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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역사인물 : 치우(蚩尤)

치우(蚩尤)
 
 
연구위원 김주우
 
  또 가라사대 “난을 짓는 사람이 있어야 다스리는 사람이 있나니 치우(蚩尤)가 작란하여 큰 안개를 지었으므로 황제(黃帝)가 지남거(指南車)로써 치란하였도다. 난을 짓는 자나 난을 다스리는 자나 모두 조화로다. 그러므로 최 제우(崔濟愚)는 작란한 사람이요 나는 치란하는 사람이니라. 전 명숙은 천하에 난을 동케 하였느니라.”(교법 3장 30절)

 
  위의 『전경』구절에 치우와 황제는 고대 동북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전쟁으로 추정되는 탁록대전(涿鹿大戰)의 중심인물이다. 이 전쟁을 상제님께서는 치우의 작란(作亂)과 황제의 치란(治亂)으로 규정하시며 작란자와 치란자를 모두 조화라고 말씀하신다. 조화의 주역 중 한 명인 치우는 누구인가. 치우(蚩尤)는 동북아 고대 신화 속의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그는 중국의 시조(始祖)라 불리는 황제 헌원(軒轅)과 탁록에서 싸웠고, 이후에 중국의 역대 제왕들로부터 전신(戰神), 병주(兵主)로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오늘날 그의 유적인 치우총(蚩尤塚)과 치우사(蚩尤祠)가 중국의 산동, 하남, 협서 등 여러 지역에서 발견되어 역사적 인물로 인식되고 있다. 치우에 대한 이야기는 중국 문헌에 여러 기록이 있으며, 각 지방의 전설에도 널리 퍼져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치우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승되고 있다.
 
 
치우 관련 문헌
  치우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서주(西周)시기의 역사적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보이는 『상서(商書)』 「여형(呂刑)」편에 있다.01 주(周)나라 목왕(穆王)이 ‘여형’을 반포하면서 잔혹한 형벌의 기원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치우에 관한 내용이 등장한다. 여기서 치우는 묘민(苗民)의 수장으로 잔인한 형벌을 사용하고 포악무도하여 반란을 일삼는 자이다. 이에 황제(皇帝)가 상제의 천명을 받고 치우와 묘민을 소멸시켰다. 목왕은 이와 같은 일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올바른 형법제정의 필요성을 설명한다. 이러한 정황은 서주시기 이전에 ‘치우’를 중심으로 하는 특정 민족 또는 부족국가의 등장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중국의 신화집 또는 인문지리서로 평가받는 『산해경(山海經)』에는 치우와 관계된 다른 사실을 볼 수 있다. 

 
  치우(蚩尤)가 병기를 만들어 황제를 공격할 때 황제는 응룡(應龍)에게 명령하여 기주(冀州)에서 공격하였다. 응용이 물을 모아두었는데, 치우가 풍백(風伯)과 우사(雨師)에게 청하여 폭풍우를 쏟아지게 하였다. 황제가 천녀(天女)인 발(魃)을 내려보내니 비가 그치고 드디어 치우를 죽였다. 발이 다시 천상으로 오를 수 없게 되자 기거하는 곳에 비가 내리지 않게 되었다.02
 

 『산해경』에서는 치우와 황제의 이미지를 선악으로 규정하는 편향적인 평가는 없다. 다만 황제와 치우가 싸운 곳은 기주(冀州)이고 치우가 먼저 황제를 정벌했다고 반대로 기록하고 있다. 치우는 병기(兵器)를 만들어 먼저 황제를 공격했다. 그리고 황제는 응룡(應龍)과 천녀(天女) 발(魃)의 도움을 받아 기주에서 치우를 죽이게 된다. 즉 치우가 황제와의 싸움에서 패한 것으로 귀결을 짓고 있다. 『산해경』의 치우 신화는 바로 고대부족 사이에 벌어졌던 전쟁을 상징적이고 은유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이후에 집필된 역사서인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에는 치우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03 서주시기로부터 1,000여 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 『사기』의 저자 사마천(司馬遷)은 각종 기록과 현장답사를 통하여 오제(五帝)가 역사적 존재로서 믿을 만하다는 판단을 내렸다.04 그러므로 중국 역사의 시작을 황제로부터 기술한다. 그 내용은 황제와 염제 및 치우에 관한 기록으로 다음과 같다.
 
 
  황제는 소전(少典)의 아들이다. 성은 공손(公孫), 이름은 헌원(軒轅)이라 불렀다. 출생은 신령스러웠고,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말을 하였다. 어려서는 영리하였고, 성장하면서는 성실하고 민첩하였으며, 장성하여서는 총명하였다. 헌원 때에는 이미 신농씨(神農氏)의 세상이 쇠하였다. 제후들이 서로 침략하거나 정벌하며 백성을 포악하게 다루었으나 신농씨에게는 이들을 징벌할 힘이 없었다. 이에 곧 헌원이 창과 방패를 쓰는 방법을 익혀 조공하지 않은 제후들을 정벌하니 모두 신하로 복종하였다. 그러나 포악한 치우는 토벌할 수 없었다. 염제가 제후들을 치려고 하자 제후들이 모두 헌원에게 귀의하였다. 헌원은 덕(德)을 닦고 군대를 정비하였다. 오기(五氣)를 다스리고, 오곡(五穀)을 심고, 만민을 보살피고, 사방의 경계를 조사하고 측량하였다. 곰과 승냥이, 표범, 백여우, 호랑이들을 훈련시켜 판천(阪泉)에서 염제(炎帝)와 세 번 싸운 끝에 뜻을 이루었다. 치우가 황제의 명을 듣지 않고 다시 난을 일으켰다. 황제는 제후의 군대를 징집하여 탁록(涿鹿)에서 치우와 싸워 마침내 치우를 죽였다. 그러자 제후들은 모두 신농씨를 대신하여 헌원을 천자로 받드니 그가 바로 황제다.05
 
 
 『사기』  「오제본기」 역시 『상서』와 『산해경』의 관점이 그대로 반영되어 치우는 반역자 또는 패배자로 기록된다. 여기서 치우는 황제에 대항하는 부족의 수장이며, 난신적자(亂臣賊子)로 묘사된다. 이에 황제 헌원은 염제와 세 번 싸워 판천(阪泉)에서 승리했고, 치우가 난을 일으키자 탁록(涿鹿)에서 죽였다고 한다. 위의 기록은 황제를 중심으로 한 평가로 치우와의 탁록의 전투가 결론적으로만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다. 이후 『사기』의 주석서가 많이 나오면서 치우에 대한 평가가 첨가된다.06 
  이처럼 정통 사서(史書)를 비롯한 후대의 문헌들은 하나같이 무도(無道)하고 불인부자(不仁不慈)한 치우였기 때문에 황제에게 정벌당한 것으로 말한다.07 치열했던 전쟁은 승패의 결과에 따라 역사서술에서 극명하고 상반된 평가를 받게 된다. 황제가 정의와 질서의 화신이라면 치우는 사악과 혼란의 대명사로 언급한다. 중국 상고사(上古史)에서 탁록대전은 가장 규모가 크고 긴 전쟁으로 기록된다. 역사에서 승자였던 황제를 부각하기 위한 목적 때문일까 치우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간략하지만 많은 전적(典籍)에 기록되었다. 문헌에서 치우의 모습은 신화 속 인물로 묘사되기도 하며, 역사 인물로 고증할 때는 동일한 항목에서도 서로 모순되는 기록들이 많다. 특히 그의 신분과 유적, 탁록대전 등에 관해서는 다양한 의견들이 분분하다. 여러 문헌08에 산재한 치우 관련 기록을 참고하여 일련의 과정을 이야기로 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치우의 신분과 형상
  치우는 중국의 산동성 일대에 거주하던 구려족(九黎族)의 수장이다.09 일설에는 고대의 천자(天子),10 황제의 속신,11 염제의 후예12라고도 한다. 당시 치우는 성격이 사납고 흉포하여 항상 다른 부족을 침략했다고 한다. 이러한 치우의 모습은 중국의 역사서를 포함한 다양한 문헌에서 아주 흉악하고 난폭한 괴물의 형상처럼 그려진다. 그의 모습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일설에 따르면 치우는 귀밑털이 마치 칼날과 창끝 같고 머리에는 뿔이 돋았다고 한다.13 또 그는 여덟 개의 팔과 여덟 개의 다리에 머리가 둘로 갈라졌다는 설이 있고,14 사람의 몸에 소의 발굽을 하고 네 개의 눈과 여섯 개의 손을 가졌으며, 치아의 길이가 두 마디인데 매우 단단하여 절대로 부서지지 않는다는 설이 있다.15
 
▲ 치우릉, 출처: 百度百科, 중국
 

  치우는 형제가 많았다. 문헌에 따르면 그의 형제가 72명16 또는 81명에 달한다. 이들은 모두 구리로 된 머리에 철로 된 이마를 가졌고 모래와 돌을 먹었다고 한다.17 모두가 짐승의 몸에 사람의 말을 했다. 이러한 치우와 그 형제들의 반인반수(半人半獸)의 형상은 소의 머리에 사람의 몸이었다는 염제를 연상시킨다. 치우는 당시에 어느 부족보다도 강력한 무기를 제작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관자(管子)』 에는 갈노산(葛盧山)과 옹호산(雍狐山)에서 발원한 물이 흘러나오는데 구리가 함께 나왔다. 치우는 그것을 얻어 칼, 갑옷, 창, 두 가닥 창 등의 무기를 만들었다고 한다.18 일설에는 구리를 캐어 다섯 가지 병기를 만들었다고 전하니,19 치우는 최초로 쇠를 캐서 병기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치우와 황제의 대결: 탁록대전
  황제가 판천이라는 곳에서 염제를 정복하자 치우는 전군을 이끌고 황제의 영역인 탁록으로 진격하였다. 치우 군대의 전투력은 중원의 어느 부족보다도 강했던 것 같다. 일설에 따르면 치우는 황제와의 전투에서 처음에 아홉 번을 싸웠는데 아홉 번 모두 승리했다고 한다.20 그러나 마지막 전투에서 치우가 황제에게 패배를 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천하가 진동했다고 하는 당시의 전투상황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살펴보자.
  먼저 구리 머리에 철의 이마를 가진 치우의 군대는 72명 혹은 81명의 용맹한 형제 또는 부족연맹을 필두로 풍백(風伯: 바람의 신)과 우사(雨師: 비의 신), 거인족 과보(夸父)가 구심점을 이룬다. 여기에 도깨비부대로 알려진 이매(螭魅)와 망량(魍魎) 등의 무리가 합세하여 공격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이에 대항하는 황제의 군대 또한 막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었다. 잘 훈련된 곰과 승냥이, 표범, 백여우, 호랑이, 독수리 등의 맹수 군단과 물을 모아 비를 내릴 수 있는 응룡(應龍: 날개 달린 용신)과 천녀인 발(魃: 가뭄의 여신) 등이 대군을 이루었다.21
  대군을 이룬 황제 군대보다 치우 군대가 전투력은 우세했지만 막상막하의 전세(戰勢)를 보인다. 먼저 날카로운 병기로 무장한 치우 군은 도깨비 군단을 앞세워 혼 빼기 작전을 폈다.22 이에 맞선 황제 군이 기(夔)라는 괴물로 만든 북을 두들겼더니 그 울림이 천둥소리처럼 우렁차서 5백 리 밖에서도 들렸다고 한다.23 치우 군은 이 엄청난 북소리에 놀라 혼비백산하여 흩어지게 되었으며, 유리했던 전세가 역전되고 말았다. 그러자 치우가 이번에는 안개를 일으켜 황제 군을 공격한다. 치우는 풍백과 우사를 거느렸기 때문에 비바람과 안개를 불러일으키는 술법에 능하였다.24 치우가 술법을 부려 사흘 동안 짙은 안개가 황제 군을 둘러쌌으며, 황제 군은 방향을 잃고 혼란 속에서 갈팡질팡하게 된다.25 치우 군은 절대적으로 유리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방에서 황제 군을 습격하였다.
  이러한 전황 속에서 황제의 신하 풍후(風后)가 북두칠성의 손잡이가 항상 북쪽을 향하는 것에 착안하여 지남거(指南車)를 만들었다. 지남거는 수레 위에 목상(木像)을 만든 것인데 이 목상의 손가락은 항상 남쪽만 가리키게 되어 있었다. 황제는 지남거의 도움으로 방향을 파악하여 안개의 포위망을 뚫고 나올 수가 있었다.26 다시 치우는 풍백과 우사로 하여금 비바람을 일으켜 황제 군을 추격하게 하였다. 황제 군은 엄청난 폭풍우가 휘몰아쳐 또다시 전멸할 지경에 처하게 된 것이다. 다급해진 황제는 천녀 발(가뭄의 신)의 도움을 받아 비바람을 잠재우고 수적으로 우세한 대군을 앞세워 치우를 사지(死地)로 몰아 죽였다.27 이로써 상고시대 동북아 지역에서 일어났던 치우와 황제 간의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전쟁의 신이 된 치우
  치우가 죽은 후 황제는 부활의 두려움과 적개심 때문에 치우의 주검을 나누어 묻었다고 한다. 후대 기록인 『황람』에 치우총(蚩尤塚)이 동평군(東平郡) 수장현(壽張縣)과 산양군(山陽郡)  거야현(鉅野縣)에 있다고 한다.28 치우는 능력이 있음에도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죽었다는 측면 때문인지 후대에 그의 죽음 또한 새롭게 해석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황제는 치우를 형틀에 채워 죽였는데, 그 형틀이 변해서 나무가 되었다고 한다.29 또 치우의 손발에 채웠던 쇠고랑과 족쇄가 있었는데 송산(宋山)이라는 곳에서 자라는 풍목(楓木)이 되었다는 설이 전한다.30 치우는 비록 전몰하였으나 그의 무서운 능력은 오히려 적수인 황제도 인정했다. 황제는 천하가 다시 소란스럽게 되자 치우의 형상을 만들어 통치에 이용하니 모두가 두려워하여 복종하였다고 한다.31 치우의 이미지는 이에 그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전해진다.
  치우의 강렬했던 투쟁정신은 여전히 전승(傳承)되어 전쟁을 치르는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사기』에 의하면 치우는 전쟁의 신으로 추앙되기 시작한다. 진시황(秦始皇)이 제사를 드리는 팔신(八神) 중 하나인 병주(兵主: 전쟁을 관장하는 신)라고 기록한다. 그리고 병주인 치우에 대한 제사가 매우 오래되었다고 부연설명을 한다.32 또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은 처음으로 전쟁할 때 치우에게 제사를 지낸 후 승리를 했다. 유방은 천하를 평정한 후에도 치우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33 이후 전신(戰神) 치우에 대한 제사인 마제(禡祭)의 풍속이 송대(宋代)까지 지속되었다.34 또 하늘의 혜성을 ‘치우지기(蚩尤之旗)’라고 하여 이 별이 나타나면 전쟁에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다.35 민간에서는 치우희(蚩尤戱)라는 연희(演戱)가 연행되었고, 치우의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는 풍속 역시 성행하였다.36 이처럼 치우는 탁록에서 황제에게 패전하였지만 그 용맹성과 전장에서의 탁월한 능력은 후세의 기억에 각인된 듯하다.
 
 
치우의 위상
  중국에서는 그동안 중화민족(中華民族)의 시조를 황제로 여겨왔다. 중국 역사에서 한족(漢族) 왕조가 정통(正統)이라는 전통은 사서(史書)에 황제를 조상으로 모셨으며, 염황족(炎黃族)을 중화민족의 정통으로 기술해왔다. 그래서 ‘염황자손(炎黃子孫)’, ‘황제후예(黃帝後裔)’라는 말은 중화민족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동안 치우는 중화민족과 아무 상관 없는 존재로 되어버렸다.37 그러나 오늘날 동북아 고대의 신화적 인물로 알려졌던 치우는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치우는 먼저 청(淸)나라 말기에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한 혁명파 학자인 양계초(梁啓超, 1873-1929), 강유위(康有爲, 1858-1927) 등에 의해 주목을 받게 된다. 이들 혁명파 학자들은 다시 황제숭배를 부활시키는데, 즉 한족(漢族)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묘족(苗族)을 한족과 대항한 최초의 민족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수천 년 전의 황제, 염제, 치우 간의 전쟁은 화하(華夏)민족과 묘만(苗蠻)계통 민족 사이에 발생한 전쟁으로 보았다. 이와 달리 1943년에 출간된 서욱생(徐旭生)의 『중국고사적전설시대(中國古史的傳說時代)』는 중국 고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많은 학자는 치우가 동이족(東夷族)이라는 전제 아래 고고유적들을 해석하기도 하였다. 이후 혁명파의 주장은 묘족(苗族)학자들에 의해 수용되어 1985년 출판된 『묘족간사(苗族簡史)』에서 치우는 소수민족인 묘족의 조상으로 등장한다.38
  현재까지 중국 학계에서는 치우를 동이족으로 분류하고 있으므로 묘족도 고대의 동이족에 속한다는 견해가 도출되었다.39 지난 1990년대 중국의 일부 학자들은 치우의 역사적 지위를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즉 치우가 염제, 황제와 함께 중화문명의 창조자이며, 중화민족의 시조라는 견해이다. 그 재평가의 대표적인 결과로 1997년 하북성(河北省) 탁록현(涿鹿縣)에 ‘귀근원(歸根源)’과 염제·황제·치우를 모시는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이 건립되었다. 오늘날 치우가 동이족이라는 견해는 일부 한국학자들 또한 주장한다. 치우가 등장하는 한국 문헌은 1675년에 북애자(北厓子)가 편집한 『규원설화(揆園史話)』와 1911년 계연수(桂延壽)가 편집한 『환단고기(桓檀古記)』이다. 하지만 학계에서 이 두 문헌의 진위(眞僞)에 대한 논쟁이 아직도 남아 있으므로 치우에 관한 기록도 향후 고증이 필요하다.
 
 
 
참고문헌
『상서(尙書)』
『국어(國語)』
『여씨춘추(呂氏春秋)』
『산해경(山海經)』
『사기(史記)』
『전국책(戰國策)』
『한비자(韓非子)』
『노사(路史)』
『술이기(述異記)』
『태평어람(太平御覽)』
『초학기(初學記)』
『관자(管子)』
『통전(通典)』
사마천 저, 김영수 옮김, 『사기·본기 1』, 서울: 알마, 2012.
김인희, 「고고유물을 통해본 선진 이전 치우의 기원과 형상」, 『우리문학연구』 34집, 우리문학회, 2011.
김인희, 「치우를 통해 본 한국과 중국의 고대사 재활용」, 『동아시아고대학』 28집, 동아시아고대학회, 2012.
빈미정, 「황제신화전설에 대한 문헌적 고찰」, 『중국문학』 제 44집, 한국중국어학회, 2015.
선정규, 「중국과 그리스 신화의 전쟁신 형상의 특징과 그 문화적 배경 연구」,『中國學論叢』 46집,
          고려대학교 중국학연구소, 2014.
우림걸, 「동아삼국의 치우전설에 대한 고찰」, 『한중인문학연구』 29집, 우리문학회, 2011.
 
 
 

01 『상서(商書)』 「여형(呂刑)」: 若古有訓, 蚩尤惟始作亂, 延及於平民, 罔不寇賊, 鴟義姦宄, 奪攘矯虔. 苗民弗用靈, 制以刑, 惟作五虐之刑曰法, 殺戮無辜. 爰始淫為劓刵椓黥, 越茲麗刑並制, 罔差有辭.
02 『산해경(山海經)』 「대황북경(大荒北經)」: 蚩尤作兵伐黃帝, 黃帝乃令應龍攻之冀州之野. 應龍畜水, 蚩尤請風伯雨師, 縱大風雨. 黃帝乃下天女曰魃. 雨止, 遂殺蚩尤. 魃不得復上, 所居不雨.
03 「오제본기」는 『상서』를 비롯하여 지금은 이름만 남은 「오제덕」과 「제계성」을 기본 자료로 삼고, 여기에 『국어』, 『좌전』, 『세본』, 『장자』, 『맹자』, 『한비자』, 『전국책』, 『여씨춘추』, 『예기』, 『회남자』 등의 자료를 녹여 완성한, 그 규모가 대단히 방대한 3,000년 중국사의 서막이다. 사마천 저, 김영수 옮김, 『사기·본기1』 (서울: 알마, 2012), p.197.
04 사마천 저, 『사기·본기 1』, 김영수 옮김 (서울: 알마, 2012), p.188 참조.
05 『사기』 「오제본기」: 黃帝者, 少典之子, 姓公孫, 名曰軒轅. 生而神靈, 弱而能言, 幼而徇齊, 長而敦敏, 成而聰明. 軒轅之時, 神農氏世衰. 諸侯相侵伐, 暴虐百姓, 而神農氏弗能征. 於是軒轅乃習用干戈, 以征不享, 諸侯咸來賓從. 而蚩尤最爲暴, 莫能伐. 炎帝欲侵陵諸侯, 諸侯咸歸軒轅. 軒轅乃修德振兵, 治五氣, 蓺五種, 撫萬民, 度四方, 敎熊羆貔貅貙虎, 以與炎帝戰於阪泉之野. 三戰, 然後得其志. 蚩尤作亂, 不用帝命. 於是黃帝乃徵師諸侯, 與蚩尤戰於涿鹿之野, 遂禽殺蚩尤. 而諸侯咸尊軒轅爲天子, 代神農氏, 是爲黃帝.
06 『사기』의 많은 주석 중에서 남송시대 배인(裴駰)의 『사기집해(史記集解)』, 당나라 사마정(司馬貞)의 『사기색은(史記索隠)』, 당나라 장수절(張守節)의 『사기정의(史記正義)』가 3대 주석서로 인정받고 있다.
07 신정규, 「중국과 그리스 신화의 전쟁신 형상의 특징과 그 문화적 배경 연구」, 『中國學論叢』 46(2014), p.306.
08 『사기(史記)』, 『국어(國語)』, 『산해경(山海經)』, 『상서(尙書)』, 『전국책(戰國策)』, 『한비자(韓非子)』, 『로사(路史)』, 『술이기(述異記)』, 『태평어람(太平御覽)』,  『초학기(初學記)』, 『관자(管子)』, 『통전(通典)』, 『여씨춘추(呂氏春秋)』 등 여러 문헌에서 치우의 내용을 인용하였다.
09 『상서(尙書)』 「여형(呂刑)」의 공영달 주석: 九黎之君號曰蚩尤. 『사기집해(史記集解)』 주석: 九黎君號蚩尤. 『국어』「초어(楚語)」의 주석: 九黎, 蚩尤之徒也. 『여씨춘추(呂氏春秋)』 「탕병(蕩兵)」: 蚩尤九黎. 『전국책(戰國策)』 「고유(高誘)」주석: 九黎蚩尤.
10 『史記集解』: 應劭曰 蚩尤古天子之號.
11 『한비자(韓非子)』 「십과(十過)」: 昔者黃帝合鬼神於太山之上, 駕象車而六蛟龍, 畢方幷, 蚩尤居前, 風伯進掃, 雨師酒道, 虎狼在前, 鬼神在後, 螣蛇伏地, 鳳凰覆上. 大合鬼神, 作爲靑角.
12 『로사(路史)』 「치우전(蚩尤典)」: 阪泉氏蚩尤, 姜姓, 炎帝之裔也, 好兵而喜亂, 逐帝而居於濁鹿.
13 『술이기(述異記)』: 蚩尤氏耳鬢如劍戟, 頭有角.
14 『초학기(初學記)』 인(引) 『귀장(歸藏)·계서(啓筮)』: 蚩尤·····八肱八趾疏首.
15 『술이기(述異記)』: 有蚩尤神, 俗云人身牛蹄四目六手. ····· 蚩尤齒長二寸, 堅不可碎.
16 『술이기(述異記)』: 軒轅之初立也, 有蚩尤兄弟七十二人.
17 『태평어람(太平御覽)』 인(引) 『용어하도(龍魚河圖)』: 黃帝攝政, 有蚩尤兄弟八十一人, 並獸身人語, 銅頭鐵額, 食沙石子.
18 『관자(管子)』 「지수(地數)」: 葛盧之山發而出水, 金從之, 蚩尤受而製之, 以爲劍鎧矛戟, 是歲相兼者諸侯九. 雍狐之山發而出水, 金從之, 蚩尤受而製之, 以爲雍狐之戟芮戈, 是歲相兼者諸侯十二.
19 『사기정의』 인(引) 『용어하도』: 蚩尤之時, 爍金爲兵, 割革爲甲, 始製五兵.
20 『태평어람(太平御覽)』 인(引) 『황제원녀전법(黃帝元女戰法)』: 黃帝與蚩尤九戰九不勝.
21 여기에서 신(神)이나 갖가지의 동물들은 모두 특정한 정치세력이나 부족을 상징하는 토템적 요소를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해도 좋을 듯하다. 빈미정, 「황제신화전설에 대한 문헌적 고찰」, 『중국문학』 44 (2015), p.15.
22 『통전(通典)』 「악전(樂典)」: 蚩尤率魑魅與黃帝戰于涿鹿.
23 『산해경(山海經)』 「대황동경(大荒東經)」: 其名曰夔, 黃帝得之, 以其皮爲鼓, 以雷獸之骨, 聲聞五百里, 以威天下.
24 『술이기(述異記)』: 蚩尤能作雲霧.
25 『태평어람(太平御覽)』 인(引) 『지림(志林)』: 黃帝與蚩尤戰於涿鹿之野, 蚩尤作大霧, 彌三日, 軍人皆惑. 
26 『태평어람(太平御覽)』 인(引) 『지림(志林)』: 黃帝乃令風后法斗機作指南車, 以別四方, 遂擒蚩尤. 『송서(宋書)』 「여복지(輿復志)」: 指南車, 一名司南車, ……上有仙人, 車雖轉而手常南指.
27 『산해경(山海經)』 「대황북경(大荒北經)」: 蚩尤作兵伐黃帝, 黃帝乃令應龍攻之冀州之野. 應龍畜水, 蚩尤請風伯雨師. 縱大風雨. 黃帝乃下天女曰魃, 雨止, 遂殺蚩尤.
28 『사기집해(史記集解)』 인(引) 『황람(皇覽)』: 蚩尤冢在東平郡壽張縣闞鄕城中, 高七丈, 民常十月祀之. 有赤氣出, 如匹絳帛, 民名爲蚩尤旗. 肩髀冢在山陽郡鉅野縣重聚, 大小與闞冢等. 傳言黃帝與蚩尤戰於涿鹿之野, 黃帝殺之, 身體異處, 故別葬之.
29 『산해경(山海經)』 「대황남경(大荒南經)」 곽박주(郭璞注): 蚩尤爲黃帝所得, 械而殺之, 已摘棄其械, 化而爲樹也.
30 『산해경(山海經)』 「대황남경(大荒南經)」: 有宋山者, 有赤蛇, 名曰育蛇. 有木生山上, 名曰楓木. 楓木 蚩尤所棄其桎梏, 是爲楓木.
31 『사기정의(史記正義)』 인(引) 『용어하도(龍魚河圖)』: 蚩尤沒後, 天下復擾亂, 黃帝遂畫蚩尤形像以威天下, 天下咸謂蚩尤不死, 八方萬邦皆為弭服.
32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 始皇遂東遊海上, 行禮祠名山大川及八神, 求僊人羨門之屬. 八神將自古而有之, 或曰太公以來作之. 齊所以為齊. 以天齊也. 其祀絕莫知起時。八神:一曰天主,祠天齊. 天齊淵水,居臨菑南郊山下者. 二曰地主, 祠泰山梁父. 蓋天好陰, 祠之必於高山之下, 小山之上, 命曰「畤」;地貴陽, 祭之必於澤中圜丘云. 三曰兵主, 祠蚩尤. 蚩尤在東平陸監鄉, 齊之西境也. … 皆各用一牢具祠, 而巫祝所損益, 珪幣雜異焉.
33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 高祖初起, 禱豐枌榆社. 徇沛, 為沛公, 則祠蚩尤, 釁鼓旗. … 令祝官立蚩尤之祠於長安. 長安置祠祝官女巫.
34 신정규, 「중국과 그리스 신화의 전쟁신 형상의 특징과 그 문화적 배경 연구」, 『中國學論叢』 44 (2014), p.308 참조.
35 『사기(史記)』 「천관서(天官書)」: 蚩尤之旗, 類彗而後曲象旗, 見則王者征伐四方.
36 『술이기(述異記)』: 今冀州有樂名蚩尤戱, 其民兩兩三三, 頭戴牛角而相抵. 漢造角抵戱, 蓋其遺制也. 太原村落間祭蚩尤神, 不用牛頭. 今冀州有蚩尤川, 卽涿鹿之夜. 漢武時, 太原有蚩尤神晝見, 龜足蛇首, 大疫, 其俗遂爲立祠.
37 우림걸, 「동아삼국의 치우전설에 대한 고찰」, 『한중인문학연구』 29 (2011), p.356 참조.
38 김인희, 「고고유물을 통해본 선진 이전 치우의 기원과 형상」, 『우리문학연구』 34 (2011),  pp.41-42 참조.
39 김인희, 「치우를 통해 본 한국과 중국의 고대사 재활용」, 『동아시아고대학』 28 (2012), p.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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