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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37년(2007)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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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典經』속의 옛 땅을 찾아 : 백암리(白岩里)와 굴치(屈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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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리(白岩里)와 굴치(屈峙)

 

 

글 연구위원 김성호

 

▲ 백암마을 전경

 

 

 『典經』을 보다보면 상제님께서 어느 지역의 특정마을이나 혹은 그 마을에 사는 종도(從徒)들의 집을 왕래하시며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행하셨다는 내용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그 중의 한 장소이기도 한 백암리(白岩里)는 한때 박공우와 신원일이 상제님을 모시고 있었던 곳이자,01 상제님께서 해원시대(解時代)를 맞이하여 이 마을에 사는 김경학의 집에 대학교를 정하시고 당시 가장 천한 신분계층이었던 무당에게 제일 먼저 교(敎)를 전하신 곳이기도 하다.02

  또 백암리는 상제님께서 무신년[1908년] 봄에 이 마을에 사는 김경학과 최창조의 두 집을 왕래하시며 성복제(成服祭)와 매화공사(埋火公事)를 보신 곳이기도 하다.

  성복제(成服祭)란 초상이 나서 처음으로 상복을 입을 때 차리는 제사(祭祀)를 뜻하는 것으로, 『典經』에 따르면 상제님께서는 김광찬 양어머니[養母]의 성복제를 최창조의 집에서 거행하시기도 하셨다.

  게다가 상제님께서는 이 마을에서 매화공사(埋火公事)를 위해 김형렬에게 ‘어떤 일’03을 분부하시고, 이를 정해진 때에 맞추어 최내경ㆍ신경원ㆍ최창조에게 행하게 하라고 지시하시기도 하셨다. 이에 형렬은 지체 없이 이를 종도들에게 알렸고, 형렬로부터 이 같은 상제님의 분부를 전해들은 세 명의 종도들은 상제님의 분부를 정해진 때에 맞추어 백암리(白岩里) 최창조의 집 정문 밖에서 이행하였다. 그들이 이 같은 일을 마치고 시급히 상제님께 돌아올 때쯤 하늘에서는 기이한 현상 즉, 갑자기 검은 구름이 일고 폭우가 쏟아지면서 뇌전(雷電)이 크게 쳤다고 한다. 이에 상제님께서는 이 광경을 보시고 형렬에게 “이때쯤 일을 행할 시간이 되었겠느냐.”고 물으셨는데, 형렬은 상제님의 물음에 “행할 그 시간이 되었겠나이다.” 라고 말씀드렸다. 형렬이 상제님의 물음에 이 같이 대답하자 상제님께는 곧, 그들이 분부를 받들어 시행했던 일들에 대해 “뒷날 변산 같은 큰 불덩이로 인해 이 세계가 타버릴까 하여 그 불을 묻었노라.”고 매화공사의 성격에 관해 말씀해 주시기도 하셨다.04

  한편 매화공사와 성복제, 그리고 상제님께서 이 마을에서 제일 처음 교(敎)를 전하시는 내용 이외에도 『典經』에서는 백암리와 관련된 구절을 더 찾아 볼 수 있다.

  그 내용은 이 마을의 화재(火災)와 관련된 것으로, 하루는 상제님께서 태인 백암리로 가시는 도중에 김경학의 집에 불이 나, 이 불이 바람을 타기 시작하여 마을이 위험하게 되었던 적이 있었다.

  이때 마침 백암리로 가시던 길에 이 광경을 직접 목도하신 상제님께서는 이 불을 끄지 않으면 동리가 위태로우리라고 말씀하시고 권능으로 바람을 크게 일으켜 이 마을을 화재로부터 구하시기도 했다.(권지 2장 15절 참고)

  이처럼 『典經』에서 비교적 자주 등장하는 백암리(白岩里)05 상제님 재세시에는 태인현(縣)06에 속해 있었지만, 1914년 행정구역이 통폐합됨에 따라 지금은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에 편입되어 여러 마을과 병합되어져 있다.

  대개 마을과 마을이 병합되게 되면 대부분의 지명(地名)이 새롭게 바뀌기 마련이다. 하지만 백암리는 병합되어진 마을 가운데 위치상으로 가장 중심이 되는 마을일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가장 오래된 마을이라는 이유로 마을 명(名)이 바뀌지 않고 지금까지도 그대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행정구역상으로 볼 때 현재의 백암리와 과거의 백암리는 그 범위상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즉, 상제님 당시만 하더라도 백암리라 하면 백암마을 한 곳만을 지칭했지만, 현재는 병합된 여러 마을을 총칭하는 리(里)07 단위의 명칭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08

 

▲ 오래된 고목과 마을 소개판

 

 

  답사장소로 출발 전 사전 조사에 의해 이 같은 사실을 몰랐던 바는 아니나, 직접 백암리에 당도하고 보니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그 범위가 워낙 방대해 통합되기 이전의 백암리를 찾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을 듯했다. 바로 그때, 때마침 이 지역 토박이로 보이는 할아버지 한 분이 직접 우리 쪽으로 다가와 이 마을에는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이에 우리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 분에게 옛 백암리에 관해 여쭤보았다.

  그 분의 말씀 또한 현재는 백암리가 통합되어 이에 관해 잘 모르는 사람은 예전의 백암리와 현재의 통합된 백암리를 동일한 곳으로 여기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며 옛 백암리의 위치를 상세히 일러주었다.

  이 말을 듣고 지체 없이 그곳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백암리 입구에서 칠보천을 따라 뻗은 한적한 마을길로 얼마를 내달렸을까, 멀리서 희미하게 마을 알림 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 순간 머릿속으로는 혹여나 이 장소가 우리가 찾는 곳이 아니면 어쩌나 하고 내심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마을 초입에 당도하여 원백암이라고 새겨진 커다란 마을 알림 돌을 확인하는 순간 이 같은 걱정은 이내 사라졌다. 원백암(元白岩) 마을을 찾고 나니 한편으로는 고심하던 문제가 풀렸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밀려왔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마을이 상제님께서 과거에 성복제와 매화공사를 보신 장소라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했다.

 

▲ 백암마을 알림 돌

 

 

  잠시 마음을 진정시키고 마을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을 주변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것 하나라도 놓칠세라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주변 경관을 유심히 살펴보니 정말이지 이 마을은 풍수지리에 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이 보아도 명당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야트막한 산들이 마을을 아늑히 감싸고 있었다.

  게다가 마을 한 가운데는 오래된 고목(古木)이 터줏대감처럼 떡하니 지키고 있어, 한눈에 봐도 누구나 오래된 마을임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한편 마을 입구에는 여타의 다른 시골마을과는 달리 목재판으로 아주 깔끔하게 만들어진 마을 소개판이 눈에 띄었다. 소개판에 쓰인 내용을 찬찬히 읽어보니 거기에는 마을의 연혁과 유래, 그리고 이 마을의 역사적 인물에 관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이에 따르면 원백암 마을은 현재 백암리의 중심마을이며, 마을 이름을 백암이라고 부르게 된 까닭은 마을 뒷산에 흰 바위가 많았기 때문이라 한다. 게다가 이 마을에는 원래 24방위에 맞추어 세운 스물 네 개의 당산(堂山)이 있었다고도 한다.

  이처럼 마을 소개판에 쓰여진 내용을 쉼 없이 읽어 내려가고 있는데, 순간 다른 마을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내용이 필자의 눈길을 끌었다. 그 내용은 다름이 아니라 상제님에 관한 것이었다.

  상제님 강세지(降世地)에서도 ‘姜甑山 降世地’라는 알림판 이외에는 마을 입구에서 상제님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었는데, 강세지도 아닌 이 마을에서 그것도 마을 소개판까지 만들어 상제님에 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는 것은 정말 특이한 경우였다.

 

▲ 백암마을 안내도 및 연혁

 

 

 

 

 

  마을 소개판에 적힌 내용이 길지는 않았지만, 소개 판에는 ‘한때 강증산의 소요처’라고 명확하게 쓰여 있었는데, 이를 통해 필자는 이 마을이 과거에 상제님께서 머무르셨던 장소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우연히 마을 소개판에 쓰여진 글을 읽으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마을과 관계된 역사적 인물 중에는 눈여겨 볼만한 인물이 있었다. 그는 바로 영조 때 효행으로 벼슬을 받았던 박잉걸09이다. 박잉걸? 언뜻 들어서는 우리에게 낯익은 인물이 아니라서 이 지역사람이 아니고서는 생소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의 이름이 생소하기는 하나 ‘굴치’10라고 하면 수도인들도 익숙하게 여겨질 것이다. 굴치! 이곳은 『典經』 속에 등장하는 지명(地名)의 한 곳으로서 상제님께서 갑진년(甲辰年) 2월에 잠시 머무르셨던 곳이기도 한데, 백암리로부터 이 굴치로 가는 길을 사재(私財)를 들여 닦은 사람이 바로 박잉걸이다.

  상제님께서 굴치 마을에 계실 때, 당시 도술(道術)을 배우고자했던 영학에게 상제님께서는 그것을 원치 말고 『大學』을 읽으라고 명하셨는데, 영학은 이를 듣지 않고 황주 죽루기(黃州竹樓記)11 엄자능 묘기(嚴子陵廟記)12만을 읽었다. 이에 상제님께서는 “대(竹)는 죽을 때 바꾸어 가는 말이요. 묘기(廟記)는 제문이므로 멀지 않아 영학은 죽을 것이라.” 말씀하시며 ‘골폭 사장 전유초(骨暴沙場纏有草) 혼반 고국 조무인(魂返故國弔無人)’13이라는 시(詩) 한 귀를 이도삼을 불러 영학에게 전했다.

  하지만 영학은 상제님으로부터 이같은 시(詩) 한 귀를 전해 받고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술서(術書)만을 공부했는데, 이로 인해 결국 상제님의 말씀대로 영학은 죽게 되었다.14 백암리에서 굴치마을로 이동하기 전, 우리 일행은 『典經』을 통해 상제님께서 굴치마을에 머무시면서 영학에게 하신 이 같은 말씀과 시(詩) 한 귀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며 굴치마을로 향했다.

 

▲ 백암마을과 굴치

 

 

  백암리에서 굴치마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백암리 뒤로 나있는 옛 산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거리상으로는 가장 가까운 최단거리다. 하지만 지도상에서 보았던 것과는 달리 실제도로는 조금은 먼 길로 우회해서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어지러움을 참아가며 얼마나 내달렸을까 어느새 목적지에 당도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사전에 조사한 대로라면 분명히 이곳에 굴치마을이 있어야 하는데 있어야 할 굴치마을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고 주변에는 오직 널찍한 저수지 한 곳만 보일 뿐이었다.

  혹시 우리가 지명을 잘못 찾은 것일까? ‘분명히 이 장소에 있어야 하는 것이 맞는데’…… 혼잣말로 중얼거려가며 지도와 지명 관련서적을 몇 번이고 다시 뒤적였다. 확인 결과 우리가 찾은 장소가 틀림없었다. 정말이지 답답하기만 할 뿐이었다. 주위에 마을이라도 있으면 물어보기라도 할 텐데 주위를 둘러봐도 주변에는 도로만 보일 뿐 마을은 어디에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우리 일행은 지나가는 차를 손을 흔들어 세우기로 했다. 끼이이익~~ 쌩쌩 내달리는 차를 미안함을 무릅쓰고 세운 후, 굴치에 관해 물어보았다. 달리는 차를 갑자기 세운 터라 운전자는 화가 날만도 하건만 오히려 그 분은 참 잘된 일이라고 하며 직접 차에서 내려 우리의 물음에 아주 친절히 답해 주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조금 의아스럽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뜸 첫마디부터 자신을 만난 것이 잘된 일이라고 하니 말이다. 대답을 듣고 난 뒤에야 알게 된 것이지만, 옛 굴치마을에 관해 잘 아는 사람은 현재 이 지역에서 몇 안 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만난 것을 더더욱 인연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백암리를 찾을 때도 느낀 것이지만 가는 곳 마다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면 꼭 어디선가 이에 관해 잘 아는 사람이 나타나서 도움을 주는 것이 마치 신명들의 도움을 받고 있는 듯했다.

  그 분의 설명에 따르면 현재 굴치마을은 수몰되었다고 한다. 이렇게라도 영문을 알고 나니 답답함이 조금은 해소 되는 듯했다. 마치 풀지 못한 수수께끼의 답을 찾은 양 마음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답답함이 해소되니 이내 궁금증이 일기 시작했다. 왜 수몰 되었을까? 그 이유에 관해 묻자 그 분이 답하기를 1986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마을이 있었는데, 그 마을이 굴치마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1986년에 저수지가 들어서면서 마을이 모두 수몰되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현재는 이곳에서 굴치마을의 모습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마을의 흔적 대신 수청저수지 그 모습을 대신하고 있었다. 마을이 수몰되었다니! 한편으로는 마을의 모습을 사진에 담을 수 없다는 것이 조금은 안타까웠다. 하지만 세월이 100여 년이나 지났지 않은가? 모든 것이 급변하는 시대에서 이 같은 일쯤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아쉽지만 다음 답사지로 발길을 돌렸다.

 

 

▲ 수청저수지

 

 

 

 


01 “이후에 백암리에서 상제를 박공우와 신원일이 모시고 있었도다 ……” (행록 447)

02 교운 132절 참고.

03 ……형렬에게 이르시니라. “네가 태인에 가서 최내경신경원을 데리고 창조의 집에 가라. 오늘 밤에 인적이 없을 때를 기다려 정문 밖에 한 사람이 엎드릴 만한 구덩이를 파고 나의 옷을 세 사람이 한 가지씩 입고 그 구덩이 앞에 청수 한 그릇과 화로를 놓고 작은 사기그릇에 호주를 넣고 문어 전복 두부를 각각 그릇에 담아 그 앞에 놓아라. 그리고 한 사람은 저육전 한 점씩을 집어서 청수와 화로 위로 넘기고 한 사람은 연달아 넘긴 것을 받고 다른 한 사람은 다시 받아서 구덩이 속에 넣고 흙으로 덮어라. 그리고 빨리 돌아오너라고 일러주시니……(공사 31)

04 공사 31절 참고.

05 백암리는 본래 태인군 남촌일변면(南村一邊面) 구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상일리(上一里), 중일리(中一里), 제내리(提內里), 백암리(白岩里), 축촌리, 석정리(石井里)와 고현내면(古縣內面) 이리(二里), 삼리(三里)및 동촌면(東村面) 칠전리(漆田里), 남촌이변면(南村二邊面) 덕두리(德斗里) 각 일부와 원두리(元斗里), 사제리(沙堤里)를 병합하여 백암리라 해서 정읍군 칠보면에 편입됨.

백암리 현주소: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백암리 원백암마을.

06 () : 옛 지방 행정의 단위.

07 면 바로 아래에 있는 한국의 행정단위.

08 각주2 참고.

09 모은(摹隱)으로도 불리우는 박잉걸 선생은 효행으로 벼슬을 받은 인물로써 과거에 굴치(屈峙)의 길을 닦고 대각교(大脚橋)를 사재로 놓았으며 가난한 사람들이 의복과 신발, 그리고 식량을 언제나 가져다 입을 수 있도록 마을 주변에 항상 걸쳐 놓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 장소는 현재도 걸치기란 이름으로 유적지화 되어 전해지고 있다.

10 굴치 관련구절(행록 36, 권지 128)

11 중국 북송 때 왕우칭(王禹 : 954~1001)이 호북성(湖北省)의 황주(黃州)로 좌천되어 그곳 태수로 있을 때, 황주의 죽루(竹樓 : 대나무로 지붕을 덮은 누각)에 대해서 쓴 기문(記文). 고문진보에 실려 있으며, 이 글은 죽은 사람을 위해 쓰여진 글이다.

12 중국 송()나라의 범중엄(范仲淹 : 989~1052)이 절강(浙江)의 태수였을 때, 엄광(嚴光)의 사당을 짓고, 그 후손을 불러 제사를 지내도록 하면서 지은 글. 엄자능묘기는 고문진보(古文眞寶)<엄선생사당기(嚴先生祠堂記)>로 소개되어 있다. 이 글 또한 죽은 사람을 위해 쓰여진 글이다.

13 ‘뼈가 모래사장에 나뒹굴고 풀에 얽히어 있다. 혼은 고국으로 돌아오나 조문하는 사람은 없다.’ 위의 시()택리지(擇里志)에 나오는 시의 일부분인데, 전문은 다음과 같다.

堯語難明桀服身 堯임금 어진 말씀도 桀王을 밝히기 어렵거니

監刑何暇訴蒼雯 형틀에 얹힌 몸 어느 겨를에 하늘에 호소하리.

三良監人誰贖 三良殉死할 때 그 뉘라서 대신할 것이며

二子乘舟賊不仁 두 아들이 용케 배에 탔으나 어질지 못한 자에게 인도되었네.

骨暴沙場纏有草 내 뼈가 드러난 모래사장엔 풀들만 얼기설기 날 터인데

魂返故國無弔親 혼백이 고국에 돌아간들 조상(弔喪)해 줄 친척조차 없다네.

竹西樓下滔滔水 죽서루(竹西樓) 아래 도도히 흐르는 물은

遺恨分明咽春 통탄한 이 사연을 알고서 영원토록 목이 메이리라. (이중환,山水總論, 擇里志)

한편 이중환은 이 시가 나오게 된 배경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인조(仁祖) 때에 왜()가 유구국(琉球國: 오키나와)을 공격하여 그 왕을 사로잡아 가자, 세자(世子)가 나라의 보물을 배에 싣고 장차 아버지를 구하고자 떠났다. 그런데 배가 표류되어 제주도에 이르렀다. 당시 제주목사(牧使) 아무개가 배에 실은 보물에 대해 물었더니, 세자의 대답이 주천석(酒泉石)과 만산장(漫山帳)이 있다고 대답했다. 주천석이란 네모난 돌덩이로서 가운데가 움푹 파였는데, 청수(淸水)를 담아두면 언제나 아름다운 술로 변하게 되는 보배이다. 만산장이란 거미줄을 약으로 물들여 짠 것으로, 적게 펴면 한 칸을 덮을 수 있고 크게 펴면 비록 큰 산이라도 덮을 수 있으며 비가 와도 새지 않는 것이라 하니, 참으로 진귀한 보배이다. 목사(牧使)가 그 보배를 청했으나 세자가 듣지 않으므로, 군사를 보내 포위하여 잡으려 했다. 세자가 붙들리자 그 보배들을 바다 속에 던져버렸다. 목사가 배 안의 물건들을 모두 빼앗은 뒤에 곤장을 쳐 죽이려 했는데, 세자가 죽기 전에 종이와 붓을 청하여 시() 한수를 지었다.……목사가 세자를 죽이고는 국경을 침범한 도적이라고 임금님께 거짓으로 글을 올렸는데, 후일 이 일이 발각되어 제주목사는 죽을 뻔하다가 살아났더라.”

이중환에 의하면,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유구국(琉球國)의 혈통을 이은 세자(世子)가 제주도에 표류했다가 뜻밖의 죽음을 당하고서 통한을 실어 남긴 글이 바로 위의 시라고 한다. 이 이야기는 결코 전설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도 유구국의 세자가 국경을 넘어와서 죽었다는 기록이 전하여 지는데, 이에 따르면 택리지 시()에 등장하는 제주목사는 이기빈李箕賓 ?~1625이라는 사람이다. 이기빈은 선조 25(1592)에 이천부사(利川府使)로 임명되었으며, 선조 37(1604)에는 함경남도 병사(兵史)로 임명되었고, 선조 39(1606)에는 수원부사가 되었으며, 선조 40(1607)에는 삼도통제겸경상도수군절도사(三道統制兼慶尙道水軍節度使)에 임명된다. 그 후 그는 광해군 1(1609) 11월에 제주목사로 임명 되었다. 그가 보물을 탐하여 유구국의 세자를 죽이고는 광해군에게는 거짓으로 보고했으나 후일 이일을 제주의 사졸(史卒)들이 이를 자백함으로써 왜곡된 사건의 전말을 밝혀지게 된다. 하지만 광해군은 이를 벌하지 않고 뇌물을 받고 이기빈을 잘못을 묵인하여 주었다. 하지만 당시 실록의 편찬자는 이 사실을 왜곡하지 않고 유구국의 세자가 죽기 전에 이기빈에게 훌륭한 글을 보냈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14 권지 128, 29절 참고.

15 현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수청리에 위치한 수청저수지.(수청저수지가 건설되기 이전에는 이 장소에 굴치마을이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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