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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36년(2006)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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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기 : 준비된 국제화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준비된 국제화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鄭 大 珍 중앙종의회 의장

 

  프랑스 파리의 유네스코 본부에서 <유네스코>, <세계불교협회>, <호주정종학원>이 주최한 석가탄신 2550주년 기념 세계불교회의에 초청받아 대순진리회의 김재목 선감, 조태룡 선감, 이순이 선감, 백승연 선감과 함께 2006년 10월 7일부터 사흘 동안 열린 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떠나는 날인 6일은 마침 병술(丙戌)년 중추절이어서 도장에서 치성을 모시고 아침 5시에 서울 중곡동 부전회관에서 양위(兩位) 상제님께 절사(節祀) 인사를 드렸다.

  이어 가족과 함께 추석 절사의 음복을 하고 담소를 나누다가 9시에 차를 타고 인천 공항으로 떠나 13시 50분에 이륙할 비행기에 올랐다. 기내식을 마친 뒤 커튼을 올리고 내다보니 태양의 직사광선이 강렬했고, 백색의 운무(雲霧) 위로 비행기는 빠르게 날고 있었다. 은하수처럼 만고에 쌓인 인간의 원(怨)과 원(冤)을 풀어 볼 날이 언제 오려는지, 이번 행사에서 구천상제(九天上帝)님의 사상을 조금이나마 펼쳐 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으나, 오직 진실된 성심으로 아니 성지우성(誠之又誠)으로 상제님의 덕화를 입어 반드시 잘 마치고 돌아오리라 확신하면서 걱정을 눌렀다.

  한국시간으로는 저녁 8시인데 창밖은 여전히 밝은 낮이어서 시차(時差)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중추절이 저물어 가는데, 서쪽 땅 위에는 해가 계속 떠 있으니 추석 명절을 두 번이나 맞는 거짓말 같은 현실을 난생 처음 겪었던 셈이다. 인천에서 11시간 20분쯤 걸려 프랑스 파리 샤를르 드골 공항에 내렸다. 공항에는 다마라타나 세계불교협회(WFB) 부회장이 보낸 사람이 나와 콜롱브의 매리어트 호텔로 안내했다. 한국시간으로는 새벽 3시, 현지시각은 저녁 8시라고 했다.

 

▲ 유네스코 본부 입구

 

 

▲ 유네스코 행사장에서

 

 

  10월 7일 햅쌀로 지은 아침밥을 맛있게 먹고 한복으로 갈아입은 뒤 유네스코 회의장에 갔다. 다마라타나 부회장의 안내로 연구대표단장석에 앉아 평안한 마음으로 회의 시작을 기다렸다. 회의장에는 ‘2550年歡慶衛塞節 佛敎徒對人類的貢獻永續發展世界和平’(2550년환경위새절 불교도대인류적공헌영속발전세계화평)이라고 씌어 있었다. 오전에는 9명의 유네스코 각국 대표가 나와서 각기 자기 나라 방식대로 인사말을 했다.

  연설한 사람들은 유네스코 사무총장 고이치로 마스우라, 정종학 회장(淨宗學 會長) 칭궁(淨空) 스님, 세계불교대학총장 아난다 구루거, 세계불교협회 부회장 담마라타나, 유네스코 사무국장 장신승, 세계불교협회 사무총장 폴립 타리어리, 유엔총회 의장 하산, 세계불교대학 학장 노라닉 세타부어, 프랑스 불교협회장 가덴 여사 등이다. 칭궁 회장은 중국어로 연설하고 딴 사람들은 모두 영어로 했다. 호주 총리의 연설은 대독되었다. 사회는 우리를 초대한 담마라타나 박사가 진행하였다.

  저녁으로 먹은 프랑스 음식은 가짓수는 많으나 익숙하지 않아선지 별로 먹을 만한 것이 없었다. 공연장에는 담마라타나, 조초(照初), 폴립과 함께 들어가 관람하였다. 일요일인 8일 아침 9시 5분 회의실 지정석에 앉았으나 태국인인 폴립과 로스앤젤레스 불교협회장인 조초 스님이 내게 자꾸 단상의 좌석에 오르라고 권유하여 오전 내내 단상에 있었다. 점심을 마치고 들어가니 호명하여 다시 단상에 오르라고 하므로 15개국 대표 15명 중 여섯째 좌석에 앉았다. 오후 5시에 내 연설 차례가 되어 유네스코에서 한국을 대표하면서 대순진리회를, 즉 상제님의 사상을, 주어진 15분간에 걸쳐 세계 각국서 모인 2천여 명을 상대로 공표하였다.

 

▲ 상제님 사상에 대한 연설

 

 

▲ 실무자 회의에서

 

 

▲ 주최관계자들과 기념촬영

 

 

  연설에서는 현재 우리가 처한 전쟁, 환경재앙, 인간소외 등의 위기가 지금까지의 세상이 상극적 속성을 가졌기 때문이었음을 설명하고 강증산 상제님께서 130여 년 전에 그 당시 약소국가였던 대한민국에 오셔서 천지공사를 통해 해원상생(解冤相生)과 보은상생(報恩相生)의 진리를 내놓으셨다고 밝혔다. 이어 “해원상생은 전 세계 인류의 가슴 속에 맺히고 쌓인 모든 원한을 해체소멸”하며 “상대를 위해 희생적으로 봉사하므로 사람이 신명 위에 서서 신명을 통제관장하는 비할 데 없는 인존사상”이라고 말하는 등 대순사상(大巡思想)을 설표(說表)하여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저녁식사는 7층에 있는 식당에서 칵테일 및 뷔페로 하고 호텔에 돌아오니 밤 11시 30분이었다.

  셋째 날 9일에는 아침 9시 30분에 회의장에 도착하였다. 다마라타나 세계불교협회 부회장의 사회로 회의가 진행되었는데, 중국인이 여럿 나와서 뭐라고 하는지 알 수 없는 중국어로 오후 5시까지 연달아 연설하였다. 중국 인구는 13억 혹은 16억이나 되고 국제무대에 진출한 사람도 많다. 이렇게 성장해 간다면 멀지 않아 세계 중심국가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사흘에 걸친 국제회의가 끝나고 폐회식이 거행되었다. 오늘의 주인공인 정종학 회장 칭궁 스님이 단상에 올라 정좌하였다. 다마라타나 스님이 참가한 사람들을 소개하고 난 뒤 스님 전원이 단상 위에 올라 법문을 읽었다. 한국의 원불교 관계자 여성 두 분은 원불교 찬송가로 대신하였다. 마지막으로 칭궁 스님의 긴 법문이 끝난 뒤 회의는 막을 내렸다.

  10일 7시에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10시에 파리 교외에 있는 베르사유 궁전을 보러 갔다. 루이 14세 왕이 1661년부터 1682년까지 지은 이 궁은 옛날에 2,400만평이었다가 지금은 250만평으로 줄었다는데 방이 700개나 된다. 1710년대에 완성한 궁전 안의 라 샤펠(예배당) 전속 성당은 얼마나 아름답고 화려한지 정말 눈이 부셨다. 궁전의 오페라실은 금동(金銅)으로 치장돼 있는데 천정의 환희에 넘치는 인물 그림이 너무도 아름다워 황홀하였다. 오페라실 옆에는 화재가 나면 불을 끌 수 있도록 물탱크가 있었다. 400년 전에 이런 시설을 해 놓았다니 놀랍기만 하였다.

 

▲ 베르사이유 궁전 전경

 

 

  궁전의 복도마다 인물들의 조각이 나열되어 있고 루이 14세의 초상화는 벽에 걸려 있었다. 연회장이었다는 헤라클레스의 방에 들어가니 천정에 헤라클레스 영웅담의 그림이 화려하게 그려져 있었다. 화가 프랑수아 르무안의 작품이다. 복도에는 왕실의 유물이 많이 진열되어 있었다. 향수기(香水器)는 목욕을 잘 하지 않기 때문에 향수를 많이 썼던 프랑스의 풍습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풍습으로 인해 강력한 군주였던 루이 14세도 생전에 목욕을 한 번도 하지 않고 죽어서야 몸이 닦였다 한다.

  음악감상실의 루이 15세 왕비 벽화와 천정화는 화려함의 극치였다. 많은 방을 지나 루이 14세와 루이 16세의 대관식 광경과 제복을 통해 그들의 화려한 궁정생활을 엿볼 수 있었다. 식당과 뷔페의 방 벽에는 어린아이들 뛰노는 조각화가 장식돼 있었다. 이 식당 옆방이 왕의 침실이었다. 천정 밑에 또 천정을 만들고 양탄자 천으로 사방을 둘러친 안쪽에 침대가 놓여 있고 방 양쪽에는 왕의 의자와 작은 의자 셋이 놓여 있었다. 앞에는 높이 1m의 칸막이가 설치되어 있는데 금칠이 된 철제로 되어 있었다. 과연 왕의 침실은 호사스러웠다.

  왕의 방 동쪽에는 거실이 있고 회의를 할 수 있게 돼 있었다. 왕비의 침실도 잘 장식되어 있고 그 옆방에는 귀족 부인들이 왕비를 만나기 위해 순서를 기다리는 대기실이 있었다. 또 그 옆방에는 루이 16세의 부인으로서 프랑스 대혁명 때 콩코르드 광장 단두대에서 목이 잘린 비운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화가 있었다. 앙투아네트는 군중이 궁에 몰려와 빵을 달라고 외치자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지, 웬 소란이냐.”고 철없는 말을 하여 군중들을 더욱 성나게 하였다고 한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루이 16세와 앙투아네트 왕비가 처형되었는데, 형장에서 루이 16세는 신하들이 좀 더 일찍 사태를 알려주었더라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탄식하고 단두할 때 “내 피가 튀겨 백성들에게 묻지 않도록 하라.”고 당부하였다. 왕비는 “내 목은 연약하니 잘 잘릴 것이다.”라고 하면서 의연하게 죽음을 맞았다. 통치자로서 좀 더 백성들을 생각했더라면 이런 비참한 꼴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폴레옹의 방에는 그의 대관식 벽화가 있고 그가 전쟁터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그린 벽화, 병사들에게 독수리 깃발을 수여하는 그림이 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실제 여기서 살지는 않았다고 한다.

  파리의 미라보 다리는 철제 난간으로 된 수수한 다리였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 강은 흐르고 우리 사랑도 흘러….”라는 아폴리네르의 시로 유명해진 다리다. 다리 이름인 미라보는 프랑스 대혁명 때 공헌한 사람의 이름을 딴 것이다.

  상이군인의 병원인 앵발리드의 광장을 지나면 콩코르드 광장이 있다. 영빈관 옆에 튈르리 공원이 있다. 콩코르드는 화합이라는 뜻이다. 콩코르드 광장 한 가운데의 오벨리스크는 본디 고대 이집트 룩소르 신전에 있던 것을 가져온 것이다. 3,300년 전 만들어진 이 돌탑에는 람세스 2세의 업적이 상형문자로 새겨져 있다.

 

▲ 1 오벨리스크   2 파리 개선문

 

 

  개선문은 잘 알려진 에투알 광장의 것 말고도 튈르리 공원에도 있다. 튈르리 공원의 개선문은 나폴레옹이 죽기 전 건립된 것이라 한다. 에투알 광장의 개선문 뒤쪽으로 커다란 아치형 현대식 대형 건물이 보인다. 파리에는 개선문이 세 개 있는 셈이다.

  샹젤리제 거리는 폭이 시원하게 넓다. 카페, 영화관, 신차전시장 등 상가가 밀집해 있어 인파가 물결쳤다. 이 거리에 있는 에투알 광장의 개선문에 이르니 나폴레옹 전승(戰勝)장면이 조각되어 있다. 개선문 지하 400m에 제1차 세계대전 때 전사한 용사들의 납골당이 있다고 한다. 개선문을 중심으로 12개의 길이 갈라진다.

  몽마르트르 언덕의 성심(聖心)성당 앞 좌우에 남녀 기마상이 각각 있었다. 남자는 13세기 프랑스의 왕이며 가톨릭교회의 충실한 수호자인 성(聖) 루이, 여자는 15세기 백년전쟁 때에 어린 처녀로서 프랑스군을 이끌고 조국을 구한 잔 다르크라고 한다. 잔 다르크는 전쟁 끝에 마녀로 몰려 화형 당했으나 그 뒤 성녀로 추앙받았다. 성당 건물은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웠다.

 

▲ 3 에펠탑    4 성심성당

 

 

  가이드가 몽마르트르 광장에 가 보자고 하기에 가파른 길을 걸어 올라갔더니 좁은 골목에 화가들이 모여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피카소 등 유명 화가들이 무명 시절을 여기서 보냈다고 한다. 차를 타고 저녁 식사 하러 가는 도중 루브르 궁전에 갔다. 규모가 엄청난 예술의 궁전이었다. 1607년에 건립된 퐁뇌프(새로운 다리) 다리는 400년이 되었는데도 끄떡 없이 고풍스러운 자태로 다리 구실을 충실히 하고 있다.

  노트르담 성당은 1163년에 공사가 시작되어 1246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소설과 영화 ‘노트르담의 꼽추’의 무대다. 그랑 팔래(큰 궁전)는 전시장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에펠탑은 1889년 완공되었다. 정부 공모에서 에펠이란 사람의 작품이 뽑혀 세워졌으며 탑의 높이는 326m이다. 해질 무렵부터 탑에 매시 정각 불이 켜진다고 한다. 하루에 열 번이나 불이 켜지는 것이다.

  11일 아침 7시 정각에 샤를르 드골 국제공항으로 출발했다. 파리는 나무가 많아 시내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어느 거리든 인물 조각이 서 있었다. 관공서나 개인 주택, 200년이나 300년 된 아파트 등 모든 건물 외부에는 돌이 붙여져 있고 다양한 인물상과 동물상 등을 조각하여 파리 전체가 예술의 도시였다. 지하 몇 백미터의 석회암을 채석하여 건물의 외부에 접착하면 세월이 갈수록 견고해진다고 한다. 석회암 벽은 10년에 한 번씩 닦는데 정부에서 일부 비용을 부담해 준다고 한다.

  샤를르 드골 공항에서 9시에 비행기 탑승 수속을 하고 비행기에 올라 11시경에 스위스 취리히 공항에 도착하였다. 한국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후 버스를 타고 1시간쯤 가서 루체른시에 있는 로이스 강의 카펠 다리를 보았다. 1300년대에 지은 200m의 목조다리가 700년 넘도록 튼튼하게 버티고 있었다. 그 근처의 롤렉스 시계점을 구경하였는데 2만 5,500달러나 하는 시계도 있었다.

  12일 인터라켄 호텔에서 나와 동역(東驛)에서 기차를 타고 20분쯤 가서 800m 고지인 라우터브루넨 역에서 산악용 톱니 열차로 갈아타고 융프라우(처녀) 산으로 향했다. 72개나 되는 폭포들이 있는 절경 속을 지났다. 고도 1,300m 지점에 특수 호텔이 수백 개 있고 1,500m 이상부터는 눈으로 덮여 흰옷 입은 처녀들이 자태를 뽐내고 있는 듯했다. 산림 조성이 잘 되어 있으나 1,500m 이상에는 눈사태에 대한 방비로 철봉들을 박아놓았다.

 

▲ 융프라우산

 

 

▲ 스위스 풍경

 

 

▲ 스위스 톱니열차

 

 

  스위스는 산이 70%, 초지가 30%라고 한다. 조림이 잘 돼 있고 목재가 흔해선지 목조건물이 많았다. 건물들은 자연과 잘 조화되었다. 산에는 전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철쭉나무가 많았다. 1,500m를 넘어 오르니 봉우리들은 바위로 돼 있었다. 2,000m에 이르니 나무라고는 하나도 없고 만년설만 쌓여 있었다. 몽커(수도승) 산, 융프라우(처녀) 산, 아이거 봉을 바라보며 가는 동안 분기점인 클라이네 샤이델 역에 도착하여 잠시 하차하였다.

  이곳 철도 시설 공사는 1896년에 시작하여 1912년까지 했다고 한다. 터널들의 총 길이는 9.3km다. 100년 전에 높은 바위산 속을 쪼아 긴 굴을 팠다니 그 의지에 감탄했다. 환승하여 둘째 역에서 잠시 정류하므로 하차해서 밑을 내려다보니 저 아래 산기슭에 마을이 보였다. 그 다음으로는 3,160m의 아이스메어(얼음바다) 역에서 내렸다.

  산 정상은 융프라우 요크, 높이가 3,454m이다. 정상에서 밖으로 나가니 알프스 산맥의 만년설 위로 거센 바람이 불어 곧 실내로 돌아왔다. 가이드를 따라 양쪽 벽과 천정이 얼음인 굴속을 벽의 손잡이를 잡은 채 조심스레 걸어갔다. 가는 도중에 곰, 호랑이, 사자 등 맹수 얼음 조각 작품들이 있어 거기서 사진을 찍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몇 개 층을 내려와 매점에서 신(辛)라면을 한 그릇씩 먹으니 모두가 꿀맛이라고 했다. 하산해서 공항으로 가 밤 8시 25분(스위스 시간) 대한항공편을 타고 13일 오후 2시 3분에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이 행사에 참여하면서 이제 대순진리회도 국제화에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을 더욱 깊게 가지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프랑스와 스위스에서 서양 문화와 문물을 직접 접하면서 많은 것을 느낀 귀중한 체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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