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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속 역사인물 : 탁월한 전략가 장량

탁월한 전략가 장량
 
 
연구위원 이광주
 
 
상제께서 앞날을 위하여 종도들을 격려하여 이르시니라.
“바둑에서 한 수만 높으면 이기나니라. 남이 모르는 공부를 깊이 많이 하여두라. 이제 비록 장량(張良)·제갈(諸葛)이 쏟아져 나올지라도 어느 틈에 끼어 있었는지 모르리라.…”고 말씀하셨도다. (공사 1장 36절)
 
  상제님께서 남이 모르는 공부를 깊이 많이 하라고 당부하시며 언급한 인물이 장량(張良, ?~기원전 187)과 제갈량(諸葛亮, 181~234)이다. 이들은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사(軍師)로 평가받고 있다. 장량이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을 도운 개국공신이라면, 제갈량은 유비(劉備)를 도와 삼국시대의 한 축인 촉한(蜀漢)을 세웠다. 군주들 중에는 자신을 도와 왕조의 기틀을 다지는 데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던 책사를 장량에 빗대어 ‘나의 장자방(張子房)’이라 부르는 사람이 많았다. 장량은 소하(蕭何), 한신(韓信)과 함께 한초삼걸(漢初三傑)로 불리며 한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웠던 인물이다. 그에 관한 내용은 『사기』 와 『통감』,  『한서』 등에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이를 토대로 장량의 생애와 초한전쟁 및 한나라 건국에 기여한 그의 활약상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협객 장량과 황석공의 만남
  장량은 전국시대 말기 한(韓)나라 성보(城父) 사람으로 자는 자방이다. 그의 집안은 조부와 부친이 5대에 걸쳐 한나라의 재상을 지낸 귀족 가문이다. 부친이 세상을 떠나고 20년 후에 진(秦)나라가 한나라를 멸망시켰다. 당시 장량은 나이가 어려서 벼슬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집에는 노복이 300명 될 정도로 부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동생이 죽었을 때 장례를 치르기는커녕 오히려 가산을 모두 털어 진시황을 척살할 자객을 구해 조국의 원수를 갚고자 했다. 진시황이 동방을 순시할 때, 장량과 자객은 박랑사(博浪沙)에 매복했다가 120근에 달하는 철퇴를 날렸다. 하지만 철퇴가 진시황을 뒤따르던 수레를 맞추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진시황이 크게 노하여 천하 각지를 수색하니, 장량은 이름을 바꾸고 하비(下邳)로 달아나 협객 노릇을 하며 숨어 지냈다.
  어느 날 장량이 한가한 틈을 타서 다리 위를 산책하다가 한 노인을 만난다. 그 노인은 장량을 몇 번 시험해 본 후 그에게 책 한 권을 건네며, “이 책을 읽으면 제왕의 스승이 될 수 있고, 10년 후에 그 뜻을 이룰 것이다. 13년 뒤에는 제수(濟水) 북쪽에서 나를 만날 수 있는데, 곡성산(穀城山) 아래의 누런 돌[黃石]이 바로 나일 것이다” 하며 떠났다. 노인이 준 것은 『태공병법』01이라는 책이었는데, 장량은 이 책을 기이하게 여겨 항상 익히고 소리 내어 읽었다. 한편, 장량이 하비에서 협객 노릇을 하며 의로운 일을 많이 할 때, 사람을 죽였던 항백(項伯: 항우의 숙부)도 한동안 장량의 집에서 숨어 지냈다.
 
 
유방을 만나 진(秦)의 수도를 점령하다
  10년 뒤 진나라는 시황제부터 이어져 온 폭정으로 나라가 위태로웠지만, 2세 황제는 사치와 방탕한 생활에 빠져 있었다. 그 와중에 진승과 오광의 난이 일어나 천하가 혼란스러워졌다. 그러자 장량도 청년 백여 명을 소집하여 유현으로 가던 중 유방을 만났다. 이때 유방은 그에게 군마(軍馬)를 관장하는 벼슬을 하사했다. 장량은 자주 『태공병법』으로 그에게 계책을 제시했는데, 다른 사람과 달리 유방은 기뻐하며 항상 그의 의견을 따랐다.02 그래서 장량은 “패공(沛公)은 아마도 하늘이 낸 인물일 것이다”라며 칭송하였다. 장량은 유방과 함께 초회왕(楚懷王)을 옹립한 항량(項梁: 항우의 숙부)을 만나 한(韓)나라의 한성(韓成)을 왕으로 세우도록 권했다. 이에 항량은 한성을 한왕(韓王)으로 삼고, 장량을 사도(司徒: 승상에 상당하는 지위)에 임명하여 한나라의 옛 지역을 수복하도록 했다.
  기원전 208년 말, 초회왕은 유방과 항우(項羽, 기원전 232~기원전 202)에게 진(秦)에 대한 공격을 명하며 누구든지 함양(咸陽: 진나라의 도성)에 먼저 진입하는 자를 관중(關中)03의 왕으로 세우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유방이 관중을 향해 서진(西進)하자 장량도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유방군에 합류했다. 이때 남양태수가 완성(宛城)을 굳게 지키고 있어서 유방은 우회하여 서쪽으로 진출했다. 그러자 장량이 진나라 군대의 강성함과 지형의 험준함으로 인해 완성을 공략하지 않으면 아군에 매우 위험함을 고하며 승리의 계책을 일러주었다. 그의 말에 깜짝 놀란 유방은 그날 밤 비밀리에 회군하여 완성을 겹겹이 포위했다. 형세가 불리해진 남양태수가 투항하니 유방은 완성에서 군사와 군량미를 충당해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유방이 가는 곳마다 적군을 물리치니 단기간 내에 진나라 성 10여 개를 함락시킬 수 있었다. 
  그 후 유방은 군대를 이끌고 요관(嶢關)에 도착했다. 천연 요새인 요관은 함양의 전략적 요충지로 방어는 쉽지만 공격이 어려운 곳이었다. 유방이 2만의 군사로 요관을 치려고 하자 장량이 만류했다. 그 대신 5만 명의 식량을 준비하게 하고, 다시 모든 산 위에 많은 깃발과 의병(疑兵: 거짓으로 만든 병사)을 세우게 함과 동시에 진나라 장수를 재물로 매수하게 했다. 진나라 장수가 진(秦)을 배반하고 유방과 연합하려고 할 때, 장량은 진나라의 병졸들이 따르지 않을 것을 염려했다. 그래서 유방에게 그들의 빈틈을 타서 요관을 급습하도록 했다. 유방군이 진나라 군대를 대파하여 쫓으니 마침내 진나라 군대가 붕괴하고 말았다. 유방이 함양에 이르자 진나라 왕 자영(子嬰)04은 성문을 열고 투항했다.
  함양에 입성한 유방은 진나라 궁실의 화려함과 아름다운 궁녀들, 진귀한 보물에 현혹되어 그곳에 머물고 싶어 했다. 번쾌(樊噲)가 그에게 진나라가 천하를 잃은 화(禍)의 근원이 여기에 있다며 궁궐 밖으로 나가기를 충간했으나 유방이 듣지 않았다. 그러자 장량이 진나라의 무도함을 말하며 천하를 위해 적들을 소탕하려면 검소함을 추구하고 사치와 향락은 멀리해야 한다고 진언했다. 유방은 장량의 충고를 받아들여 즉시 함양에서 나와 주변에 주둔했다. 그리고 함양의 백성들에게 약법삼장(約法三章)05을 선포하며 민심을 달래니 진나라의 악법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한고조를 도와 초한전쟁을 승리로 이끌다
  유방과 함께 함양으로 진군하던 항우는 대치 중이던 진나라 명장 장한(章邯)이 투항하자 질풍같이 서진하여 함곡관에 이르렀다. 그러나 관문이 굳게 닫힌 채 유방의 군사들이 성 위에서 지키고 있었다. 유방의 함양 진입 소식을 접한 항우는 크게 노하여 관문을 공격하게 했다. 항우군은 즉시 함곡관을 접수한 후 홍문(鴻門) 일대에 주둔하며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다음 날 유방에 대한 총공격을 감행할 계획이었다. 당시 항우군은 40만의 대병이고 유방군은 10만에 불과했으니 유방의 형세는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았다. 이때 항우의 숙부 항백이 몰래 유방의 진영으로 찾아가 장량에게 함께 달아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장량은 이를 거절하고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유방에게 고하며 항백을 통해 항우에게 사죄의 뜻을 전하게 했다.
  다음 날 유방이 백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홍문으로 찾아가 항우에게 사죄하니 항우도 의심을 풀고 그를 후하게 대접했다. 항우의 모사 범증(范增)이 연회 중 유방을 죽이라는 신호를 세 번이나 보냈지만 항우는 듣지 않았다. 그러자 범증은 항장에게 검무를 추다가 유방을 죽이라고 했더니 항백도 검무를 추면서 유방을 보호했다. 낌새를 눈치채고 장량이 장막 밖으로 나와 번쾌를 찾았다. 번쾌는 검과 방패를 들고 유방을 보호하며 항우의 불의한 처사를 강하게 비판했다. 항우가 멈칫하는 사이 유방은 측간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 번쾌와 장량을 불러 함께 나갔다. 유방은 장량에게 뒷일을 부탁한 후, 번쾌와 세 측근의 보호를 받으며 지름길을 통해 군영으로 돌아갔다. 장량은 유방이 군영에 도착했을 즈음 연회장으로 돌아와 작별인사를 전했다. 이 장면이 『사기』의 여러 명장면 중 백미로 꼽히는 ‘홍문의 연회’이다.
 
▲ 홍문의 연회: 『초한상쟁』 1권, p115, 陳丹旭 作, 중국上海人氏미술출판사 참조.
 

  한고조 원년(기원전 206) 정월, 항우는 팽성에 도읍한 후 자신을 서초패왕으로 봉하고 천하를 나누어 18명의 제후를 세웠다. 이때 유방을 한왕(漢王)으로 봉하고 오지인 파(巴)와 촉(蜀), 두 지역을 다스리게 했다. 장량의 공적이 뛰어났기 때문에 유방은 그에게 황금 100일(溢)06과 진주 2말을 하사했다. 장량은 상으로 받은 재물을 모두 항백에게 선물하면서 항우가 유방에게 한중(漢中) 땅을 더 봉하도록 요청했다. 그 결과 유방은 진령(秦嶺) 이남의 파와 촉, 한중 지역을 차지해 한왕으로서의 명색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그는 유방에게 파촉으로 갈 때 한나라군이 다 지나고 나면 유일한 통로인 잔도(棧道)07를 불태워 끊으라고 건의했다. 이것은 천하 사람들에게 동쪽으로 돌아올 뜻이 없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항우의 의심을 풀려는 조치였다.
  한동안 휴식을 취하며 군대를 정비한 유방은 잔도를 보수하는 척하며 몰래 진창을 넘어 관중 지역을 평정했다. 이 소식을 접한 항우가 크게 노하여 유방을 치려고 하자 장량은 즉시 서신을 보내 한왕이 더 이상 동진하지 않을 거라며 항우를 안심시키는 대신 제나라의 모반 사실을 알린다. 항우는 장량의 말을 믿고 서쪽은 내버려 둔 채 병력을 북쪽의 제나라 땅으로 집중시켰다. 이처럼 장량은 몇 장의 편지로 전쟁의 판도를 바꾸어놓으며 유방의 동진을 도왔다.
  한고조 2년, 유방은 여러 제후의 군대 56만 명을 집결시켜 세력을 크게 키웠다. 그해 4월 팽성을 공격하여 점거한 후 많은 재물과 미녀를 수중에 넣고 연회를 베풀며 천하를 차지한 듯 기뻐했다. 하지만 항우의 정예병 3만이 들이닥쳐 맹공격을 퍼붓자 유방군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유방은 몇십 명의 기마병과 함께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탈출해 하읍(下邑)에 이르렀다. 크게 낙심한 유방이 이 난국을 타개할 방책을 장량에게 물었다. 그는 초나라의 맹장 경포와 북서쪽에서 활약하는 팽월을 불러야 하고, 군왕의 장수 중 한신만이 큰일을 담당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들에게 함곡관 동쪽의 땅을 하사하고 함께 공격한다면 항우를 물리칠 수 있다고 했는데, 이것이 초한전쟁의 국면을 바꾼 ‘하읍의 계책’이다. 유방은 장량의 계책대로 즉시 수하를 보내 구강왕 경포를 설득하게 하였고 팽월과 연합하였다. 위왕(魏王) 표(豹)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는 곧 한신을 보내어 그를 치게 했고 그 기세를 몰아 연나라, 대나라, 조나라, 제나라 지역을 모두 함락시키게 하였다.
  한고조 3년, 항우가 형양에서 유방을 포위한 채 한나라군의 양식과 원군이 오는 길을 가로막아 한나라군이 버틸 수 없게 되었다. 이때 역이기(酈食其)가 육국(六國)의 후손들에게 인장을 하사하여 나라를 다시 세우게 한다면 천하의 패주가 될 수 있다고 간했다. 유방은 즉시 인장을 파서 그에게 직접 가지고 떠나라고 명했다. 그가 떠나기 전에 장량이 마침 외지에서 돌아와 유방을 뵈었다. 유방이 역이기의 방책에 대한 의견을 물으니, 장량은 “누가 대왕을 위해 이런 계책을 낸 것입니까? 이 계책대로 한다면 대왕의 대업은 가망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그는 당시의 형세를 논하며 8가지 이유를 들어 그 계책의 부당함을 역설했다. 그러자 유방은 “아무것도 모르는 서생 때문에 나의 대업을 망칠 뻔했구나!” 하면서 당장 그 인장을 녹여버리라고 명했다.
  유방이 형양에서 고전할 때, 한신은 북쪽에서 파죽지세로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한고조 4년에 한신은 제나라를 평정한 후 유방에게 자신을 제나라의 대리왕으로 세워달라고 요청했다. 이러한 요구에 유방이 격노하자 장량이 지금 형세가 매우 불리하므로 한신의 요구를 들어주게 함으로써 그의 이탈을 막았다. 유방이 한신과 팽월로 하여금 외각에서 초나라를 공격하게 하고 경포도 끌어들여 공격하자 초나라는 점점 세력이 약해지고 양식마저 떨어져 전세가 불리해졌다.
  한고조 4년, 유방은 항우와 조약을 맺고 홍구(鴻溝)08를 경계로 서쪽은 한나라 땅으로, 동쪽은 초나라 땅으로 정했다. 항우가 군대를 이끌고 동으로 떠나자 유방도 서쪽으로 회군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장량과 진평이 지금 천하의 형세가 한나라에 매우 유리하며 초나라는 지치고 군량이 떨어졌으니 그들이 퇴각할 때 습격하여 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유방은 고릉에서 항우와 크게 싸웠다. 이 마지막 전투에서 한신과 팽월이 나타나지 않아 고전을 면치 못하자 그 대책을 장량에게 물었다. 장량은 전쟁이 끝나면 초나라 땅을 나누어준다고 약속하게 하여 그들의 참여를 이끌었다. 그리고 항우군을 포위했을 때는 초나라 노래를 부르게 하여[四面楚歌] 초나라 군사들은 물론 항우마저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5년간 이어졌던 초한전쟁은 마침내 한나라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된다.
 
 
한나라의 초석을 다지고 공성신퇴(功成身退)를 이루다
  한고조 5년(기원전 202년) 2월, 유방은 정식으로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도읍을 어디로 정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유방의 심복과 대신들은 대부분 산동(山東) 출신이기 때문에 모두 낙양(洛陽)을 수도로 정하자고 건의했다. 그러나 누경은 관중의 지세가 갖는 중요성을 역설하며 관중을 수도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량이 누경의 주장에 동의하며 험준한 삼면의 지형으로 방비에 유리한 데다가 기름진 땅이 천 리에 달하고, 물길로 군대와 물자 수송이 유리하니 천혜의 요새인 관중을 수도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장량의 설명을 들은 유방은 즉시 수레를 타고 서쪽을 향해 나아가 관중에 도읍하였다.
  한고조 6년 정월, 유방은 대대적으로 공신들에게 봉지(封地)를 나누어 주었다. 장량은 체질이 약하고 병이 많았기 때문에 일찍이 독자적으로 군대를 통솔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초한전쟁에서 그는 유방을 수행하며 4가지 중요한 계책을 내놓아 전체적인 전쟁의 국면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유방은 “장막 안에서 계책을 세워 천 리 밖에서 승리를 결정지었으니, 이것은 모두 자방의 공로다. 스스로 제나라 땅에서 3만 호(戶)를 고르라”고 하였다. 한나라 초기 신하들의 식읍(食邑)09은 조참에게 내려준 1만 630호가 가장 컸으니 거의 세 배에 달하는 파격적인 우대였다. 그러나 장량이 이를 정중하게 사양하며 받지 않자 유방은 그를 유후(留侯)로 책봉하고, 소하(蕭何, 기원전 257~기원전 193)와 함께 1만 호의 봉지(封地)를 받게 했다.
  당시 유방은 공로가 큰 20여 명의 공신을 책봉했으나, 나머지 사람들은 밤낮으로 공을 다투어 책봉할 수가 없었다. 유방이 낙양의 남궁(南宮)에 있을 때 여러 장수들이 모래밭에 모여 앉아 논의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묻자, 장량은 저들이 지금 모반을 꾀하고 있음을 아뢰었다. 매우 놀란 유방이 그 까닭을 물었다. 장량은 저들이 공로는 있으나 과실이 있어 분봉 받지 못하고 도리어 죽임을 당할까 봐 두려워 모반을 꾀하는 것이라고 아뢰었다. 유방이 크게 근심하자 장량은 유방이 가장 미워하는 옹치를 먼저 책봉하면 저들이 모반을 꾀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유방이 그의 말대로 시행하니 과연 대신들이 모두 기뻐하며 마음을 놓았다.
  한고조 10년, 유방은 태자 유영을 폐하고 척부인의 아들 여의를 태자로 세우려 했다. 이에 여후(呂后)는 둘째 오빠를 장량에게 보내 계책을 구했다. 장량은 지금 황제가 불러도 응하지 않는 상산사호(商山四皓)10를 극진한 예로써 청해 태자를 보필하게 한다면 황제도 태자를 달리 보실 거라고 일러주었다. 2년 후, 경포의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온 유방은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직감하고 태자를 바꿀 결심을 한다. 어느 날 그는 연회를 베풀어 신하들을 청했는데, 태자도 황제를 모시며 옆에 서 있었다. 이때 유방은 선풍도골의 네 노인이 태자를 보좌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이 누구인지 물었다. 네 노인의 이름을 들은 유방은 깜짝 놀라며 그들이 유영을 보좌하니 태자를 바꿀 수 없겠다고 척부인에게 말했다. 이로써 유영이 태자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는데, 이 또한 나라를 안정시킨 장량의 공이었다.
  장량의 보좌로 천하가 안정되었으나 그는 병치레가 잦다는 핑계를 대고 집안에서 두문불출하며 지냈다. 이때 그는 늘 입버릇처럼 “세속의 일일랑 버리고 적송자(赤松子)11를 따라 노닐고자 바랄 뿐이다” 하면서 오곡을 끊는 벽곡(僻谷)과 도인법(導引法: 도교 양생법의 하나)으로 몸을 가볍게 하였다. 마침 한고조가 승하하고 태자가 뒤를 잇자 여후가 장량의 은덕에 감격해 하며 그의 건강을 염려하여 억지로 음식을 먹게 했다. 이에 장량은 거절하지 못하고 다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 후 8년 뒤 장량도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문성후(文成侯)라는 시호를 받았다.12
  중국 최고의 전략가 장량은 공을 이룬 뒤 권력의 중심에서 물러남으로써 자신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의 사당에 남아 있는 ‘지지(知止: 멈출 때를 안다)’와 ‘성공불거(成功不居: 성공한 곳에는 머무르지 않는다)’ 같은 글자를 새긴 기념물은 장량의 이런 정신을 잘 드러내고 있다.13 장량처럼 토사구팽을 당하지 않고 자신의 발자취를 고스란히 역사에 남긴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다. 그와 함께 활약했던 한신과 팽월은 죽임을 당했고 경포는 반역을 일으켰다가 유방에게 진압을 당했다. 이들과 달리 장량은 그칠 줄 알았고 성공한 후에는 그 자리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항상 과업에 충실했지만 더 큰 욕심을 부리지 않았기 때문에 천수(天壽)를 다할 수 있었다.14
  진나라는 중국을 최초로 통일했지만 20년을 지속하지 못했다. 진나라 말기 항우와 유방이 천하를 다툰 초한전쟁은 유방의 승리로 끝났다. 항우는 명문가의 자손으로 산을 뽑고 세상을 뒤덮을 기세를 가진 영웅이었지만 유방은 10리를 관할하는 정장(亭長) 노릇을 했을 뿐 변변한 이름도 가지지 못한 한량이었다. 그러나 유방에게는 장량이라는 걸출한 전략가가 있었다. 그는 초한전쟁의 전체적인 구도 속에서 긴 안목을 가지고 중요한 대목마다 적절한 전략을 제시하였다. 항우에게도 범증이라는 뛰어난 전략가가 있었지만 항우는 끝내 그를 믿지 못해 내치고 말았다. 하지만 유방은 장량의 전략을 충실하게 따랐는데 이것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원동력이 되었다.
  사마천은 『사기』 「유후세가」에서 “유후(장량)가 황제를 따라 대나라를 공격할 때 기이한 계책을 내어 마읍을 공략했고, 소하를 상국(相國: 승상)에 세우게 한 일 등 황제와 함께 조용히 천하 대사를 논의한 것이 매우 많았지만, 이는 천하의 존망에 관계된 바가 아니므로 여기에 일일이 기록하지 않는다”15 하였다. 또한, “한고조가 곤궁에 처한 일이 여러 번 있었는데, 유후는 그때마다 늘 공을 세웠으니 이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16라고 하였다. 장량이 팽성 전투에서 처절하게 패한 유방에게 준 계책은 초한전쟁의 마지막까지 유효하게 작용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그가 전투에서 지더라도 전쟁에서 이기는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탁월한 군사 전략가였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참고문헌
사마천, 『사기 본기』, 정범진 옮김, 서울: 까치, 1994.
____, 『사기 세가(하)』, 정범진 옮김, 서울: 까치, 1994.
____, 『사기 세가』, 김원중 옮김, 서울: 민음사, 2010.
반고, 『한서』, 김하나 옮김, 경기: 팩컴북스, 2013.
강지, 『통감』, 조수익 옮김, 서울: 홍신문화사, 1994.
김영수, 『현자들의 평생 공부법』, 경기: 위즈덤하우스, 2011.
렁청진, 『제왕과 책사』, 박광희 옮김, 경기: 다산북스, 2015.
신동준, 『사람은 어떻게 처신하는가』, 경기: 역사의아침, 2016.
우종철, 『역사에서 배우는 포용의 리더십』, 서울: 승연사, 2016.
오치규, 『유방의 참모들』, 경기: 위즈덤하우스, 2015.
이양호, 『장량』, 서울: 평사리, 2015.
장석만, 『사기에서 뽑은 영웅들의 출세학』, 서울: 사사연, 2010.
청녠치, 『중국을 말한다 5(진ㆍ서한)』, 남광철 옮김, 서울: 신원문화사, 2008.
 
 
 

01 기원전 11세기 주(周)나라의 개국공신인 강태공(姜太公)이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병법서이다. 병법서의 원조격인 이 『태공병법』에 관해 당태종(唐太宗)과 이정(李靖)의 토론을 모아놓은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에서 이정이 “장량이 배운 것은 강태공의 『육도(六韜)』와 『삼략(三略)』이다”라고 말한 기록이 있다. 이양호, 『장량』 (서울: 평사리, 2015), p.31.
02 잔병치레가 잦은 장량은 군대를 통솔해 전투에 나서기보다 뛰어난 계책으로 전투를 지휘하는 한편, 유방이 진정한 리더로 성장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여기에는 노인이 준 『태공병법』에 대한 깊은 공부가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 김영수, 『현자들의 평생 공부법』 (경기: 위즈덤하우스, 2011), p.65.
03 그 지역이 함곡관(函谷關) 서쪽, 산관(散關) 동쪽, 무관(武關) 북쪽, 소관(蕭關) 남쪽에 위치하여 네 관문의 중앙에 있었기 때문에 ‘관중(關中)’이라고 하였다. 대체로 지금의 섬서성(挾西省) 관중 평원 일대를 가리킨다. 사마천, 『사기 세가(하)』, 정범진 옮김 (서울: 까치, 1994), p.562 참조.
04 진시황의 손자로 진 2세가 조고(趙高)에게 살해된 후 자영이 왕위를 계승했지만, 재위 기간은 46일에 불과했다. 앞의 책, p.555 참조.
05 유방은 함양의 백성들에게 ‘사람을 죽이는 자는 사형에 처하고, 사람을 다치게 하는 자와 남의 물건을 훔치는 자는 그 죄에 따라서 처벌한다.’는 세 가지 간단한 법령만을 약정했다. 이 밖의 진나라 법령은 모두 폐지하여 모든 관리와 백성들이 안락한 생활을 누리게 하였다. 사마천, 『사기 본기』, 정범진 옮김 (서울: 까치, 1994), p.269 참조.
06 중량의 단위로 20량(兩) 혹은 24량(兩)이 1일(溢)이다.
07 산골짜기의 험한 곳에 건너질러 놓은 다리.
08 황하(黃河)와 회수(淮水)를 연결시키는 운하로서 대구(大溝)라고도 한다.
09 고대 제왕이나 제후가 신하에게 하사한 세습 봉지.
10 진나라 말기에 난리를 피하여 상산에 살던 동원공, 하황공, 녹리선생, 기리계 등 네 명의 백발노인.
11 전설 속의 신선(神仙). 신농씨(神農氏) 때의 우사(雨師)로 불 속에 들어가도 타지 않았으며, 곤륜산에 이르러 늘 서왕모(西王母)의 거처에 들어가 비바람을 타고 놀았다. 신농씨의 딸에게 신선술을 가르쳐 주어 함께 천상으로 올라갔다고 한다. 사마천, 『사기 세가(하)』, p.568; 이양호, 앞의 책, p.139 참조.
12 장량은 자신에게 『태공병법』을 준 노인을 만난 지 13년 후, 한고조를 따라 제북(濟北)을 지나갔는데, 과연 곡성산 아래에서 누런 돌을 보았다. 그는 그것을 가지고 돌아와 보물처럼 받들며 제사까지 지냈다. 장량이 죽자 누런 돌을 그와 함께 안장하였다. 그 후 사람들은 성묘하는 날이나 복일(伏日), 납일(臘日)이면 으레 장량뿐만 아니라 누런 돌에게도 제사를 지냈다. 사마천, 『사기 세가(하)』, p.568.
13 김영수, 앞의 책, p.66 참조.
14 일설에는 여후가 장량도 없애려고 모함하여 한고조가 여러 차례 군사를 보냈지만 장량이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지역 주민들과 끝까지 저항하니 결국 한고조도 그들을 정복하지 못하고 그곳을 ‘장량 일가의 땅[張家界]’으로 인정한 채 물러갔다고 한다. 중국 호남성 북서부에 위치한 장가계(張家界)는 해발 1,500m의 고원지대로 칼날 같은 봉우리가 3만7000개나 솟아 있는 곳인데, 바로 여기에 장량의 묘가 있다.
15 사마천, 『사기 세가(하)』, pp.567-568.
16 앞의 책, p.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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