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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문화와 함께 읽는 전경 : 1908년 태인 행단에서 발생한 일진회원 관련 사건

1908년 태인 행단에서 발생한 일진회원 관련 사건



교무부 김성호


▲ 시천교 21인의 묘지, 정읍시 칠보면 행단1길 51-72



  『전경』을 보면 상제님께서 행하신 공사가 이따금 역사적 사건과 연관되어 있지만,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을 찾지 못해 성구(聖句) 이해에 어려움을 겪곤 한다. 100년이 더 지난 옛 사건 기록은 찾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소실된 경우가 많다. 하지만 상제님께서 행하신 공사를 검토하는 것이 중요한 일임은 틀림없다. 공사로 처결된 사건 중에는 크고 작은 일들이 많지만, 이 글에서는 상제님께서 1907년 태인에서 일진회원과 관련하여 처결하신 공사와 공사 이후 발생한 관련 사건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과거 《대순회보》에서 다루어진 바 있다. 이전 원고에서는 상제님께서 태인에서 행하신 이 공사가 태인 행단에 있는 시천교인의 무덤과 관련되어 있으며 시천교인이 이 사건에 연루되었지만 21명만 사망한 것으로 간략하게 서술되었다.01 따라서 이 글은 상제님의 공사 이후 태인에서 발생한 사건의 구체적 내용과 이 사건이 상제님의 공사와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대한제국 당시 간행된 신문과 한국 측 사료 및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가 직접 이 사건을 조사한 내용을 담은 외교문서를 통해 관련 역사적 사실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일진회원 관련 사건의 경위 
  상제님께서 훗날 일본 군사로부터 일진회원의 죽음을 면하게 하려고 처결하신 공사는 1907년 음력 10월 말경에 이뤄졌다. 이 무렵 상제님께서는 문공신 종도와 태인 행단에 있는 주막에 들러 이틀간 이곳에 머무셨다. 상제님께서는 주막에 머무시는 동안 주모에게 삶은 돼지 한 마리와 술을 준비케 하신 다음 글을 써서 불사르게 하신 후 마을 사람들과 나누어 드셨다. 이때 갑자기 큰 소리로 “무엇을 더 구하느뇨, 글자 한 자에 하나씩만 찾아가면 족하리라”고 외치셨다. 02 그로부터 이틀 뒤 상제님께서는 공사에 쓰신 술과 고깃값 33냥을 공신으로 하여금 지불하게 하신 후 행단 주막을 나오셨고, 관련 공사를 처결하신지 약 1년 뒤 이곳에서 일본 군사가 의병인 줄 알고 쏜 총에 일진회원 21명이 목숨을 잃었다.
  관련 기사는 1908년 10월 9일과 20일 자 《대한매일신보》에 보도되었다. 이에 따르면 1908년 음력 8월 16일에 시천교인들이 이곳을 지나다가 날이 저물어 태인군 행단리 주막에서 유숙하였는데, 일본 군사가 이들을 의병으로 오인(誤認) 사살하여 33명 중 21명이 사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은 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고자 1908년 10월 23일에 장교[대위] 한 명을 사고 현장에 급파(急派)하였다.03
  조사 결과, 피해자들은 임실(任實), 순창(淳昌), 태인(泰仁) 등지의 시천교 교도들로 확인되었다. 그들은 태인군 용산면 화호리(禾湖理)에서 시천교 지도급 인사들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날이 저물어 태인군 행단리 주막에서 투숙했다가 예기치 못한 참변을 당하게 되었다.04
  시천교(侍天敎)는 이용구05가 손병희(孫秉熙, 1861~1922)로부터 천도교에서 출교된 뒤 창립한 종교이다. 이용구는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의 회장을 역임하며, 1906년 11월에 시천교를 창설하고 1907년 4월 5일에 시천교 창건을 선포하는 개교식(開校式)을 거행했다. 시천교가 창건될 당시 이용구를 따라 일진회에 가입하거나 시천교에 입교한 이는 20만 명에 달했다.06 따라서 역사적으로 시천교인 21명이 사망한 시기에 일진회원이라 하면 시천교인과 일진회원을 모두 포함한다.07 사건 당일 이들은 태인군 용산면 화호리08에서 시천교 지도급 인사들 간의 회동(會同) 후 돌아오는 길이었다.
  시천교인들이 화호리 회동 후 태인 행단 주막에서 유숙할 당시 전국 각지에서는 의병활동이 치열하였다. 이 사실은 『한국사료총서』의 《시천교인 몰살과 각 군의 의병장》이라는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시천교인 21명이 사망하였을 때 경기와 해서 지방에서만 수천 명의 의병이 봉기하여 일본은 이를 매우 괴롭게 여겼다.09 「영, 호남지역 의병활동 관련 판결문」에서도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판결문에 따르면, 이 지역에서 의병활동에 가담하여 문초를 받고 판결된 사건만 수백 건에 이른다.10
  실제로 1907년 12월부터 1908년 12월까지 의병들의 전투는 1,976차례 일어났으며, 의병 숫자는 15만 명으로 추산된다. 1년여의 기록만 보더라도 이 시기에 의병이 얼마나 엄청났는지 알 수 있다.11 1907년 7, 8월 고종의 강제 폐위와 정미조약(丁未條約)12, 대한제국 군대 해산 등 일본이 본격적으로 식민지화 정책을 시행하면서 전국 각지에서는 대규모의 의병이 조직되었다.13 의병의 규모가 커지자 조선의 초대 통감을 역임 중이던 이토 히로부미는 의병을 폭도로 규정한 후 일본 본토로부터 대규모의 병력을 투입하여 대한제국 경찰에 임용하는가 하면 일본군 헌병대와 수비대 병력도 대거 확충하며 의병 진압에 총력을 기했다. 이를 통해 태인에서 본 사건이 발생하기 몇 개월 전인 1908년 1월부터 7월에는 전국에 헌병분견소 460개와 1,990여 개의 진압소가 설치되었다.14      
  대규모의 군사를 총동원하여 토벌대를 구성한 일제는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들의 활동을 잠재우고자 의병활동이 치열했던 지역에 군사를 매복시키고 병참소를 설치하는 등 이들의 활동을 예의주시하였다. 사건 당시에도 태인군 행단리 근처 명천리에는 군 작전 시 군수품과 병력을 수송하고, 부상병이나 포로를 후송하기 위한 병참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21명의 시천교인은 사건 당일 동곡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군사들에 포위되어 총살당했다. 이들의 죽음에 대해 일본 측은 폭도로 오해했다고 변명하였으며, 한ㆍ일(韓日) 양국정부에서는 조위금 수백 원을 하사한 후 장례를 치르고 비석을 세워 조문하였다.15
  관련 기사는 1908년 11월 26일 자 《대한매일신보》에 실렸다. 신문기사에는 1908년 11월 26일에 전북 태인군 행단리에서 정부 지방관헌과 국외인사 및 많은 조문객이 참관하여 조위금을 하사하고 이들의 넋을 기렸다고 보도되었다.
 

▲ 시천교 21인의 묘지와 묘비



외교문서에 담긴 태인 관련 사건과 위기에 처한 일진회원  
  태인에서 발생한 일진회원 관련 사건은 일본 천황에게 보고되어 중요한 사건으로 다루어졌다. 그러한 근거는 사건 당시 도쿄 주재 프랑스 대사를 역임 중이던 제라르(Gerard)가 피숑(Pichon) 프랑스 외무부 장관에게 외교문서로 보낸 서신을 통해 알 수 있다. 서신에는 당시 일제가 태인에서 발생한 이 사건을 어떻게 인식하였는지를 엿볼 수 있다. 제라르는 피숑 프랑스 외무부 장관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전하며 이 사건의 전말을 논했다.


  “지난 7월 말부터 이곳에서 휴가 중인 서울 주재 일본 통감 이토 대공은 이달 7일 대한제국의 한 지방, 즉 올해 봄부터 개시된 폭도 진압 작전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전라도 지방에서 발생한 사건 소식을 접하고 괴로워했습니다.
  불과 며칠 전 도쿄에서 입수한 보다 더 상세한 정보들과 이토 대공이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일본에 가장 우호적인 당파인 일진회 소속이자 시천교라는 종파에 속하는 대한제국인들이 동학의 옛 수장들 중 한 명의 무덤이 있는 태인으로 성지순례를 하던 중, 이달 7일 식사를 하려고 머물던 두 여점에서 그들을 폭도로 고발한 한국인 통역관들의 밀고로 일본 기병대에 포위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21명이 현장에서 살해되었습니다. 하지만 조사 결과 순례자들은 길을 나서기 전 일본 헌병대를 찾아가 자신들의 신분과 여행 목적을 명확히 밝힌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더욱이 일본군 당국은 이들이 무장을 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저항을 하지 않아 그들에 대한 공격을 일차 중단했다가 다시 공격을 재개하여 그런 끔찍한 학살을 계속한 이유가 단지 그들 중 한 명의 주머니에서 수상쩍어 보이는 편지를 한 통 발견했기 때문임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조사 결과에 깜짝 놀란 이토 대공은 태인대학살이 오랫동안 추구해오던 평화와 화해 작업을 매우 지연시키게 될 것을 직감하고서, 곧바로 먼저 황제를 알현하고 이어 가쓰라 후작과 데라우치16 장군을 방문하여 필수적인 수습 조치들을 결정하고자 했습니다. 그리하여 대한제국 참모부 담당관인 사이토17 대좌가 몇 명의 장교들과 함께 전라도를 방문하여 희생자 가족들에게 주차군의 사과와 유감을 표명키로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그리고 각 유가족당 위자료 명목으로 1천 원이 지급되었습니다. 또한, 이 10월 7일 사건에 연루된 사관과 병사는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18


  제라르의 서신에 따르면 사건 당시 일진회 소속의 시천교인들은 동학의 옛 수장들 중 한 명의 무덤이 있는 태인으로 성지순례를 하던 중 예기치 않은 참변을 당한 것으로 확인된다. 당시 태인에서 본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일제는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의병들을 저지하는 일을 매우 괴롭게 여겼다. 그중에서도 특히 태인에서 발생한 이 사건은 일제가 조선을 영원한 속국으로 만들어 그들이 추구하는 평화를 이루는 데 큰 걸림돌로 여겨 사건을 급히 수습하고 관련 지역 조사판결문에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이면에 감추어진 일본의 속내는 평화 추구라는 병탄 구호로 민중들을 속여 친일세력으로 끌어들인 수많은 일진회원을 죽음으로 내몰아 교도들과 일진회원의 분노가 절정으로 치닫는 것을 일시적으로 막기 위한 정치적 결단이었다.
  한편, 위 외교문서에 기록된 것처럼 사건 당시 시천교 소속의 일진회원들이 동학의 수장 중 한 명의 무덤이 있는 태인으로 순례길에 올랐다는 것은 앞서 제시한 화호리(禾湖理) 회동19 내용과는 사건 경위 상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외교문서로 전달된 서신에는 일본 측 사료와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 천황에게 보고하여 자세히 조사한 내용이 담겨 있어 사건 발생의 경위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그런데, 사건 당시 이들의 사망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한 《대한매일신보》는 기사 내용에 본 사건이 1908년 음력 8월 16일[양력 9월 11일]에 발생한 것으로 보도하였다.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시천교 소속의 일진회원들은 1908년 10월 7일에 사망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대한매일신보》가 기사 내용에 사건 발생일을 음력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오류로 보인다. 그 까닭은 《대한매일신보》에 「시천교인의 피해」 기사의 발행일[1908년 10월 9일]이 이토 히로부미가 조사하여 발표한 10월 7일의 이틀 뒤임을 고려하면 1908년 10월 7일이 보다 정확한 사건 발생일로 받아들여진다.
  한편, 일본 측 사료와 이토 히로부미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들은 시천교인이자 일진회원임을 명확히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10월 7일 이전부터 성지순례에 참여하여 이동 중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사실은 제라르의 서신에서 이들이 “태인으로 성지순례를 하던 중, 이달 7일 식사를 하려고 머물던 두 여점”이라는 특정 대목을 눈여겨보면 그들의 행보를 읽어낼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순례길에 오른 시천교 소속의 일진회원들이 7일 이전부터 순례에 참여 중이었고 한 곳이 아닌 여러 곳의 여점(旅店)에 흩어져 식사한 것으로 여겨진다.
  일제는 21명의 일진회원이 순례 도중 일본 군사로부터 참변을 당한 일을 수천 명 이상의 죽음을 일컫는 대규모 학살로 인식하고, 이 사건을 ‘태인대학살’이라고 명명했다. 당시 의병 관련 수많은 판결사례를 보더라도 일제는 이들의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사장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제라르의 서신에 기록된 것처럼 일제는 이 사건을 평화를 저해하는 중차대한 사안으로 인식하고 사건 해결을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사실 일본은 청일전쟁 이후 동양정책 및 조선식민지정책을 추진하면서 동양의 영원한 평화를 게시하고 국제 정세상 그 아래에서만 대한제국의 독립이 가능하다고 강조하면서 일련의 조약을 강제하고 식민지화를 추진한 바 있다.20 일제가 주장하는 평화는 이토 히로부미가 1906년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면서 고종을 알현할 때 남긴 부임 목적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이 통감으로 부임한 목적이 “일한 양국 간 국교를 더욱 친밀하게 융화”하고 “동양의 영원한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그 평화는 불평등조약을 통해 일제가 확보한 이권 독점과 그 이권을 계속해서 이어가는 영속화로 조선 독립의 현안을 유보하는 것이었다.21 이를테면 태인에서 일어난 이 사건을 일제가 평화를 빙자해 제국주의를 정당화하고 조선을 영원한 속국으로 만드는 데 지대한 걸림돌로 여긴 것이다. 당시 시천교 교주이자 일진회장인 이용구도 일제가 평화 개념을 대한제국의 병탄(倂呑·竝呑)22 구호로 활용함을 인지하면서도 일제의 행보에 동조하며 친일행각을 이어갔다. 그뿐만 아니라 이용구는 시천교를 창립하면서 최제우와 최시형으로 이어지는 종통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최제우의 고향인 구미산과 그가 처형당한 대구 장대 등을 매입했고, 최제우의 묘소 관리권까지 장악하였다.23 이는 과거 최제우의 동학으로부터 이어져 온 정당성을 확보하여 동학을 추종하던 민중들과 천도교인의 이탈을 꾀해 일진회와 시천교의 교세를 확장하기 위함이었다.
  이 시기 우리나라는 이완용(李完用:1858~1926)24이 내각총리대신에 천거되어 역임 중이었고, 이때 이완용은 일진회 총재 송병준(宋秉畯:1858~1925)25을 대신(大臣)에 임명했다. 일제로서는 당시 일진회 총재 송병준을 내각에 발탁하여 수많은 일진회원의 지지를 이끌어냄으로써 친일내각을 확고히 하여 식민지화를 위한 한일합병조약 체결을 앞당기고자 했다. 실제로 일제는 이완용 내각이 출범하자 고종황제의 황제권을 박탈하기 위한 일련의 활동을 본격화하였다. 1907년 7월 6일, 일진회 총재이자 이완용 내각에서 대신을 맡고 있던 송병준은 고종에게 일본측이 합병을 요구하기 전에 순종에게 왕권을 넘기는 양위(讓位)로써 일본천황에게 사죄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후에도 일진회의 송병준은 이토 히로부미와 결탁한 후 수많은 일진회원을 동원하여 궁궐을 에워싸고 고종의 폐위를 촉구하여 일제의 조선 식민지화 정책을 주도해나갔다.       
  이 시기 이미 일진회와 시천교는 친일세력으로 전락하였지만, 20만에 달하는 시천교 입교자와 일진회 가입자 중에서 지도세력을 제외한 많은 사람은 이 사실을 모른 채 가입한 경우가 많았다. 그 까닭은 과거 서북지방 동학 재건의 일등 공신인 이용구가 시천교 교당을 신축한 후 동학의 연원제(淵源制)26를 활용해 천도교인의 이적을 유도했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수많은 천도교인들은 이용구의 속내를 모른 채 일진회와 시천교에 입교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당시 이용구는 과거 동학을 추종하던 민중을 현혹하여 시천교와 일진회에 가입시키고 자신은 매국행위를 일삼으며 교도들을 또다시 사지로 몰아넣었다. 상제님께서 태인에서 일진회원 관련 공사를 보신 시점에도 일진회원의 피해는 실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당시 서울 주재 영국 총영사 헨리 코번(Henry Cockburn)은 1907년에서 1908년 3월까지 의병에 의해 살해된 일진회원의 수가 2,000명이 넘는다고 영국 외무성에 보고한 바 있다.27 동학농민운동을 거쳐 어렵게 살아난 민중들이 또다시 친일세력에 이용당해 해하여지는 안타까운 상황이 이어진 것이다. 이 시기에 상제님께서는 수많은 이들을 살리시기 위해 공사를 행하셨다.
  과거 동학을 추종하던 민중들이 이용구의 속내를 모른 채 또다시 우후죽순 시천교와 일진회에 가입하여 세력을 확장하였지만, 일진회원에게는 예기치 못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태인 사건 발생 당시 의병들은 일진회원과 관련된 군율을 정해 일진회원을 보고 죽이지 않는 자는 즉시 참수한다는 명령이 하달되기도 했다.28 그뿐만 아니라 태인에서 일진회원 관련 사건이 발생하기 몇 개월 전 이미 일제는 일진회원을 이용한 후에 일진회 자체를 없앨 계획까지 세워두고 있었다. 이 사실은 주일 영국대사 맥도날드(MacDonald)가 1908년 4월에 영국대사관에 발송한 서신29에서도 확인된다. 문서에는 “일진회는 처음에 예정했던 것보다 훨씬 큰 규모로 성장하였고, 이에 구성원을 감축하려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으며, 결국에는 일진회를 모두 없애 버릴 것”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상제님의 공사 이후 대한제국을 일제의 영원한 속국에 두고 지배하려 한 이토 히로부미와 이에 동조하여 일진회와 시천교도를 현혹해 친일매국행위를 일삼은 이용구는 결국 죽음을 맞이했다. 이용구와 그를 따른 중진(重鎭)들은 일제가 평화를 빙자해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데 동참하기 위한 수단으로 수많은 민중을 속여 시천교와 일진회에 가입시키고 안으로는 재민혁세(災民革世)를 꿈꿨다. 하지만 그들은 일제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며 이용만 당하다가 결국에는 수많은 민중으로부터 지탄을 받고 1910년에 해체되었다.



나가며
  상제님께서는 일본 군사로부터 수많은 이들의 목숨이 해하여질 것을 미리 아시고 이를 애석해하시며 공사를 보셨다. ‘글자 한 자에 하나씩’이라는 공사의 의미를 명확히는 알 수 없지만, 집계된 사망자 숫자가 정확히 21명임을 고려하면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글자 수가 21글자임을 유추할 수 있다. 더군다나 공교롭게도 이때 사망한 교인들의 교단(敎團)인 시천교의 명칭이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지기금지원위대강’ 21글자의 시천주를 상징한다는 점은 글자 하나에 하나씩이라는 의미가 내포하고 있는 상징성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30
  아울러 상제님께서는 이 공사를 처결하실 때 33냥의 돈을 공사에 쓰인 술과 고깃값으로 사용하셨다. 공사 전에 문공신에게 하명하여 돈을 준비하신 점과 33냥 전액을 공사에 사용하셨다는 점을 살피면, 공사에 쓰인 33냥에 부여된 상징성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이와 관련해서 상제님께서 전하신 말씀이 없어 그 의미를 명확하게 헤아리기는 어렵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이들이 식사하기 위해 들린 여점 가운데 일본 군사가 들이닥친 여점에 머물고 있던 교인들이 33명이었다는 사실은 그 의미를 헤아림에 있어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일 것이다.
  1907년 상제님께서는 동학농민운동 때처럼 어리석게 가담하여 죄없이 죽어간 민초들을 살리기 위해 공사를 행하셨다. 수많은 일진회원이 친일세력의 꼭두각시로 전락하기 전 상제님께서는 이들이 동학의 잔당이라는 이유로 순검들로부터 색출 당할 때도 “그대들이 이같이 고난을 겪기만 하고 벗을 줄을 모르니”라고 하시며 권능으로써 관부(官府)의 조사를 면하게 하신 적도 있다.31 이는 동학농민운동을 거쳐 겨우 살아난 민중들을 불쌍히 여기신 것인데, 이들에 대한 상제님의 마음은 『전경』에 “어렵게 살아난 것이 또 죽게 생겼으니”라는 말씀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32 상제님께서도 성인의 도와 웅패의 술을 말씀하시며 “억조창생을 죽이고 살기를 바라는 것이 어찌 합당하리오”라고 이르신 것처럼 일제의 만행과 그에 동조하며 민초들을 이용한 죄는 그 무엇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01 《대순회보》 123호, 「상제님의 발자취를 찾아서(59): 행단에서의 공사와 사기(邪氣)를 옮기는 공사」./197호, 「지명 이야기: 태인 행단에 있는 시천교인의 무덤」.
02 행록 3장 17절.
03 《대한매일신보》, 「시천교인피해」, 1908.10.09./「調査渡韓」, 1908.10.20.
04 정읍문화원, 『井邑文化財誌』, 2002, pp.571-572./정읍시청 홈페이지 유물유적 시천교 순교묘비(www.jeongeup.go.kr).
05 이용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868-1912. 친일반민족행위자. 대표 관직으로는 광무학교 교장, 일진회 회장, 시천교 교주.
06 김정인, 「大韓帝國期,日帝强占期 侍天敎의 존재 양태와 활동」, 『國史館論叢』 103 (2003), p.5.
07 김성호, 「상생의 길: 『전경』에 나타난 손병희(孫秉熙) 연구」, 《대순회보》 93 (2009), pp.108-109.
08 화호리는 상제님께서 이십팔장(二十八將)과 사십팔장(四十八將) 공사를 보신 곳이자 이 마을에 태을주가 전파되자 아직 때가 이르다고 하시며 그 기운을 거두어들인 곳이기도 하다.(공사 3장 28절 참고)
09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한국사료총서 제1집, 侍天敎人의 沒殺과 各郡의 의병장.
10 국가기록원, 「영, 호남지역 의병활동 관련 판결문」, pp.102-276.
11 의병,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http://www.grandculture.net).
12 1907년 일제가 우리나라의 주권을 빼앗기 위해 강요한 조약. 정미년에 맺은 7개 항목으로 구성된 조약이라는 뜻에서 ‘정미 7조약’이라고도 함.
13 김종준, 「대한제국 말기 일진회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8), pp.177-178 참고.
14 이양희, 「일제의 자위단 운영과 성격」 (충남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9), pp.15-16 참고.
15 정읍문화원, 앞의 책, p.572.
16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
17 사이토 리키사부로(齋藤力三郞). 한국 주차군 참모장.
18 이지순, 『근대 한불 외교자료 Ⅱ』 (서울: 선인, 2018), pp.235-237.
19 앞서 제시된 《대한매일신보》와 『정읍문화재지(井邑文化財誌)』를 참고하면 1908년 음력 8월 16일에 시천교인들이 태인군 용산면 화호리(禾湖理)에서 시천교 지도자들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이곳을 지나다가 날이 저물어 태인 행단 주막에서 유숙하였는데, 일본 군사가 이들을 의병으로 오인(誤認) 사살하여 21명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20 이예안, 「영원평화의 기대지평과 근대 한국」, 『한림대학교 개념과 소통』 17(2016), pp.42-43. 
21 이예안, 같은 글, pp.51-54 참고.
22 남의 물건이나 다른 나라의 영토를 한데 아울러서 제 것으로 만듦.
23 김정인, 같은 글, pp.5-10.
24 이완용, 『두산백과』: 을사오적(乙巳五賊)의 한 사람이며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 고종을 협박하여 을사늑약 체결과 서명을 주도했고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친 후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헤이그 특사사건 후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하여 물러날 것을 강요했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총리대신으로 일본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했다.
25 송병준, 『두산백과』: 조선 후기 친일정치가, 민족반역자. 헤이그 특사사건 후에는 황제 양위운동을 벌여 친일활동에 앞장섰다. 이용구와 함께 일진회를 만들어 나라를 일본에 넘겨주기 위한 친일행위를 일삼았고, 1907년 이완용 내각이 들어서자 농상공부대신, 내부대신을 역임, 국권 피탈을 위한 상주문, 청원서를 제출하는 매국 행위를 했다.
26 입도 후의 수행과 종교적 체험을 통해 동학에 대한 신앙과 이해도가 적절한 수준에 도달하면 포덕이 허가되고, 포덕을 통해 자신의 인맥을 구축하면 도통 연원의 권위를 지니게 되어 휘하 교인을 통솔할 수 있고, 휘하 교인이 종교적 체험을 통해 교의에 대한 이해와 신앙 수준이 깊어지면 자연스럽게 연원인 전교인의 종교적 권위가 강해지는 조직체계. (박상규, 「근대 한국 신종교의 조직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 논문, 2022), p.126).
27 외교문서 「Consul General Cockburn to Sir Edward Grey」 국가기록원, FO 371-440.
28 홍순권, 「한말 일본군의 의병 진압과 친일세력의 역할」, 『역사교육논집』 58(2016), pp.247-272 참고.
29 외교문서, 이등박문(伊藤博文)과의 면담기, 국가기록원, FO 371 440 6987 Ⅱ.
30 시천교, 『두산백과』: 시천교의 명칭을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으로 시작되는 천도교의 주문에서 따온 것 같이 교의(敎義) 자체는 천도교와 별 차이가 없다.
31 행록 3장 15절 참고.
32 행록 3장 14절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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