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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37년(2007)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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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종 : 강태공과 디딜방아

강태공과 디딜방아

 

 

글 연구위원 김주우

“「…강 태공(姜太公)이 부국강병의 술법을 천하에 내어놓아 그 덕으로 대업을 이룬 자가 있되 그 공덕을 앙모하나 보답하지 않고 다만 디딜방아에 경신년 경신월 경신일 강태공 조작(庚申年庚申月庚申日姜太公造作)이라 써 붙일 뿐이니 어찌 도리에 합당하리요. 이제 해원의 때를 당하여 모든 신명이 신농과 태공의 은혜를 보답하리라」”…(예시 22절)

 

  주(周)나라 초기의 정치가이자 공신인 강태공은 본명이 강상(姜尙)이다. 그의 조상이 우(禹)임금 때 치수(治水)에 공이 있어 여(呂)땅에 봉해졌기 때문에 여상(呂尙) 또는 여망(呂望)이라고도 불리나, 세상에는 강태공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강태공은 서백[西伯: 훗날 주(周)의 문왕]에 의해 등용되어 나라의 치란흥망(治亂興亡)에 대해서 강론했으며 군사력과 정치를 정비하는 부국강병책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서백은 은왕조를 멸망시키고 주왕조를 건국할 수 있었고, 가장 큰 공을 세웠던 강태공은 제(齊: 지금의 산동지방)나라를 봉지(封地)로 받아 창업군주가 되었다. 제나라는 강태공이 펼친 부국강병술에 의해 상공업과 어업이 발달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게 되어 여러 제후국들 중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는 “후세에 용병술과 권모(權謀)를 말하는 이들은 모두 태공을 그 주모자로 존숭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널리 알려진 병법서인 『육도(六韜)』도 강태공이 지은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의 병법은 후대의 병법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漢)나라의 창업공신인 장량(張良:?~BC189)이 황석공으로부터 받은 비서(秘書)는 태공의 병법과 관련되어 비전(秘傳)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장량은 이 비서를 공부하여 유방(劉邦)을 도와 한제국을 세우는 데 기여했다. 또 『손자(孫子)』, 『오자(吳子)』,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 등 제가(諸家)의 병법사상도 『육도삼략(六韜三略)』을 근간(根幹)으로 하고 있다. 전국시대에 합종책(合縱策)으로 6국의 재상을 지낸 소진(蘇秦)도 태공의 병법을 공부하여 천하를 경륜하는 방법을 터득하였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한 유세(遊說)를 통하여 여러 군왕들을 설득할 수 있었다. 이처럼 많은 창업군주나 공신들이 강태공이 내놓은 부국강병술로 새로운 나라를 개국하거나 천하를 통일하는 대업을 이룰 수 있었다.

  이외에도 신비한 능력을 가진 강태공의 이야기는 구전(口傳)을 통해 전설로 내려오다 명나라 때에 『봉신연의(封神演義)』라는 소설로 집약되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강태공은 후대에 지혜롭고 도술이 뛰어난 인물의 전형으로 중국 민중들의 마음속에 각인되었다. 중국에서는 강태공을 액운이나 잡귀를 물리쳐 주는 신으로 받들게 되었는데, 특히 집에 들어오는 돌림병을 막아준다고 한다.

  『조선도교사(朝鮮道敎史)』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도 입춘 날이면 집집마다 대문에 ‘강태공재차(姜太公在此)’라는 글귀를 써 붙여 귀신이나 사악한 기운을 쫓아내려는 풍습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유래를 짐작할 수 없으나 디딜방아를 설치하고 나면 일반적으로 몸체에 ‘경신년 경신월 경신일 경신시 강태공 조작(庚申年 庚申月 庚申日 庚申時 姜太公 造作)’이라고 써서 제살(除煞: 살풀이를 하여 미리 재액을 막음)을 하는 풍습도 있다. 이를 ‘방아상량’이라고 하는데 디딜방아를 수리하거나 새로 놓을 때는 반드시 이 날에 맞추어 ‘동티(귀신을 노하게 하였을 때 받는 재앙)’를 막고자 하였다.

  또 우리나라와 중국 등 여러 지역의 문물·제도를 기록한 이규경(李圭景 : 1788~1863)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따르면 집을 새로 짓고 나서 대문에 ‘경신년 경신월 경신일 경신시 강태공 조작’이라고 써 붙인다고 한다. 이처럼 강태공을 내세운 것은 강태공이라는 위대한 인물이 만들었기 때문에, 잡귀가 덤벼들어 해를 끼치지 말라는 뜻이 담겨있다고 한다.

  후대에 많은 사람들은 강태공이 내놓은 부국강병의 술법으로 천하의 대업을 이루었으나 그에 따른 보답은 하지 않았고, 다만 그의 이름은 디딜방아나 대문에 기록되어 사악한 귀신을 쫓는 풍습으로만 남게 되었다. 상제님께서는 “「강 태공(姜太公)이 십년의 경영으로 낚시 三천 六백개를 버렸으니 이것이 어찌 한갖 주(周)나라를 흥하게 하고 제나라 제후를 얻으려 할뿐이랴. 멀리 후세에 전하려함이니라.…”」(예시 20절)라고 말씀하셨다. 강태공은 자신의 입신(立身)과 영달(榮達)보다 남을 잘 되게 하려는 마음으로 부국강병의 술법을 내놓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하고 마음을 닦으며 10년 동안 삼천 육백 개의 낚시를 소비하여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강태공의 이러한 삶은 도문소자(道門小子)인 우리가 과연 어떠한 마음으로 수도(修道)와 포덕(布德)에 임해야 하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게 한다.

 

 

▲ 디딜방아(온양민속박물관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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