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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지명 답사기 : 태인 배례밭

태인 배례밭
 
 
종단역사연구팀
 
  상제께서 각 처에서 정기를 뽑는 공사를 행하셨도다. 강산 정기를 뽑아 합치시려고 부모산(父母山)의 정기부터 공사를 보셨도다. “부모산은 전주 모악산(母岳山)과 순창(淳昌) 회문산(回文山)이니라. … 다음에 네 명당(明堂)의 정기를 종합하여야 하니라. 네 명당은 순창 회문산(淳昌回文山)의 오선위기형과 무안(務安) 승달산(僧達山)의 호승예불형(胡僧禮佛形)과 장성(長城) 손룡(巽龍)의 선녀직금형(仙女織錦形)과 태인(泰仁) 배례밭(拜禮田)의 군신봉조형(群臣奉詔形)이니라. … ” 하시고 상제께서 그 정기를 뽑으셨도다.(공사 3장 6절)
 
 
▲ 마을 입구에서 본 예동마을과 배례밭(2014년 8월 촬영)
 
 
  무신(1908)년 상제님께서는 각처에서 정기를 뽑아 합치는 공사를 행하시기 위해 부모산(父母山)의 정기부터 공사를 보신 후 네 명당(明堂)의 정기를 종합하셨다. 그 가운데 한 곳이 태인 배례밭의 군신봉조형이다. 명당이라 하면 누구나 한 번쯤은 가보고 싶어하는 곳이다. 더구나 상제님께서 행하신 공사에 쓰인 곳이니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배례밭의 군신봉조형에 대해 머릿속에서 잘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번 답사를 통해 알아보고자 길을 나섰다.
  태인 배례밭은 현재 정읍시 산내면 예덕리 예동마을에 있으며 상제님 재세 시 태인군에 속한 지역이었다. 태인(泰仁)이란 지명은 조선 시대의 태산현(泰山縣)과 인의현(仁義縣)에서 유래한다. 배례밭을 가기 위해 우선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에 있는 행단마을에 이르렀다. 행단마을은 옛날에 태산읍에 속했던 마을로 정읍시 산내면이나 순창으로 가기 위한 길목과도 같은 곳이다. 또한 상제님께서 전북 칠읍의 흉년을 없애시는 공사와 관련된 섬진강수력발전소[구 칠보수력발전소]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산내면은 주변 지역과 다르게 고지대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행단마을에서 산내면으로 들어가기 위해 호남정맥에 속한 장군봉의 구불구불한 산길을 타고 올라갔다. 행단마을에서 산내면 능교리까지 이르는 이 고갯길은 양(羊)의 창자처럼 99개의 굽이가 있다고 하여 구절재[九節峙]라 부르며, 모은(慕隱) 박잉걸(朴仍傑, 1676~?)이 처음 길을 닦았다고 한다.
  박잉걸은 정읍시 칠보면 백암리에 살았던 사람으로 어떤 연유로 해서 많은 자선사업을 하게 되었다. 그 동기는 그의 몸에 이상한 병을 갖고 있었을 때 아들을 만나러 가다가 산중에서 우연히 한 노승을 만나면서부터였다. 그 노승이 박잉걸에게 몸에 있는 병을 걱정하지 말라고 하며, 중생에게 적선적덕(積善積德)을 해야 하는데 우선 산길을 닦으라고 했다 한다. 이후 그는 개인 재산을 들여 태인 굴치의 고갯길은 물론 이곳 구절재의 산길을 닦았고, 또 태인읍에 석재로 만든 대각교를 설치하는 등 많은 자선사업을 하였다. 잠시 그분에 대한 고마움을 가져보며 굽은 길을 따라 계속 차로 달렸다.
  사방이 산으로 이루어져 있는 모습에 과연 이곳이 ‘산내(山內)’라는 것을 실감케 했다. 그리고 산이 깊고 험한 산내면을 보면서 산내면과 인접해 있는 순창의 일부 지역이 왜 피신처로 이용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산내면 소재지 사거리에 이르자, 이정표에 따라 좌회전해서 계속 들어가니 배례밭이 있는 예동(禮洞)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일반 시골 농촌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마을과 주변 산세를 보면서 이곳이 공사(公事)에 쓰였던 네 명당 중 한 곳이라는 생각에 왠지 새롭게 보였다.
 
▲ 정읍시 산내면 주변 일대 (출처: 다음지도)
 

  이곳은 상제님 재세 시 태인군 산내이변면(山內二邊面)의 지역이었다. 그런데 1914년 행정구역폐합에 따라 예동[상예·중예·하예]·홍문·원덕(元德)마을을 합하여 예덕리(禮德里)라 하고 정읍군 산내면에 편입되었다. 상예[상례]·하예[하례] 마을 뒤편에 군신봉조의 혈이 있다는 왕자산 자락이 있어 마을 주민이 항상 절을 올렸다. 그래서 예절 바른 사람들만이 마을에 살고 있다 하여 ‘배례동(拜禮洞)’ 혹은 ‘배례밭’으로 불려오다가 뒤에 ‘보리밭’으로 변하였다 한다.01
  이곳 배례밭과 관련된 결록[訣錄: 지관(地官)이 감정한 풍수학적 소견서]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 남(南)으로 건너가서 제좌봉(帝坐峰) 올라서니, 상제봉조(上帝奉朝) 일대혈(一大穴)은 용호(龍虎)없이 생겼구나, 배례(拜禮)밭은 재후(在後)하며 삼태봉(三台奉) 옆에 놓고, 언연(焉然)히 앉았으니 알아볼 이 그 뉘런가 …”02
 
 
  “정읍 산내면 구태인의 남쪽 삼십리에 왕이 앉아 있는 봉이 있으니 상제봉조형이라. 8백의 곱게 화장한 미인이 늘어 서 있고, 용이 옆으로 지나가는 혈이니 앞에는 홍문, 뒤에는 신배, 두 장수가 뒤에서 수비하고 세 장수가 앞에서 지키고, 서쪽으로 배례전이 있다. 신안(神眼)이 아니면 헤아리기 어렵다. 천벽부승복자의 형태로, 49대 동안 장상(將相)이 나오는 땅이고, 3년이 지나 발복이 시작되면 천지와 더불어 동행한다[정읍산내면(井邑山內面) 구태인남삼십리(舊泰仁南三十里) 왕좌봉(王坐峰) 상제봉조형(上帝奉朝形) 팔백연화나열(八百煙花羅列) 과거룡횡작혈(過去龍橫作穴) 전홍문(前虹門) 후신배(後臣拜) 이장방후(二將防後) 삼장수전(三將守前) 서유배례전(西有拜禮田) 비신안난재(非神眼難裁) 천벽부승복자형(天壁付蠅卜字形) 사십구대장상지지(四十九代將相之地) 삼년시발여천지동행(三年始發與天地同行)]”03
 
 
  이러한 결록의 내용에서 지명이나 위치 등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마을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조금이나마 이해가 될까 싶어서 상예마을로 이동하였다. 상예마을에서 연세가 있으신 한 분을 만나 뵙고 여쭈니, 이 마을의 형세(形勢)에 대해 말씀을 해주셨다. “이 마을 주변에 군신봉조혈이 있다고 전해온다. 마을 주변을 보면 하예마을 뒷산이 왕자산이고 그 오른편으로 낮은 산이 있는데 혹자는 작은 왕자산이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왕자산 맞은 편, 상예마을 뒤쪽으로 길게 늘어선 산의 형세가 마치 장군들과 화장한 미인들 그리고 기녀들이 늘어선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하셨다. 그런데 결록에서는 ‘군신봉조’라 쓰지 않고 ‘상제봉조’로 쓰였는데 두 형국에 내포된 의미는 비슷하다고 본다.
 
 
▲ 마을입구에서 본 하예마을의 왕자산과 작은 왕자산(일부) (2014년 8월 촬영)
 

  잠시 공사(公事)에 쓰인 배례밭의 군신봉조형에 대해 생각해보니 예절 바른 사람들이 산다고 하여 불리게 된 배례동의 마을 이름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배례동은 예동(禮洞)이라고도 불린다. 예(禮)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거나 지켜야 할 도리요 행동 규칙으로, 어원적 의미는 제물을 제기에 담아 신에게 봉헌하는 제사 의례를 말한다. 그래서 상제님께서 군신봉조형에 배례밭을 말씀하신 것은 군신봉조에는 사람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예(禮)가 빠져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1909(기유)년 상제님께서는 또 다른 공사로서 국태민안(國泰民安)은 군신봉조혈(群臣奉詔穴)04이라 하셨다. 군신봉조는 여러 신하가 임금의 조서(詔書)를 받들어 임금의 명을 백성들에게 널리 알린다는 ‘하달(下達)’의 의미로 해석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상통(上通)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즉, 상통하달은 위아래가 상호소통함은 물론 하나가 된다는 의미로 서로가 예(禮)를 근본으로 하여 덕(德)과 경(敬)을 갖춰나감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국태민안도 마찬가지로 나라의 태평성대와 백성들이 안정되기 위해서는 상통하달이 되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국태민안과 군신봉조는 연관성을 갖고 있다.
  마을 어르신과의 대화를 끝내고 저 멀리 보이는 왕자산을 살펴보았다. 그리 높지 않은 완만한 산이었다. 중앙에 큰 봉우리를 중심으로 좌우에 작은 봉우리들이 마치 큰 봉우리를 시좌하고 있는 듯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왕자(王子)산으로 알고 있었던 왕자산을 결록에는 제좌봉(帝坐峰)·왕좌봉(王坐峰)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는 ‘왕좌’가 ‘왕자’와 발음상 비슷하므로 발음상의 변이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왕자산은 결록에서처럼 왕이 앉은 산으로 ‘왕좌봉’ 등으로 봐야 할 것이다.
  이어 왕자산과 마주하고 있는 주변 산들을 제대로 보기 위해 맞은편에 있는 하예마을로 이동하였다. 상예마을에서 바라본 것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상예마을 뒤로 펼쳐진 산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을 말로는 표현할 수 없지만, 옆으로 길게 늘어선 여러 봉우리가 어르신의 말씀처럼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잠시 결록의 내용과 어르신의 말씀을 떠올리며 여러 신하가 왕이 있는 곳을 향하여 예를 갖춰 시좌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왠지 그 숙연한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젖어들었다.
 
 
▲ 하예마을에서 본 상예마을 뒷산의 모습(2014년 8월 촬영)
 

  이렇게 배례밭 주변의 산세를 둘러본 후 아쉬움에 배례밭 들판 길을 잠시 거닐었다.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 땅이 좋아야 훌륭한 인물이 난다고 했다. 옛날부터 사람들은 삶의 터전이나 묏자리가 명당인 곳에 있으면 집안과 후손이 잘된다고 믿어 왔다. 하지만 『전경』에 상제님께서는 종도 김병욱과 청련암의 중 김현찬이 명당을 원하여 바라던 아들을 얻음으로써 명당의 관념을 바꿔 놓으셨다.05 이는 상제님께서 “천존과 지존보다 인존이 크니 이제는 인존시대라”06고 하신 점과 “길성 소조(吉星所照)에 대해 길성은 덕(德)을 닦고 사람을 올바르게 대우하라, 여기서 길성이 빛이 난다”07고 하신 점에서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즉, 지존시대에는 땅에 명당이 있어 좋은 기운이 서려 있는 땅의 영향을 받아 사람이 잘 되었지만, 앞으로 오는 인존시대에는 상제님의 공사에 의해 사람이 곧 명당이 되어 사람에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명당의 기운을 받아 잘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로 다가왔다.
  또 공사로서 국태민안과 군신봉조혈에 함축된 의미도 길성소조에 대한 상제님의 말씀 속에 있다고 본다. 상제님께서는 공사로써 각처의 정기를 뽑아 합치시는 데 이 공사에 의해 군신봉조혈에 서려 있던 기운은 인존시대를 맞이하여 덕을 닦고 사람을 올바르게 대우하는 자에게 새롭게 발현되고, 국태민안도 길성소조에 대한 상제님의 말씀을 믿고 실천해 나간다면 자연스럽게 실현될 것이다.
 
 

01 정읍시사편찬위원회, 『정읍시사』(정읍: 정읍시사편찬위원회, 2003), p.223 참고.
02 도선국사(玉龍子, 827~898)가 쓴 『유산록(遊山錄)』 태인편에 나옴.
03 도선국사, 『도선국사 풍수문답』(서울: 지선당, 1994), 부록 「정관도 해설」 참고.
04 四월 어느 날 김 보경의 집에서 공사를 행하시는데 … 백지 한 장의 복판에 사명당(四明堂)이라 쓰시고 치복에게 가라사대 “… 조화는 불법(佛法)에 있으므로 호승예불형(胡僧禮佛穴)이오. 무병장수(無病長壽)는 선술(仙術)에 있으니 오선위기혈(五仙圍碁穴)이오. 국태민안(國泰民安)은 군신봉조혈(群臣奉詔穴)이오. 선녀직금혈(仙女織錦穴)로 창생에게 비단옷을 입히리니 六월 十五일 신농씨(神農氏)의 제사를 지내고 공사를 행하리라. 금년이 한문(捍門)이라. 지금 일을 하지 않으면 일을 이루지 못하니라” 하셨도다.(행록 5장 15절)
05 행록 1장 37절 참고.
06 교법 2장 56절 참고.
07 교법 2장 20절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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