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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51년(2021)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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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종 : 인도(人道)의 오상(五常)

인도(人道)의 오상(五常)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최치봉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때때로 시를 읽어 주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깨우치게 하셨도다.
不受偏愛偏惡曰仁
不受全是全非曰義
不受專强專便曰禮
不受恣聰恣明曰智
不受濫物濫欲曰信 (교법 3장 47절)


들어가는 글

  이 글에서는 위 교법 3장 47절 중 상제님께서 종도들에게 말씀하신 오상(五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인의예지신의 오상은 예부터 지금까지 흔히 사용하는 용어이다. 일반적으로 오상은 사람의 내면에 선천적으로 갖춘 덕성으로 태어날 때부터 본래 가지고 있는 이치나 도리를 말한다. 이에 오상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하는 다섯 가지의 당위법칙을 뜻하기도 한다.01 하지만 실생활에서 인의예지신은 여건과 상황 속에서 다양하고 복합적으로 발현된다. 이러한 점에 있어 오상은 명확하게 규정짓거나 한가지 정의로 재단하기에는 다소 난해한 측면이 있다.
  대순사상에서 오상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덕성이라는 측면에서 일반적으로 논의되는 오상과 유사하다고 보이지만, 『전경』의 시구는 기존에 언급된 적 없는 표현으로 오상이 설명되고 있다. 우선 눈에 띄는 시구의 형태는 부정문과 대구(對句)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불수(不受)는 ‘받지 않다’, ‘받아들이지 않다’, ‘수용하지 않다’, ‘용납하지 않다’의 뜻이니, 그 시구는 “편애편오·전시전비·전강전편·자총자명·남물남욕을 받아들이거나 용납하지 않음을 인·의·예·지·신이라 이른다”로 해석될 수 있다. 여기서의 오상은 마음이 발현된 측면에서 특정 행위의 부정이 인·의·예·지·신의 본의와 근접하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시구에서 표현되는 오상에 대해 하나씩 접근해보고자 한다.



● 불수편애편오왈인(不受偏愛偏惡曰仁)  
  : 편벽된 사랑도 편벽된 미움도 용납하지 않음을 인이라 한다.




  편(偏)은 ‘치우치다’, ‘편향되다’, ‘편벽되다’의 뜻으로, ‘어느 한쪽만을 사랑하거나(아끼거나) 미워하지(싫어하지) 않는 것’을 인이라 설명한다. 우선 ‘불수편애’라는 것은 타인에 대한 사랑이 어느 한쪽으로 과도하게 치우침을 경계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특정인에 대한 치우친 사랑은 그 사람의 잘못된 행위를 축소하거나 옳은 행위를 과장하게 하고, 이를 통해 집단 안에서의 공정성을 무너뜨리는 계기를 만들게 된다. 또한 그 편애의 대상자가 되지 못한 이들이 편애의 대상자를 시기, 질투하여 그 집단의 화합을 해칠 수 있다. 그러므로 편애를 경계해야 하는 것이니, 편애하지 않는 것은 곧 인을 이룬 것이라 할 수 있다.
  ‘편오’는 편벽되게 미워한다는 뜻이다. 상제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대할 때에 그 장점만 취하고 혹 단점이 보일지라도 잘 용서하여 미워하지 말라.”02고 하여 상대를 미워하지 말 것을 가르치셨다. 설령 상대가 밉다고 하더라도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 상대에 대한 미움 자체를 경계해야 하므로, 더욱이 편벽되게 미워하는 편오는 더욱더 지양해야 한다. 도전님께서도 “미운 게 없고 원망이 없으면 그저 감사하고 고마울 뿐이다.”03라고 훈시하셨다. 그러므로 편오하지 않음은 곧 인을 이룬 것이라 할 수 있다.



● 불수전시전비왈의(不受全是全非曰義) 
  : 모두 옳거나 모두 그르다고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음을 의라 한다.




  『대순지침』의 “내 경위만 옳고 남의 주장을 무시하는 데서 반발을 일으켜 서로 미워하다가 마침내 원한을 품어 척을 맺는 법이다.”04라는 구절을 전시전비하여 일어나는 불의가 곧 원한과 척이 됨을 알려준다. 이러한 측면에서 의는 자신과 다른 견해를 전적으로 옳거나 그름으로 여기는 이분법적 관점이 아닌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해야 함을 강조하신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은 도인들간에 ‘상호이해’를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근거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05 자신의 관념이나 지식체계에 한정하여 옳고 그름을 단정하는 것은 의사소통과 화합에 장애가 될 수밖에 없다. 또한, 집단이나 단체를 바라보는 측면에서 한 집단의 생각이나 의견이 전적으로 옳다거나 그르다고 여기는 편견 역시 그 집단에서 말하고자 하는 진위와 핵심을 놓치게 할 수 있다.


  서로 만나서 대화를 하고, 자신의 의사를 충분히 밝힐 줄 알아야 하며 의사를 밝힐 때도 의논하는 식으로 해야 합니다. 이렇다, 저렇다고 단정할 것이 아니라 이렇게 하면 어떻겠느냐는 식으로 해야 합니다. … 사람은 각자가 필요한 대로, 그리고 자신이 깨달은 것만큼 얘기하게 됩니다. … 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얘기는 틀린 말은 하나도 없지만, 한가지의 의견만으로써 우리의 일을 해나갈 수는 없습니다. 여러 사람의 각기 다른 다양한 의견을 모았을 때 우리의 일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니 누가 옳고 그르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06


  이 훈시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개개의 의견은 진리에 있어 각각의 단면을 말하는 것으로 관점과 위치에 따라 달라 보일 뿐, 그 의견들이 ‘전시전비’하다고 단정 지을 수 없는 것이다. 그 단면들이 자유롭게 수용되고 조율될 때 경위가 더 올바르게 설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옳을 의’라는 것은 옳고 그름의 이중성에 함몰되지 않고 다양성 가운데 조화로움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 불수전강전편왈예(不受專强專便曰禮) 
  : 오로지 강(强)하거나 오로지 편(便)한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을 예라 한다.




  강(强)은 ‘강하다’, ‘굳세다’, ‘거스르다’, ‘순종하지 않다’의 뜻이다. 편(便)은 ‘편하다’, ‘아첨하다’의 뜻으로 대구의 형태를 고려할 때 강을 ‘강하다’, ‘굳세다’로 해석하면 ‘편하다’의 뜻이 자연스럽고, 강을 ‘거스르다’, ‘순종하지 않다’로 해석하면 편은 ‘아첨하다’는 해석이 자연스럽다. 이러한 자의를 바탕으로 논의해 보면 너무 강하고 굳센 태도는 사람 사이에 경직을 일으키고 인간관계를 딱딱하게 만들게 되어 소통이나 조화가 어렵게 된다. 나아가 이러한 굳셈과 강함은 화의 바탕이 되기도 한다.07 이와 반대로 너무 격의 없이 편한 것을 추구하면 서로의 관계가 방자해지고 상하 간의 질서가 무너져 상대를 무시하거나 낮추어 보게 된다. 처세의 측면에 있어서도 상대방에 대하여 오롯이 강하거나 거스르는 태도로 대하거나, 또는 아첨하여 상대방의 의견에 무분별하게 동의하거나 인정해주는 것은 모두 예라고 할 수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대순지침』은 “예라는 것은 사람으로서 일생 동안 움직일 때나, 정지할 때나, 앉아 있을 때나, 누워 있을 때를 가리지 않고 항상 정도를 넘는 일이 없이, 공경심으로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여 주는 인도(人道)를 갖추는 것을 이른다.08라고 언급하고 있다. 즉, 예의 핵심은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상대를 공경하고 이를 ‘불수전강전편’하게 드러냄이라 할 수 있다.



● 불수자총자명왈지(不受恣聰恣明曰智) 
  : 방종한 총과 방종한 명을 용납하지 않음을 지라고 한다.




  총(聰)은 ‘귀 밝을 총’의 뜻으로 ‘총명함’과 ‘민첩함’을 의미한다. 이는 상대방의 뜻과 의도를 명확하게 인지하여 상대방이 요구하는 말과 행위를 함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명(明)은 ‘밝다’라는 뜻을 기본으로 하여 ‘사리에 밝음’, ‘눈이 밝음’, ‘현명함’의 뜻을 내포한다. 이는 개인의 인지나 인식능력으로 사물의 이치를 깨우쳐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남을 말한다. 자(恣)는 ‘방자하다’, ‘방종하다’의 뜻으로 구속됨이 없이 제멋대로 행하거나, 어려워하거나 조심스러워하는 태도가 없음을 말한다.
  총명도통(聰明道通)09이라는 말이 있듯이 총명은 수도에 있어 요구되는 자질이다. 하지만 이는 결코 방종하게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귀 밝음과 눈 밝음을 방종하게 사용한다는 것은, 자신의 총명이 남을 배려하지 않은 채 자기 자랑과 자만으로 이어지거나, 오롯이 자신의 사욕을 위하여 사용됨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스스로 자제를 가지지 못한 총명은 자신을 과신하여 남의 우위에 서려고 하거나, 상대를 무시하거나 깔보게 되는 태도를 보이게 만든다. 그리하여 결국 ‘자총자명’은 오히려 그 총명함이 독이 되어 척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곧, 총명한 지혜라는 것은 자신의 밝음을 방종하지 않게 경계함으로 인해 드러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일을 함에 있어 마땅히 어리석은 것같이 하라.”10는 『전경』의 구절은 이러한 방종한 총명을 경계함이라 할 수 있다.



● 불수남물남욕왈신(不受濫物濫欲曰信) 
  : 넘치는 물과 넘치는 욕을 용납하지 않음을 신이라 한다.




  신(信)은 믿음을 말하며, 믿음은 의심 없는 굳은 신념을 뜻한다.11 수도인에게 있어 이 믿음은 도와 이 도를 주재하시는 상제님을 향한다. 『대순지침』에는 “백성이 국가를 믿지 않고 자식이 부모를 믿지 않는다면 난신적자(亂臣賊子)가 될 것이다.”12라고 되어 있는데, 난신적자란 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와 어버이를 해치는 자식을 일컫는다. 결국 믿음이라는 덕목이 바탕이 되지 않으면 가정뿐만이 아니라 나라의 기반도 흔들리게 됨을 지적하신 것이다. 가정과 나라에서도 이러할진대 수도인으로서 도에 대한 믿음이 부실하고 어그러지면 어찌 되겠는가? 이는 결과적으로 난법난도를 초래한다.13
  신은 오방(五方)으로 볼 때 중앙에 위치하여 인의예지의 덕을 포괄한다.14 또한, 신은 사람의 일상생활에서 인의예지를 실제로 드러냄을 뜻하기도 한다. 즉 신은 내면의 믿음이나 굳은 신념이라는 마음가짐과 인도를 행하는 실천적 측면까지 포함한 개념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삶에서 끊임없이 인의예지를 구현함은 도를 향하는 전반적인 과정을 말하므로, 신을 통해 나아가고 또 나아가며 정성하고 또 정성하여 기대한 바 목적에 도달케 하는 것이다. 사람은 실생활 가운데 각각 사물과 타인을 끊임없이 접촉하고 이 가운데서 자신의 인의예지를 드러낸다. 하지만 인의예지에 따른 삶을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사람이 외부로부터 끊임없이 자극을 받고 그에 대응하여 자신의 의욕을 발동하여 살아가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의욕을 절제하지 못하여 ‘남물남욕’의 상태에 있다면 인의예지의 덕성을 온전히 구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기 생각과 감정은 외물에 휩쓸려 인도의 올바름과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다.
  상제님께서는 도의 근원이 끊어지게 되는 연유를 물질에 치우친 문명으로 보셨다.15 물질에 치우쳐 있다는 것은 한편으로 ‘남물’의 상태라고 볼 수 있다. ‘남물’의 상태에서는 내면에서의 덕성을 구현하는 삶과 도를 향한 믿음을 온전히 할 수 없다. 그리하여 불수남물남욕을 신이라고 함은 넘치는 물욕[濫物]과 넘치는 욕심[濫欲]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결국 도를 향하는 믿음 가운데 외부로부터의 물욕에 현혹되지 않고, 자신의 욕심을 절제하여 인의예지를 실천할 것을 언급하신 것이라 여길 수 있다.



나가는 글

  상제님께서 종도들에게 말씀하신 오상(五常)은 인도(人道)에서 이를 구현하는 실천적 측면이 강조되고 있다. “편애편오·전시전비·전강전편·자총자명·남물남욕을 받아들이거나 용납하지 않음을 인·의·예·지·신이라 이른다.”는 상제님의 말씀은 종도들을 향한 것이었고, 종도들의 일상생활에서 아주 쉽게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오상에 대한 뜻을 풀어주신 것이라 여길 수 있다.


사람은 덕을 베풀어 도를 이루게 되는데,
덕은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오상(五常)으로
몸을 빛내기 때문이다. (도전님 훈시 말씀, 1986년 1월 20일)


  상제님께서 오상을 통해 종도들에게 가르침을 주셨듯이, 도전님께서도 지금의 수도인들에게 오상의 덕을 실생활에서 베풀 것을 훈시하셨다. 우리는 이미 훈회와 수칙을 바탕으로 실천적인 수도생활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볼 때, 다변하는 사회와 복합적으로 얽히는 가치관 속에 처한 지금의 수도인들에게 오상에 대한 상제님의 가르침은 도덕적 행위의 판단과 실천에 올바른 지침을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이러한 오상의 의미를 되새기며, 매 순간 이를 실천한다면 오상으로 자신의 몸을 더욱더 빛낼 수 있을 것이다.






01 양승이, 「오상(五常)에 관한 연구」, 『退溪學과 儒敎文化』 56 (2015), pp.212-215.
02 예시 46절.
03 『도전님 훈시』 (1991.4.20.)
04 『대순지침』, 신앙체계의 정립 3장 3절 (다).
05 최정락, 「선과 악의 이분법을 넘어서」《대순회보》199 (2017), pp.95-96.
06 『도전님 훈시』, 「체계를 확립하고 융화단결 하라」《대순회보》11 (1989), p.2.
07 행록 3장 49절, “剛强是禍基”
08 『대순지침』, Ⅲ. 조직기구 3장 3절 (가).
09 교운 1장 66절.
10 행록 3장 49절, “臨事當如癡”
11 『대순지침』, Ⅱ. 수도ㆍ공부 2장 2절 信-(바).
12 『대순지침』, Ⅱ. 수도ㆍ공부 2장 2절 信-(다).
13 『대순지침』, Ⅱ. 수도ㆍ공부 2장 2절 信-(라).
14 엄연석, 「주희의 성리학적 신뢰[信]관과 그 특성」, 『대동문화연구』 60 (2007), p.185, “성(性)의 내용과 본질을 다섯 종류로 분류하는 사고는 한대(漢代) 시작되었다. 한대 이후 신은 오상의 하나로 네가지 본성의 덕을 포괄하는 의미를 가진다.”
15 교운 1장 9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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