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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37년(2007)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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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소개 : 귀(鬼) 별을 관장하는 요기(期)신명

귀(鬼) 별을 관장하는 요기(期)신명

 

 

글 교무부

 

  요기[期:?~34, 자(字)는 차황(次況)]는 영천군 겹현(潁川郡 縣:현 하남성 중부) 사람으로 광무제(光武帝)를 도와 후한(後漢:25~220)01을 세우고 나라의 기반을 다지는데 많은 공적을 남긴 장수이다.

  키가 8척 2촌이나 되었으며 용모가 매우 뛰어났고, 태도는 조심스럽고 엄숙하여 자못 위엄이 있었다. 아버지 요맹(猛)이 계양태수(桂陽太守)를 지내다 돌아가시자, 요기는 3년 동안 상복을 입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이를 칭찬하였다.

  광무제가 영천(潁川: 현 하남성 우주시)을 관할하여 다스릴 때, 요기가 의롭다는 소문을 듣고 불러 적조연(賊曹:도적 체포의 일을 관장하는 관리)의 직책을 맡겼다.

  요기가 광무제를 따라 계(: 현 북경 서남쪽부근, 연(燕)나라의 수도였음)를 순시(巡視)할 때의 일이었다. 당시 계는 하북지방의 한단(邯鄲: 현 하북성 남단)을 근거지로 하는 왕랑(王郞)02의 세력권 밖이었으나, 마침 광무제가 머무는 동안 유자접(劉子接)03이라는 자가 군(軍)을 일으켜 왕랑의 세력에 호응함으로써 도성 안은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또 유자접은 성내에 다음과 같은 유언비어를 퍼뜨려 혼란을 가중시켰다. ‘한단성에서 왕랑의 사신이 방금 도착하여, 이천 석(二千石:郡守) 이하의 관원은 모두 성 밖으로 나가 영접하고 있다.’

  광무제 일행은 이 소문을 듣자, 황급히 수레를 타고 계(蓟)를 빠져나가려 하였다. 하지만 광무제를 보려고 모인 인파로 인해 전진을 할 수가 없었다. 이때 요기가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며 나타나, 눈을 부릅뜨고 좌우를 향하여 “물렀거라[蹕]04!”라고 소리치니 그 위세에 눌려 인파가 흩어졌다. 비로소 성문 앞에 다다랐으나 벌써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공격을 감행해서야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계를 탈출해서 신도군(信都郡: 현 하북성 기주시)에 도착한 광무제는 요기를 비장(裨將: 副장군)으로 삼고 부관(傅寬)·여안(呂晏)과 함께 등우(鄧禹: 角별을 관장)의 휘하 장수로 배속시켰다. 등우 일행은 인접 현(縣)들을 순시하였고 방자(房子: 현 하북성 고읍현)에서는 병사들을 징발하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등우가 요기의 뛰어남을 보고 편장군(偏將軍)으로 삼아 병사 2천명을 지휘하도록 하였다. 이때 부관·여안은 각기 수백 명을 담당하였다. 등우가 돌아와서 이 사실을 보고하니 광무제는 제대로 처리했다며 매우 기뻐하였다. 광무제는 다시 요기로 하여금 진정(眞定: 현 하북성 석가장시 동쪽), 송자(宋子: 현 하북성 조현 동북쪽) 등을 별도로 순시케 했는데, 이때 요기는 낙양(樂陽)05과 고(槀), 비류(肥)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또 왕랑의 휘하 장수 아굉(兒宏), 유봉(劉奉)을 거록(鉅鹿:신도군과 한단의 중간지점) 근처까지 추격하였는데, 요기가 홀로 뛰어들어 50여 명을 베니 진(陳)이 허물어졌다. 이때 이마가 창에 찔렸는데 요기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마를 동여매고는 다시 싸움을 하여 크게 격파시켰다. 왕랑이 멸망하자 광무제는 요기를 호아대장군(虎牙大將軍)으로 삼았다.

  낙양에서 광무제가 후한을 건국하고 황제로 즉위한 후, 요기를 안성후(安成侯)에 봉하고 식읍 5천호를 내렸다. 이때 단향적(檀鄕賊)과 오루적(五樓賊)06이 번양(繁陽)·내황(內黃)으로 쳐들어오고, 또 위군(魏郡: 현 하남성 안양현 북쪽)의 대성(大姓: 호족)들이 자주 반란을 일으키므로 광무제는 요기에게 위군태수(魏郡太守)의 직책을 주고 대장군의 역할을 맡도록 했다.

  한번은 위군의 호족이었던 이웅(李熊)의 동생 이륙(李陸)이 모반하여 단향적(檀鄕賊)을 성내(城內)에 영입하려 한 적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이 사실을 요기에게 고(告)했으나, 요기는 들으려 하지 않았다. 고하는 사람이 서너 명이 되자 요기는 이웅을 불러들여 자초지종을 물었다. 이웅이 머리를 조아리고 ‘노모(老母)와 함께 죽여주십사’고 탄원하였다. 요기는 “벼슬아치로 지내는 것이 도적이 되어 즐기는 것만 못하다면 노모와 함께 동생에게로 가도 좋다.” 하고는 관리를 시켜 성 밖으로 내보냈다. 동생 이륙은 요기의 아량을 헤아리고 나서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는 것으로써 요기에게 사죄했다. 요기는 이를 안타까워하여 예(禮)로써 장례를 치러주고, 이웅에게는 예전의 직책을 다시 돌려주었다. 이에 위군(魏郡)내의 사람들은 모두 요기의 위엄(威嚴)과 신망(信望)에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29년(건무 5)에 광무제가 위군(魏郡)으로 행차하여 요기를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임명했고, 얼마 후 다시 낙양(洛陽)으로 불러들여 위위(衛尉: 南軍의 통솔과 궁문경비를 담당하는 중앙관직)를 제수하였다.

  요기는 신의(信義)를 중시하였는데 장군이 되어 상대를 항복시키거나 함락시키고도 노략질을 하지 않았다. 조정에 머물고 있을 때는 나라를 걱정하고 광무제를 충심으로 모셨다. 때로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 있으면 서슴없이 간언을 하곤 했다. 광무제가 한번은 가벼이 성문 밖 가까이로 나갔을 때 요기가 어가(御駕)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신(臣)이 듣기로 고금(古今)의 경계하는 말에 변고(變故)는 뜻하지 않은데서 생긴다고 했습니다. 진실로 원하옵건대 일없는 출입을 자주 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자, 광무제가 이 때문에 수레를 돌려 환궁했다.

  34년(건무 10), 요기가 죽자 광무제가 친히 와서 염(斂)을 하였고, 위위(衛尉)와 안성후(安成侯)의 인수(印綬: 관직을 표시하는 도장을 매는 끈)를 주고 시호(諡號: 죽은 후에 공적을 기리기 위해 임금이 주는 이름)를 충후(忠侯)라 했다.

 

 

 


01 기원전 202년에 유방이 건국한 한()나라는 기원후 8년에 왕망에 의해 멸망하였다. 25년에 유방의 9세손인 유수(劉秀:광무제)는 왕망이 세운 신()나라를 무너뜨리고 낙양에서 한()나라를 재건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를 유방이 장안에 세웠던 전한(前漢)과 구별하기 위하여 후한(後漢) 또는 동한(東漢)이라고 한다.

02 ?~24, 장안의 점술가였는데 자신을 한나라 왕실의 후예인 유자여라고 속여 반란군 세력을 규합한 다음 이를 토대로 하북 일대를 장악하였다.

03 무제(武帝)5대손 전() 광양왕(廣陽王) 유접가(劉接嘉)의 아들

04 천자·귀인이 행차할 때 앞에서 통행인을 쫓아내는 말이다. “()!”

05 후한의 수도는 낙양(洛陽)이다.

06 하북 각지에서 노략질을 하던 농민반란집단들의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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