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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6년(2016)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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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수(宿) 신명 : 유(柳) 별을 관장하는 유식(劉植) 신명

유(柳) 별을 관장하는 유식(劉植) 신명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유수(柳宿)
  유수는 28수 가운데 스물 네 번째 별자리이다. 그리고 정귀유성장익진(井鬼柳星張翼軫) 남방(西方) 주작(朱雀) 칠수(七宿) 가운데서 세 번째 별자리다. 이 별자리의 주된 별[主星]은 8개로 상징 동물은 장(獐) 즉 뿔 없는 노루이다. 유수의 속성(屬性)은 토(土)이며, 유수라는 이름은 별자리의 모습이 유협(柳叶, 버들잎)과 닮은 것에서 유래한다. 또한 주작(朱雀)의 부리로도 인식된다.
  유수를 의인화하여 남방유토장성군(南方柳土獐星君)이라 하는데 얼굴 생김새가 노루와 닮았고 쌍도(雙刀)가 무기라고 한다.01 
 
 
후한의 창업공신 유식
  유식(劉植, ?-26)은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 BCE 2-CE 58)를 도와 후한(後漢)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창업공신이다. 그의 자(字)는 백선(伯先)으로 거록군(鉅鹿郡) 창성현(昌城縣, 현재 하북성 束鹿 남쪽) 사람이다.
  유식의 생애는 전한(前漢)-신(新,8~23)-후한(後漢)으로 이어지는 혼란기에 걸쳐 있다. 이 혼란기 집권자는 시기별로 왕망-경시제(更始帝)02-광무제였다. 후한의 창업자 유수도 경시제 치하에서는 그의 장수였다. 유수는 경시제의 명령으로 하북을 평정해 가는 과정에서 유식과 조우(遭遇)하게 된다. 천신만고 끝에 하북 평정에 성공한 유수는 경시제와 대립하면서 궁극적으로는 후한을 건국하게 된다. 그런데 유수가 하북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위기의 순간을 맞게 된다. 그것은 왕랑의 봉기였다. 유수가 하북을 순시하던 중, 계(薊, 북경시 大興縣)에 이르렀을 때에 왕랑이 봉기했다. 왕랑은 한단에서 점을 치는 자였는데 혼란한 시대를 틈타 급속하게 세력을 확대하였다. 세력을 확대한 왕랑이 유수의 목에 거액의 현상금을 내걸게 되니 유수는 쫓기는 신세로 전락했다.03
  유수가 도망자의 신세로 전락할 정도로 하북의 많은 군현들이 왕랑에 호응했다. 이때 유식은 동생 유희(劉喜), 사촌형 유흠(劉歆)과 함께 종족과 빈객을 이끌고 수천 명의 병사를 모아 창성현을 지켜냈다. 유식이 창성현을 ‘지켜냈다’라고 한 것은 당시의 복잡했던 정세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당시의 많은 군현들이 왕랑에 호응하면서 외부에서 뿐만아니라 창성현 내부에서도 왕랑을 따르고자 하는 세력이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유식은 유수를 섬기고자 했고 자신들의 일족과 함께 내부의 적들을 우선적으로 제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식은 유수가 계(薊)로부터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문을 열고 유수군을 맞아들였다. 유수는 유식에게 효기(驍騎)장군, 유희와 유흠에게는 편장군(偏將軍)에 임명하고 이들을 모두 열후(列侯)로 봉하였다. 그때 진정왕(眞定王) 유양(劉揚, ?-26)04이 왕랑에게 항복했는데 병사가 10여 만에 이르렀다. 이에 유수가 유식을 파견해서 유양을 설득하게 하니 유양은 생각을 바꿨다.
  유식이 유양을 설득하는데 성공함으로서 유수로서는 가장 큰 위기의 순간에 상대편의 대군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게 되었다. 이때 유양의 세력은 10만이었는데 상대편의 10만이 아군의 10만이 되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유수에게는 20만의 병력이 편입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유양의 합류로 유수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고, 또한 반격을 위한 계기가 마련된 것이었다.
  이렇게 유양이 유수의 세력권으로 편입되자 유수는 진정 땅에 머무르면서 유양의 생질(甥姪)인 곽씨(郭氏)05와 혼인했다. 곽씨와의 혼인으로 유수와 유양 사이의 결속은 더욱 굳건해졌다. 이에 유양과 여러 장수들이 칠리(漆里)에 있는 곽씨 집에서 술자리가 마련되었고, 그 자리에서 유양은 축(筑)06을 두드리면서 즐거워하였다. 이후 군대를 정비한 유수는 왕랑의 본거지인 한단을 점령하고 하북을 평정하였다.
  하북을 평정하여 기반을 확립한 유수가 25년 호현(鄗縣, 하북성 栢鄕縣)에서 신하들의 추대로 제위에 올라 한의 부흥을 선언하니 그가 후한의 초대 황제인 광무제이다. 26(건무 2)년 광무제는 유식을 창성후(昌城侯)로 봉했다. 유식은 밀현(密縣)의 도적을 토벌하러 갔다가 싸우다 죽었는데, 그의 아들 유향(劉向)이 뒤를 이었다. 광무제는 유식의 동생 유희(劉喜)로 하여금 유식을 대신하도록 하면서 효기(驍騎)장군 관진후(觀津侯)에 봉했다. 유희가 죽자 광무제는 다시금 유식의 사촌형인 유흠을 효기장군 부양후(浮陽侯)에 봉했다. 유희와 유흠은 유식과 더불어 후한 초기의 정벌 전쟁에 참여했고 그러한 공로로 모두 자신들의 봉국(封國)을 후손들에게 전했다.
(유식 끝)
 
 

01 萬民英(明) 原著, 『圖解 星學大成 第一部: 星曜神煞』, 北京; 華齡出版社, 2009, p.447.
02 자(字)는 성공(聖公). 왕망 말년에 법을 어겨 평림(平林)으로 망명하였다가 22년 평림을 기반으로 한 반란이 일어나자 평림군(平林軍)에 투항했고 23년 호(號)를 경시장군(更始將軍)이라 했다. 이때 평림군의 추대로 황제가 되었는데 유수의 형인 유연(劉縯)의 위세와 명망을 시기하여 그를 죽였다. 한나라의 부흥을 바라는 민심을 업고 왕망을 몰아내고 장안을 차지하였으나 잘못된 정치로 반란이 빈발했다. 왕망 말기에 일어났던 반란세력이 가장 세력이 컸던 적미(赤眉)가 장안을 함락시킨 이후 처음에는 장사왕(長沙王)에 봉해졌으나 후에 사록(謝祿)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03 왕랑의 봉기와 관련한 사항은 「벽(壁) 별을 관장하는 왕패(王霸) 신명」, 『대순회보』 173호, pp.65-68 참조.
04 진정공왕(眞定恭王) 유보(劉普)의 아들로 그를 이어 진정왕이 되었다. 왕망(王莽)이 세운 신(新)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왕랑이 거병하여 세력을 확산하자 그에게 귀부하였는데 10여 만의 무리를 이끌었다. 광무제 유수의 장수 유식(劉植)의 설득으로 광무제에게 귀순했다. 광무제는 그의 조카인 곽씨(郭氏, 각주5 참조)와 혼인하여 이들의 결속력은 더욱 굳건해졌다. 이후 유양은 참언(讖言, 赤九之後 癭揚爲主)을 지어 대중을 선동하고 면만적(綿曼賊)과 통하면서 세력의 확대를 기도했다. 이에 광무제는 경순(耿純)을 파견하여 유양을 처단하였다. 광무제는 유양이 모반의 의사는 있었지만 구체적인 반란에 이르지는 않았음에도 그를 죽인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고 그의 아들 유득(劉得)을 진정왕으로 삼았다.
05 곽후(郭后, ?-52) 즉, 곽성통(郭聖通). 진정(眞定) 고(槀, 현재 河北省 槀城 西南) 사람. 광무제 유수의 첫 번째 황후로 부(父)는 곽창(郭昌), 모(母)는 진정공왕(眞定恭王) 유보(劉普)의 딸이었으므로 곽성통은 진정왕 유양(劉揚)의 조카이다. 24년 봄 유수는 진정왕 유양과 결탁(結託)하며 곽씨와 혼인하였다. 유수가 광무제로 즉위하면서 귀인(貴人)으로 봉해졌다. 25(건무 1)년 황자(皇子) 강(彊)을 낳고 다음 해 황후에 봉해졌다. 이후 광무제의 총애를 잃었는데, 44(건무 20)년 중산왕(中山王) 유보(劉輔)가 패왕(沛王)으로 봉해지면서 패태후(沛太后)로 봉해졌다가 52(건무 28)년 세상을 떠났다.
06 거문고 비슷한 현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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