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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7년(2017)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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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문예 : 영화 ‘동주’를 보고

영화 ‘동주’를 보고
 

잠실38 방면 선무 양범모
글 편집  출판팀

 
 
 
  버스를 타고 귀가하는 길에 우연히 맞은편 버스에 부착된 영화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제목은 ‘동주’, 젊은 청년 두 명이 교복을 입고 서 있는 흑백 포스터였습니다. 검색을 해보니 ‘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8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친 윤동주(尹東柱, 1917~1945) 시인의 삶을 담아낸 영화였습니다. 살아온 시대는 다르지만, 당시 저와 같은 나이였던 동주의 삶이 무척 궁금했습니다. 그 길로 곧장 극장으로 가 심야영화로 ‘동주’를 관람하였습니다.
  윤동주라는 인물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키워드는 그의 삶보다 ‘별 헤는 밤’과 ‘서시’ 등과 같은 시(詩)입니다. 저 또한 학창시절 교과서를 통해 그의 시를 암기하면서 윤동주를 일제강점기를 살다 간 비운의 청년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학창시절 윤동주문학관에 견학 갔을 때 느낀 그의 이미지는 치열한 독립투사가 아닌 시대적 상황을 문학에 담아낸 민족시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을 두고 어떤 선생님은 “일기장에 자신의 고민거리를 쓴 청년” 정도로 깎아내리기도 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기 전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그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쳐 갔습니다. 이러한 기억은 ‘동주’라는 영화를 통해 다시 나를 일깨웠고, 당시 동주와 같은 28세 청년인 나의 삶을 되돌아보게 했습니다.
  영화는 흑백이었지만, 그 사실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생동감 넘쳤습니다. 영화에서는 윤동주에 가려져 잘 알려지지 않았던 동갑내기 사촌 송몽규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둘은 같은 집에서 태어나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을 마칠 때까지 평생을 함께했습니다. 그러나 동주와 몽규는 삶의 방식과 문학을 바라보는 견해가 달랐습니다.
 
 

  그의 사촌인 송몽규는 중학교 재학 중에 신춘문예에 당선될 만큼 재능 있는 문사였습니다. 몽규는 청년 시절 자신의 재능을 살려 문예지를 발간하며 사람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했습니다. 그에게 문학은 사람들의 지성(知性)을 일깨워 민중을 계몽시키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래서 몽규는 글자의 수나 운율에 제한을 두는 시보다 자유롭게 쓰는 산문을 최고의 문학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윤동주는 문학을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예술로 여겨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시가 최고의 문학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문학적 가치관의 차이는 이후 두 청년의 삶에도 그대로 녹아들었습니다. 청년이 된 몽규는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군사교육을 받은 후 자금 조달 등의 임무를 수행하다가 손에 피를 묻히기도 하였고, 일본 유학 중에는 조선인 유학생을 모아 독립운동을 모의하다가 검거되었습니다. 그는 경찰서 폭파 등의 독립운동 혐의가 적힌 조서에 서명하라는 일본 형사의 요구에, 일제의 만행과 그들이 벌이고 있는 전쟁이 정당하지 않음을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반박합니다. 이에 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하던 일본 형사는 말문이 막혀 그를 외면해버립니다. 몽규는 조서에 적힌 혐의에 대해서도 그것을 실현하지 못하고 모의에만 그친 것이 부끄럽고 한스러울 뿐이라고 말하며 서명합니다.
  한편, 윤동주는 몽규처럼 독립운동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일본 제국주의와 항일독립운동 사이에서 무시되어진 인간의 마음을 시로 표현하였습니다. 지금은 개인의 감정을 글이나 매체를 통해 표현하는 것이 자유롭지만, 일제강점기에는 그러한 것이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윤동주는 문학을 통해 그것을 표현하고자 했기에 그의 시는 더 순수하고, 치열했습니다. 당시 동주의 마음에는 자신이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부끄러움과 문학인으로서 인간의 순수한 감정과 마음을 지켜야 한다는 소신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만감이 교차하며 괴로움에 사로잡힌 동주에게 몽규는 “니는 계속 시를 쓰라, 총은 내가 들꺼니까”라고 말하며 동주를 응원합니다. 이는 독립운동에 매진해야 했던 몽규가 분신과도 같은 동주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가 시를 통해 인간의 마음을 지켜주길 바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동주 역시 조선인 유학생 독립운동 모의에 연루되어 체포됩니다. 사실 동주는 독립운동에 직접 가담한 적이 없었지만, 형사는 몽규에게 내민 것과 똑같은 조서를 내밀며 동주에게 혐의를 인정하는 서명을 요구합니다. 그러자 동주는 자신이 직접 독립운동에 가담하지 못하고 시로써 시대를 논하는 것이 부끄러울 뿐이라며 눈물을 흘립니다. 이렇듯 시대는 인간의 마음을, 개인의 순수한 감정조차 용납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는 부끄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끄러움이라는 마음의 울림은 제국주의에 심취하여 인간의 양심마저 외면해버린 일본 형사의 마음을 움직여 눈물이 고이게 합니다.
  송몽규와 윤동주는 삶에 대한 가치관은 달랐지만, 조국에 대한 열정은 누구보다 높았기에 자신의 처지에서 부끄러움을 느끼며 마지막을 맞이하였습니다. 치열했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알았고, 부끄러움을 알았기 때문에 더 치열한 삶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들에게 부끄러움이란 지금의 내가 있도록 해준 부모와 민족과 나라에 대한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었습니다.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받은 모든 것들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수도인의 입장에서도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은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일상에서의 대인관계 및 선후각 간의 배려와 감사에 대해 이따금 우리는 모든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후각에게 법수를 전해주고 음복을 챙겨줘도 고맙다는 말조차 듣지 못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습니다. 그러한 후각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답답하고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저의 마음을 선각께 털어놓자 선각분들은 그것 또한 저의 모습이라며 후각 탓만 하지 말고 자신을 돌아보라고 하셨습니다. 돌이켜보니 저 역시도 평소에 선각이 저에게 마음 써 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28세의 동주가 부모와 민족과 나라에 받기만 한 것을 부끄러워할 때 저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받는 것을 당연하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남을 탓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되돌아보고 잘못된 허물을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 생각하여 당연시하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감사와 배려의 마음을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윤동주의 시가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것은 당대의 수많은 사람이 외면했던 부끄러움을 외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수도인으로서 동주와 몽규의 삶에 나를 비추어볼 때 스스로가 너무나도 부끄러웠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시인 ‘서시’에 적힌 내용에 비추어보더라도 저는 지금까지 하늘을 우러러 자신을 비춰보지도 않았고, 잎새에 이는 바람(마음의 거리낌, 방심) 정도는 쉽사리 외면해버렸습니다. 스스로의 삶에 별(양심)이 보이지 않을 만큼 혼탁했고, 모든 죽어가는 것(남)을 사랑하기에는 이기적이면서도 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조차 몰랐습니다. 그런 제가 나에게 주어진 길인 도(道)를 만나게 된 것은 너무나도 감사한 일입니다. 상제님의 도를 알게 되었다는 것에 감사하고 나를 이끌어주는 선각이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다시 한번 되새겨 봅니다.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제 모습을 반성해 봅니다. 사람이 옳은 말을 듣고 실행치 않는 것은 바위에 물 주기와 같다는 상제님의 말씀과 은혜를 저버리지 말라는 훈회를 되새기며 앞으로는 부끄러움을 외면하지 않고 수도에 정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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