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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지명 이야기 : 도주님의 봉천명과 봉천 지명 이야기

도주님의 봉천명과 봉천 지명 이야기
 
 
글 종단역사연구팀
 
 
1909년(기유년 15세시) 4월에 부조전래의 배일사상을 품으신 도주 조정산께서는 한일합방이 결정 단계에 있음을 개탄하시고 부친 숙부 등과 같이 만주 봉천 지방으로 망명하시어 동지들과 구국 운동에 활약하시다가 도력으로 구국제세할 뜻을 정하시고 입산공부를 하시다.(『대순진리회요람』)
 
 
  도주님께서 망명 가셨던 ‘만주 봉천’은 우리 수도인들에게는 매우 의미 깊은 곳입니다. 그래서 도주님의 망명지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지만 지역이 중국에 있다는 점과 확실한 증언자를 찾지 못해서 현재까지 그 정확한 위치가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만주 봉천’에 관해 수집된 자료들 중에서 몇 가지 내용을 다루어 보고자 합니다.
 
▲ 낙동강을 가로질러 만주행의 철도가 놓여있었던 남지철교
 
 
봉천행: 화약 공장과 산본 그리고 산부이들
  도주님 가족들이 만주로 망명을 가시게 된 데에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도주님의 장남이신 조준래 씨(작고)의 증언에 따르면, 도주님의 아버님과 두 동생은 망해가는 나라를 살리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대책을 논의하게 됩니다. 그리고 삼형제 분은 논의 끝에 무기를 생산하기로 결정하고 그 방법을 찾게 됩니다. 마침 당시 산본(山本)이라 불리는 일본 사람이 대부업(남에게 얼마간의 이자를 받기로 하고 돈을 빌려 주는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이 사람을 이용하여 자본을 마련하기로 하였습니다. 먼저, 도주님의 부친이 함안 조씨의 종손이었기 때문에 문중 땅을 담보로 큰돈을 빌리게 됩니다. 회문리 앞들에 있던 문중 땅을 담보로 내놓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마련한 자금으로 비밀리에 화약 공장을 만들었고, 화약을 이용해 무기를 생산하는 실험을 하다가 그만 화약이 터지는 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이 사고로 비밀리에 만들었던 화약 공장은 일본 헌병에게 탐지되었고, 삼형제 분에 대한 추적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나라를 구하는 일을 실행하지도 못하고 체포될 수 없다고 의견을 모은 그들은 일가족이 모두 만주로 망명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도주님 일가족이 기차를 타고 망명길에 오른 날은 기유(1909)년 4월 28일이었습니다.
  그후 삼형제분에게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한 산본이란 일본사람은 담보로 잡았던 함안 조씨 문중 땅을 차압하였고, 이때 회문리 앞들의 대부분이 산본의 소유로 넘어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산본’의 이름을 따서 그 들판을 ‘산부이들’이라고 불렀습니다.
 
▲ 회문리 산부이들 (출처: 네이버 위성지도)
 
▲ 회문마을 입구(2013년 4월)
 
 
진인에 대한 상제님의 공사
  도주님의 봉천명과 관련된 상제님의 공사로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1903년이 저물어가던 어느 날 상제님께서 김보경의 집에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신명을 시켜 진인(眞人)을 찾아보았더니, 이제 겨우 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지라. 내 일이 이렇게 더디구나!”라고 말씀하시며 한숨을 지으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김보경이 “말씀을 듣사온즉 우리들은 모두 무용지물이며, 또한 지금까지 헛되이 따랐습니다.”라며 토라지니 “때에도 그 때가 있고 사람 중에도 그 사람이 있노라.” 하시며 타이르셨습니다. 이 공사에서 진인은 1895년 을미생으로 탄강하시어 당시 9세였던 도주님을 가리킵니다.01
  또 도주님 일가족이 급히 망명길에 오르던 기유(1909)년 4월 28일에 상제님께서는 김보경을 비롯한 몇 종도들을 앞세우고 대전역 부근에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기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시고 “남아 15세면 호패를 찬다 하느니, 무슨 일을 못하리오.”라고 하셨습니다.02 이 공사는 15진주의 도수(度數)에 따라 당시 15세였던 도주님께서 천명을 받들 시기가 되었음을 알리신 것입니다.
 
▲ 일제 강점시기의 대전역
 
 
만주의 상황: 간도협약과 독립운동의 기지
  도주님께서 봉천명의 길을 떠난 1909년의 만주는 한인(조선인)들의 이주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시기였습니다. 그중 가장 많은 이주민이 있던 곳은 북간도 지역으로 당시 약 20만 명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간도는 보통 서간도, 북간도(또는 동간도)로 나눕니다. 백두산에서 동쪽으로 흘러가는 두만강을 경계로 북한과 중국이 나누어지는데 두만강 건너편의 중국 영토를 북간도라고 합니다. 북간도는 옌지(연길), 왕청, 훈춘 등의 지역을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위쪽에 위치한 하얼빈을 포함한 만주 일대의 한인 거주 지역까지 통칭해서 북간도라고 부르기도 합니다.03 백두산 서쪽으로 흐르는 압록강 건너편의 중국 영토는 서간도라고 합니다. 퉁화(통화), 류허(유하), 환린(환인), 단둥 지역 일대로 도주님 일가족은 이곳 서간도 지역 중 류허(유하) 지역에 정착하셨습니다. 서간도 일대에는 당시 한인 약 3만 명 정도가 이주하여 정착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간도 지역은 고려 이후 여진족의 점유지였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면서 큰 세력을 이룰 때 점령하였던 땅이었습니다. 이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모든 부족이 본토로 이동하면서 이 지역은 한족들이 살지 못하도록 봉금(封禁)지역으로 선포되었습니다. 그런데 주인 없는 땅으로 남아있던 이곳에 조선인들이 넘어가 살면서 조선(숙종 때)과 청나라 사이에 국경분쟁이 발생하였고, 백두산정계비를 세워 북간도 지역(토문강 오른쪽 지역)은 조선의 영토로 한다는 국경의 경계를 확정하기도 하였습니다. 대한제국시기인 1907년에 일제는 조선통감부 간도파출소를 북간도에 설치하고 헌병과 경찰을 들여보냈습니다. 그리고 1909년 북간도 지역을 청나라의 영토로 한다는 내용의 간도협약을 체결하면서 대륙 침략을 위한 여러 이권(남만주철도 부설권과 푸순탄광 개발 등)을 얻어냅니다. 이를 바탕으로 만주를 차지하면 간도도 다시 얻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일본은 잠깐 청나라에 간도를 맡긴다는 전략을 취한 것입니다.
 
▲ 통감부 간도 파출소
 

  북간도 지역에는 한인 거주민이 많았기 때문에 일본 군경이 약 20명 정도가 머물며 관리하고 있었지만 도주님이 정착하신 서간도 지역은 상대적으로 거주민이 적어서 일제의 관리가 소홀한 지역이었습니다. 일본 군경이 가끔 서간도 지역을 파견 나가는 형식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간도 지역에 대한 일제의 본격적인 침략은 1920년에 조선총독부로부터 300명의 경찰이 파견되면서부터였습니다. 도주님께서 1917년 귀국하시고 나서 3년 후의 일입니다. 이렇게 일제의 탄압이 미치지 않던 곳이었기 때문에 1910년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긴 후, 국내에서 활동하기 어려웠던 독립지사들은 국내와 가까운 이곳에 독립운동 기지를 마련하여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만주 봉천지방으로 망명하시어 동지들과 구국운동에 활약’하셨다는 도주님의 행적은 이런 상황에서 이루어진 활동이었습니다.04
 
 
봉천성과 봉천시(심양)
  과거 만주 지역에서 봉천(奉天)의 지명은 두 가지로 쓰였습니다. 광동성, 하남성, 감숙성 등처럼 큰 행정단위의 하나로 남만주 지역 일대를 가리키는 행정구역 이름으로 쓰인 ‘봉천성(奉天省)’이 하나이며, 이 봉천성의 중심 도시인 ‘봉천시’라는 도시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쓰인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먼저 성의 행정단위로 쓰인 경우를 살펴보면, 1907년을 기준으로 할 때 만주에는 크게 세 개의 성이 있었습니다. 가장 북쪽은 흑룡강성이며 그 아래에는 길림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동반도와 발해만을 끼고 있는 남만주 지역은 봉천성이었습니다. 이렇게 구분된 행정구역에서 북간도 지역은 길림성에 속하였고, 서간도 지역은 봉천성에 속하였습니다. 봉천성은 청나라 때 성경(盛京)성으로 불리다가 1907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봉천성으로 변경된 후 1930년대 초까지 쓰이다가 현재 랴오닝성(요령성)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현재의 랴오닝성은 과거 봉천성 지역과 경계에 약간 차이는 있지만 대략 일치합니다.
  도시로서의 봉천(瀋陽)은 원나라 이후로 심양이라 불리다가 청나라를 세운 누루하치가 이곳을 점령하고 수도로 삼은 곳입니다. 그후 성경이라 개칭하였습니다. 1644년 청 왕조가 중국 대륙을 정복하고 북경으로 천도한 뒤, 이곳은 제2의 수도가 되어 봉천부가 설치되었는데 이때부터 봉천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20년대 이후 봉천은 심양으로 명칭이 바뀌었다가 다시 봉천으로 바뀌는 부침을 겪었고, 현재는 심양(선양)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도주님께서 만주 봉천에 계셨다고(교운 2장 8절) 할 때, 봉천은 봉천성과 봉천시(심양) 중 어느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봉천시(심양)가 아니라 서간도 지역을 포함하고 있는 남만주 일대의 봉천성을 가리킵니다. 몇 년 전에 도주님의 친지들이 도주님께서 망명하여 정착하셨던 지역을 찾기 위해 답사를 갔습니다. 답사한 지역은 봉천이라 불렸던 심양이 아니라 서간도 일대의 통화시 북쪽 지역(옛 유하현) 일대로 과거 봉천성 지역이었던 곳입니다. 이 지역은 도주님 막내 숙부의 친지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이분들은 도주님의 망명지에서 살다가 주변으로 이사를 나왔다고 합니다. 이분들과 함께 답사를 하였지만 너무 오래전 일이고, 이사를 10번 이상 다녀서 안타깝게도 그 망명지를 찾을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이런 사실로 비추어 볼 때 ‘만주 봉천’은 ‘남만주의 봉천성’ 지역으로 이해하는 것이 무리가 없을 듯합니다.05
 
▲ 청말 ~ 중화민국 시기 행정구역. 봉천성과 심양시(봉천)
 
 
봉천승운(奉天承運)
  봉천(奉天)이라는 지명은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요? 봉천은 봉천승운(奉天承運)에서 나온 말입니다. 봉천승운이란 ‘천명에 따라 천운(하늘의 도수, 계획)을 계승하여 받든다’는 뜻입니다. 중국의 명나라와 청나라의 황제들은 스스로를 천자(하늘의 아들)라 하였고, 하늘의 명을 받들고 계승하여 백성을 통치하는 황제라며 ‘봉천승운황제’라 자칭하였습니다. 그래서 황제의 명령을 적은 조서를 내릴 때는 ‘봉천승운황제가 조서를 내린다’는 머리글로 시작하였습니다.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이 북경으로 수도를 옮긴 후 자신들의 발원지인 성경을 ‘봉천부’라 명명한 것도 ‘천명을 계승하여 받든다’는 민족적 사명의식의 표현이었습니다. 이렇게 ‘봉천’이라는 두 글자에는 ‘하늘을 받든다’는 단순한 해석을 넘어서는 깊은 의미가 채색되어 있습니다.
 
▲ 봉천승운으로 시작하는 청나라 세조(순치3년, 1645)의 조서
 
 
  상제님의 공사에 따라 이루어진 도주님의 봉천행에는 ‘천명에 따라 천운을 계승하여 받든다’는 ‘봉천승운’의 뜻이 온전히 담겨져 있습니다. “도주님께서 15세 시 진주(眞主)로 봉천명(奉天命)하시고, 만주 봉천에서 23세 시 득도하심은 태을주로 본령합리(本領合理: 근본이 되는 큰 줄기와 요점이 이치에 맞음)를 이루신 것”이라는 도전님 훈시는 도주님의 행적이 이미 하늘의 도수와 계획으로 정해져 있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유(1909)년 4월 28일의 ‘봉천명’은 도주님께서 상제님의 계시로 대순진리를 감오득도(感悟得道)하시기 위한 첫 행로였으며, 천부적 종통 계승을 향한 거대한 일보였습니다.
 
 

01 《대순회보》, 60호, 「청계탑: 봉서(封書)」 참조.
02 『증산의 생애와 사상』, p.265.
03 북간도는 현재 연변 조선족자치구 경계와 대략 일치합니다.
04 『대순진리회요람』, pp.11-12.
05 《대순회보》, 30호의 「성지순례: 만주 봉천(奉天)」 코너에는 봉천을 심양으로 보고 내용을 적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오류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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