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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51년(2021)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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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문예 심사평 : ‘소통, 배려, 공존의 멋과 맛’으로 전하는 글

제13회 대순문예공모전 심사평





  13회 대순문예 공모전 심사는 코로나19 대응 정국으로 비대면이라는 새로운 방법으로 실시했습니다. 심사위원으로는 대진대 신유식 교수, 대진고 진로상담부장 김곤선 교사, 국어 담당 임지예 교사가 맡아 주셨습니다. ‘문예’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새로운 접근 가능성에 도전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습니다. 심사에 참여하신 분들은 ‘덕분에 충분한 시간이 확보되어 심도 있게 읽어 볼 수 있었다’고 전언 주셨습니다. 덧붙여 ‘운문 33편, 산문 52편을 읽으면서, 코로나19 시대에는 다양한 소통 방법뿐만 아니라, 비대면으로 인한 자기 신념의 정체성 회복이 더 절실했던 것 같다’는 전체 평도 남겨 주셨습니다. 심사를 맡아 주신 세 분께 감사 인사드립니다. <교무부>




‘소통, 배려, 공존의 멋과 맛’으로 전하는 글



신유식(문학박사, 대진대 교수)


13회 대순문예 공모전 특징


  13회 「대순문예 공모전」의 특징은 코로나 시대에 황폐한 의식을 일구는 삽날 소리로 가득했다. 자신을 간절한 마음의 밭으로 가게 하는, 날이 시퍼런 삽날의 질타는 대단했다. ‘문예’의 창조력이란 측면뿐 아니라, 신앙적 삶에 대한 신념의 문제를 비대면 시대에 새롭게 인식시켜 주었다.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는 남을 배려하고 소통하는, 결국 ‘멋있는 공존’을 위한 일이다. 올해 작품들은 이런 ‘멋과 맛을 전하는 소통’과 관련된 글이 많았다. ‘멋’과 ‘맛’은 동일어다. ‘멋’은 겉으로 드러나는 감각이라면 ‘맛’은 속으로 드러나는 감각일 것이다. ‘맛’있으면 ‘멋’있다고 한다. ‘멋’있다면 ‘맛’있다는 말과 같다. 글도 ‘맛’과 ‘멋’이 있어야 읽으면서 ‘맛’을 느낄 수 있다. 그 ‘맛’은 무엇일까? 아마도 ‘소통’일 것이다.





운문


시는 관찰을 잘해야 한다. 관찰을 잘한다는 것은 소통을 위한 장치다. 시의 ‘멋’과 ‘맛’을 안다는 것은 관찰을 통한 ‘소통’이다. 관찰은 눈으로 한다. 그럼 어떤 눈으로 해야 하느냐? 여기서 ‘시안(詩眼)’이란 말이 나온다. 시안은 ‘시심(詩心)’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사람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은 정말 다행이다. 마음은 소통이다. 그 시심이 얼마나 ‘예쁘고, 굳세고, 정(淨)하느냐’ 하는 것은 시인의 눈이다. 특히 수도자로의 ‘淨한 詩心’을 가진 詩眼이 ‘멋’이고 ‘맛’있는 소통의 시가 된다.


  ‘속 깊은 물빛’은 도대체 무슨 색일까? 물이 떨어지면서 물빛을 만든 색은 ‘청록색’이라고 단언했다. 청록색은 초록과 파랑의 중간색이다. 청록색은 공작의 여러 색 가운데 목에서 날개 쪽 안 부위 가운데 색을 청록색으로 칭한다고 한다. 아마 ‘속 깊은 물빛’ 색은 공작의 목 부위처럼 짙은 청록색이 인 듯하다. 물방울이 떨어지면서 그 배경이 어울려 ‘청록색’이 되었다. 그러다가 물방울에 의해 지워지기도 한다. 그런 모습을 ‘청록색을 훔쳐서 달아나는’ 물방울이라고 말하고 있다. 뛰어난 관찰이다. 물방울이 떨어지면서 변화무쌍한 모습을 청록색을 훔치는 것으로 표현했다. 통상 색채학에서 빨강이 에너지를 발산시킨다면 녹색은 정신적 에너지를 보충해 준다. 녹색은 원형상징어다. 일본어로 ‘みどり’, 영어로 ‘green’, 프랑스어로 ‘vert’라 하는데 모두 ‘청년, 청춘, 우월, 부활, 승리, 성, 신앙, 기억, 풍부, 신성, 구원, 평화, 이상’ 등을 상징한다. 결국 시인은 폭포를 통해 새로운 희망인 ‘봄꿈’을 청록색으로 꿈꾼다.
  이 시는 관찰을 통해 강하게 떨어지는 폭포의 역동성을 담고 있다. 무리 없이 잘 다듬어진 작품이다. 떨어지는 폭포를 통해 삶의 힘을 얻는다는 화자의 시적 관찰은 일시적으로 얻어진 것은 아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을 등장시켜 이질적인 것들을 하나로 종합하여 구축된 시로 현란하고 웅장하다. 직접 눈으로 보는 듯한 선명한 이미지, 직접 귀로 듣는 듯한 경쾌한 리듬, 아기자기한 묘미를 맛볼 수 있는 수준 높은 시다. 심지어는 떨어지는 소리를 ‘허덕이는’ 짐승의 소리라고 했다.
  ‘물떠러지’는 순수어다. 폭포에서 직하해서 ‘떨어지는 물’을 말한다. 시인은 일부러 고유어를 찾아내서 시어를 사용하고 있다. ‘드릉대는’도 고유한 의성어다. 시인은 폭포를 계속 보고 있다. 오랫동안 바라본 폭포를 자신의 상념과 연결하고 있다. 폭포와 자신의 상념이 얽혀들게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말하자면 ‘물아일체(物我一體)’가 되고 있다. 고전에서 말하는 폭포와 자신의 상념이 일체가 된 시이다.
  다만 투박한 관념투가 남아 있다. 시에서 관념투는 좋은 점이라 볼 수 없다. 그러나 이 시가 이 관념투를 극복해 나갔다. 시의 대상인 폭포를 예민하게 관찰해 나가는 힘이 관념의 투박성을 극복했다.
  작가는 아마 봄에 폭포를 본 모양이다. 물도 떨어지면서 상처를 받는다. 그 상처를 어떻게 달래야 할까. 물처럼 부딪치며 상처를 받는다면 인간의 상처는 어떻게 어루만지며 달래야 하는가? 시인은 결국 다시 ‘봄꿈’으로 상처를 달랜다. 그 속에서 하나의 희망을 보고자 하지만 살아오면서 가진 여러 번의 희망을 녹록지 않아 ‘닳고 닳았다’고 했다. 그런데도 다시 희망을 겸허하게, 아주 조심스럽게 ‘봄꿈’으로 표현하고 있다.
  폭포의 속이 깊다고 하지만 사실은 시인의 속이 깊은 것이다. 물길 속을 들여다보면서 인생사를 들여다보는 듯하다. 천길 물길과 인간의 속길. 물길 속이 깊다고 하면서 사실은 관찰자는 그 자신의 깊이를 말한다. 우리는 관찰자의 마음 깊이를 믿고 당선작으로 추천했다.



  ‘거미’는 현대시조를 만들었다면 정말 좋은 작품이 될 수 있었다. 형식상 현대 연시조로 만들면 제격인 작품이다. 현대시조는 행(行)으로 배열하지 장(章)으로 배열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현대시조로 만들지 않았다. 아쉽다.
  내용으로 살펴보면 거미와 거미줄에 대한 시다. 시어 중에 ‘이슬털이’라는 시어가 있다. 거미줄에 이슬이 맺혀 있는 모습이다. 거미줄 위에 하루가 지나는 모습이 선명하게 이미지를 형상하고 있다. ‘기우며’라는 시어 역시 묘하게 중의적 표현을 한 것도 대단한 실력자다. 석양 속에서 ‘하루가 기울어 간다’는 뜻과 또는 힘든 ‘하루를 겨우 마무리한다’는 뜻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우에’는 시적 허용이다. 이왕에 더 살펴보자. 인간의 삶은 제대로 영글 수조차 없다. 한낱 거미줄 같은 ‘숙명’에 걸며 살고 있다. 그런 가느다란 운명의 끈에 기대어 살고 있다. 거기에 어떤 열매를 ‘영글’ 것이냐! ‘끊어지는 서러움’이라는 시구를 보자. 거미줄은 가볍게 끊어진다. 그런데 인간은 가볍게 끊어지는 거미줄 같은 것에 기대어 살고 있다고 봤다. 인간의 삶은 이처럼 아슬아슬하게 살아가고 있다. 거미줄 위에는 무거운 것을 싣지 못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무게를 위태로운 거미줄에 싣고 살아간다. 말하자면 시인은 인생의 무게로 치환하고 있다. 거미는 숙명적으로 어딘가에 매달려야 하기에 뼈를 녹여 자신의 무게를 줄였다. 인간도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기 뼈를 버려야 살아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깊은 사유와 꿋꿋한 정신으로 피워내는 꽃송이 같은 시다. 시인의 깊은 영혼이 지향하는 더 큰 세계로 달려가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봄밤’은 시가 이쁘다. 작가의 마음을 서정적인 풍경 속에 아름답게 담아내고 있다. 시를 지은 작가의 마음을 알 수가 있다. ‘은하수’가 하늘에 긴 뱀처럼 흘러가는 모습도 이쁘다. 아무 욕심이 없다. 그저 이쁜 마음뿐이다. 다만 중간 연에 나온 ‘몽마’라는 시어는 읽기가 불편한 면이 보였다. 단꿈과 연결도 그렇고, 굳이 해석하자면 ‘꿈속의 마귀’ 정도일 것이다.
  이 시는 아름답다. 섬세한 시인의 감정과 정갈한 시어의 교직으로 수놓은 아름다운 서정 공간이 잘 드러나고 있다. 그 황홀한 서정 공간은 시인의 마음과 영혼이 서정성으로 들어왔다. 다만 다소 진부한 표현들이 거슬렸다. 진부한 시어 극복은 분발이 필요한 부분이다.



산문


  소통이란 마음과 뜻이 막히지 않고 서로 통하는 것을 말한다, 소통에도 마음이 없으면 뜻도 통하지 않는다. 마음을 잘 먹지 못하고 마음과 몸이 엇갈려 병이 날 때 그것이 다 마음 탓이라고 생각한다. 그리 보면 동심(童心)에도, 천심(天心)에도, 시심(詩心)에도 모두 ‘마음(心)’이 들어 있다. 가장 순수한 것에도 ‘마음’이 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도 된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하지만 ‘마음’은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것 같다. 배고픈 마음이 삶이란 곳에 긴 이야기를 들여놓게 된다. 이게 글의 멋이고 맛이다.



  ‘우리 엄마’는 할 이야기가 많은 글이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방황한다. 조용하지만 격렬한 언어, 그 격렬한 언어 끝의 밀물 같은 슬픔이 가득하다.
  담담하게 밤낮없이 며칠을 써 내려간 작품이다. 한 여성의 비참한 삶이다. 마음 아픈 글이다. 이 작품이 서사적으로 크게 성공하고 있는 부분은 처절하게 일그러진 엄마의 생애가 아니라 그에 대한 내레이터의 태도, 시각 그리고 그 해석에 높은 문학적이고 전달적 경지를 이루고 있는 점이다.

  욕심내지 않고 어머니의 삶을 추적해서 종합해서 전달하는 것이 진솔하고 감동적이다. 내용을 읽어보면 어머니는 미국에서 교육학 석사까지 취득한다. 그 과정이 얼마나 고생스러운가는 상상에 맡긴다. 귀국 후 어머니 삶은 황폐화된다. 결국 처참하게 살다가 66세에 삶을 마감한다. 여성으로 참 비참한 삶을 살았다. 전달하는 내레이터는 어머니의 얼굴조차 모른다. 그리고 이 글을 쓸지 말지 많이 고민했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들은 엄마의 이야기이다. 요즘의 ‘페미니즘’ 시각으로 보면 엄마는 시댁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 그런 시각이 좀 결여되어있다. 아마 이는 내래이터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혹은 할머니로부터 오랫동안 끊임없이 세뇌되어 온 엄마에 대한 부정적인 말 때문일 것이다. 어린 나이에 할머니와 아버지의 손길이 엄마의 손길을 대신하진 못한다. 그분들의 시각으로만 엄마를 생각해서 나온 고충이 담긴 작품이다. 아쉽다. 다만 아버지, 할머니의 시각이 아니라 어머니의 시각으로 전환해서 보기에는 그가 양육된 환경에 고충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운명’은 이야기 속도가 빠르다. 빠른 만큼 감정이 과잉 노출되지 않았다. 때로는 연결이 부자연스러운 곳도 있다. 그런데도 감동을 ‘툭’하고 던지고 달아난다. 한 편의 영화다. 아마 그 감동은 고통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 진솔하기 때문일 것이다. 고난의 극점에 떨면서 시린 손으로 빚은 가장 순수한 현실의 편린들이다. 춥고 헐벗은 곳에 맞닿아 있던 그의 심연에 숨겨 놓은 참으로 맑은 감동이 담담하게 전해 준다. 주체할 수 없는 고통에 처해있는 사람,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절망하고 있는 사람, 그러나 어디엔가 반드시 구원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위한 부활의 영가이다.
  인생의 어둠 속에서 빠져나오는 일종의 통과의례를 겪으면서 흔히 빠지기 쉬운 소(小)영웅주의적 회고식의 전개를 보이지 않아서 우수작으로 밀기에 적이 안심이 된 작품이다. 고통의 긴 세월이 녹록지 않았다. 운명처럼 따라오는 온갖 고난을 이겨나가는 과정을 어려운 수도로 극복해 나가는 체험적인 글이다. 한 인간이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는 이야기다. 사람은 살면서 누구나 절망의 구렁텅이 한 번씩은 빠진다. 이 빠져나오는 과정은 대부분 소영웅적 회고담 식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이런 식으로 빠져나왔다’ 하며 대부분 우쭐한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렇지 않다. 장면 장면으로 처리하면서 그 과정을 진솔하고 담백하게 던지며 글을 이어간다. 그게 오히려 큰 감동을 주었다.



  ‘오! 나의 원수님!!’은 일견 자명하고 당연해 보이는 것들을, 그렇게 믿어 넘기려는 것들을 다시 따지고 드는 그의 눈길과 목소리가 이 작품에서 퍽 드물고 값진 것으로 드러난다. 제목을 잘 정했다. 시대에 따르는 패러디한 제목이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변한다. 그래서 부모들은 늘 ‘친구를 잘 만나야 한다’는 말을 한다. 글쓴이는 도장에서 수호의 파트너로 원수를 만난다. 앞뒤 막히고 원리원칙주의자다. 파트너로 인해 마음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살이 빠지기까지 한다. 그런데 임원이 전해 준 감화에 마음을 고쳐먹으니 새롭게 보고 자신을 고쳐 나가는 방법을 작성하고 있다.



  13회 「대순문예 공모전」 산문 부문에는 영화평과 독후감도 많이 나왔다. 특히 영화평이 많다. 내용이 좋은 글도 많았다. 그런데 문장이나 맞춤법 등이 눈에 거슬리게 드러나는 작품들이 좀 아쉽다. 산문 작품 선정하는 기준을 잡았다. 자기 체험에 따른 깨달음, 자신의 일상생활 속에 깨달음을 말하는 방식에서 확고한 자신감을 나타내는 것보다 담담하게 말하는 것에 더 믿음이 갔다. 깨달음을 전달하는 방식에서 믿음이라는 차이에서 당선작을 선정하였다.


 
심사를 마치고
 
  소중하고 그리운 것들은 모두 글 속에 있었습니다. 글 속으로 들어서면서 부끄러운 또 다른 나를 만났습니다. 소중한 글로 주신 도인의 마음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경험을 했습니다. 광활한 정신세계에서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감동을 전해 주셨습니다. 새로운 세계를 감상할 수 있는 더없이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글로 생각을 주신 많은 분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또한 여러 면에서 협조를 아끼지 않은 종단 교무부 관계자분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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