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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으로 :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



잠실28 방면 선무 박제현


  2012년 개봉한 뮤지컬 영화 ‘레미제라블’을 영화관에서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서 그 이후로도 OST를 즐겨들으며 그때의 감동을 되새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뮤지컬 레미제라블 탄생 40주년을 맞아 프랑스 오리지널팀이 내한공연을 한다는 소식에 공연을 관람하였고 영화와는 또 다른 울림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레미제라블은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의 소설이며, 소설의 내용을 바탕으로 1980년 뮤지컬 ‘레미제라블’이 제작되었습니다. 당시 극장의 예상치 못한 3개월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급하게 올려졌던 이 작품은 관객의 큰 호응을 얻었고, 현재는 세계 4대 뮤지컬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뮤지컬 레미제라블은 어떻게 40년 동안 변함없이 사랑받을 수 있었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저는 단순히 작품의 외형적인 요소를 넘어, 시대를 관통하는 깊은 주제의식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진정성 있는 이야기가 있기에 배우들의 연기가 더욱 빛나고, 관중이 공연에 몰입하게 하며, 공연이 끝난 후에도 기나긴 여운을 남기는 작품으로 기억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레미제라블이 전하는 이야기에 대해 같이 나누고자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레미제라블의 시대적 배경은 1832년 6월 프랑스 민중봉기 사건입니다. 그전에는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으로 유명한 1830년 7월 혁명이 있었습니다.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으로 이룩한 공화정이 퇴색하고, 나폴레옹이 몰락하면서 프랑스에는 다시 왕정복고가 강화되고 있었습니다. 이에 반발한 시민들은 혁명의 깃발을 들었고, 결국 다시 자유를 쟁취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하지만 7월 혁명의 중심은 부르주아 계급이었고, 그들은 초기 자본주의가 낳은 열악한 노동조건 문제와 극심한 빈부격차 등의 부작용을 방관하였습니다. 또 선거권 등의 권리를 노동자층으로 확산시키는 데 소극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외된 계층을 중심으로 발생한 것이, 레미제라블의 배경이 되는 6월 봉기입니다. 제목 ‘레미제라블’은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시대의 대대적 변화 속에서도 혜택을 받지 못하고 소외된 노동자, 서민, 여성, 어린이 등입니다. 우리나라에서 1894년 발생한 동학농민혁명 역시 농민, 여성, 백정 등 소외된 계층이 주축이 되고 혜택의 대상이 되었던 점에서 그 궤를 같이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공화제로의 급격한 변화를 원한 학생과 적정수준의 임금인상을 요구한 노동자층이 주축이 되어 일어난 프랑스 6월 봉기는, 민중의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하고 며칠 만에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운동의 의의에 비해 역사 속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한 사건으로 끝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로 인해 6월 민중봉기는 책과 뮤지컬, 그리고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2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끊임없이 메시지를 던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시 역사로 돌아가서 1830년은 상제님께서 강세하시는 1871년으로부터 약 40년 전입니다. 상제님께서는 천하가 재리에만 눈이 어두워 진멸할 지경에 빠지자 신성, 불, 보살 등이 간청하므로 직접 인간의 몸으로 강세하셨다고 말씀하시는데, 당시 유럽의 상황이 이와 같아 보입니다. 전통적으로 혈통이 중시되던 왕정에서, 재력으로 대표되는 소수의 부르주아 계급으로 권력의 중심이 이동하는 시기로, 수많은 하층민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살아가던 시기였습니다. 레미제라블에는 그러한 불쌍한 사람들을 대표하는 인물로 장발장, 판틴, 테나르디에 부부, 에포닌, 자베르, 코제트 등이 등장합니다.
  우선 장발장은 어린 조카를 위한 빵 한 조각 살 돈이 없어 도둑질하다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4차례 탈옥 시도로 결국 19년이 흐른 후에야 가석방됩니다. 지금으로써는 도저히 이해 안 되는 무거운 형벌이 당시에는 당연시되는 시대(형식적 법치주의)였던 것입니다. 이를 대표하는 인물로 자베르 경감이 있습니다. 자베르는 장발장의 범행 동기나 사회적 공헌 등을 고려하지 않고 법적인 처벌만을 우선시합니다.
  형사로서 법을 중시하는 태도는 당연하겠지만, 문제는 그 당시의 법이 일반 민중을 억압하기 위한 지배층의 도구였다는 것입니다. 본인은 정의를 구현하고자 평생을 노력했지만, 사회 구조 자체가 일그러져 있었기에 결과적으로는 선량한 시민을 무자비하게 억압한 또 다른 불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마지막에는 결국 자결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됩니다.
  판틴은 미혼모로 하나뿐인 딸 코제트를 남(테나르디에 부부)에게 맡기고 공장에서 일한 보수를 양육비로 보내며 근근이 생활해 갑니다. 당시 유럽은 수차례 전쟁과 혁명 등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시기로 미혼모는 그러한 시대상을 반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판틴은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동아줄을 부여잡고 오로지 딸에 대한 그리움으로 하루하루를 버텨갑니다. 그러다 공장 동료들의 모함으로 직장에서 쫓겨나자 판틴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테나르디에 부부는 주점을 경영하는 소시민으로 재리에 빠져 도덕적인 관념을 버린 인물들입니다. 그래서인지 작품 초기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는 그나마 먹고살 만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쌓은 악업으로 결국 가세는 기울고, 딸인 에포닌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합니다.
  코제트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와 헤어져 남의 집에서 구박을 받으며 자라납니다. 시대의 혼란이 낳은 아동 피해자인 셈입니다. 다행히 개심한 장발장을 만나 새로운 삶을 맞이하지만, 그전까지 겪어야 했을 고통은 어린이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시련이었을 것입니다.
  작품은 이렇게 비참한 시대상을 반영하고, 여러 불쌍한 사람들을 조명하지만, 희망의 빛을 남겨놓습니다. 바로 미리엘 주교입니다. 그는 갈 곳 없는 장발장에게 친절을 베풀고, 자신의 집에서 도둑질한 장발장에게 몸소 용서와 사랑을 가르쳐줍니다. 이는 작가 빅토르 위고가 비참한 삶을 극복할 방법으로 용서와 사랑이라는 메시지를 던진 것인데 실제로 이 계기를 통해 장발장은 세상에 대한 원망을 버리고 평생 남(코제트)을 위한 삶을 살아갑니다.
  또한, 민중봉기 중에 일생의 원수 자베르의 목숨을 구하여 미리엘 주교에게서 배운 용서와 감사의 가르침을 실천합니다. 미리엘 주교의 가르침에 대한 확신을 갖고 몸소 실천하는 순간, 장발장은 총을 쏘며 위협하는 자베르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보입니다. 마침내 악연의 고리를 끊었기 때문에 죽음마저 초월한 의연함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자베르 역시 자결로 생을 마감하지만, 성격 자체는 정의로웠고, 장발장의 행동을 통한 가르침으로 자신이 틀렸음을 깨달았기에 그가 실존 인물이라면 후천에서는 훌륭한 알곡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비록 6월 민중봉기는 실패하고 역사 속으로 묻혀갔지만, 장발장의 남을 위한 헌신은 쌓이고 쌓여 본인의 구원은 물론 코제트라는 희망의 씨앗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혁명을 주도한 시민들과 함께 ‘민중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보면, 장발장의 삶이 혁명을 위해 몸 바친 선열들의 고결함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며 동학농민혁명과 전봉준 장군의 이야기가 오버랩되는 느낌이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이 실패하고 전봉준 장군은 절명시를 남기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지만, 상제님께서 그 의기를 알아주셨습니다. 프랑스 6월 봉기도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빅토르 위고의 소설을 통해 2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우리의 가슴을 울리고 있고, 그러한 사실이 단순한 우연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건 아마도 영화의 여러 부분에서 상제님의 가르침과 맞닿은 부분이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지금은 그때와는 달리 물질적으로는 확실히 살기 좋은 세상이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 개개인의 정신문제로 들어가면, 과거보다 더욱 힘든 시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사람 간의 유대관계는 점점 희미해져 가고, 그 자리를 기계와 프로그램이 대체하고 있습니다. 육체는 풍요롭지만, 정신은 빈곤한 새로운 ‘레미제라블(불쌍한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는 시기가 아닐까 합니다. 200년 전에는 전쟁과 가난, 기아 그리고 질병으로 사람들이 죽어갔다면, 지금은 유대관계의 상실로 인간성이 죽어가는 시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상제님께서는 약 150년 전에 인간의 몸으로 오셨고 그 전에 30년간 영으로 머무신 것을 참작하면 사실상 레미제라블이라는 역사적 무대가 펼쳐지는 시기에 이 땅에 오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2세기의 역사 동안 급변하게 될 인류의 운명과 문제점, 그리고 그 해결책을 미리 가르쳐 주셨습니다. 해원과 보은을 통한 상생, 즉 인간 유대관계의 회복입니다. 하지만 레미제라블 시대와 지금의 시대에는 아주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 당시에도 용서와 사랑이라는 상제님의 가르침과 유사한 해답을 내놓았지만, 그것은 인간만을 위한 해답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모든 문제 해결에는 한계가 있었고 결국 ‘옳은 말이지만 현실과는 동떨어진’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제님의 공사로 하늘과 땅이 바르게 뜯어 고쳐져 ‘옳은 말이 현실에도 부합하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는 레미제라블 시대의 사람들보다는 희망찬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답게 살아갈 때 잘살 수 있는 세상, 비단 프랑스 6월 민중봉기뿐 아니라 수 천 년의 역사를 거쳐 인류가 치열하게 열고자 했던 세상이 지금이라는 생각에 다시 한번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계기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레미제라블이라는 이야기에 공감하고 열광하는 사람들 역시 정의가 승리하고 용서와 사랑이 정답인 세상을 바라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그러한 세상이 왔음을 널리 알리는 것이 수도인으로서 해야 할 일이겠기에 포덕에 힘쓰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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