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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각문 : 맹사성의 일화가 남긴 교훈
맹사성의 일화가 남긴 교훈 연구원 이호열 맹사성(孟思誠, 1360~1438)01은 조선 시대 초기인 태조부터 세종 때까지 오랫동안 관직에 머물면서 청백리(淸白吏)로 칭송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젊고 명석하며 패기에 찬 세종 임금을 황희(黃喜, 1363~1452)와 함께 보필하며 조선 왕조의 기틀을 다지고 문화적 황금기를 여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02 맹사성은 높은 관직에 있었음에도 벼슬이 낮은 자를 대할 때면 관대를 갖추고 대문 밖에 나와서 맞아들였고, 상대가 물러날 때도 손을 모으고 몸을 구부린 채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가 거처하는 집은 초라했고, 바깥출입을 할 때도 가마 대신 소 타기를 좋아해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宰相)임을 알지 못했다고 할 정도로 검소함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맹사성이 처음부터 그러한 인품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명문가의 자손으로 뛰어난 학식을 지녔던 그가 겸손을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게 된 것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 이후 맹사성은 누구에게도 거만하지 않고, 겸손을 몸에 익히고 실천하며 선정(善政)을 베풀어 많은 이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고 한다. 짧은 일화지만, 깊은 울림을 주는 이야기이다. 한편으로는 글 좀 읽었다는 관리의 위세가 무너지는 통쾌함이 느껴지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산사에 묻혀 수도에 정진해 온 스님의 지혜가 느껴지기도 한다. 이 이야기에서 맹사성이 고을의 관리인 자신을 높이고 상대방을 얕잡아 보는 태도를 보이자 무언가 배우려는 겸손한 자세를 갖추지 못한 그에게 스님이 가르침을 준 것이다. 01 여말선초(麗末鮮初)의 문신으로 호는 고불(古佛)이다. 그의 조부 맹유는 조선이 개국하자 두문동(杜門洞) 72현의 한 사람으로 순절했고, 아버지 맹희도는 출사하지 않고 절의를 지켰다. 최영 장군의 손녀사위이며 고려 우왕 12년(1386)에 문과에 장원급제한 맹사성은 조부가 순절하자 관직을 그만두었으나, 나라가 평온해지자 부친의 권유로 다시 벼슬길에 올랐다. 조선 초 태조의 제수로 관직에 들어와 대사헌, 판서를 거쳐 좌의정을 지내다 세종 17년(1435) 벼슬에서 물러났다. 『해동명신록』에도 기록된 그는 조선 500년사의 명재상으로 황희 등과 함께 청백리에 올랐다. 맹온재, 「고불 맹사성 연구」, 『국악원논문집』 11 (1999), pp.86-90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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