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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52년(2022)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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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고 싶은 이야기 : 일구이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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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구이언



배봉3 방면 교감 김정숙




  보통 사람들은 본인 생각이 옳은지, 그릇된 건지, 마음이 분란한 상태에서 내린 결정이 하나의 신념으로 자리를 잡으면 자기의 옳음 때문에 상대의 가치는 평가절하되고, 내 것만 옳다고 주장을 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런데 난 그 시절을 그렇게라도 했어야 견뎌낼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가족은 막내인 나만 도를 닦고 가족들은 언니의 전도로 교회에 다녔다. 지금도 언니는 교회에서 중요 직책을 수행하는 임원이다.
  15년 전 선사 때쯤으로 기억된다. 직장을 다니고 주말엔 포덕을 하면서 보냈던 때 나는 나의 겁액을 이기지 못하고 태만했고 선감의 포덕에 대한 끈질긴 교화 덕분에 난 마음을 먹었다. 선감을 피해 다니기로. 연로하신 아버지를 핑계로 반찬을 좀 해드려야 한다, 집 청소를 해드려야 한다 등등, 포덕을 피하려고 온갖 변명을 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음악감상을 하면서 한잠 자고는 내 집으로 돌아오곤 했었다. 포덕을 하기 싫어 경기도 구리에서 서울 은평구 신사동을 주말마다 다녔다.
  이런 생활 때문에 문제의 상황이 발생했다고 생각된다. 도를 닦는 자손이 포덕에 게을러지는 것을 조상 선령신들이 그냥 바라만 보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이런 걸 두고 선각들은 내가 참말로 조상 공덕이 많다고들 말씀하신다.
  하루는 아버지가 교회를 다닐 거니까 앞으로 주말에 아버지 집에 오지 말라고 전화가 왔다. 집이 비어있으니 내가 아무도 없는 집에 왔다 가는 게 미안해서 그 먼 길을 오지 말라고 하셨던 거였다.
  ‘나는 쉬러 가는 거였는데.’
  내가 화가 났던 건 언니의 신앙심에 내가 밀렸다는 거다. ‘진작에 잘할 걸…’ 아버지 집에 갈 때마다 도담도 하고 아버지와 이런저런 이야기도 해야 했는데 하고 싶은 대로 편하게 지내고서 언니한테 밀렸다는 자존심 상함에 화를 가라앉히지 못할 때였다. 그 후로 나는 선감을 피할 수 있는 장소가 없어서 할 수 없이 포덕을 했다. 천하 포덕 하겠다고 불고가사를 결정해 놓고선 9년 만에 포덕을 피하고 싶다는 이율배반적인 심정은 나의 깊지 못한 내면 때문에 생긴 웃픈 이야기이다. 그 당시는 모르다가 정신이 드니 창피함이 밀려든다.
  사실 회사 일이 학교 용품, 졸업장 등을 제작하는 일이여서 시즌별로 가을 겨울은 거의 새벽 1시까지도 집으로 일을 갖고 와서 마감해야 했었다. 봄, 여름은 공부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여유의 시간도 많았는데, 몸이 피곤할 때는 수반을 만나 도담하는 것조차 마음 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포덕하겠다고 약속을 해놓고 막상 하려니 내 힘듦에 아버지 찾아뵙는 걸로 핑계 삼아 피했다.
  나의 활동이 크게 빛을 보진 못했지만, 그래도 마음을 내서 움직이려고 했던 걸 예쁘게 봐주신 것일까? 서너 달 정도 지나서 아버지가 밥 먹으러 오라고 연락이 왔다. 아버지를 뵙고 교회를 다니신다기에 내가 얼마나 마음 상해 있었는지 또, 제사도 안 지내고 하나님만 강조하는 그런 곳을 왜 가시냐고 따지고 물었더니 언니의 입장을 나에게 전하셨다.
  언니는 내가 주말마다 집에 가니 아버지께 도를 전할까 덜컥 겁이 났던 모양이다. 그전에도 아버지를 교회에 모시고 가려고 했는데 안 가신다고 하니까 더 이상 말 안 하고 있다가 나의 잦은 방문에 언니는 수를 쓴 거였다.
  “아버지! 교회 오시면 제가 차비 좀 챙겨 드릴게요. 근데 어차피 차로 모시러 오니까 차비 안 들어요. 집에만 계시면 답답하니까 교회에 오셔서 친구도 만드시고 주말은 그렇게 보내세요. 그리고 우리 목사님은 제사 지내는 거 반대하는 분이 아니세요.” 아버지는 제사를 허용한다는 말에 친구나 사귈까 하는 마음으로 가신 거라고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럼 계속 다니지 왜 또 안 가세요?” 나는 되물었다.
  그 말에 화를 내시면서, 물론 내게 화내신 게 아니라 목사를 지탄하신 것이다. “내가 네 언니 말을 믿고 갔다. 차비도 매번 주는 거 생활비나 보태라고 안 받았고, 가는 길 바람이나 쐬러 간다는 맘으로 다녔는데 목사가 본색을 드러내지 뭐냐.” “제사를 뭐하러 지내세요? 하나님만 잘 믿으면 되는데요”라는 말에 아버지가 ‘더 이상 다닐 곳이 못 되는구나!’라고 마음을 접고 언니한테 “다음 주부터는 집에 차 보내지 마라. 안 올 거다”라고 하셨단다.
  그리고 아버지는 나에게 “한 단체의 수장이라는 사람의 말이 바뀌면 안 되는데, 교묘하게 바꿨다”며 “어디 한국 사람한테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하냐”고 하셨다. 내가 도 닦는 것을 그다지 달가워하지는 않으셨지만, 치성을 모시면서 천지 주인 상제님과 선령신들께 정성 들이는 곳이라고 말씀을 드려 놓은 터라 아버지는 “너도 이왕에 하는 거 잘하고, 그곳에 들어간 김에 성공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너무 놀라서 “아버지 그곳에서 성공이 뭔데요?” 나는 아버지가 도통을 아시는 줄 알고 흥분했다. “윗자리에 가는 거지. 윗자리는 한번은 가봐야 하는 거야. 근데 절대 그 목사처럼 말을 바꾸면 안 된다”고 강조를 하셨다.




  어렸을 때 엄마 따라 언니 따라 교회 다니면서 집에서 제사 지내는 걸 제일 싫어하고 제사음식도 안 먹던 내가 아버지의 그 말씀에 어릴 적 기억은 사라지고, 언니를 한 방 먹였다는 통쾌함에 얼굴에 웃음이 만연했다. 언니는 내가 입도를 하고 집에서 올케언니나 오빠들한테 도담하는 즐거움에 떠들고 다닐 때 거의 나를 벌레 쳐다보듯 했던 것이 마음에 남아있어서인지 아버지가 교회에 가셨단 말에 내 좌절감을 생각하면 너무나 속이 후련했다.
  그리고 언니한테 전화해서 “아버지가 되게 화가 많이 나셨네? 무슨 목사가 그래?”라고 큰소리를 치니까 “아니야! 목사님이 아버지랑 인사하고 안부 겸 이런저런 말씀 나누시다가 집에서 제사 지내기 힘드실 텐데 교회에 자주 오셔서 기도 많이 하시면 그렇게만 해도 하나님이 좋아하신다고 말한 거야”라고 했다. 언니는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그 말이 이상한 걸 못 느끼고 있었고 되레 아버지를 편하게 해드리려는 배려로 생각한 것이다.
  제사의 절차와 정성은 번거롭고 힘들긴 하다. 하지만 아버지 성정(性情)에 당신 몸 편하자고 제사 안 지내는 이유가 될 수도 없고, 또 하나님 좋으라고 교회 나오라는 언변에 아버지는 바로 눈치를 채신 것 같다. ‘힘드니까 지내지 말고, 당연히 교회에나 잘 나오라’는 뜻으로.
  난 갑자기 아버지가 존경스러워졌다. 나를 늦게 낳으셨고 어렸을 때 엄하게 느껴진 아버지를 나는 무서워했고 대화가 별로 없었던 부녀지간이었는데, 내가 20대 중반에 입도하고 가족들이 다 미쳤다고 할 때 내 건강 걱정부터 해주시고 시집은 보내놓고 눈 감으시겠다고 지참금 천만 원을 별도로 내 몫으로 모아놓으셨던 아버지. 다른 건 몰라도 최소한 아버지 말씀대로 일구이언하는 사람이 안 되고자 매일매일 노력한다.
  내 생각에 우리 조상님들은 나에 대한 시나리오를 너무 잘 쓰시는 것 같다. 아버지를 교회에 가시게 하는 것으로 내 쉴 곳을 차단해놨고, 다시 내가 포덕을 하며 마음을 다잡으니 아버지를 다시 그 목사를 통해 교회를 안 나가게 하시고, 아버지가 교회를 다녔던 그 얼마 안 되는 동안에 나의 생활방식이 변하여 굳이 핑계를 대고 아버지한테 가는 걸 하지 않아도 되었으니 말이다. 내가 안 가니까 언니가 청소하고 반찬 해드리고 행위적인 효도는 언니의 몫이 되었다.
  도의 일이 크다고 교화 들어왔던 내가 실제로 그런 일을 겪게 되면서 하나의 신념으로 자리가 잡혔다. 도에서 공덕을 쌓고 있으니 아버지를 살피는 것은 내가 아니어도 다른 가족이 하게 된다. 내가 해드렸던 것보다 더 잘. 그런데 그 신념이라는 것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으면 고착된 성향이 되어서 내 말만 옳다고 하는 꼰대가 될 확률이 높다. 지금은 상대와 소통하려고 내가 옳다는 생각을 많이 접어두려 애쓰고 있다.




  2013년 첫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오빠들이 입도했다. 언니는 입도까지는 안 했어도 근래에 회관에도 와봤다. 그것만으로도 언니한테는 큰 결심이었을 것이다. 종교적 신념으로 소원해졌던 자매의 정을 다시 베풀려는 느낌이다. 가족이 날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면 내가 좀 닦인 것으로 생각한다. 나이 차이가 있으니 맨날 코흘리개 막냇동생으로만 바라봤던 오빠들조차 지금은 조카들보다 나를 더 많이 챙겨준다.
  “네가 집에를 와야 차례를 지내지!”
  “내가 조상이야? 왜 내가 가야 차례를 지내? 나 없이도 잘 지내놓고 왜 그래?”
  요즘은 이런 대화를 한다.
  그때 아버지가 표현한 윗자리라는 상급임원이 내게는 멀게 느껴졌고 ‘선사 일을 제대로 못 하는데 어찌 임원이 되겠는가’라는 생각에 흘려버렸던 아버지 말씀이, 임원이 되고 보니 수행에 있어 제일 중요하고 또 제일 힘든 작업임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아버지도 다른 많은 말씀을 해주실 수 있었을 텐데, 그 얘기를 통해 종교인의 삶을 일깨워 주시려 했던 것 같다. 현재 내 주위에 자꾸 말을 번복하는 일들로 여러 사람이 힘들어하는 것을 보게 되면서 아버지가 오늘도 하늘나라에서 나를 일구이언하지 않는 사람으로 살게끔 보살펴 주신다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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