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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8년(2018)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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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 지명 답사기 : 정읍 마동(馬洞)

정읍 마동(馬洞)
 
 
연구원 이정만
 
▲ 정읍 마동 일대 전경
 
도주께서 다음 해 정월 보름에 이 치복(호:석성)을 앞세우고 정읍 마동(馬洞) 김 기부의 집에 이르러 대사모님과 상제의 누이동생 선돌부인과 따님 순임(舜任)을 만나셨도다. 선돌부인은 특히 반겨 맞아들이면서 “상제께서 재세 시에 늘 을미생이 정월 보름에 찾을 것이로다”라고 말씀하셨음을 아뢰니라. 부인은 봉서(封書)를 도주께 내어드리면서 “이제 내가 맡은 바를 다 하였도다” 하며 안심하는도다. 도주께서 그것을 받으시고 이곳에 보름 동안 머무시다가 황새마을로 오셨도다. (교운 2장 13절)
 
  1919년 정월 보름, 도주님께서는 정읍 마동에서 봉서(封書)를 받으셨다. 종단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이 일이 있기 10년 전에 상제님께서는 누이동생인 선돌부인에게 봉서를 맡기시며, 장차 을미생이 정월 보름에 찾아오면 전해주라고 당부하셨다. 그런데 놀랍게도 상제님께서 재세 시 늘 말씀하시던 그 ‘을미생’이 선돌부인을 찾아오신 것이다. 그분이 바로 도주님이셨다.
  상제님께서는 재세 시에 종도들에게 천부적인 종통을 계승하실 진인(眞人)에 대하여 많은 말씀을 하셨다. 아무도 그 진인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도주님께서는 상제님의 모친과 강순임 그리고 (상제님의) 종도였던 이치복이 보는 가운데 상제님께서 비밀리에 남기신 봉서를 전해 받으신 것이다. 도주님께서 봉서를 받으신 일은 상제님의 종통을 계승하신 진인이 도주님이심을 객관적으로 입증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처럼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정읍 마동을 답사하기로 하였다. 
  정읍 마동은 현재 전북 정읍시 북면 화해리(全北 井邑市 北面 花海里) 조동(槽洞)마을에 속한다. 화해리(花海里)는 본래 고부군 우일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인근의 화야리(花野里), 가전리(加田里), 순목리(順木里), 조동(槽洞), 부동(付洞), 마동(馬洞)과 정읍군 북면 한교리 일부가 합쳐져서 화해리가 되었고, 우순면(雨順面)에 편입되었다. 이후 1935년 행정구역 개편 때, 북면에 편입되었다.01
  마을 입구에 도착하니 ‘조동마을’이라 새겨진 둥근 모양의 표지석이 우리를 맞이했다. 이곳에서 200m 정도 곧게 뻗은 길을 따라가다가 오른쪽으로 산을 끼고 좀 더 걷다 보면 마동마을 입구가 나온다. 그 옛날 상제님께서도 이 길을 따라 마동으로 걸어가셨을 것이다. 『전경』에는 상제님께서 마동에 오셨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다. 하지만 상제님께서 정읍 마동에 처음 오신 시기는 1908년 가을로 추정된다.02 이곳에 오시기 전에 상제님께서는 여기에서 동북 방향으로 5km 정도 떨어진 고부 학동(學洞)에 계셨던 것으로 짐작된다.03 그곳에서 며칠을 머무시다가 떠나실 때 박공우에게 “나의 이번 길은 한 사람의 절을 받기 위함이니 이 절이 천하에 널리 미치리라”고 하셨다.04 그리고 마동으로 오셔서 집 한 채를 마련하시고, 누이동생 선돌부인을 그곳에 살게 하셨다.
 
▲ 마동과 학동 마을 일대(출처: Daum 위성지도)
 
 
▲ 입석리 입구 선돌(주소: 전북 정읍시 고부면 입석리)
 

  선돌부인은 일찍이 고부군 입석리(立石里)에 사는 박창국(朴昌國)과 혼인하였다. 선돌이란 호칭은 시집간 곳의 지명인 ‘입석’의 순우리말 ‘선돌’을 따서 불린 택호(宅號)이다. 혼인한 지 10년이 넘도록 아이가 없어 박창국은 소실을 두었고 그녀를 심하게 박대했다고 한다. 이에 상제님께서는 마동에 집을 마련해주어 살게 하셨다. 그리고 선돌부인에게 봉서를 맡기시며 “을미생이 정월 보름에 찾아올 것이로다”라고 말씀하셨다.05
  우리는 도주님께서 선돌부인을 만나셨던 김기부의 집을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마동 입구 부근에 세워진 기념비가 가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계단 축대 위에 거북 좌대를 앉히고 그 위에 기념비를 세웠는데, 비(碑) 정면에는 ‘화해제우지(花海際遇地)’라 쓰여 있었다. 이 비는 원불교 교조 소태산 박중빈(朴重彬, 1891~1943)과 그의 법통을 이은 제2대 종법사 정산 송규(宋奎, 1900~1962)가 김해운(金海運, 1872~1939)의 집에서 처음 만난 것을 기리기 위하여 1986년에 건립되었다. 김해운은 4남 2녀를 두었는데, 이중 장남이 김기부(金基富, 1896~?)이다.
  기념비에서 30m쯤 더 올라가니 김기부의 집터가 나왔다. 건물은 모두 없어지고 빈터만 남아있었다. 본채가 있던 자리에는 흙을 돋우어 놓아 본채의 위치와 규모를 짐작하게 해 주었다. 건물이 헐리기 전에는 본채 외에도 아래채, 까대기06 등의 건물이 더 있었다고 한다.07 새마을 사업을 하기 전에는 동네 집들이 모두 초가집이었다고 하니 도주님께서 이곳에 오셨을 때 김기부의 집도 초가집이었을 것이다.
 
▲ 화해제우지비(花海際遇地碑)
 
 
▲ 김기부 집터
 

  그런데 상제님께서는 왜 마동에 봉서를 남겨두셨을까? 그 해답을 얻기 위해선 ‘마동’이란 지명의 유래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마동(馬洞)’은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말[馬]과 관련이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마동의 지형이 말의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08 신기하게도 인접해 있던 예전의 조동마을은 약 300년 전에 지형이 말의 먹이통처럼 생겼다고 해서 마을 이름에 마소의 먹이를 담는 통을 의미하는 ‘구유 조(槽)’ 자가 붙여졌다고 한다.09
  유래는 알 수 없으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람 성씨를 동물과 관련지어 왔다. 이를테면 강 씨(姜氏)는 강아지, 조 씨(趙氏)는 말, 정 씨(鄭氏)는 당나귀 등이 그것이다. 마동 지명과 관련하여 도전님께서는 “마동은 말 마(馬), 동리 동(洞)이다. 말[馬]은 조 씨(趙氏)를 가리키는 말이니, 봉서를 받으신 곳이 마동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10 상제님께서 ‘마동’에 집을 얻어 선돌부인을 살게 하시고 화천 하시기 전 봉서를 남기신 것은, 장차 조 씨 성을 가진 도주님께서 봉서의 주인이 되실 것을 암시하셨던 것이다. 
  도주님께서는 정읍 마동에서 봉서를 받으시고 그곳에서 보름 동안 더 머무시다가 다시 도본부(道本部)가 있는 황새마을로 가셨다. 그리고 수개월 후 어느 날 통사동 재실에서 도주님을 따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무극대운(无極大運)의 해원상생 대도(大道)의 진리를 설법하시어 도(道)를 밝혀 주셨다.
 
▲ 김기부 집터에 있던 건물 위치
 
 
 
 

01 임남곤, 『정읍향리지』 (전북: 정읍문화원, 2002), p.160; 한글학회, 『한국지명총람 12: 전북편·하』 (서울: 한글학회, 2003), p.407 참고.
02 이상호, 『증산천사 공사기』 (경성부: 상생사, 1926), p.113 참고.
03 행록 4장 30절.
04 예시 48절.
05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전경』 다시 읽기: 도주님의 성과 존휘, 존호」, 《대순회보》 170호(2015), p.22 참고.
06 건물이나 담 따위에 임시로 덧붙여서 만든 허술한 건조물.
07 2012. 12. 27, 마을 주민 ○○○ 증언.
08 한글학회, 『한국지명총람 12:전북편·하』 (서울: 한글학회, 2003), p.407 참고.
09 임남곤, 『정읍향리지』 (전북: 정읍문화원, 2002), p.162 참고.
10 도전님 훈시(1984.12.26)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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