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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49년(2019)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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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종 : 신인조화의 실천적 의미 이해

신인조화의 실천적 의미 이해



연구위원 박병만


  도전님께서 우리 대순진리회를 창설하신 목적을 명시한 글이 바로 『대순진리회요람』의 「취지(趣旨)」문이다. 아래는 그 글의 일부인데,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도통을 위해 어떻게 수도해야 하는가 하는 방법과 과정이 제시되어 있다.


오직 우리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는 성(誠)·경(敬)·신(信) 삼법언(三法言)으로 수도(修道)의 요체(要諦)를 삼고 안심(安心)ㆍ안신(安身) 이율령(二律令)으로 수행(修行)의 훈전(訓典)을 삼아 … 음양합덕(陰陽合德) 신인조화(神人調化) 해원상생(解冤相生) 도통진경(道通眞境)의 대순진리(大巡眞理)를 면이수지(勉而修之)하고 성지우성(誠之又誠)하여 도즉아(道卽我) 아즉도(我卽道)의 경지(境地)를 정각(正覺)하고 일단(一旦) 활연관통(豁然貫通)하면 삼계(三界)를 투명(透明)하고 삼라만상(森羅萬象)의 곡진이해(曲盡理解)에 무소불능(無所不能)하나니 이것이 영통(靈通)이며 도통(道通)인 것이다.


그 가운데 필자는 특히 ‘대순진리(大巡眞理)를 면이수지(勉而修之)하고 성지우성(誠之又誠)하여’라는 구절에 주목하였다. 이는 문맥상 도통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설명으로 대순진리회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우리 종단은 상제님께서 대순하신 진리를 종지(宗旨)로 하여 창설되었다. 종지란 어떠한 종교의 신앙인들이 믿고 실천해야 할 이념을 요약해 놓은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 종단은 상제님께서 대순하신 진리를 믿고 실천하기 위해 창설되었다는 뜻이다. 이것이 곧 우리 종단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면이수지’와 ‘성지우성’은 ‘힘써서 그것(대순진리)을 닦는다’와 ‘정성하고 또 정성하다’는 의미다. 이 ‘성지우성’은 ‘면이수지’를 더 지극하게 질적으로 향상하여 나간다는 뜻으로 모두 ‘닦음’이라는 실천적 의미를 담고 있다. 결국, 이 구절은 ‘대순진리를 힘써 닦는다’라는 의미이며, 바로 종단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대순진리를 힘써 닦는다는 말에서 대순진리는 닦음의 구체적 대상이 된다. 따라서 대순진리는 꼭 닦음이라는 실천적 차원에서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수도의 본질이 실천에 있다는 것은 너무나 일반적인 사실이다. 단지 대순진리 각각의 개념에 대한 이론적 차원에서의 이해에 그친다면 수도의 본질과 동떨어진 일이 될 것이다. 대순진리는 반드시 실천적 측면에서 그 의미를 이해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 글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다. 이제 음양합덕에 이어 신인조화를 힘써 닦는다는 것이 우리의 수도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실천하도록 하는 것인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01



신인조화의 개념적 이해

  ‘신인조화’를 해석하면 ‘신과 인간이 조화(調化)한다’라는 말이다. 여기 ‘조화’는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어휘가 아니므로 그 의미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필요하다. ‘조(調)’는 일반적으로 ‘고르다’라는 뜻인데, 주어에 해당하는 ‘신과 인간’이 주체가 되어 이루어지는 ‘조(調)’이므로 ‘잘 어울린다(harmony)’라는 의미가 가장 적절하다. 곧, 신과 인간이 서로 잘 어우러진다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조화롭다’라거나 ‘조율한다’는 용례에서의 ‘조(調)’가 이러한 의미다. 조화(調和)는 (서로 어긋나거나 부딪치지 않고) 알맞게 잘 어울림이란 뜻이고, 조율(調律)이란 여러 의견을 적절하게 조절하여 잘 어우러지게 하는 것을 말한다.
  신인조화에 대한 도전님의 말씀을 보면 이러한 의미가 분명해진다.


신인조화는 신과 인간이 서로 화합하는 것이다. 무자기를 근본으로 하여 속임이 없어야 한다.02


‘화합’이란 서로 다른 두 가지 이상의 개체가 ‘적절하게 잘 합하는 것’을 말한다. 간략하게 말하면 ‘서로 합하는 것(相合)’이지만, 화합은 더욱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그 개체들이 서로 잘 어우러진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화합은 ‘조(調)’의 의미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말씀을 통해 ‘조(調)’는 신과 인간이 잘 어우러진다는 의미임을 명백하게 알 수 있다. 또 한편으로 이 화합의 과정에는 반드시 무자기(無自欺)가 전제되어야 함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무자기를 실현하지 않고는 신과 화합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03
  다음으로 조(調)와 결합된 ‘화(化)’의 의미를 살펴보자. 화는 흔히 ‘되다’ 또는 ‘화하다’라는 뜻인데,04 ‘어떤 상태가 다른 상태로 되었다’거나 ‘한 물질이 전혀 다른 물질로 바뀐 것’을 말한다. 『묵자(墨子)』의 「경(經)」 상(上)에는 “화(化)는 바뀜을 겪어내는 것(化, 徵易也)”이라 하였고, 그 해설에 해당하는 「설(說)」에서는 “화(化)란 개구리가 메추라기가 되는 것과도 같다.(化, 若鼃爲鶉)”라고 하였다. 고대의 묵가(墨家)들은 개구리가 메추라기가 되는 것과 같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한 것을 ‘화’로 이해한 것이다.05 이 ‘화’는 단순한 변화를 뜻하는 ‘변(變)’과는 다르다. 일반적으로 ‘변’과 ‘화’는 모두 ‘변화’라고 번역하여 의미의 차이를 두지 않고 사용한다. 하지만, 엄밀하게 보면 차이가 있다. 화는 변의 상태에서 더 나아가 질적으로 새롭게 탈바꿈한 것이다. 예컨대, 달걀은 5·6일째가 되면 그 내부의 배아에 눈이 보이고, 시일이 지나면서 차차 부리와 털이 보이기 시작하다가 21일이 지나면 알을 깨고 병아리가 되어 나온다. 이때 병아리가 되어 나오는 것을 부화(孵化)라 하는데, 이것이 바로 ‘화’다. 그 이전 달걀 내부에서 일어난 일련의 변화는 ‘변’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신인조화의 의미가 더 명확해진다. 그것은 신과 인간이 서로 잘 어우러져 (인간이)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한다는 뜻이다.06 인간과 신의 어우러짐(調), 곧 화합에 의해 인간이 새로운 차원의 모습으로 탈바꿈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질적 변화를 도전님께서는 도통이라고 말씀하셨다.


도통은 다른 데 있지 않고 사람과 신이 합치는 것이다. … 신인상합(神人相合)을 도통이라 한다.07


여기에서 말씀하신 ‘상합’은 ‘화합’과는 동일한 의미이나 ‘조화(調化)’와는 의미상 차이가 있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조(調)는 상합이나 화합과 같은 뜻이다. 따라서 ‘조화’는 이 ‘상합의 과정’(調)을 거쳐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한 상태’(化)까지를 아우르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곧, 조(調)는 과정이고 화(化)는 결과라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를 고려한다면 위의 말씀은 도통의 과정 내지는 방법에 주안점을 두고 하신 말씀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말해, 신과 인간의 상합을 통해 도통이 이루어진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신인조화를 힘써 닦음은 직분(職分)의 올바른 수행을 위한 노력

  이제는 이러한 신인조화를 힘써 닦는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일인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이 ‘닦는다’라는 말은 닦음의 대상이 되는 무언가를 지속해서 실천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가 신과 상합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 나가는 과정이다. 하지만, 그 변화는 상합의 과정에 의해 이루어진 결과이므로 결국 신과 상합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과정이 바로 신인조화를 닦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신과 상합한다’는 것은 또 무엇을 말하는가? 『전경』에서 이 상합의 모습 내지는 방식을 구체화하여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구절은 다음의 상제님 말씀일 것이다.


사람마다 그 닦은 바와 기국에 따라 그 사람의 임무를 감당할 신명의 호위를 받느니라. (교법 2장 17절)


상제께서 “나는 하늘도 뜯어고치고 땅도 뜯어고치고 사람에게도 신명으로 하여금 가슴 속에 드나들게 하여 다 고쳐 쓰리라. … ” 말씀하셨도다. (교법 3장 1절)


여기에서 신명은 ‘호위’나 ‘드나듦’의 방식을 통해 인간과 일종의 상합이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우리 도인들은 누구나 상제님을 신앙하며 성심(誠心)을 다해 대순진리를 실천하고 있다. 그러나 각자가 처한 환경이나 조건이 다르고 마음과 능력이 다르므로 닦은 정도와 기국의 차이가 생기게 된다. 당연히 주어진 임무도 다를 수밖에 없다. 그 임무에 따라 적합한 신명이 호위할 수 있도록 상제님께서 용사(用事)하신다는 말씀이다.
  아래 구절은 어떠한 임무를 맡기에 부족한 사람에게 신명을 드나들게 하여 고쳐서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하신다는 의미다. 곧, 상제님께서 맡기고자 하신 임무를 감당할 수 있도록 신명을 통해 그 사람의 체질과 성격을 비롯한 모든 면을 변화시킨다는 뜻이 담겨 있다.08 앞서 살펴본 조화(調化)의 ‘화’인 것이다. 이렇게 화함으로써 사람은 주어진 임무를 감당할 수 있게 된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신명은 단순히 호위의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드나듦이라는 구체적 행위를 통해 사람의 모든 면을 고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우리 도인들은 종단의 조직체계에 소속되어 자신이 수도한 정도와 기국(器局) 등의 기량에 따라 일정한 직분을 부여받는다.09 여기에서 ‘직분’은 ‘직무(職務)상의 본분(本分)’을 말하는데, 곧 ‘직책이나 직업(職業: 지속적인 업무 활동)상 맡은 책임이나 의무’를 뜻한다. 선감·교감·보정을 비롯하여 교령·선사·선무·평도인 등등이 그 직(職)이며, 포덕·교화·수도·선도 등등이 그 직분이다. ― 여기 기술한 내용은 포정원(布政院)과 정원(正院)에 소속된 도인들의 직과 직분이다. 대부분의 도인이 여기에 해당하는 만큼 일반적인 사실이라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종무원(宗務院)의 각 부서와 감사원 등 기타 여러 기관에 소속된 도인(종사원)들이 있으며, 대진대학교를 비롯한 종단 산하 기관에 파견되어 교직이나 여러 사무를 담당하는 도인들도 있다. 이들도 모두 일정한 직과 그에 따른 직분이 주어져 있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까지 모두 기술하기에는 서술상 한계가 따르므로 여기에서는 일반적인 차원에 국한하여 논하였다 ― 위의 상제님 말씀에 의하면 이러한 직분을 수행함에 있어 반드시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신명의 호위를 받는다는 것이다. 선감은 선감의 직분을, 선무는 선무의 직분을 ― 종사원은 종사원의 직분을, 교사는 교사의 직분을 ― 각각 감당할 수 있는 신명의 호위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직분 수행을 위한 신명의 이러한 호위는 항구적인 일인가? 왜냐하면, 우리가 지속적으로 온전하게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신명의 항구적인 호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명의 호위에 대해 도전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여러분 앞에는 신명들이 있고 여러분을 보호해 주면서 항상 따라다닌다. 그것을 믿지 않아 속일 수 있는 것이지. 여기 큰 공부하신 분들은 다 본다. 신명이 보호해 주다가 잘하면 더 힘이 되고 못하면 떠나기도 한다.10


  우리 도인을 신명이 항상 함께하며 보호(호위)하고 있지만, 못하게 되면 그 신명이 우리를 떠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말씀에서 ‘못한다’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지만, 앞서 언급한 상제님의 말씀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신명은 우리가 닦은 바와 기국에 따라 주어진 임무를 감당할 목적으로 우리를 호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못한다는 의미는 우리가 자신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무자기를 근본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 곧 직분을 충실하게 수행해 나갈 때 신명과의 상합이 지속될 것이다. 이 신명과의 상합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과정이 바로 신인조화를 닦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직분을 올바르게 수행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일이 신인조화를 힘써 닦는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직분을 올바르게 수행함으로써 보호하는 신명과 항상 함께할 수 있으며, 그 신명의 작용으로 우리는 질적 변화를 이루게 된다. 이것이 신인조화의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결론

  지금까지 ‘신인조화를 힘써 닦는다’라는 것이 실질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 살펴보았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수도 과정에 있으므로 상제님께서 펼치신 이 신인조화의 진리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는지 그 의미를 온전하게 파악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 진리는 지극히 현묘(玄妙)하여 헤아릴 수 없는 데 반해 우리의 인식 능력은 너무나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 의미를 궁구하기 위한 노력은 결코 중단될 수 없다. 올바른 수도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올바른 앎이 바탕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부족하지만, 상제님과 도전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그 의미를 탐구하였다. 그 결과 신인조화는 인간이 신명과 상합하여 새로운 차원의 인간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이 진리를 힘써 닦는다는 것은 신명과 상합이 지속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정성을 다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곧 우리가 무자기를 근본으로 종단의 체계 속에서 부여받은 직분을 올바르게 수행할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 직분을 올바르게 수행함으로써 그 직무를 감당할 신명과의 상합을 지속하게 하며, 나아가 그 신명의 작용으로 우리가 질적으로 변화할 수 있게 된다.
  도인이라면 누구나 도전님으로부터 임명을 모시고 그 직책에 맞는 신명과 어우러져 수도하고 있다.11 그 누가 자신이 이러한 직분을 온전하게 제대로 수행하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겠는가. 수도의 완성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항상 부족할 뿐이다. 오직 이 부족함을 알고 자신의 직분 수행에 철저하도록 성심을 다하는 노력이 최선의 길인 것 같다. 이 직분 수행에 대해 “자기의 직분을 바르고 성실하게 행하여 체계 질서를 똑바로 세워 가는 것이 도(道)를 닦는 것입니다.”12라고 하신 도전님의 훈시를 깊이 생각해보자.






01  이 글은 대순진리를 실천적 측면에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해 살펴보고자 기획한 것으로 ‘박병만, 「음양합덕의 면이수지(勉而修之)에 대한 이해」(대원종), ≪대순회보≫206호’에 이어지는 연구다. 여기 서론의 내용은 이 원고에서 이미 언급한 부분들(pp.26-28)을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니, 상세한 이해를 원한다면 이 원고를 참고하기 바란다. 
02  도전님 훈시」 (1984. 5. 1).
03  신과 인간이 화합하는 과정에서 ‘왜, 무자기가 근본이 되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하지만, 이 글의 논지와 조금 동떨어진 사안이므로 구체적인 논의는 생략하겠다.
04  민중서림편집국,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 (파주: 민중서림, 2011), p.289 참고.
05 개구리가 새인 메추라기가 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若(약)’은 ‘~와 같다’라는 비유적 의미를 담고 있으므로 이렇게 이해함이 타당할 것이다. 자세한 설명은 ‘묵자, 『묵경1』, 염정삼 주해 (파주: 한길사, 2012), pp.194-197’ 참고.
06 기존 연구에서는 ‘調化’를 ‘調和’와 ‘造化’의 의미를 함께 나타내는 것으로서 이 두 단어의 ‘調’와 ‘化’를 합성한 조어(造語)로 이해하였다. 이것은 의미론적 관점에서 파악한 것인데, 필자가 이 글에서 서술한 調化의 의미와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기존 연구로는 대순사상학술원에서 발간한 『대순사상논총』 3집(신인조화 특집호, 1997)의 ‘이항녕, 「신인조화사상의 현대적 의의」’ ; ‘임영창, 「신인조화의 신세기적 의의」’ ; ‘안종운, 「철학적 측면에서 본 신인조화론」’ ; ‘주현철, 「신인조화에 관한 연구」’ 외 6편이 있다.
07 「도전님 훈시」 (1995. 2. 25).
08 다른 구절에서는 ‘체질과 성격을 고쳐 쓰신다’라고도 말씀하셨다. “… 신명으로 하여금 사람의 뱃속에 출입케 하여 그 체질과 성격을 고쳐 쓰리니 …” (교법 3장 4절) 참고.
09 이와 관련하여 『대순지침』(p.79)에서는 “도인들은 자신들의 기량에 따라 응분의 직분이 주어졌으니 맡은 바를 밝게 행하여야 한다.”라고 하였다.
10 「도전님 훈시」 (1992. 5. 31).
11 선무와 교무는 방면 선감이 임명을 낸다. 하지만, 이 또한 도전님의 명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결과이므로 결국은 도전님으로부터 임명을 모신다고 할 수 있다.
12 ≪대순회보≫ 8호, 「도전님 훈시」 (1988.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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