상(排日思想)과 이에 더하여 도주님께서 태어나신 함안 조씨 가문의 충절을 그 선조들의 삶을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
 
▲ 도주님 조부 공덕비(함안군회문마을 입구 좌측에 위치)

 

부조전래의 배일사상
  『대순진리회요람』은 도주님의 배일(排日) 사상이 부조전래(父祖傳來), 즉 조부와 부친을 통해 전하여진 것이라 하면서01 조부와 부친의 배일사상 배경에 대해서는 간략히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조부(祖父)[諱 瑩奎]는 배일(排日) 사상가(思想家)로서 민영환(閔泳煥) 등과 교우(交友)하며 활약(活躍)하시다가 을사보호(乙巳保護) 조약(條約)에 분개(憤慨)하사 심화(心火)로 토혈(吐血) 서거(逝去)하시고 부친(父親)[諱 鏞模]은 조부의 유의(遺意)를 승봉(承奉)하여 그 아우[諱 鏞懿, 鏞瑞 二人]와 반일운동(反日運動)에 활약(活躍)하시다.02
 
 
  도주님에게 이어진 배일사상의 시작은 조부인 함안 조씨 27대 손인 취당공(聚堂公)[휘 영규(瑩奎): 1861∼1905]이시다. 1861[철종 12]년에 태어나셨고 1891[고종 28]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8품 통사랑(通仕郎)의 품계와 홍문관 정자(正字) 겸 춘추관 승정원 주서(主書)를 제수받으셨다.03  조부께서 역임하신 관직인 홍문관 정자는 조선시대 홍문관(弘文館)04에 둔 정구품(正九品) 관직으로 그 직급은 낮지만 청요(淸要)의 직(職)으로 명성이 높았다. 청요의 직이란 청직과 요직을 합한 말이다. 청직(淸職)은 깨끗한 직책이라는 뜻으로서 당대의 깨어있는 선비들이 권력에 연연하지 않고 공평무사하게 일처리를 해 나가는 직책을 의미하였는데 주로 홍문관 벼슬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였다. 요직(要職)이란 말 그대로 중요한 직책, 즉 권력의 핵심에 서 있는 실세를 의미한다. 실제로 홍문관은 학술적인 관부이자 언론삼사(言論三司)의 하나로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기에, 조선시대의 정승·판서로서 홍문관을 거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홍문관의 관원이 되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었으니, 지제교(知製敎)05가 될 만한 문장과 경연관(經筵官)06이 될 정도의 학문과 인격이 있어야 함은 물론 가문에 허물이 없어야 했고, 우선 홍문록07에 오른 후 홍문관 관직에 빈자리가 생기면 다시 투표로써 뽑혀야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그 선발이 까다로운 만큼 일단 홍문관에 들어가기만 하면 향후의 출세는 충분히 보장되었다.
  조부께서는 이처럼 출세가도가 보장된 관직에 계셨음에도,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분개하여 민영환(閔泳煥: 1861∼1905), 이상설(李相卨: 1870∼1917) 등과 함께 나라의 위태함을 상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분격함을 이기지 못하여 심화(心火)로 토혈(吐血)하고 낙향하셨으며, 그해 11월 45세의 나이로 서거(逝去)하셨다.08
  도주님의 부친은 휘가 용모(鏞模)이고 자함은 순필(順弼)이고 호는 복우(復宇)인데, 1877[고종 14]년 회문리에서 태어났으며 천성이 지혜롭고 총명하며 재주가 뛰어나셨다고 전해진다. 일찍이 문예로 그 명성이 높았으나 아버님, 즉 도주님의 조부께서 1905년 순국하는 일을 당함에 학문을 그만두고 구국의 뜻을 세워 통영의 통제사와 방도를 모색하였으되, 길이 보이지 않고 일제로부터의 위협이 급박해지자 두 아우의 가족들과 함께 만주에 들어가서 의병장 이진룡(李鎭龍) 등과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하셨다.09
  토혈서거의 순국까지 이른 조부의 생애와 독립운동을 위한 망명을 결행하는 부친의 구국정신을 통해, 도주님 가문의 배일사상이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지극한 충(忠)의 정신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가문의 충절이 우연히 조부에게서 비롯된 것은 아닐 터이기에, 도주님의 선조들에 대해서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10
 
 
시조 전설
  조씨의 조상을 상고(詳考)하여 보면 대략 4,600여 년 전의 오제(五帝) 중 한 분이었던 전욱고양씨(顓頊高陽氏)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시절에는 하늘과 땅이 가까웠고 그 사이에 통하는 길이 있어 신과 인간이 같이 어울려 지내고 있었는데, 주(周)나라의 좌구명(左丘明)이 쓴 역사서인 『국어(國語)』에 따르면, 전욱고양씨가 하늘과 땅의 간격을 크게 벌리고 왕래하는 길을 단절시켜 신과 사람을 구분시켰다고 한다. 이것을 일러 절지천통(絶地天通)이라고 하며,11 이로써 신은 이따금 인간세상으로 내려올 수 있다 하더라도 인간은 하늘로 오를 수 없게 되어 드디어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는 분리되었다고 전해진다.
  상제님께서 펼치신 신인조화(神人調化)의 종지로 신봉어인(神封於人)의 도수를 완성하셔서 신계와 인계를 통일(統一) 조화(調化)하시는 일을 맡으신 분이 도주님이라는 사실에 비추어본다면, 조씨의 시조가 신계와 인계를 분리하였다고 전해지는 전욱고양씨라는 사실은 도주님이 조성(趙姓)으로 오신 것이 결자해지(結者解之)를 위한 원시반본의 이치와 연관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조씨의 시조와 관련된 다음 전설도 도주님과 관련해 보면 신비하다. 전욱의 후손 중에 여수(女修)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어느 날 베를 짜다 우연히 제비가 떨어뜨린 알을 먹고 잉태하여 한 사내아이를 낳았으니, 이름이 대업(大業)이며 그의 아들 대비(大費)는 순(舜)을 도와 새와 짐승을 조련하였으며 우(禹)와 함께 물을 다스렸다는 일화인데 결국 이 이야기는 제비[燕]가 조씨를 상징함을 알려준다. 제비는 을(鳦)로서 파자하면 곧 ‘조을(鳥乙)’이니, 조씨의 시조 설화에 도주님을 상징하는 조을(조씨 을미생)의 이치가 있음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12
  그 후 수백 년이 지나서 주(周)나라 목왕(穆王: 재위 기원전 976∼922) 때에 이르면 그 자손 중에 조보(造父)란 분이 나타난다. 조보는 여덟 필의 준마를 얻어 목왕에게 바치고 그의 마부가 되었다가 목왕의 서쪽지방 순수(巡狩: 임금이 나라 안을 두루 살피며 돌아다니던 일)에 참여하였다. 그때 서(徐)나라(지금의 강소성 사홍현 남쪽에 있었음)의 언왕(偃王)이 난을 일으키자 천리 길을 쉬지 않고 말을 몰아 목왕이 하루 만에 돌아오게 함으로써 난리 평정에 공을 세우게 되었다.13 목왕은 조보의 공을 높이 사서 그에게 조성(趙城)14을 봉읍으로 하사하였다. 이때부터 조보의 가족들은 성(城)의 이름을 따서 모두 ‘조씨(趙氏)’로 불리게 되었으며, 조성(趙姓)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함안 조씨의 시조는 후당 때 고려로 건너 온 충장공(忠壯公) 조정(趙鼎)
  후당(後唐)15 때 조씨의 후손 중 조정(趙鼎)이라는 분이 있었다. 이분은 당시 혼란한 중국 정세를 피하여 두 동생 부(釜)와 당(當), 그리고 절강(浙江) 사람인 장길(張吉)과 함께 한반도로 건너왔다.
  그 시절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의 왕건(王建)과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서로 자웅을 겨루고 있었다. 이때 조정은 고려에 귀화하여 930년에 고창성(古昌城: 지금의 안동)에서 견훤을 대파하고 동경(東京: 지금의 경주)의 항복을 이끌어냄으로써 고려의 후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우게 된다. 이에 왕건은 조정을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으로 삼았고, 조정은 고려의 대장군 원윤(元尹)16을 역임하며 충장공(忠壯公)이라는 시호(諡號)도 받았다. 그 후손들이 이 분을 시조로 하고 본관을 함안(咸安)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나가니, 함안 조씨는 이로부터 시작되었다.17 함안 조씨가 정(鼎)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은 도주님의 호인 정산(鼎山)과 관련하여 사뭇 암시하는 바가 신비하다 할 것이다.  
 
 
함안 조씨 10대 손 조열 선생은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함
  함안 조씨 10대 손은 전서공(典書公) 조열(趙悅)이다. 이분이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내고 있을 때인 고려 공양왕 3년, 이성계가 북방의 적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원주에 진을 친 일이 있었다. 조열은 그가 반역을 일으킬 것을 미리 알고는 “이성계 부자(父子)가 원주에 진을 치고 말로는 적을 토벌한다고 하나 그 뜻은 혁명을 계획함이니 속히 그 병권을 회수하여 사직을 보존하소서.”라고 3일에 걸쳐 상소하였다. 그러나 왕은 이성계가 두려워 그 상소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조열을 함안으로 쫓아냈다.
  불과 1년 뒤인 공양왕 4년(1392), 이성계가 공양왕을 폐하고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자 조열은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고 길재(吉再, 1353∼1419) 등과 더불어 두문동(杜門洞)18에 은거하여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였다. 훗날 공양왕이 살해당하자 그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지내고 3년간 복상(服喪)하였으며, 조선 조정에서 선생에게 고려 시절 관직인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 공조전서의 벼슬을 내렸음에도 받지 않고 끝까지 충절(忠節)을 지켰다.
 
▲ 조열 신도비각
 
 
함안 조씨 12대 손 조려 선생은 생육신 중 한 분
  조열의 손자는 생육신 중 한 분으로 널리 알려진 조려[趙旅, 1420∼1489, 함안 조씨 12대 손, 호 어계(漁溪)]이다.
  단종(조선 제6대 임금, 1441∼1457)이 1455년 삼촌인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찬탈 당하자, 당시 태학(太學: 성균관)에 있던 조려는 낙향하여 낙동강 가의 백이산(伯夷山)에 은거해 버렸다. 원래 이 산의 이름은 서산(西山)이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조려의 충절을 기려 그 옛날 충신이었던 백이와 숙제의 이름을 빌려 백이산으로 바꾸어 불렀다고 한다.19
  1456년 6월에는 집현전 학사 출신들인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들이 단종을 복위시키려다 실패하여 죽임을 당했고, 다음 해 6월에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로 유배되었다.
 
▲ 조려 등 생육신을 배향한 서산서원. 뒤에 보이는 산이 백이산이다. 경남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 소재.
 

  『영월읍지(寧越邑誌)』에 실린 ‘호배도강전설(虎背渡江傳說)’에 따르면, 그때 조려는 매월 세 번씩 찾아가서 단종께 문안드렸다고 한다. 조려가 살았던 함안은 영월에서 무려 500여 리가 훨씬 넘게 떨어진 곳이었기에 한 달에 세 번 인사를 한다는 것은 상상을 뛰어넘는 일이었다. 그 무렵 순흥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금성대군이 또다시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자 세조는 1457년 10월 금성대군과 단종의 장인 송현수(宋玹壽)를 죽이고 단종에게 사약을 내렸다. 이로써 단종은 17세의 나이로 한 많은 생을 마치게 되었다.20 조려는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갔는데, 그 도중에 강물이 크게 불어 있었고 건너갈 배는 없었다.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고는 의관을 등에 지고 물에 뛰어들려고 할 때, 문득 누가 뒤에서 옷을 당기기에 돌아보니 큰 호랑이 한 마리가 있었다. 조려는 놀라지 않고 “임금의 상(喪)을 당하여 먼 길을 달려왔는데 이 강을 건널 수 없구나. 내가 무사히 이 강을 건너 임금의 시신을 염습하면 다행이지만, 만약 건너지 못하면 푸른 물에 귀신이 될 것인데, 너는 어찌 나를 잡아당기는고!” 하였더니, 문득 호랑이가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는 것이었다. 그 뜻을 짐작하고 호랑이 등에 업혔더니 과연 호랑이가 강을 건너다 주었다. 드디어 단종의 시신이 버려진 곳에 도착해서 통곡·사배하고 옥체를 수렴하여 문을 나오니 기다리던 호랑이가 다시 강을 건너다 주었다고 한다. 사실 단종의 시신을 염습하여 묻고 장례를 치른 사람은 당시 영월 호장(戶長)이었던 엄흥도(嚴興道)라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조려의 전설이 따로 영월에 구전(口傳)되고 있는 것은, 영월에 살았던 사람들이 단종을 향한 조려의 충절에 감명 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유생 신만원(辛萬元) 등은 1703년에 조려의 충절을 기려야 한다고 조정에 상소하였고, 이에 따라 조려는 김시습(金時習), 원호(元昊), 이맹전(李孟專), 성담수(成聃壽), 남효온(南孝溫) 등 다른 생육신과 더불어 함안의 서산서원(西山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21 또한 정조는 조려에게 이조판서를 증직(贈職)하고 정절공(貞節公)이란 시호도 내려주었다.
 
▲ 조려를 기리는 사적비. 영월에서 청령포로 들어가는 흰재 고개에 있다. 호랑이가 조려를 태워 강을 건너다 주었다는 전설 때문에, 사적비는 호랑이 조각상 등에 세워졌다.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의병장으로 활약한 조방(趙垹)
  조려의 손자는 의금부경력(義禁府經歷)의 벼슬을 지낸 참의공(叅議公) 조연(趙淵, 1489∼1564, 함안 조씨 14대 손)이며, 곧 함안 조씨 내헌공파(耐軒公派)의 파시조(派始祖)이다.22
  조연의 손자는 두암공(斗巖公) 조방(趙垹, 1557∼1638, 함안 조씨 16대 손)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집안 젊은이 100여 명과 함께 곽재우를 따라 창의(倡義)23하여 왜적을 물리친 분이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조방은 다시 곽재우와 함께 창녕 화왕산성을 지키고 적을 무찔렀다. 전쟁이 끝난 후 조방은 나라에 그 공을 알리지 않고 낙동강 우포의 말바위[두암(斗巖)]에 반구정(伴鷗亭)24을 지어 은거하고, 강 건너 마주 보이는 곽재우의 창암정(滄巖亭)을 수시로 왕래하면서 여러 벗들과 더불어 교우하였다. 돌아가신 후 조정에서는 가선대부 호조참판을 추증하였으며, 함안 조씨 75지파 중 두암공파(斗巖公派)의 파시조(派始祖)가 되었다.25 그리고 조방의 11대 손이 바로 도주님의 조부이시다.
 
▲ 낙동강 건너편에서 본 함안 반구정의 정취(사진 우측 표 아래)
 
 
구국제민의 창도이념
  이상 도주님의 선조들이 걸어왔던 삶의 궤적들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은 바로 충절(忠節)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분들의 나아가고 물러나는 기준에는 항상 나라와 임금·민족의 안위를 중시하는 충(忠)과 절개가 있었다. 대대로 이러한 정신을 실천하고 계승하여 온 가문에서 도주님께서 탄강하신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상제님께서는 충효열이 없어 천하가 병들었다고 하시면서 충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셨다면 도주님께서는 이 뜻을 받드셔서 구국제민으로 창도이념을 삼으셨다. 이에 대해 도전님께서는 “상제님께서도 구국정신에서 도를 펴셨고[宣道] 도주님께서도 구국정신에서 창도하셨다.”(음 82년 1월 3일), “도주님의 구국제민의 창도이념을 명심하고”, “창도정신인 구국제민의 마음으로 국민운동에 참여하며”, “구국운동의 깊은 뜻을 따라 독립기념관 건립 모금운동에 도인들도 성의를 다하라.”26고 훈시하셨다. 결국 구국제민, 즉 충절의 정신은 수도의 이념이며 기초인 것이다. ‘나라에 충성하며’라는 도인의 수칙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도주님께서 대대로 충절의 정신을 계승하여 온 함안 조씨 문중에서 탄강하신 인연(因緣)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 충남 천안시 독립기념관의 ‘겨레의 탑’과 ‘태극기 한마당’
 
 

01 “一九○九년(기유년 十五세시) 四월에 부조전래(父祖傳來)의 배일사상(排日思想)을 품으신 도주(道主) 조정산(趙鼎山)께서는 ……” 『대순진리회요람』 (1969), pp.11-12.
02 『대순진리회요람』 (1969), p.11.
03 『함안 조씨 두암공파 세보』 권1 (1996), pp.173-174.
04 조선시대 궁중의 경서(經書)·사적(史籍)의 관리와 문한(文翰)의 처리 및 왕의 각종 자문에 응하는 일을 관장하던 관서. 사헌부·사간원과 더불어 삼사(三司)라 하였다. 옥당(玉堂)·옥서(玉署)·영각(瀛閣)·서서원(瑞書院)·청연각(淸燕閣)이라고도 하였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홍문관의 직무는 궁중의 경적(經籍) 관리와 문한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는 것이었다. 홍문관원은 모두 경연관을 겸했고, 부제학에서 부수찬까지는 지제교를 겸하였다. 그러나 실제적인 기능은 집현전과 같이 학술적인 성격과 정치적인 성격을 아울러 가졌다. 특히, 언론삼사의 하나로서 정치적으로 큰 비중을 가졌고, 학문적·문화적 사업에도 주도적인 구실을 한 기관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홍문관[弘文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05 조선시대 왕에게 교서(敎書) 등을 기초하여 바치는 일을 담당한 관직.[네이버 지식백과] 지제교[知製敎]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06 고려·조선시대 국왕의 학문 지도와 치도 강론을 위하여 설치한 경연의 관직. 학문과 인품이 탁월한 문관으로서 겸직시키는 것이 보통이었다. 경연관은 왕조시대에 가장 명예로운 벼슬로서 여러 가지 특별 대우를 받는 청화직(淸華職)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연관[經筵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07 홍문록이란 홍문관원의 후보로 결정된 사람 또는 홍문관원의 후보자로 간선하는 일을 가리키며, 홍문관·이조·정부(政府: 廟堂)의 투표[圈點]를 통해 다득점자의 순으로 결정되었다. 홍문관원에 결원이 생기면 홍문록 중에서 주의(注擬)·낙점(落點)된 사람으로 충원하므로 홍문관원이 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네이버 지식백과] 홍문관[弘文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08 『함안 조씨 두암공파 세보』 권1, pp.173-174.
09 『함안 조씨 두암공파 세보』 권1, pp.179-187.
10 전반적인 내용은 이미 『대순소식』 30⋅31호(2006)에서 『도주님께서 탄강하신 함안 조씨 문중(門中)의 계보(系譜) 탐구』라는 제목 하에 다루어졌으니, 기본적인 자료는 이를 인용하였다. 
11 전욱이 뒤를 이어 남정 중에게 명하여 하늘을 맡아 신을 모으게 하고, 화정 려에게 명하여 땅을 맡아 백성을 모으게 하여, 옛날처럼 신과 사람의 구분을 명확하게 하여 서로 침범하고 더럽히지 못하게 하였다. 이것을 일러 절지통천(땅의 백성과 하늘의 신들이 통하는 길을 끊음)이라 한다.(顓頊受之, 乃命南正重司天以屬神, 命火正黎司地以屬民, 使復舊常, 無相侵瀆, 是謂絶地天通) 『國語』 「楚語下」.
12 ‘조을’에 대한 설명은 「을미년(乙未年) 三」, 『대순회보』 168 (2015), pp.24-29 참조.
13 이에 대한 다른 설도 있다. 당시 천자였던 주나라의 목왕이 무력을 과시하기 위해, 섬서성(陝西城)과 산서성(山西城)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부족인 견융(犬戎)을 토벌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견융은 제후가 지켜야 할 의무를 나름대로 다 하고 있던 중이었으므로 이 일은 견융으로서는 매우 억울한 것이었고, 이러한 목왕의 처사에 불만을 품은 많은 제후들은 주나라를 천자국으로 섬기지 않고 등을 돌리게 되었다. 그때 서 언왕이 인의(仁義)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으므로, 인근의 제후 36개 나라가 서나라를 따르는 일이 생겼다. 주 목왕은 조보를 초(楚)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하여 서나라를 치도록 하였고, 서 언왕은 초나라의 공격에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서주(徐州) 팽성(彭城)으로 쫓겨 들어갔다고 한다.
14 산서성 조성현(趙城縣) 남부 지역.
15 923년∼936년 중국에 존속한 왕조. 돌궐 사타부 출신의 이극용(李克用)이 당(唐)나라에 봉사(奉事)하며 황소(黃巢)의 난 진압에 공을 세워 895년 진왕(晉王)으로 훈봉(勳封)을 받았는데, 아들 이존욱(李存勖)은 923년 후량(後梁: 907∼923)의 뒤를 이어 국호를 당(唐)이라 칭하고 낙양(洛陽)에 도읍하였다. 말제(末帝)에 이르러 거란과 결탁한 부장인 하동(河東) 절도사 석경당(石敬瑭), 즉 후진(後晉)의 고조(高祖)에 의하여 4대 13년 만에 멸망하였다.
16 고려 초기에 16관계 가운데 10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왕건이 고려를 창건한 직후에 태봉의 관계를 본떠서 919년에 두었다.
17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조씨(趙氏)는 210개의 본이 있다고 하였으나, 오늘날 계통이 자세히 전하는 본은 한양, 함안, 풍양, 배천, 옥천, 평양, 김제, 양주, 밀양, 순창 등 68개 정도이다. 이중 함안 조씨는 우리나라에서 한양 조씨 다음으로 번성한 조씨 가문이다.
18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반대한 고려의 유신(遺臣) 72인은 두문동[지금의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光德面) 광덕산(光德山) 서쪽]에 들어가 나오지 않고 끝까지 신왕조(新王朝)에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후일 정조(正祖)는 그 자리에 표절사(表節祠)를 세워 이들의 충절을 기렸다.
19 백이산(伯夷山) (한국지명유래집 경상편 지명, 2011. 12, 국토지리정보원)
20 단종은 태어난 지 이틀 만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6살 때는 할머니를, 10살 때는 할아버지(세종)를, 12살 때는 아버지(문종)을 잃었으며, 12살에 왕이 되었으나 15살 때 폐위 당하고 17살에 생을 마감한 비운의 왕이었다.
21 그간 서산서원에서는 조려의 후손들이 중심이 되어 매년 생육신들에 대한 제를 올려 왔으며, 최근에는 김시습 등 다른 생육신들의 후손들도 여기에 참여한다고 한다.
22 함안 조씨는 크게 21원파로 나뉘고 다시 그 속에 75지파로 나뉜다.
23 국난을 당하였을 때 나라를 위하여 의병을 일으킴.
24 원래의 반구정은 도주님의 13대 조(祖) 두암공께서 낙동강 우포 말바위 위에 처음 세웠으나 수해를 자주 입자 1858년 현재의 위치인 경남 함안군 대산면 장암리 용화산으로 옮기게 되었다. 1924년 여름에 도주님께서는 밀양 종남산 영성정(靈聖亭)에서 폐백도수(幣帛度數)를 다섯 달 동안 보시다가 이곳 반구정으로 옮겨 마치셨다. (교운 2장 30절 참조)
25 두암공파는 조방의 아들 조위도(趙衛道, 1579∼1656)를 파시조로 하여 우제공파(愚齊公派)라고 불리기도 한다.
26 『대순지침』 (1984),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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