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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9년(2019)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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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기고 : 상제님께서 인용하신 한시 2

상제님께서 인용하신 한시 2
 
『현무경(玄武經)』에 나오는 주자(朱子)의 무이구곡(武夷九曲)
 
 
김탁01
 
▲ 옥녀봉
 
 
▲ 지도출처: Goog Earth
 
 
  증산 성사께서 남기신 유일한 친필저작인 『현무경』의 허령부(虛靈符), 지각부(智覺符), 신명부(神明符)에는 3번이나 ‘무이구곡(武夷九曲)’이라는 표현이 나타난다. 『현무경』은 1909년 정월에 성사께서 친히 저술하신 책으로, 짧은 글귀와 여러 개의 부(符)로 이루어진 신묘한 책이다.
  무이구곡(武夷九曲)은 주자(朱子, 1130~1200)가 정사(精舍)를 짓고 제자들을 양성하던 장소이며, 후대에는 주자가 학문을 이룬 성지(聖地)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이러한 사정에 따라 현재 유포되고 있는 『현무경』의 이본들 가운데는 주자(朱子)의 무이구곡시(武夷九曲詩)를 첫머리에 싣고 있는 경우도 있다.02
  성사께서는 시의 제목만 적어놓았을 뿐이지만, 이 시는 성사를 신앙하는 다수의 교단에서 애송되었으며, 나아가 진리의 문을 여는 핵심적인 열쇠로까지 받아들여졌다. 아울러 이 시는 세상의 변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믿어져 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흔히 ‘무이구곡시’로 불리지만 이 시의 원제목은 ‘순희갑진중춘(淳熙甲辰仲春) 정사한거(精舍閒居) 희작무이도가십수(戱作武夷櫂歌十首) 정제동유상여일소(呈諸同遊相與一笑)’이다. 즉 “순희 갑진년[남송(南宋) 효종(孝宗) 11년, 1184년] 봄날에 정사에서 한가로이 지내다가 무이(武夷) 뱃노래 10수를 재미 삼아 지어 여러 벗에게 드리노니, 더불어 한바탕 웃어 보세나”라고 풀이할 수 있다. 시의 제목이 너무 길기 때문에 이를 줄여서 ‘무이도가십수(武夷櫂歌十首)’, ‘무이시(武夷詩)’ 또는 ‘무이구곡시(武夷九曲詩)’라고 부르기도 한다.
  무이구곡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무이산상유선령(武夷山上有仙靈)  무이산 위에 선령(仙靈)이 있으니
산하한류곡곡청(山下寒流曲曲淸)  산 아래 차가운 물, 굽이굽이 맑구나.
욕식개중기절처(欲識箇中奇絶處)  그 가운데 빼어난 곳 알고 싶거든
도가한청양삼성(櫂歌閒聽兩三聲)  뱃노래 두어 곡조를 한가로이 들어보세.
 
 
일곡계변상조선(一曲溪邊上釣船)  1곡(一曲) 물가에서 낚시 배에 오르노니
만정봉영잠청천(幔亭峯影蘸晴川)  만정봉 그림자는 청천(晴川)
03
에 잠겨있네.
홍교일단무소식(虹橋一斷無消息)  무지개 다리 한번 끊어진 뒤 소식이 없고
만학천암쇄취연(萬壑千巖鎖翠煙)  일만 골짜기 일천 바위엔 푸른 안개만 자욱하네.
 
 
이곡정정옥녀봉(二曲亭亭玉女峯)  2곡(二曲)에 솟은 아름답디 아름다운 옥녀봉이여!
삽화임수위수용(揷花臨水爲誰容)  꽃 꽂고 물가에 선 그 모습 누구를 위한 건가?
도인불부황대몽(道人不復荒臺夢)  도인(道人)은 황대몽
04
을 다시 꾸지 않는데
흥입전산취기중(興入前山翠幾重)  흥에 겨워 앞산드니 푸르름이 첩첩이네.
 
 
삼곡군간가학선(三曲君看架壑船)  3곡(三曲)에 매어둔 가학선(架壑船)05 그대는 보았는가?
부지정도기하년(不知停櫂幾何年)  노 젖기 멈춘 지 몇 해인지 모르겠네.
상전해수금여허(桑田海水今如許)  뽕나무밭이 바다가 됨도 이와 같거늘
포말풍등감자련(泡沫風燈敢自憐)  물거품과 풍등 같은 인생 가련하기 그지없다.
 
 
사곡동서양석암(四曲東西兩石巖)  4곡(四曲) 동 서쪽에 두 바위 우뚝 섰는데
암화수로벽람삼(巖花垂露碧㲯毿)  바위에 핀 꽃, 이슬 머금어 푸르게 드리웠네.
금계규파무인견(金鷄叫罷無人見)  금계(金鷄) 울었건만 인적은 보이지 않고
월만공산수만담(月滿空山水滿潭)  빈 산엔 달빛, 연못엔 물이 가득하네.
 
 
오곡산고운기심(五曲山高雲氣深)  5곡(五曲)의 산 높고 구름 기운은 깊어
장시연우암평림(長時煙雨暗平林)  오랜 안개비에 평림은 어둑하네.
임간유객무인식(林間有客無人識)  숲 속 나그네 있음을 아는 이 없지만
애내성중만고심(欸乃聲中萬古心)  어기여차 뱃노래엔 변치 않는 마음 있다네.
 
 
육곡창병요벽만(六曲蒼屛遶碧灣)  6곡(六曲)의 푸른 바위 병풍이 푸른 물굽이를 두르는데
모자종일엄시관(茅茨終日掩柴關)  초가집 사립문은 종일토록 닫혔구나.
객래의도암화락(客來倚櫂巖花落)  손이 와서 노 저을 제, 바위 위 꽃은 떨어지는데
원조불경춘의한(猿鳥不驚春意閒)  원숭이와 새조차 놀라지 않으니 봄 정취 한가롭네.
 
 
칠곡이선상벽탄(七曲移船上碧灘)  7곡(七曲)에 배를 저어 벽탄(碧灘)으로 올라가며
은병선장갱회간(隱屛仙掌更回看)  은병봉(隱屛峯)과 선장봉(仙掌峯)
06
을 다시 돌아보니
각련작야봉두우(却憐昨夜峯頭雨)  어여뻐라 지난밤 봉우리 내린 비여.
첨득비천기도한(添得飛泉幾道寒)  폭포수에 더해져 그 얼마나 차가울까?
07
 
 
팔곡풍연세욕개(八曲風煙勢欲開)  8곡(八曲)에 바람 부니 연무가 걷히려 하는데
고루암하수영회(鼓樓巖下水縈洄)  고루암 아래 강물은 굽이쳐 돌아드네.
막언차처무가경(莫言此處無佳景)  이곳에 아름다운 경치가 없다 말하지 마오.
자시유인불상래(自是遊人不上來)  여기부터는 유람하는 사람들이 올라오지 않아서라오.
 
 
구곡장궁안활연(九曲將窮眼豁然)  9곡(九曲)에 다다르니 눈앞이 확 트이고
상마우로견평천(桑麻雨露見平川)  이슬 머금은 뽕나무와 삼밭에 넓은 들이 보이네.
어랑갱멱도원로(漁郞更覓桃源路)  어부는 도화낙원 가는 길 다시 찾으려하나
제시인간별유천(除是人間別有天)  이곳 말고 인간 세상에 별천지 있겠는가?
 
  주자(朱子)가 이 시에서 노래한 무이산(武夷山)은 중국 복건성(福建省) 숭안현(崇安縣) 남쪽에 위치한 산이다. 무이산은 36개의 봉우리와 99개의 동굴이 있는, 산세가 빼어나고 기암괴석이 즐비하고 맑은 시냇물이 굽이쳐 흐르는 절승지(絶勝地)이다.
  위에서 인용한 주자의 무이구곡시는 특히 우리나라에서 그 해석을 둘러싸고 상당히 많은 학자들이 논란을 벌였던 시이다. 무이구곡시는 우리나라에 고려 말기 무렵에 이미 소개가 되어 있었으리라고 추정된다.08 구체적으로는 고려 말 원천석(元天錫, 1330~?)이 찬한 『운곡시사(耘谷詩史)』에 이식(李植)의 ‘칠봉서원제영(七峯書院題詠)’이라는 시가 실려 있는데, 이 시의 말구(末句)에서 “의연히 구곡(九曲)이 무이산에 있네(依然九曲武夷中)”라고 노래했다. 또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주문공무이정사도용문공운(朱文公武夷精舍圖用文公韻)’이라는 오언절구(五言絶句)의 시를 지었다. 나아가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 1418~1453)은 한양(漢陽) 북문(北門) 밖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천하의 좋은 그림과 글씨를 모았을 정도였다. 즉 14세기 후반에서 15세기 중반에 이르면, 무이도가(武夷櫂歌)나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가 우리나라의 지식인 계층에 전파되었다고 생각된다.
 
▲ 무이계곡 전경
 

  중국 문학사에서 주자의 무이구곡시는 거의 언급되지도 않으며, 따라서 이 작품에 대해서 후세의 학자와 사람들도 별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중국인들은 이 시를 기껏해야 경치를 읊은 시나 도교적 신앙이 배어 있는 시로 인식했을 따름이다. 즉 중국인들은 이 시에 계속 관심을 가져왔지만, 주자학(朱子學)이나 주자(朱子)의 문학론(文學論)과 연관하여 이해하지는 않았으며 다만 칠언절구(七言絶句) 10수(十首)로 된 한 편의 연시(聯詩)로, 무이구곡(武夷九曲)의 아름다움과 그 속에 깃들인 도교적 전설을 담은 서정시(抒情詩)로 파악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당대 지식인들은 이 무이구곡시를 열광적으로 수용하고 적극적인 논의를 진행했다. 즉 조선에서는 무이구곡시가 단순한 화운(和韻)09에 머문 것이 아니라 주자학(朱子學)의 묘리(妙理)를 읊은 재도시(載道詩)10 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에 따른 수많은 비평과 아울러 그에 대한 다양한 문학적 논쟁까지 야기한 것이다. 이것은 무이산(武夷山)과 무이구곡시(武夷九曲詩)가 유달리 조선의 사림파(士林派)에 있어서 성역(聖域)으로 인식되었고, 성시(聖詩)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이구곡시를 수용함에 있어서 조선의 사림파 역시 두 갈래로 나뉘는 경향이 있었다. 즉 문학작품을 통해 주자학적인 도(道)를 어떻게 형상화할 것인가에 관한 문이재도론(文以載道論)11의 논쟁이었다. 이를 크게 보면 입도차제(入道次第)12와 인물기흥(因物起興)13 의 두 흐름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무이구곡시의 논쟁에 참여한 학자는 사가(四佳) 황거중(黃居中), 퇴계(退溪) 이황(李滉),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포저(浦渚) 조익(趙翼), 한강(寒岡) 정구(鄭逑),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갈봉(葛峰) 김득연(金得硏), 성호(星湖) 이익(李瀷) 등이다. 역사상 명망이 있는 학자들이 거의 모두 참여한 논쟁이었다고 평가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주자(朱子)가 지은 10수로 이루어진 한 편의 시를 두고 당대의 기라성과 같은 학자들이 몇 세기를 두고 논쟁을 펼친 사실이 놀랍다. 그들은 무이산(武夷山)을 성스럽고 아름다운 곳으로 여겼고, 그림으로 그려 걸어놓고 흠앙(欽仰)까지 했을 정도였다.
  먼저 당시 중국의 몇몇 주석가들과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 포저(浦渚) 조익(趙翼, 1579~1655) 등은 이 시를 학문입도차제(學問入道次第)의 조도시[造道詩, 도학(道學)의 성취단계를 노래한 시]로 보아 우입성역(優入聖域)14 하는 길을 제시하는 시로 보았다. 그들은 이 시를 사림파가 추구했던 이상적인 지고(至高)의 시로 인식했다.
  이러한 시 해석의 입장에서는 시의 구절마다 그리고 단어마다 특별한 의미와 비유가 있다고 본다. 즉 1곡의 “무지개다리가 한 번 끊어진 뒤”는 도통(道統)이 끊긴 일을 비유한 것이고, 2곡은 여색(女色)을 멀리하라는 원색(遠色)의 가르침이며, 3곡은 견위수명(見危授命)15하고 살신성인(殺身成仁)하라는 사생지지[捨生之志: 도(道)를 위해서는 생명까지 버려야 한다는 의지의 표현]의 교훈이며, 4곡은 진식(眞識)을 노래했고, 5곡은 학문을 하다가 의심을 품는 우각의(又却疑)의 뜻을 노래했으며, 6곡은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하여 계속 정진해 나가야 함을 나타냈으며, 9곡은 도학(道學)의 이치를 크게 깨달은 것이며, 도원(桃源)으로 가는 별도의 길에 들어서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일련의 여러 대상을 구경하면서 일맥상통하는 학문하는 차례를 가르쳐 준 시라고 보는 입장에서 제1곡에서 9곡으로 이어지는 각 시는 도학(道學)의 성취와 완성으로 나아가는 단계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주자가 이 시를 읊을 때 어떤 의도로 무이구곡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았다는 결과를 낳게 되어, 약동하고 쾌활한 시 본래의 맛을 사라지게 하는 문제가 있었다. 즉 선입견을 가지고 경치를 바라본다면, 과연 그 경치가 제대로 작가의 마음에 와 닿을 수 있을까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경치를 보고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도의(道義)를 찾으려 한다면, 보이는 대상에 조그마한 꼬투리라도 있으면 이를 견강부회(牽强附會)하기 쉽다. 이렇게 되면 경치와 자신의 감정이 진실되지 못하고 괴리되어, 결국 시가 절실하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입도차제적(入道次第的)인 해석에 반해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은 인물기흥(因物起興)으로 보아 계비지사(戒譬之辭)16로써의 산수시[山水詩: 강호(江湖)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로 보았다. 즉 사물에 인(因)하여 흥(興)이 일어나서 가슴속의 품은 뜻을 묘사한 것으로 본 것이다.
  기대승은 주자(朱子)와 같은 성인이 어찌하여 각 곡(曲)의 경치마다 도를 닦는 방법과 절차를 암시하는 번잡한 일을 했을 것인가라고 반론을 제기한다. 나아가 그는 2곡의 옥녀봉에 색(色)을 멀리하라는 경계심을 붙였고, 3곡의 가학선(架壑船)에 사생지지(捨生之志)의 의지를 붙였기 때문에 배우는 자는 반드시 원색사생(遠色捨生)한 다음에야 가히 도를 배울 수 있다는 김인후(金麟厚)의 주장에 대해, 여색(女色)을 멀리하고 생(生)을 버릴 수 있는 의지는 초학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들어 반론을 제시하고 있다.
 
▲ 창주 이성길 필 무이구곡도(滄洲李成吉筆武夷九曲圖) 조선시대(1592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리고 기대승은 김인후가 4곡을 진리를 터득한 것으로 보고 5곡에서 다시 의문이 있다고 설명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9곡에 대해서는 구곡이 끝나고 눈앞에 상마우로(桑麻雨露)가 평천(平川)에 나타났다는 것이 바로 청유이광(淸幽夷曠)17한 경지이며, 유람의 구극(究極)이라고 풀이하였다. 따라서 여기에 이르러서도 아직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 도원지경(桃源之境)을 찾는다면 별유천(別有天)을 구하는 것이지 인간사(人間事)는 아니다라고 해석했다. 즉 달리 이상향을 찾는 일을 경계하는 뜻으로 풀이했다.18
  결국, 기대승은 주자가 경치를 봄에 따라 일어나는 자신의 감정을 진솔하게 표현했을 따름이며, 그 경치와 감정이 맞닿아서 그를 서술한 시어(詩語)가 저절로 절실하게 된 것으로 보았다. 한편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의 의견을 받아들여 자신이 지은 무이도가(武夷櫂歌)에 화답한 시의 9곡(九曲) 부분을 전면 수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퇴계는 하서(河西)와 고봉(高峰)의 설을 절충하는 입장이었다.
  필자는 이 시가 성리학적 도(道)의 완성이나 그 추구과정을 이야기하는 교훈적인 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벗과 더불어 즐기자고 만들었다는 시가 도학자(道學者)의 길을 잘 가라는 충고라고 한다면, 주자(朱子) 자신이 시의 제목을 짐짓 만들어 친구들을 속인 일밖에 안 된 것이기에 따라서 기본적으로 이 시는 구체적인 경치를 보고 느낀 감상을 토로한 시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구곡(九曲)은 실제로 있는 경치이며, 이에 대해 그린 그림이 중국뿐만 아니라 조선(朝鮮)에서도 널리 유포되었기19  때문이다.
  무이구곡도는 조선조 성리학자들 사이에 주자학을 실물을 통해서 보다 가깝게 접하게 하는 기능을 하였다. 물론 글만 아니라 그림으로서의 구곡도(九曲圖)를 보고서도 도학(道學)의 성취과정으로 해석할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경치는 단순한 경치가 이미 아니기 때문에 철학적 사색의 과정이나 결과와 연관시켜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에 구체적인 그림으로 그려진 무이구곡도를 보고서도, 실제 경치와의 관련성을 부인한 일부 조선의 주자학자들의 생각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아 보인다.
  필자의 이와 같은 입장에도 불구하고, 시를 지은 주자(朱子) 자신이 과연 어떠한 입장에서 작시(作詩)했던지는 상관없이, 무이구곡시는 읽는 이가 읊조리고 감상하는 사이에 달리 해석되고 음미 될 수 있다. 시가 지은이의 한뜻으로만 새겨질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그 시를 읽고 도학(道學)의 전개과정으로 느끼든지, 단순한 경치를 읊었다고 평하든지, 경치를 보고 감흥을 일으켜 지었다고 보든지는, 전적으로 읽고 감상하는 이의 판단에 달려있다. 시가 창작되어 간행되었을 경우 이미 그 시는 시인의 것이 아니며, 따라서 시인의 본래 의도대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 즉 시에 있어서 작자의 본의(本意)와 독자의 의사(意思)는 다를 수도 있고, 또 달라야 하는 것이다. 결국, 주자의 본의와 다른 시 해석과 수용, 그리고 비평이 배제되거나 배척되어서는 안 된다.
  성사께서는 당시 전통사상의 주류를 이루던 유학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식견을 갖고 있었으며,20무이구곡시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성사께서 무이구곡시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의 차이나 상반되는 주장들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성사의 친필저작인 『현무경』에 “무이구곡”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현무경』에 앞날의 비밀이 비장(秘藏)되어 있다고 믿는 후대의 수도인들이 무이구곡시에 대해 새롭게 해석할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다시 말해 신앙대상이신 증산 성사께서 미래의 일을 정하는 과정에서 무이구곡시를 사용했다면 성사께서 짜 놓으신 도수에 따른 교운이나 진법 등을 무이구곡시를 통해 알 수 있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주자의 무이구곡시는 도를 논한 과정을 노래한 시냐 아니면 경치에 감흥되어 읊은 시냐 라는 오랜 논쟁을 지나, 성사를 신앙하는 수도인들에게 있어 이 세상에 이상향을 건설하기 위한 성사의 천지공사의 비밀을 간직한 시로 받아들여진다고 볼 수 있다.
 
 
 
 

01 한국학중앙연구원 종교학 박사, 저서 , 『증산교학』, 『증산 강일순』, 『한국의 관제신앙』, 『한국의 보물, 해인』, 『조선의 예언사상』 등.
02 『현무경』 (증산법종교본부, 1986)
03 청천은 지명이므로 “맑은 시내” 등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04 폐허가 된 옛 누각의 영화를 의미함. 옥녀의 옛 낭군인 대왕은 옛날의 영화를 꿈꾸지 않는데 옥녀만 머리에 꽃을 꽂고 물가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뜻.
05 가학선(架壑船)은 무이(武夷) 3곡(三曲) 소장봉(小藏峯)의 절벽에 걸려 있다는 전설적인 배다.
06 은병(隱屛)은 5곡(五曲)의 대표적인 봉우리이고, 선장(仙掌)은 6곡(六曲)을 대표하는 봉우리이다. 따라서 은병의 은(隱)을 “우뚝 솟은”, “숨겨진”, “희미한” 등으로 풀이해서는 안 된다.
07 7곡(七曲)의 마지막 두 구는 판본에 따라 ‘人言此處無佳景 只有石堂空翠寒’라고 쓰기도 한다.
08 이민홍, 『사림파 문학의 연구』 (형설출판사, 1985), 58쪽.
09  남이 지은 시의 운자를 써서 답시를 지음.
10 도덕적 가치를 실은 시.
11 문장으로 도를 싣는다는 뜻으로, 문(文)과 도(道)의 관계에서 도를 더 강조하는 문학관.
12 도에 들어가는 차례.
13 사물들로 인하여 흥이 일어남.
14 넉넉히 성인의 경지에 들어감.
15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침.
16 비유함을 경계하는 말.
17 맑고 고요하고 평탄하고 탁 트임.
18 고봉 기대승, 『고봉전서(高峯全書)』, 「고봉퇴계왕복서(高峯退溪往復書)」 권1, 별지무이도가화운(別紙武夷櫂歌和韻), 44쪽-48쪽.
19 현재 전하는 가장 오래된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는 이성길(李成吉, 1562-?)이 1592년에 그린 그림이다.
20 김탁, 「한국종교사에서의 유교와 증산교의 만남」, 『석산 한기두 박사 회갑기념논문집 한국종교사상사』 (원광대학교 출판국, 1993)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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