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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9년(2019)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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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단역사코너 : 둔궤(遁櫃) 이야기

둔궤(遁櫃) 이야기



연구원 이정만




  1984(갑자)년 3월 25일 우리 종단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잃어버렸던 둔궤를 찾게 된 일이다. 둔궤는 도주님의 공부에 쓰이고 난 후 도난당하여 행방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60여 년이 지난 1984년에 갓 입도한 한 도인을 통하여 행방이 알려지고 그 소유자가 기증하여 도장으로 모셔오게 되었다.
  종단 역사에서 둔궤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명확하게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 도(道)의 연원(淵源)이신 상제님과 도주님 그리고 도전님 세 분 모두에게 쓰임이 된 중요한 성물(聖物)이므로 둔궤의 내력에 대해서 정리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둔궤에 관련된 『전경』과 인터뷰 내용 그리고 기타 내부자료 등을 종합하여 둔궤가 만들어져 우리 도장에 모셔지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둔궤는 동곡 약방이 설치되면서 만들어졌다고 추측된다. 약방이 설치되고 난 뒤에 상제님께서 약장과 궤에 대한 공사(公事)를 함께 보신 것으로 보아 이경문이 만든 기구 중에는 약장 외에도 궤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01
  약방이 설치된 후 상제님께서는 동곡에서 “원형이정 봉천지 도술약국 재전주동곡 생사판단(元亨利貞奉天地道術藥局 在全州銅谷生死判斷)”이란 글귀를 쓰셔서 불사르셨다. 그리고 약장과 궤로 공사를 행하셨다. 약장에는 상단 열다섯 간 중 정 가운데 간에 “단주수명(丹朱受命)”이라 쓰고 그 속에 목단피를 넣고 그 아래 간에 “열풍 뇌우 불미(烈風雷雨不迷)”라고 쓰셨다. 또 칠성경과 우보 상최 등양명(禹步相催登陽明)을 백지에 쓰시고, 이 종이를 약장 위에서 뒤쪽으로 붙이고 그 위에 “양정 유월 이십일 음정 유월 이십일(陽丁六月卄日陰丁六月卄日)”이라 쓰셨다. 그리고 궤 안에는 “팔문둔갑(八門遁甲)”이라 쓰고 그 글자 위에 “설문(舌門)” 두 자를 낙인하신 후 그 글자 주위에는 24개의 점을 홍색으로 찍으셨다.02 약장에는 바깥에 글을 쓰시거나 붙여 공사를 행하셨고, 궤에는 속에 글을 쓰거나 낙인하시며 공사를 행하셨다.
  상제님께서 공부에 쓰신 둔궤는 1911년 이후 정읍 대흥리에 있는 보천교 본부에 옮겨졌다가03 1919년 9월 4일에 다시 도주님에 의해 통사동 재실04로 옮겨졌다. 둔궤가 이곳으로 옮겨진 계기는 상제님의 누이동생 선돌부인이 도주님께 둔궤에 대해 말씀드렸기 때문이다.
  도주님은 1919년 정월 보름 정읍 마동에서 선돌부인을 처음 만나셨다. 그곳에서 선돌부인은 정월 보름에 찾아오는 을미생에게 전해주라는 상제님의 말씀에 따라 봉서(封書)를 도주님께 전했다. 이후 선돌부인이 “구릿골 약방(동곡 약방)에 비치하셨던 둔궤가 천지도수의 조화둔궤라, 하루바삐 그것을 찾도록 함이 어떠하겠나이까”라고 도주님께 아뢰었다.05 이에 도주님께서는 1919년 9월에 정읍 대흥리 보천교 본부에 둔궤가 있음을 확인하시고, 9월 4일 보천교 본부에서 통사동 재실로 둔궤를 옮겨오셨다.06
  다음 해인 1920년에 도주님께서 통사동 재실에서 밤낮으로 불면 불식(不眠不息)하면서 공부하시던 중 2월 17일(양력 4월 5일)에 둔궤가 봉안된 곳에서 벼락 치는 소리가 나더니 그것이 저절로 열리는 이적(異蹟)이 일어났다. 1908년 상제님께서 천하창생을 살리기 위해 동곡약방에서 행하셨던 공사 내용이 10여 년이 흐른 뒤 도주님께 전해진 것이다. 열린 둔궤 속에는 호피 한 장과 반쯤 핀 국화 한 송이가 그려 있고 양피(羊血) 스물넉 점이 궤에 찍혀 있고 오강록(烏江錄) 팔문둔갑(八門遁甲) 설문(舌門)이란 글자가 쓰여 있었다.07 도주님께서는 천지공사의 도수가 담긴 둔궤를 모시고 후천 5만 년의 도수를 풀어가는 공부를 계속하셨다.
  이후 도주님께서는 둔궤를 함안 반구정(伴鷗亭)08으로 옮겨 그곳에서 둔궤를 모시고 행한 공부를 마치셨다. 도주님의 공부에 쓰임을 다한 둔궤는 이후에 창원 사람 조주일(曺周一)이 훔쳐 달아났다. 훗날에 종도들이 이를 알고 매우 안타까워하니 도주님께서 “그 시기의 도수에 쓰였으면 족하니라. 둔궤의 둔자는 도망 둔자이도다”고 그들에게 이르셨다.09 도주님의 공부에 쓰인 둔궤는 이렇게 사라진 후 오랫동안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로부터 6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어느 날, 사라졌던 둔궤의 행방이 알려졌다.
  도전님께서 둔궤의 행방을 아시고 직접 찾으러 가신 때는 1984년 3월 25일(양력 4월 25일)이었다. 둔궤가 있는 곳은 충남 논산시에 있는 육군 훈련소인 연무대 부근이었다. 집은 비가 새서 엉망이었다. 그런데 둔궤를 모신 방은 천장에서 비가 새지 않았다. 도전님을 수행했던 한 임원이 그 집에서 열쇠를 받아서 둔궤를 열려고 여러 차례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자 도전님께서 열쇠를 받으셔서 직접 여셨다. 그 안에는 도주님 공부에 쓰였던 둔궤 속과 같이 호피 한 장, 반쯤 핀 국화 한 송이 그림, 스물네 개의 점, 오강록(烏江錄)·팔문둔갑(八門遁甲)·설문(舌門)이란 글자 등이 있었다.
  도전님께서는 둔궤를 승용차의 뒷자리에 실으라 하시고, 그 오른편에 앉으셔서 서울로 출발하셨다. 가시는 도중에 바람이 거세지기 시작하자 도전님께서는 서둘러 가야 한다고 하셨다. 곧 폭우가 쏟아지고 뇌성벽력이 쳐서 고속도로에는 운행하는 차가 거의 없었다. 천안을 지나 수원 근처를 지날 때쯤 날씨가 맑게 변했고, 중곡도장 숭도문에 들어서니 바람이 멈췄다. 이로부터 3일 뒤인 1984년 3월 28일에 도전님께서는 영대의 옥황상제님 진영 왼편에 둔궤를 모시고 치성을 올리셨다. 치성을 모신 후에 도전님께서는 둔궤의 둔(遁) 자가 도망 둔 자여서 도망을 가니 이제부터 성궤(聖櫃)로 부르라고 말씀하셨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둔궤는 상제님께서 천하 창생을 살리시기 위해 동곡 약방을 여실 때 공사에 쓰였던 성물이었다. 그 둔궤는 상제님께서 동곡 약방을 설치하시면서 행하신 공사 내용이 담겨있었고, 천지 도수를 푸는 공부를 하신 도주님께 전해져 쓰였다. 우리 종단 역사에서 둔궤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지녔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상제님, 도주님, 도전님께 전해져 쓰여야만 했던 비의(秘義)가 담겼음을 추측할 수 있다.






01 약방이 설치된 후 … 궤 안에는 “팔문둔갑(八門遁甲)”이라 쓰고 그 글자 위에 “설문(舌門)” 두 자를 낙인하신 후 그 글자 주위에는 24개의 점을 홍색으로 찍으셨다. (공사 2장 9절)
02 공사 2장 9절 참고.
03 둔궤가 보천교 본부로 옮겨지게 된 것은 고수부(高首婦, 1880~1935)가 1911년 정읍 대흥리 차경석의 집에서 교단을 창립할 무렵이었다. 당시 이 교단은 뚜렷한 교명(敎名)이 없었는데 교인들이 태을주(太乙呪)를 외우는 교단이라는 뜻에서 세간에서 태을교(太乙敎)라 불렀다. 보천교라는 교명은 1922년 서울 창신동에서 포교당을 열 때 처음 사용되었다.
04 전북 정읍시 감곡면 통석리 통사마을에 있던 전의 이 씨(全義李氏) 재실로 1876년에 지어진 건물이었다. 현재 재실 건물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다.
05 교운 2장 14절 참고.
06 교운 2장 16절~17절 참고.
07 교운 2장 20절 참고.
08 함안 반구정은 경남 함안군 대산면 장암리 용화산 중턱에 있는 정자다. 원래는 도주님의 13대 선조인 두암 조방 선생에 의해 함안군 칠서면 용성리에 있는 말바위[두암(斗巖)]에 지어졌는데, 1858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통사동 재실에서 함안 반구정까지는 250km가량 떨어져 있다.
09 교운 2장 20절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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