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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9년(2019)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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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대순진리회 : 삼생(三生)의 인연으로 만나는 도

삼생(三生)의 인연으로 만나는 도



허훈01




  아직도 기억에 또렷한 일이 하나 있다. 나의 학부 시절, 나는 대학 윤리 교재에 나오는 증산의 행적에 대한 한 줄 문장에 시선이 떠나지 않았고, 이상하게도 알 수 없는 긴장감에 휩싸여 관련 내용을 거듭 찾아보곤 했다.
  당시 안종운 교수님은 학과 주임교수였다. 이미 고인이 되셨지만, 당시 동양철학계 내에서는 꽤나 실력파로 알려진 뛰어난 식견을 지니셨던 분이다. 또한, 안 교수님과 아주 친분이 두터웠던 분 중에 서울대 종교학과 학과장을 역임했던 장병길 교수가 있었다. 안교수님은 서양철학에 대한 동양철학의 우월성을 근거로 한국 신종교에 신앙적 믿음을 가지셨던 분이다. 당시 나의 주된 관심사는 서양철학이었고, 동양철학은 비록 신비로운 얘기를 늘어놓지만, 서양철학에 비해 정치(精緻)한 논리는 부족하다고 여겼다.
  회고해 보건대, 당시 신종교에 대한 내 느낌은 이랬다. 민족 종교라니? 이 무슨 황당한 얘기란 말인가? 보편화된 세계종교가 아니라면, 더구나 특정 민족종교라면 그만큼 지엽적이고 편협한 범주 안에 사로잡힌, 함몰된 교의를 담고 있음이 분명하다. 혹 세계종교들도 첫 시작은 민족 종교에서 출발했으니까, 일부 지역의 특정 종교들도 그 과정 중에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볼 여지는 있지만, 예수나 붓다 같은 성자들의 종교는 수천 년 전에 출현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들의 가르침은 이미 세계적으로 공인된 바 있는데, 이제 와서 신종교라니? 역사상의 위대한 성자들, 세계종교의 가르침에 뭐가 부족해서 새로운 종교들이 필요하단 말인가. 대충 이런 논조의 생각이었던 것 같다.
  이러한 종교에 대한 나의 인식에 다소 변화가 생겼다면, 장병길 교수의 초청 강연회에 참석하면서부터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기조연설에서 그는 아주 확신에 찬 어조로 한국 신종교의 교의를 학생들에게 소개했다. 민족 종교가 인류 보편의 진리를 함축하고 있다는 논조였다. 아니, 세계의 주류 종교는 물론이고 특정 지역의 아주 지엽말단적인 종교들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을 그가 대체 왜 우리의 신종교에 확신을 갖는다는 말인가. 강의 내용은 세계 종교를 두루 아우르는 포괄적인 것이었지만, 나의 경계심은 좀처럼 누그러지지 않았다. 다만 종교학 전문가의 얘기이니 ‘뭔가가 있을 수 있다’하는 생각이 든 것이 전부였다.
  안 교수님, 당신께서는 신자로서의 강한 믿음을 지닌 듯했으나 결코 믿음을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기존 종교들의 독단, 아집, 편견에 대해서는 신랄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그의 가르침은 상식적인 내용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상식적인 내용에도 반발했다. 그리고 때로는 반박 논리를 찾기 위해 고심했다. 학부 시절의 나는 소극적인 수강생이 아니라 적극적인 발언자였다.
  그러다가 내가 만난 학문적 맞수(?)는 같은 학과의 학우였다. 그는 ‘증산사상연구회’라는 안교수님의 지도하에 운영되던 동아리의 회장이자 나의 절친한 학우였다. 항상 곁에 앉아 함께 수강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토론하면서 지적 편견과 아집, 몰이해가 독선이 된다는 사실을 점차 느끼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때 대순사상을 접하고서 이제 거의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거의 한순간도 나의 관심사에서 떠나지 않았다. 대순사상과 나는 천연(天緣)으로 만난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야 듣게 된 얘기지만, 나의 친할아버지는 보천교 신도로서 수도에 전념하는 불고가사(不顧家事)를 하셨고, 이로 인해 부유했던 집안은 남의 집 소작농으로 전락할 정도로 빈궁(貧窮)에 허덕이는 생활을 했었다는 것이다. 당시 할아버지는 “땅을 주름잡고 다니셨다(縮地術)”고 한다. 그런데 도를 이루지 못한 채 한을 품고 돌아가셨고, 남은 가족들은 빈곤한 생활에, 할아버지를 원망했었다는 집안 내력을 알게 되었다. 추측건대, 그 해원을 다시 자손을 통해 하시려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나는 형언할 수 없는 묘한 감정으로 대순사상을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나 또한 진리를 구하지 못하면, 그 포원은 어찌 되는 것인지 늘 궁금하다.
  영국의 소설가 올더스 헉슬리가 그의 책 『영원의 철학』에서 소개했던 한 구절의 명언은 항상 나의 책상 위에 메모지로 붙어 있다. “여러 가지 꽃에서 꿀을 모으는 벌처럼, 현명한 사람은 다양한 경전의 본질을 수용하고 모든 종교에서 좋은 점만을 본다. (인도 스리마드 바가바탐)” 나는 이 한 구절에서 영감을 얻는다. 예수는 옳고 붓다는 틀렸는가? 마호메트는 옳고 노장(老莊), 마하리쉬는 그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다. 궁극적 진리는 언설(言說)로 나타내기 어려운 것이며, 분명 그들 모두가 진리의 한 면모를 묘사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다양성을 그대로 인정하는 데서 그친다면, 극으로 치닫는 종교 간의 분열과 갈등은 어찌 되는 것일까. 종교적 이념을 앞세운 이른바 ‘성전(聖戰)’이라는 미명 하에 끔찍한 폭력과 테러가 난무하는 게 우리 눈앞의 현실이다. 테러를 가하는 이들은 저마다 거룩한 사명이 자신에게 주어졌다고 믿는다. 어리석은 맹신, 편견, 여타 종교에 대한 무지에 빠진 사람들이 소위 거룩하다는 ‘성전’에 나선다.
  이제, 시대가 공존의 장(場)을 요청한다. 바야흐로 우리는 동서(東西)가 만나 하나가 되는, 세계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문명[종교] 간의 충돌’은 21세기 벽두를 뒤흔들어 놓았고, 아울러 다른 한쪽에서는 문명의 교류와 ‘문명의 공존’을 역설한다. ‘시운(時運)’을 서구인들도 감지하고 있는 것일까. 현대 세계철학과 자아초월심리학을 주도하고 있는 켄 윌버는 그의 『모든 것의 이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다양한 세계관을 통합하려는 시도 자체를 왜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자주 받는다. … 그러나 다양성을 찬양하는 수준에만 머무른다면 궁극적으로는 분열과 소외, 분리와 절망을 촉진하는 것이다. … 다원적 상대주의의 풍부한 다양성을 기반으로 다음 단계로 나아가 그런 수많은 가닥을 통일적 연결의 홀론적 나선, 서로 딱 들어맞게 짜인 온 우주 속으로 엮을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우리는 다원적 상대주의에서 보편적 통합주의로 이동할 필요가 있다.” 나는 위의 두 진술 안에서 대순이 나아갈 길을 찾는다.






01 프로필
한국철학 박사
서울 소재 ‘국제예술대학교’와 ‘중앙대학교’에서 강의
현, 서울 강동구 상일여자고등학교 교사
주요 저서로 『사상체질로 본 성공리더의 조건』(2003), 『활인의 리더십』(2005), 『이제마의 건강심리학』(한국학술정보(주), 2007), 『한국윤리와 생명윤리』(한국학술정보(주), 2007), 『동무 이제마의 철학사상』(2009년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보인다 윤리와 사상』(이담북스, 2010), 『마음은 몸으로 말한다-동서양의 심신의학』(한국학술정보(주), 2010), 『영원한 철학』(2013), 『한눈에 보는 세계철학사』(2015) 외에도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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