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별 보기
   daesoon.org  
대순147년(2017) 8월

이전호 다음호

 

도전님 훈시 종단소식 기자수첩 청계탑 전경 지명 답사기 대순문예전 홍보 대원종 일각문 특별기획 포토에세이 돋보기 나누고 싶은 이야기 정각원 철학과의 만남 대순청소년 여름캠프 홍보 대순광장 영화속으로 상생의 길 퀴즈 및 퀴즈 정답자 알립니다

대원종 : 한강(漢江) 이남은 범치 못하리라

한강(漢江) 이남은 범치 못하리라
 
 
연구원 강대성
 
“장차 청일 사이에 싸움이 두 번 나리니 첫 번에는 청국이 패하리라. 다시 일어나는 싸움은 十년이 가리니 그 끝에 일본이 쫓겨 들어가려니와 호병(胡兵)이 들어오리라. 그러나 한강(漢江) 이남은 범치 못하리라.” (예시 26절)
 
 
 
 
  올해(2017년)는 한국전쟁이 발발(勃發)한지 67주년이 된다. 아울러 정전협정(停戰協定)01을 맺은 지 64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전쟁과 관련한 『전경』 성구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전경』의 관련 구절은 예시 26절로서 청일 사이에 싸움이 두 번 일어난다는 것과 그 후에 호병이 들어오나 한강 이남은 범하지 못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청일 사이에 두 번 일어나는 싸움은 각각 ‘청일전쟁’과 ‘중일전쟁’을 뜻한다. 청일전쟁은 1894~95년 청(淸)나라와 일본이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싸고 벌였던 전쟁이다. 중일전쟁은 1937년 7월부터 일본의 중국침략으로 전개된 전쟁이다. 이 전쟁은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고 그 결과 미국에 참패한 일본이 1945년 8월에 항복함으로써 끝이 나게 된다. 두 번째 싸움이 십 년이 가리라는 상제님의 말씀처럼 중일전쟁은 1937부터 45년까지 약 10년의 세월이 소요되었다.
  그다음에 호병(胡兵)02이 들어오나 한강 이남은 범치 못하리라 하신 것은 민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을 말씀하신 것이다. 호병은 중국 인민해방군(이하 중국군)을 의미하며 중국군이 북한을 도와 전쟁에 참여하지만 한강 이남은 범치 못한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의 역사 기록을 더듬어 보면 위 예시 말씀의 사실성을 좀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땅에서 반세기 전에 일어난 소위 6·25전쟁이라 일컬어지는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 공산군이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전쟁이다. 한국전쟁을 생각할 때 흔히 맥아더 장군과 그가 이끈 인천상륙작전 등을 떠올리기도 한다. 한국전쟁은 현재도 진행 중이며 잠시 쉬는 휴전상태일 뿐이다. 한반도 허리를 휘감은 휴전선이 정전협정을 맺은 지 60여 년을 넘게 지속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극적인 사건이라 한다면 앞서 언급한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중국군의 참전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중국군이 개입함으로써 인천상륙작전 후 두만강까지 올라갔던 전선은 다시 한국군을 포함한 연합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전쟁은 장기화할 조짐이 나타났고 결국엔 휴전에 이르는 빌미가 되었다. 그 당시 중국군의 최고사령관은 팽덕회(彭德懷, 1898~1974)라는 인물이다. 팽덕회는 1898년 중국 호남성(湖南省) 상담현(湘潭縣)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모택동(毛澤東, 1893~1976)과 동향인으로 모택동과 함께 20여 년간 전투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하였으며 여러 요직을 거쳐 ‘원수(元首)’03까지 오른 인물이다.
  한국전쟁 시 중국군은 모두 5차례의 총공세를 펼쳤다. 그중 3차 전역(三次戰役: 1950.12.31~1951.1.8)04에서 38선 돌파 여부를 놓고 팽덕회는 모택동과 심한 갈등을 겪는다. 이른바 신중론과 확전론의 대립이었다. 모택동은 38선 돌파를 강력하게 주장하며 팽덕회의 지구전(持久戰)을 허용치 않았던 것이다. 팽덕회는 어쩔 수 없이 절충방안을 수립하였다. 이러한 작전 결과 중국군은 38선을 돌파하여 서울을 점령하였고 적을 추격하여 남진하지 않는다는 원래 계획대로 추격정지 명령을 하달, 휴정(休整)에 들어갔다.05
 
▲ <중공군의 3차 전역>06
 

  이 당시 1사단장으로 참전한 백선엽(白善燁, 1920년~ ) 장군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중공군(中共軍)07의 3차 공세로 37도선(평택~삼척)08까지 밀려난 유엔군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후방 방어선을 재점검, 보완하는 동시에 재반격 작전도 검토하기 시작했다. 만약 이때 중공군이 쉬지 않고 남침을 계속할 수 있었다면 유엔군은 후퇴를 거듭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다행히 중공군은 공격의 고삐를 늦췄고, 유엔군과 국군은 전열을 가다듬어 반격의 의욕을 되살릴 수 있었다.” 백선엽 장군은 중공군이 진격을 멈춘 것에 대해 지금까지 거듭된 인해전술로 병력 손실이 극심하였고, 보급선이 길어지면서 전쟁 물자 조달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술회하였다.09
  또 다른 기록인 『유엔軍의 재반격(한국전쟁7)』10에서는 이와 같은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유엔군이 37도선을 향하여 철수하였는데 서부전선의 상황과 중부전선의 상황이 달랐다고 한다. “서부의 미 제1·9군단이 37도선까지 내려가서 방어에 들어갔는데 중부전선의 홍천이 탈취당하여 방어선이 쓸모없게 되었다. 미 1군단이 평택에서 안성에 이르는 지역과 9군단의 장호원 북쪽에 이르는 새 진지를 점령하여 공산군의 공세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중공군의 공세는 시작되지 않았다. 차량으로 후퇴하는 미군과 걸어서 내려오는 중공군과의 속도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되었으나, 한강을 건너기가 어려워서인지, 보급 때문인지, 혹은 다른 목적이 있어서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11
  “서부전선에서는 유엔군과 중공군의 접촉이 끊어진 것이다. 제8군은 의아스럽고 이상한 느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즉, 중공군은 한강 북쪽 기슭을 점령함으로써 작전목적을 달성한 것인가, 혹은 서울의 공략을 하나의 고비로 하여 다음 공세를 준비하는 중일까, 전혀 판단할 수가 없었다. 서부전선의 평온함과는 반대로 중·동부전선의 전황은 시시각각 치열해져 가고 있었다.”12
  팽덕회는 3차 전역 직후 유엔의 정전 제의(停戰提議) 수락 여부와 4·5차 전역 개시 여부를 놓고 또 다시 모택동과 갈등을 겪게 된다. 결국 모택동의 4차(1951.1.27.~4.21), 5차 전역(1951.4.22.~6.10) 개시를 연속적으로 명령하였다. 결과적으로 중국군은 미군의 반격을 받아 전장의 주도권을 상실하였으며 38선 부근으로 물러나게 된다. 중국군은 미군과의 두 차례 정면승부에서 크게 손실을 입었고 중국의 전쟁목표도 평화회담을 통해 전쟁을 종결한다는 방향으로 수정된다.13
  3차 전역 후 중국군은 누적된 피로와 보급선의 연장으로 인해 보급이 원활하지 못하였으며, 한강 북쪽을 점령했지만 전투 인력의 막대한 손실로 남진할 상태가 아니었다. 팽덕회가 이끄는 중국군은 두 차례의 총공세에도 불구하고 한국군과 연합군의 재반격으로 인해 막대한 인적, 물적 자원의 피해를 보고 38선을 넘어 지금의 휴전선 지역까지 후퇴했고 정전회담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 정전협정
 

  지금까지 팽덕회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한국전쟁의 전개과정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상제님께서 ‘한강 이남은 범치 못하리라’고 하신 말씀에서 ‘한강 이남’의 지리적 범위와 ‘범치 못한다’는 것에 대한 이해이다. 예를 들어 범치 못함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여 ‘중국군이 한강을 넘지 못한다’고 한다면 이는 역사적 사실과 배치된다. 왜냐하면 앞에서 밝힌 바대로 중국군의 3차 공세 후 북위 37도선까지 미군이 밀려 내려와 방어전에 나섰다는 점, 수원 서북방의 수리산에서 양평 서쪽 양자산까지 중국군 제50군과 38군의 6개 사단이 횡(橫)으로 방어하는 진지가 있었다는 사실 때문이다.14 또한 “한강 이남까지 진출하였던 중공군의 보급량은 참으로 미약한 것이었으며...”15에서 중국군은 한강 이남까지 진출하였음을 서술하고 있다.
  이남(以南)이란 어떤 지점을 기준으로 하여 그 남쪽을 뜻한다. 따라서 한강 이남은 한강을 기준으로 남한(南韓)을 모두 포괄하는 범위로 봐야 할 것이다. 정리하면 “한강 이남을 범치 못하리라”는 상제님의 말씀은 중국군이 한강을 넘지 못하였다기보다 한강을 포함한 서울을 비롯해 남쪽 지역을 차지하는 데 실패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는 역사적 사실로서 지금의 휴전선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대순지침』에 “천리와 인사의 합일성을 밝혀 만상만유가 도 안에서 생성 존재하고 있는 진리를 확신케 하여야 한다”라고 하셨다. 상제님께서 행하신 공사가 어떻게 현실 속에서 이룩되어 가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진리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하는 데 꼭 필요한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이러한 역사를 통해서 순국선열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현재의 안녕이 이룩되었음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보명(保命)과 안주(安住)는 국가와 사회의 은혜임을 바르게 인식하여 사회발전과 공동복리를 도모하는 국민의 도리를 다하는 데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01  1953년 7월 27일.
02 글의 문맥상 ‘호(胡)’는 ‘중국’을 의미한다. 청 왕조는 1616년부터 1911년까지의 왕조로서 상제님 재세 시에는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1949년 10월 1일)으로 국명이 바뀌기 전이다. 예시는 상제님 재세 시의 말씀이므로 호병은 그 당시 중국 대륙을 지배한 청나라의 군사를 의미한다.
03 중국에선 ‘10대 원수’라 하여 팽덕회를 포함한 10명만이 원수로 임명되었다.
04 전역(戰役)은 주어진 시간과 공간 안에서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군사작전을 말한다.
05 양영조, 「6·25전쟁시 중국군의 지구전 전략과 군사개혁-조·중 연합군 사령원 팽덕회 전략을 중심으로」, 『한국근현대사연구 33』, pp.18~19.
06 백선엽, 『軍과 나(백선엽 회고록)』 (서울: 재단법인 대륙연구소, 1989), p.155.
07 『軍과 나(백선엽 회고록)』에서 ‘중공군’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을 직접 인용하였기에 여기서는 중국군이 아닌 중공군으로 표기하였음.
08 지도 참고(각주 6).
09 백선엽, 앞의 책, p.155.
10 일본 육전사연구보급회에서 발간한 『한국전쟁(조선전쟁)』을 육군본부 군사연구실에서 역간(譯刊)한 것이다. 이 책의 서언에서 “기존의 한국전쟁에 관한 기록과 달리 한국, 미국, 중공, 북괴공간사(北傀公刊社)와 기타 사료를 참조하여 제3자의 입장에서 비교적 객관성을 가지고 기술하였다”라고 밝히고 있다.
11 육군본부 군사연구실, 『유엔軍의 재반격(한국전쟁 7)』 (서울: 명성출판사, 1986), pp.120~121.
12 같은 책, pp.121~123.
13 양영조, 「6·25전쟁시 중국군의 지구전 전략과 군사개혁-조·중 연합군 사령원 팽덕회 전략을 중심으로」, 『한국근현대사연구 33』, pp.22~23.
14 육군본부 군사연구실, 『유엔軍의 재반격(한국전쟁 7)』 (서울: 명성출판사, 1986), p.156.
15 같은 책, p.157.
 

관련글 더보기 인쇄

Copyright (C) 2009 DAESOONJINRIHOE All Rights Reserved.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강천로 882 대순진리회 교무부 tel : 031-887-9301 mail : gyomubu@daesoo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