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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5년(2015)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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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고 싶은 이야기 : 종교문화답사를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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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문화답사를 다녀와서
 
 

산동9 방면 선감 문순란

 
6월 18일
11:00, 참새골 방조제
  1920년대 말, 과학문물과 기계문명이 지금과 같이 발전하지 못한 시절에 저 멀리 쇠섬에서 뗏목에 바위와 돌을 싣고 와서 바닷물이 들락날락하는 상태에서 도주님께서 도인들과 같이 방조제를 쌓으셨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감회가 깊다. 그 방조제를 우리는 아주 쉽게 성큼성큼 걸어서 지나왔지만, 당시 도인들의 고행이 뼈저리게 느껴짐은 왜일까? 우리 도장을 지을 때가 생각난다. 도장을 지을 땐 크레인이 동원되었음에도 일이 힘들었다고 모두 얘기하는데, 우리들의 조상님들이 저기서 더 큰 고행을 했을 것이리라.
  1920년대 일제 치하에서 곡물을 모두 공출당한 뒤 어떻게 저런 힘든 공사를 이루셨을까? 상제님의 유지를 받드는 일이니 해낼 수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한복을 입고서 돌과 바위를 나르고 쌓았던 모습도 상상해본다. 진흙에 빠진 도인들을 보시는 도주님의 가슴은 어떠하셨을까? 공사의 현장을 직접 발로 딛고 서 있는 우리는 도주님의 토지해원공사와 제민사업을 한 번 더 생각하며, 지금 수도인들에게 그 느낌을 잘 교화하고 전달하여 뜻을 받들 수 있도록 노력을 쏟아야 하지 않을까 되새겨 본다.
 
▲ 참새골 방조제
 

13:00, 창기 방조제
  창기 방조제는 참새골 방조제와는 달리 미완성된 방조제라고 한다. 아무렇게나 흐트러진 불규칙한 모양의 돌들이 도주님과 도인들이 바닷물을 막아서 방조제를 만들고자 했던 돌들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위쪽으로 시멘트와 어우러진 규격에 맞게 다듬어진 바윗돌들은 도주님께서 방조제를 쌓다가 못 다 쌓으신 것을 후일에 완성한 것이라고 한다. 도주님의 토지해원과 제민사업을 저렇게 시작을 하셨으니 시작이 반이 되어 지금 새만금 같은 큰 공사가 진행되고 있지 않은가, 또한 도주님의 일이시니 세상만사에 시간을 다투어 이루어져 가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 보게 된다. 갑자기 영대에 계신 도주님의 용안이 떠오른다. 그 당시 공사를 받들 때 북한 사람들이 먹는다는 옥수수밥을 드시고 저 험한 일들을 하셨으니, 도주님의 눈이 그렇게 휑하시고 볼에 우물이 패이신 것이 이제 이해가 되는 듯하다. 그런 곳을 우리는 에어컨이 시원하게 작동되는 차량으로 천진난만하게 하하호호 웃으며 참 쉽게도 답사를 한다. 도주님께서 내려다보시면 철이 없다고 허허! 웃지 않으실까? 아니면 이곳까지 도의 흔적을 쫓아 공부하러 왔다고 기특하게 여기지는 않으실까? 어쨌든 상제님께서 과학문물을 지상에 남겨 놓겠다고 하신 공사 덕분에 우리는 사방팔방으로 뚫린 고속도로를 편안하게 달리며 성지순례를 할 수 있는 것이리라.
 
▲ 공사현장의 진업단 숙소 위치
 
▲ 창기 방조재
 
 
14:00, 우일재와 느락골
  도주님께서 만주 봉천에서 상제님의 계시로 태인을 찾아가시다가 풍랑을 만나 안면도에 내리게 되셨다. 도주님께서는 30여 명의 따르는 사람들과 같이 우일재를 마련하셨다고 『전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장소를 직접 발로 밟고 보니 실로 감개무량하다. 다만 우일재의 터에 우일재의 기왓장, 기둥, 주춧돌 하나라도 남아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논이 죽 늘어서 있었다고 느락골이라 명칭했다고 하는데, 과연 그 정도의 논이면 많이 늘어서 있다고 했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주님께서 일제 강점 하에서 독립운동가 집안이셨으니 일본인의 감시속에서 공사를 풀어 가시기가 얼마나 힘드셨을까? 또한, 중국에서 서해로 오시다가 풍랑을 만나 사력을 다해 안면도에 도착하셨던 상황과 도전님께서 일제 때에 징용되어 일본으로 끌려가셨다가 해방이 되어 본국으로 돌아오는 중 배가 폭파됨으로 표류하시다가 거북이 등에 업혀 육지로 무사히 귀환하신 것이 갑자기 아리아리하게 겹쳐진다. 천지를 구하시기가 이리도 힘이 드셨음을 글로서만 보다가 현지에 와서 보고 들으니 참으로 실감 난다. 독립운동 집안의 출신이라 숨 한번 제대로 못 쉬시면서 상제님의 공사를 풀어나가신 도주님을 생각하며 도주님과 따르던 도인들이 분주하게 다니셨을 것 같은 장소에서 감격하여 크게 한번 소리 지르고 높이 비상이라도 하듯 날갯짓을 해 본다. 도주님의 마음을 한 번 더 헤아려보며 수도생활을 되돌아봐야 할 듯하다. 에어컨 켜고서 기도를 모시고 히터를 켜놓고서 기도를 모시는 우리들, 과학문명을 맘껏 사용하면서 수도하는 상황이 옛일들과 대비되어 왠지 죄송스러워진다.
 
▲ 느락골 우일재 터의 위치
 
 
6월 19일
09:00, 내소사
  우일재 터에서 도주님의 흔적을 발견 못한 안타까움을 내소사에서 어느 정도 푸는 듯하다. 내소사의 보종각은 무극도장 도솔궁의 3층 목조건물을 여기로 옮겨 와서 지었다고 한다. 그 당시 화려하게 칠한 단청의 그림과 한옥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문화 해설사가 간단한 소개로 내소사를 설명해 주었는데 거기서 도주님의 기운이 소생해 있음을 발견했다. 특히 문화 해설사의 간단한 설명 속에서 상제님에 대한 내용이 나왔다는 게 참 인상적이었다.
  우일재를 갔다가 내소사를 오는 코스가 아주 자연스럽고 좋았다고 생각한다. 여명이 밝음으로 만물이 모습을 드러내듯이 자연스럽게 도주님의 흔적을 알고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내소사 보종각
 
 
11:00, 변산 굴바위
  오늘도 도주님의 발자취를 뒤밟아 본다. 인솔자인 오세기 교감이 첫 날부터 미끄러운 길이라고 조심조심 게발 모양으로 걸으라고 강조한 곳이 여기였구나 싶었지만, 걱정해준 것에 비해 그리 힘든 길은 아닌 듯하다. 변산 굴바위. 도주님께서 상제님으로부터 종통을 계시받으시고 여러 가지 공사를 풀어 가시던 장소 중 한 곳이다. 올라가는 길에 시누대가 많이 있었다. 시누대는 선비들의 집 뒤안이나 집안에 많이 심는 것으로 알고 있다. 대나무의 기운은 살기를 물리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부안 변산은 도주님께서 굴 바위에서 천지공사를 받들 줄 알았을까? 어찌 알고서 저렇게 통통한 시누대를 길러 놓았을까 생각해 본다. 변산 굴의 모양은 임산부 배 속에 든 태아의 모양으로 보이는데 제각각의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나 혼자의 생각으론 그곳에서 구천상제님의 도를 도주님께서 창도하시는 것과 태아가 잉태된 형태의 모습이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싶다. 그래서 조화의 신장인 육정신장을 응기시켜서 뇌성벽력이 크게 일어나고 산천이 진동하는 듯하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우리 4조는 답사 미션에 올릴 사진을 태아의 모양인 굴 앞에서 일부러 태아의 모양을 몸으로 만들어 보았다. 다들 날씬한 몸이 아닌지라 제법 힘들긴 했지만 의미는 있었던 것 같다. 구천상제님의 도를 빈틈없이 이어가시려는 도주님의 의지를 표현해 봄으로써 우리의 마음은 한결 더 뿌듯해짐을 느꼈다. 변산의 기운 때문에 험한 길을 오르셨는지, 일본의 눈을 피하기 위해 산에 오르셨는지, 그 이유를 알 순 없지만 도주님의 고행을 조금이나마 느끼며 발길을 돌렸다.
 
▲ 변산 굴바위
 
 
14:00, 경주이씨 재실
  경주이씨 재실에서 무극도장의 모습을 일부분이나마 실제로 만날 수 있었다. 내소사의 보종각 건물에서 도주님의 체취를 얼마나 맡고 싶었던가! 거기서 그나마 흔적조차 희미해진 우일재의 안타까움을 달랠 수 있었지만, 단청을 절에서 새로이 한 탓에 아쉬움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경주이씨 재실은 원래 무극도의 단청을 그대로 옮겨놓은 상태였다. 원래의 것보다 규모를 줄여서 재실을 건립해 놓았다지만 우리만큼은 도주님의 흔적을 확실히 확인할 수 있어 더없이 기뻤다.
 
▲ 경주이씨 재실
 

  여기서 잠시 무극도 도인들의 안타까웠던 마음을 헤아려 볼까 한다. 화평의 길을 봐서 모두 알겠지만 1941년에 종교 단체 해산령에 따라 도주님께서 무극도의 도인들을 해산시키셨을 때와 그 후 조선총독부에서 무극도 도장을 마음대로 해체할 때 도인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도주님께서, 그리고 도인들이 직접 지었을 법한 소중한 도장을 일본인들이 마음대로 매각하고 해체할 때, 그분들이 느꼈을 상실감은 우리가 우일재에서 기왓장 한 장 남겨지지 않은 모습을 보고 허탈함을 느낀 것에 비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으리라. 그 어려운 시절, 종교 단체만 보면 독립운동 한다고 눈에 쌍심지를 켜고서 경찰서로 끌고 가던 그 시절. 일본인들의 눈을 피해 가며 천지공사를 받들었던 도주님과 무극도 도인들의 안타까움이 서린 도장의 흔적을 보고 설움과 감동이 혼재한 미묘한 감정이 솟구쳤다. 아마 다른 도인들이 없었다면 아마 맘껏 목 놓아 울고 싶었을 것이다. 선사 시절, 본부도장 공사부터 금강산도장 공사까지 직접 참여하여 정성을 쏟았던 기억 때문에 마음에서부터 더 큰 공감이 느껴져 가슴이 아려오는 것 같다.
  여명이 밀려와 만물이 서서히 밝혀지는 것과 같이 도주님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옴으로써 내 마음도 서서히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아마 도주님의 흔적에서 묻어나는 구세제민의 큰 뜻을 조금이나마 헤아림으로써 느껴지는 감동의 물결이리라. 이러한 감동을 느끼게 해 준 이번 행사를 준비해주신 모든 분께 무척 감사하다는 말씀드리며, 다음 기회에도 꼭 함께 참석하자는 우리 4조 임원들의 뜻을 담아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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