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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52년(2022)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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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광장 : 너희들의 가는 길이 위태롭구나

너희들의 가는 길이 위태롭구나



교무부 정나연


▲ 「공주 우금티고개전투」, 동학농민혁명기념관, (2012년 10월 촬영)



“형렬이, 필성이, 너희들의 가는 길이 위태롭구나.”


  영화 ‘화평의 길’에서 동학농민군에 가담한 김형렬과 안필성이 일본군과 관군에게 쫓겨 산속으로 피신했을 때 상제님께서 그들에게 하셨던 말씀이다. 상제님께서는 두 사람을 살리기 위해 그들이 피신해 오는 길목에서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이 상황과 관련된 내용은 『증산의 생애와 사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01 그러나 안필성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있어 당시 김형렬의 행보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이 글에서는 『증산의 생애와 사상』의 기록과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통해 상제님과 김형렬 그리고 안필성의 행적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1894년 갑오년. 상제님께서 주유천하 하시기 3년 전의 일이다. 조선은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 등으로 백성들이 계속되는 고통의 시기를 겪고 있었다. 상제님께서는 동학농민군이 눈이 내릴 시기에 실패할 것을 아시고 어느 여름날 여러 사람에게 “월흑안비고 선우야둔도(月黑雁飛高 單于夜遁逃) 욕장경기축 대설만궁도(欲將輕騎逐 大雪滿弓刀)”의 글을 외워주시며 동학에 들지 말 것을 권유하셨다.02 하지만 상제님의 예지를 믿지 못한 사람들은 그 말씀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안필성 또한 그러한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안필성(安弼成, 1870~1961)은 금구군 수류면 계룡리(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사람으로 한문에 능해 관내 주사(主事)를 지냈던 인물이다. 190cm의 큰 키에 힘도 장사인데다가 직설적인 말투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그를 어려워했다고 한다. 평소 안필성은 상제님과 친구처럼 지내며03 상제님의 비범하심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동학농민군에 가담하였다.
  김형렬 또한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상제님의 종도가 되기 전이었던 당시 그는 상제님의 성예를 풍문으로만 전해 듣고 있었다. 이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 세상이 어수선해지자 상제님의 글방으로 찾아가 한적한 곳에서 함께 글 읽기를 청해 학선암(學仙庵)으로 가기도 하였다.04 이처럼 김형렬 또한 상제님의 성예를 알고 있었지만 당면한 현실 앞에서는 상제님의 예지를 믿지 못하고 동학농민군에 가담했던 것이다.


▲ 호남제일성, (전북 전주시 풍남문)



  동학농민군에 가담한 안필성은 남원에 주둔하고 있던 김개남 부대에 합류하기 위해 1894년 10월 중순에 태인을 떠났다. 그가 전주 구이면 정자리(현 완주군 구이면 백여리)에 도착했을 때 상제님께서 그를 기다리고 계셨다. 안필성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자신의 행로 중에 나타나신 상제님을 보고 깜짝 놀랐다. 상제님께서는 놀라는 안필성을 데리고 임실 마구단 주막에서 한참을 머무르셨다. 사실 안필성은 남원에 도착하면 자신을 동학농민군에 가담케 했던 접주 최두연을 비밀리에 만나기로 했었다. 이것을 알고 계셨던 상제님께서는 주막을 빨리 떠나고 싶어 하는 그에게 최두연을 주막 앞에서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과연 두서너 시간이 지나자 최두연은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나타났다. 그는 안필성에게 남원으로 가지 말고 전주로 따라오라 말하며 급히 떠났다. 김개남과 동학농민군이 국권을 침탈하려는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한양(漢陽)을 향해 북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1894년 5월 7일 동학농민군과 조선 조정 사이에 전주화약이 체결된 후 6월 25일 김개남과 동학농민군이 남원에 입성해05 그곳을 중심으로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을 시행한 지 100여 일 만이었다.06
  상제님께서는 곧바로 따라가려고 하는 안필성에게 천천히 가기를 종용하시며 함께 전주로 향하셨다. 다음 날 전주성에 도착한 상제님께서는 저녁 무렵 안필성을 데리고 거리로 나가셨다. 그곳에는 김개남과 동학농민군에게 처형당한 세 사람의 머리가 나뒹굴고 있었다. 그것은 신임 남원부사 이용헌(李龍憲)과 그를 수행하며 기록을 담당하던 하급 관리인 기실(記室), 그리고 시중을 드는 중방(中房)의 머리였다.07 이 외에도 고부군수 양필환(梁弼煥)08과 순천부사 이수홍(李秀弘)이 처벌되었다.09 상제님께서는 이러한 처참한 일에 안필성이 가담하지 않도록 동학농민군보다 조금 늦게 전주에 오신 것으로 보인다.
  전주에서의 이 사건은 김개남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의 폭력적인 성향을 잘 보여주는 한 예이다. 이는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척왜(斥倭)를 외치며 일어난 동학농민군의 재기 명분과 사람들의 인심을 잃게 만들었다. 자신을 개남국왕(開南國王)이라 칭하며 비결 속 이상국인 남조선(南朝鮮)의 왕을 꿈꿨던 것으로 평가되는 김개남은 왕후장상(王侯將相)을 바랬다.10 진정한 보국안민보다 왕후장상을 바란 이들이기에 백성을 살피며 움직이는 게 아니라 강압적인 행동을 취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들에게 적대적이지 않았던 지역에서도 행해졌던 폭력과 방화 및 강탈은 결국 동학농민군에 대한 보복으로 돌아왔다.11 상제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내다보고 계셨던 것이다.


▲ 안필성의 이동 경로(출처: 카카오맵 위에 추가 표기)



  상제님의 이러한 마음을 알지 못한 안필성은 결국 전주에서 김개남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에 합류하였다. 안필성은 10월 21일 전주를 출발하여 삼례를 지나12 여산(礪山)에서 상제님을 다시 만났으나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동학농민군은 지금의 대전지역인 진잠(鎭岑)읍을 거쳐 유성(儒城) 장터에서 야영하였다. 그들은 삼남 지방에서 한양(漢陽)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군사적 요충지가 된13 청주성의 충청병영을 공격하기 위해 11월 12일에는 야간행군까지 실시하였다. 마침내 11월 13일 새벽 청주성에서 삼십 리 정도 떨어진 곳에 도착했다.
  놀랍게도 상제님께서는 그곳에서도 안필성을 기다리고 계셨는데, 여기서 많은 동학농민군이 희생될 것을 예견하셨다. 안필성은 상제님께서 백성을 구하려고 하는 동학농민군과 함께하지 않고 불길한 말만 하신다고 생각하며 화를 냈다. 백성을 구한다는 생각에 가득 차 있던 안필성은 상제님의 만류를 듣지 않고 동학농민군을 따라 충청병영의 앞산까지 나아갔다. 이때 김형렬도 있었다.14 당시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한 그의 기록이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을 볼 때 김형렬과 안필성은 따로 움직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동학농민군이 청주성에서 500m 떨어진 곳에서부터 공격하기 시작하자 관군들은 청주성으로 퇴각하였다. 동학농민군이 퇴각하는 관군을 추격하자 사방에서 총알이 빗발쳤다. 매복에 걸려들고 만 것이다. 그곳에는 동학농민군의 움직임에 관한 정보를 입수한 일본 군로실측대(軍路實測隊) 호위병들이 매복해있었다. 일본 군로실측대 호위병의 구와하라 에이치로(桑原榮次郞) 소위는 11월 12일 청주성에 도착한 후, 13일 새벽 1시에 5명의 척후병을 보낸 것을 시작으로 동학농민군을 여러 차례 정찰한 후 청주성 남문 앞 고지에서 잠복하고 있었던 것이다15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이 그들을 내려다보며 기습사격을 가하자 동학농민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기와 소, 말 등을 버리고 다투어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16 동학농민군이 혼비백산하여 흩어지는 가운데 안필성과 김형렬은 산속으로 피신했다. 상제님께서 두 사람을 기다리고 계시다가 “형렬이, 필성이, 너희들의 가는 길이 위태롭구나.”라고 하시며 두 사람을 부르셨다. 영화 속 장면이 바로 이 상황이다. 상제님께서는 안필성에게 떡을 사 오게 해 온종일 굶은 그들의 허기를 달래주신 후 산에서 내려가셨다. 이때 김형렬은 상제님의 비범하심을 깨닫고 뉘우치는 바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상제님께서는 백성들이 희생되는 당시의 상황을 안타까워하시며 두 사람을 데리고 계룡산으로 가셨다. 깊은 산 속까지 들려오는 총소리에 불안해하는 안필성과 김형렬을 안심시킨 상제님께서는 그곳에서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전주로 향하셨다. 상제님께서는 일본군과 관군, 혹은 동학농민군에게 보복하려는 사람들을 피해 그들을 안전한 길로 이끌어주셨다. 그리고 전주에 도착하자 두 사람을 각자의 집으로 돌려보내셨다. 이렇게 김형렬과 안필성은 위태로움 속에서 살아났으나, 김개남은 12월 3일에 처형되었고 많은 동학농민군은 죽음을 면치 못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화평의 길’에서 김형렬과 안필성이 상제님의 덕화로 살아 돌아온 전투는 1894년 11월 13일의 청주성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김형렬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김형렬의 일생에서 중요한 일이 바로 이 전투에서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소문으로만 전해 들었던 상제님의 성예를 직접 목격하게 된 것이다. 상제님의 덕화로 목숨을 구한 이 과정에서 깨달은 상제님의 비범하심은 김형렬이 훗날 종도가 되어 성심으로 상제님을 모시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안필성의 경우를 보면, 상제님께서는 그가 김개남의 동학농민군에 합류하고자 남원으로 떠난 후부터 끊임없이 살펴주셨다. 하지만 상제님의 예지를 믿지 못한 안필성은 죽음에 직면해서야 상제님을 따라나섰다. 상제님께서는 친구처럼 가깝게 지냈던 그를 구하기 위해 한겨울 추위 속을 다니신 것이다. 어느 여름날 상제님께서 동학농민군의 실패를 예견하시며 사람들에게 동학농민군에 들지 말 것을 권유하시고 추운 겨울날 김형렬과 안필성을 구하기 위해 먼 길을 다니신 모습에서는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고자 하셨던 상제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김형렬과 안필성처럼 알고 지내던 사람도 상제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지만, 그들이 진심으로 상제님을 따를 때까지 기다려 주신 모습에서는 수도인들의 마음가짐과 자세에 대한 이정표를 제시해 주고 계신다.






01 이 글은 『증산의 생애와 사상』의 pp.46-54까지의 기록을 참고하였으며 본문에서 그와 관련된 내용의 각주는 따로 하지 않았다.
02 행록 1장 23절.
03 신상미, 「안필성과 동곡 앞 팥거리」, 《대순회보》 144호 (2013), p.31.
04 행록 1장 21절 참고.
05 전라북도 동학농민혁명기념관관리사업소, 『동학농민혁명과 전북』 (전북: 신아출판사, 2006), p.177.
06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 52회」, http://www.ohmynews.com.
07 황현, 『오동나무 아래에서 역사를 기록하다-황현이 본 동학농민전쟁 [오하기문]』, 김종익 옮김(경기: 역사비평사, 2016), p.446.
08 당시 고부군수가 양성환(梁性煥)이라는 기록도 있으나 『승정원일기』의 고종 31년 11월 14일 병술 8번째 기사에는 양필환(梁弼煥)으로 기록되어 있다.
09 순천부사 이수홍은 군수전(軍需錢,: 군에 필요한 돈) 3,000냥을 바치고 풀려났으나 고부군수 양성환은 군수전을 내지 않고 저항하다가 매를 맞고 풀려난 후 장독(심한 매질로 인한 상처에 생긴 독)으로 사망하였다. 천도교, http://chondogyo.or.kr.
10 대순종교문화연구소,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에 대한 상제님의 평가」, 《대순회보》 81호 (2008), pp.33-39 참고.
11 신영우, 「1894년 동학농민군의 청주성 점거 시도」, 『충북사학』 13집 (2002), pp.66-67 참고.
12 천도교, 같은 자료, http://chondogyo.or.kr.
13 김양식, 「청주병영의 동학농민군 진압과 모충사」, 『동학학보』 43 (2017), p.146.
14 『증산의 생애와 사상』에서 이 시기의 김형렬에 대한 기록은 이때 처음으로 등장한다.
15 일본 군로실측대 호위병은 일본의 철로 부설 측량대를 호위하는 군사를 말한다. 일본은 조선에서 군대와 군수물자 이동을 위한 철로 노선을 조사하기 위해 철도기사 센고쿠 미츠기(仙石貢) 등을 보냈는데 호위병으로 후비보병 제19대대의 1개 소대를 함께 보냈다. 이들은 보은, 문의를 지나서 청주로 이어지는 철로 노선을 조사하였는데 11월 12일 청주성에 도착하여 13일 전투에 임했다. 『청주시지』 1권, pp.340-341.
16 신영우, 같은 논문,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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