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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36년(2006)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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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이야기 : 마의태자묘와 비로봉

마의태자묘와 비로봉

 

글 교무부

 

 

  구룡폭포에서 금강산의 주봉인 비로봉을 오르기 위해 경사진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천연 돌문인 비사문(毘沙門)과 그 위에 우뚝 솟아 있는 비사바위를 만나게 된다.

  비사문의 ‘비사’는 사천왕의 하나로, 불법을 지키고 선악을 분별하는 비사문천(毘沙門天)1)을 뜻한다. 불가에서는 이 돌문을 지나는 벼랑길이 매우 가파른 것을 빗대어 착한 일을 한 사람은 무사히 지날 수 있으나 악한 일을 한 사람은 무사치 못하다고 했다. 문 위에 솟은 비사바위는 평평한 사각형의 돌을 차근차근 쌓아놓은 것처럼 묘하게 생겨 멀리서도 잘 보인다. 이곳은 전망이 좋아 세존봉 연화대, 옥녀봉, 관음연봉, 그리고 멀리 동해의 파도가 언뜻언뜻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비사문을 지나 상팔담 위쪽 계곡인 아홉소골을 따라 한참 가다보면 길게 다듬어진 자연석을 층층이 쌓아 만든 무덤인 ‘마의태자묘’가 나타나고, 그 옆에는 신라 마의태자릉이라 새겨진 비석이 서 있다. 이 무덤은 둘레가 약 10m, 높이 1.5m로 보통의 무덤보다 조금 큰 편이다.

 

▲ 비사바위

 

 

▲ 용마석

 

 

  지금으로부터 약 1,100여 년 전 신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경순왕은 왕의 자리를 내놓고 고려를 따르고자 하였다. 그러자 태자는, “나라의 존망에는 반드시 천명(天命)이 있으니, 힘을 다하지 않고 가벼이 남에게 넘겨주어서는 안 됩니다.”며 고려에 투항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러나 경순왕은 무고한 백성을 더 이상 죽일 수 없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태자는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였으나 왕의 결심이 바뀌지 않자, 통곡하며 홀로 금강산으로 떠나갔다. 금강산에 들어온 이후 그는 비단옷 대신 삼베옷을 입고 풀뿌리를 캐어 먹으며 일생을 보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마의태자(麻衣太子)’라 부르게 되었다. 그의 묘 오른쪽에는 높이 약 50m 되는 한 개의 큰 바윗덩어리가 있다. 그 모습이 마치 말이 서 있는 것 같다는 용마석(龍馬石)은, 마의태자가 타고 다니던 말인 용마가 돌로 변한 것이라고 한다.  

  마의태자묘를 둘러보고 곧장 정상을 향해 오르면 비로봉에 닿게 된다. 마의태자가 죽기 바로 직전 올랐다는 ‘비로봉(毘盧峰 : 1,638m)’은 금강산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일만 이천 봉우리를 거느린 금강산의 주봉이다. 화엄사상의 영향으로 『화엄경』의 주불(主佛)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 법신불)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2) 비로봉 동남쪽으로는 뼈만 남은 톱날 같은 봉우리들이 많지만, 서북쪽은 이와 대조적으로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 나무들이 우거져 있다. 비로봉 정상에서는 금강산 전체의 수많은 봉우리와 계곡들, 그리고 동해바다의 장쾌한 모습까지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1) 사천왕(四天王)의 하나. 다문천을 다스려 북쪽을 수호하며 야차와 나찰을 통솔한다. 분노의 상()으로 갑옷을 입고서 왼손에 보탑(寶塔)을 받쳐 들고 오른손에 몽둥이를 들고 있다.

2) ‘비로라는 말은 범어로서 가장 높은 곳을 뜻하는 의미가 있어 여기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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