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7호 독자코너 : 중용(中庸)과 안심(安心) |
중용(中庸)과 안심(安心)
잠실25 방면 평도인 김의성(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 한국철학전공 박사과정)
『중용(中庸)』은 본래 『예기(禮記)』에 속해 있던 편명인데 송대(宋代)에 주자(朱子, 1130~1200)에 의해 따로 편찬된 사서(四書) 중의 하나이다. 『중용』에서 나타난 ‘중용’이라는 단어는 일상에서 일반명사처럼 쓰이면서 그 의미가 통용되고 있다. 흔히 사람들은 어떤 일이 한쪽으로 치우쳐 공정하지 못하게 되면 “중용을 지켜라”고 말하는데 이는 “중립적인 입장을 지켜라”는 것으로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않는다는 의미이다.
1. 성리학(性理學)
무극(無極)이면서 태극(太極)이다. 태극이 동(動)하여 양(陽)을 낳고, 움직임이 극한에 이르면 정(靜)해지고, 고요해져 음(陰)을 낳는다. 고요함이 극한에 이르면 다시 움직인다. 한 번 움직이고, 한 번 고요한 것이 서로 간에 뿌리가 된다. 음으로 나뉘고 양으로 나뉘어져 양의(兩儀)가 정립된다. 양이 변하고 음이 화합하여 수화목금토(水火木金土)가 생겨나고, 오기(五氣)가 순조롭게 펴져서 사계절이 운행한다. 오행(五行)은 하나의 음양이요, 음양은 하나의 태극이다. 태극은 본래 무극이다.05
『태극도설』에는 무극과 태극의 형이상학적 개념들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이 이루어지고 있다. ‘無極而太極’이라는 첫 구절은 여주본부도장 포정문(布正門)의 글을 연상시키기도 한다.06 이러한 구절의 한문해석에는 어려움이 있는데 접속사 ‘而’는 역접, 순접, 인과, 병렬관계 등의 다양한 뜻으로 해석이 가능하며, 주어를 상정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주자가 무극과 태극의 개념에서 ‘리’를, 음양과 오행의 개념에서 ‘기’를 생각했다는 것이다.07
2. 성(性)
하늘(天)이 명령하신 것을 성(性)이라 이르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이르고, 도의 절차를 마름질 한 것을 가르침(敎)이라 이른다.10
하늘(天)이 음양(陰陽)과 오행(五行)으로 만물을 만들어낼 때에, 기(氣)로 형체를 이루고 이치를 또 부여하니, 명령을 함과 같다. 이렇게 되어 사람과 사물의 생겨남이, 각기 그 부여한 이치를 얻음에 따라 건(健) 순(順) 오상(五常)의 덕(德)으로 삼으니, 이것이 이른바 성(性)이다.11
그 마음에는 양심(良心) 사심(私心)의 두 가지가 있다. 양심은 천성(天性) 그대로의 본심(本心)이요. 사심은 물욕(物慾)에 의하여 발동하는 욕심(慾心)이다. 원래 인성(人性)의 본질은 양심인데 사심에 사로잡혀 도리(道理)에 어긋나는 언동을 감행하게 됨이니 사심을 버리고 양심인 천성을 되찾기에 전념하라.13
그러나 ‘성’은 순선한 ‘리’ 자체는 아니다. 현실적으로 인간은 선한 정도가 모두 다르며 선하지 못한 경우도 있다. ‘성’은 ‘리’와 ‘기’의 결합인 마음의 본체이기 때문에 ‘기’와 분리될 수 없다. 주자는 일단 ‘리’가 ‘기’와 결합하여야만 현실적인 사물의 본성이 된다고 보았다. 그런데 ‘리’가 ‘기’와 결합하면, ‘기’의 맑고 탁한 정도에 따라 그 선함이 구현될 수도 있고 가려질 수도 있다. ‘리’가 인간 사물이라는 기질(氣質)에 부여되면서 ‘성’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현실적으로 ‘기’에 의하여 한정을 받는 ‘리’를 ‘기질지성(氣質之性)’이라 부른다.14 그래서 ‘성’은 ‘기’에 의해 가려진 ‘기질지성’과 ‘기’를 배제한 ‘리’ 자체인 순선한 ‘본연지성(本然之性)’으로 구분되는 것이다.15 여기서 기질지성은 사심(私心)의 개념과는 좀 다르다.
대게 사람의 성(性)에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 다섯 가지가 있을 뿐이니 이 다섯 가지 이외에는 성이 없고, 정(情)에는 희노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慾) 일곱 가지가 있을 뿐이니, 이 일곱 가지 이외에는 정이 없다. 사단이란 것은 선한 정의 별칭에 불과하니 칠정을 말하면 사단은 그 가운데 들어 있는 것이요 인심(人心), 도심(道心)과 같이 상대적으로 이름 지은 것이 아니다. … 그러므로 사단(四端)은 도심만을 오로지 말한 것이요, 칠정은 인심과 도심을 합쳐서 말한 것이니, 인심과 도심이 양변으로 나누어진 것과는 다르지 아니한가?24
‘정’은 ‘칠정’뿐으로서 ‘사단’은 그 가운데 내포되어 있는 선한 ‘정’만을 척출해 낸 것으로 보는 입장이 율곡 ‘사단칠정론’의 핵심이다. 퇴계가 ‘사단’과 ‘칠정’은 질적으로 다른 두 개의 정감으로 규정하였다고 한다면 율곡은 이 두 가지 ‘정’을 가치론적 차원에서의 구분은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로 통합한 점에 그 특징이 있다. 한편으로 율곡은 ‘인심’과 ‘도심’과 같은 마음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있는데, 이는 ‘사단’과 ‘칠정’이 하나의 ‘정’인 것과는 달리 서로 다른 두 개의 마음임을 인정하지만 본질적으로 같은 것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말하고 있다.25
그러나 이제(二帝)·삼왕(三王)의 정치는 도(道)에 근본하였고 이제·삼왕의 도는 마음에 근본하였으니, 그 마음을 알면 도와 정치를 진실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째서인가? 정일집중(精一執中)은 요(堯)·순(舜)·우(禹)가 서로 전수한 심법(心法)이요, 중(中)을 세우고 극(極)을 세움은 상나라 탕왕과 주나라 무왕이 서로 전수한 심법이다. 덕(德)과 인(仁)과 경(敬)과 성(誠)이 글자는 비록 다르나 이치는 하나이니, 모두 이 마음의 묘함을 밝힌 것이다.30
요순에 대해서는 상제님께서도 요·순의 도(道)가 다시 나타난다는 말씀을 하실 정도로 이상적 군주로 회자한다.31 도에 근본을 둔 정치는 요·순·우의 심법(心法)으로 이어지고 있으며 그것의 핵심적인 가르침이 ‘정일집중(精一執中)’이라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정일집중’에서 핵심키워드는 ‘중’이 된다. 정(精)과 일(一)이라는 마음의 과정이나 조건을 통해 ‘중’을 잡는 것이다. 도(道)에 근본을 두고자 한다면 추구해야 하는 가치로서 ‘중’이 얘기되고 있는 것이다. 『중용』의 서문에서 주자는 『서경』에서의 이와 같은 내용을 다시 한 번 언급하면서 ‘중’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일어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이르고, 일어나서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 이르니, 중이라는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고, 화라는 것은 천하의 통하는 도이다.33
주자는 기본적으로 ‘중’을 “편벽되지 않고 치우치지 않으며 과함과 부족함이 없음을 이름 하는 것이다”34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중’에 대한 개념 정의 아래 주자는 위 본문 내용에 대한 주석으로서 다음과 같은 해석을 말하고 있다.
‘희노애락(喜怒哀樂)’은 정(情)이나 그것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성(性)이니, 치우치고 기울어짐이 없는 까닭에 중(中)이라 이른 것이다. ‘일어나서 모두 절도에 맞음(發皆中節)’은 정의 바른 것이니, 어긋나는 것이 없는 까닭에 화(和)라 이른 것이다. ‘큰 근본(大本)’이라는 것은 하늘이 명령한 성품이며, 천하의 이치가 모두 여기서부터 나오니 도의 본체(體)이고 ‘통하는 도(達道)’라는 것은 성품을 따름을 이름이며, 천하의 예와 지금이 함께 따르는 것이니, 도의 작용(用)이다.35
‘중’은 마음과 관련된다. “희노애락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을 중(中)이라 이른다”고 하는 것은 마음이 ‘정’으로 표출되기 이전의 상태에서 ‘중’을 말하는 것으로 이는 마음의 순선한 본연의 ‘성(性)’과 연결된다. 그리고 “일어나서 모두 절도에 맞음”이라는 것은 마음이 표출된 ‘정’의 상태가 ‘중절’함을 말하는 것으로 “편벽과 치우침이 없고 과함과 부족함이 없는 것”이라는 ‘중’의 특성으로 ‘정’을 절제함을 말한 것이다. 특히 일어난 정감이 절도에 맞게(中節) 되었을 때 즉, ‘정’이 ‘중’으로의 절제 되었을 때 그것은 바르다고 하는 선의 가치기준이 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위와 같은 주자의 해석을 통해 마음을 나타내는 ‘성’과 ‘정’이라는 개념이 ‘중’과 관련되어 갖는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더불어 ‘중’의 개념은 그것을 통해서 ‘중용’의 의미를 가름할 수 있는 역할을 한다.
중용이라는 것은 치우치지 않고 기울지 않으며,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없는 평상의 이치니, 곧 하늘이 명령한 당연한 것이며, 정밀하고 은미함의 극치이다.36
‘중용’의 정의는 치우침이 없이 과불급이 없으며 하늘이 명한 ‘성’으로서 정밀하고 은미함의 극치로 얘기되고 있는데 이는 곧 ‘중’의 개념 속에서 확인 될 수 있는 중요한 요소를 담고 있다.37 그러나 ‘중’의 치우침이 없고 과불급이 없는 상태는 가운데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중용’의 ‘중’은 상황에 따라 극단과 치우침이 인정된다.38 화를 내야할 때 화를 내고 소극적이어야 할 때 소극적인 것이 ‘중’이 될 수 있다. 상제님께서는 이러한 내용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마음은 성인의 바탕으로 닦고 일은 영웅의 도략을 취하여야 되느니라.39
성인과 영웅은 어떤 측면에서 대비되는 인간상일 수 있으나 상황과 주제에 맞게 각각의 극단적 인간상의 모습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제님의 말씀 속에서 ‘중’의 이치를 발견할 수 있으니 짧은 말씀 한마디 속에 숨겨진 오묘한 이치를 발견하는 것은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중용’의 개념에서 특별히 ‘중’과 관련하여 ‘안심’의 문제를 생각해 보자.
마음이란 귀신(鬼神)의 추기(樞機)이며 문호(門戶)이며 도로(道路)이다. 추기를 열고 닫고 문호를 들락날락하며 도로를 오고가는 신(神)에는 혹 선(善)한 것도 있고 혹은 악(惡)한 것도 있다. 선한 것은 스승으로 삼고 악한 것은 고쳐 쓴다. 내 마음의 추기와 문호와 도로는 천지(天地)보다도 크다(心也者鬼神之樞機也門戶也道路也 開閉樞機出入門戶往來道路神 或有善或有惡 善者師之惡者改之 吾心之樞機門戶道路大於天地).40
이와 같은 말씀에서 인간의 마음은 신(神)이 드나들고 있는 도로와 같다는 원리성을 파악해 볼 수 있다. 단순한 측면에서 신은 환경과 대상에 응하여 있는 기운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신이 나의 마음에 드나든다는 것은 마음이 환경과 대상에 감응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사물과 환경, 대상에 감응하여 생기는 마음의 문제를 내 스스로 다루는 것은 마음에 드나드는 신을 선택하는 길이 된다. 마음을 신이 오고가는 길이라고 보는 기본적인 원리성을 토대로 대순진리회에서는 마음과 관련된 개념으로서 ‘안심’의 상태를 지향하고 있다.『대순진리회요람』에서는 ‘안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사람의 행동(行動) 기능(機能)을 주관(主管)함은 마음이니 편벽(便辟)됨이 없고 사사(私邪)됨이 없이 진실(眞實)하고 순결(純潔)한 본연(本然)의 양심(良心)으로 돌아가서 허무(虛無)한 남의 꾀임에 움직이지 말고 당치 않는 허욕(虛慾)에 정신(精神)과 마음을 팔리지 말고 기대(企待)하는 바의 목적(目的)을 달성(達成)하도록 항상(恒常) 마음을 안정(安定)케 한다.41
‘안심’을 이루기 위한 마음상태의 전제 조건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해 보면, 첫째로 편벽(便辟)됨이 없고 사사(私邪)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진실된 본연의 양심(良心)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내용을 성리학에서 마음의 ‘성’, ‘정’과 관련된 ‘중’의 문제를 통해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처세에 귀한 것은 부드러움이요 강하고 굳건한 것은 화(禍)의 기초가 된다. 말을 할 때는 늘 더듬듯이 하라. 일을 당하여 당연히 어리석은 듯하라. 위급함(急地)에 있어서는 항시 느린(緩) 것을 생각하고 편안할 때(安時)에는 위태한(危) 것을 잊지 말라. 한 평생을 이 계책에 따른다면, 진정한 호남아(好男兒)이니라(處世柔爲貴 剛强是禍基 發言常欲訥 臨事當如癡 急地尙思緩 安時不忘危 一生從此計 眞皆好男兒).42
사람의 다양한 감정들은 세밀하게 표현될 수 있지만 아주 단순하게 나눈다면 좋음과 싫음으로 분류할 수 있다. 좋음과 싫음이라는 감정은 그 자체로서는 나쁜 것이 아니지만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과부족이 발생하여 중절이 되지 못하면 문제가 생긴다. 치우치지 않는 절제가 요구되는데 “위급함에 있어서는 느린 것을 생각하고 편안할 때는 위태한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은 ‘정’으로 표출된 나의 마음을 치우치거나 과부족이 생기지 않도록 ‘중’으로 절제하라는 의미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치우쳐서 사랑하고 치우쳐서 미워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음을 인(仁)이라 하고, 전부 옳고 전부 그르다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음을 의(義)라 하고, 오로지 힘쓰고 오로지 편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음을 예(禮)라 하고, 방자하게 귀 밝고 방자하게 눈 밝은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음을 지(智)라 하고, 넘치게 견주고 넘치게 하고자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음을 신(信)이라 한다(不受偏愛偏惡曰仁 不受全是全非曰義 不受專强專便曰禮 不受恣聰恣明曰智 不受濫物濫欲曰信).43
인의예지신은 오상의 덕이다. 이것은 인간에게 천명으로 주어진 것으로 ‘성’이 된다. 때문에 ‘성’은 마음의 본체가 되며 인간이 선할 수 있는 근원적인 근거가 된다. 인간이 양심과 같은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으로 천성이나 본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상제님께서는 위와 같이 대비적인 개념들을 제시하여 그것으로 치우치지 않는 것으로서 오상의 덕에 대해 개념정의를 하고 계신다. 이러한 개념정의는 ‘중’의 가치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오상의 덕 하나하나가 ‘중’의 가치 기준 속에서 정의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太極圖說』 •김용옥, 『중용 인간의 맛』, 통나무, 2012.
01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홍석영 역, 『니코마코스 윤리학』, 풀빛, 2005, pp.38~101, 참조. 02 김용옥, 『중용 인간의 맛』, 통나무, 2012, pp.58~64, 참조. 03 대순진리회교무부, 「대순회보」127호, 대순진리회출판부, 2011, pp.78~85, 참조. 04 최영진 외, 『한국철학사』, 새문사, 2010, p.176. 05 『太極圖說』“無極而太極 太極動而生陽 動極而靜 靜而生陰 靜極復動 一動一靜 互爲其根 分陰分陽 兩儀立焉 陽變陰合 而生水火木金土 五氣順布 四時行焉 五行一陰陽也 陰陽一太極也 太極本無極也” 06 대순(大巡)이 원(圓)이며 원(圓)이 무극(無極)이고 무극이 태극(太極)이라. 우주(宇宙)가 우주된 본연(本然)의 법칙(法則)은 그 신비(神秘)의 묘(妙)함이 태극에 재(在)한바 태극은 외차무극(外此無極)하고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진리인 것이다. … (대순진리회교무부, 『대순회보』43호, 대순진리회출판부, 1993.) 07 朱子曰 太極只是一箇理字 太極只是天地萬物之理 在天地言則 天地中有太極 在萬物言則萬物中各有太極 (『朱子語類』 卷1, 「理氣」) 08 최영진 외, 위의 책, pp.177~178, 참조. 09 최영진 외, 위의 책, p.176. 10 김수길 역, 『집주완역-중용』, 대유학당, 2008, p.82.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11 김수길 역, 위의 책, p.83. “天以陰陽五行 化生萬物 氣以成形 而理亦賦焉 猶命令也 於是 人物之生 因各得其所賦之理 以爲健順五常之德 所謂性也” 12 『주역(周易)』의 괘(掛)에 선(善)가치를 표현한 것이다. 13 대순진리회교무부, 「대순진리회요람」, 대순진리회출판부, 2010, pp.18~19. 14 최영진 외, 위의 책, p.181. 15 又曰: “才又在氣質之下. 如退之說三品等, 皆是論氣質之性, 說得儘好. 只是不合不說破箇氣質之性, 卻只是做性說時, 便不可. 如三品之說, 便分將來, 何止三品? 雖千百可也. 若荀揚則是‘論氣而不論性’, 故不明. 旣不論性, 便卻將此理來昏了.” (『朱子語類』 卷4, 「性理」 1, 人物之性氣質之性.) 16 최영진 외, 위의 책, pp.150~152, 참조. 17 최영진 외, 위의 책, p.152. 18 『退溪集』「退溪先生文集卷之十六」, “夫四端 情也 七情 亦情也 均是情也 … 子思所謂天命之性 孟子所謂性善之性 此二性字所指而言者 何在乎 將非就理氣賦與之中 而指此理原頭本然處言之乎 由其所指者 在理不在氣 故可謂之純善無惡耳 若以理氣不相離之故 而欲兼氣爲說 則已不是性之本然矣 誠以爲雜氣而言性 則無以見性之本善故也 … 故愚嘗妄以爲情之有四端七情之分 有性之有本性氣稟之異也” 19 退溪, 『聖學十圖』「心統性情圖說」, “四端之情 理發而氣隨之 自純善無惡 必理發未遂而揜於氣 然後流爲不善 七者之情 氣發而理乘之 亦無有不善 若氣發不中而滅其理 則放而爲惡云” 20 최영진, 『e시대의 절대사상-퇴계 이황』, 살림, 2007, pp.80~81, 참조. 21 『栗谷全書』 卷10, 「書2」, pp.198~210. “發者氣也 所以發者理也. 非氣則不能發 非理則無所發. … 若來書所謂理氣互發 則是理氣二物 各爲根柢於方寸之中. … 或原者 以其理之所重而言也 或生者 以其氣之所重而言也 非當初有理氣二苗脈也” 22 최영진 외, 『한국철학사』, 새문사, 2010, p.168. 23 『栗谷全書』 卷10, 「書2」, p.198. 24 『栗谷全書』 卷10, 「書2」, p.199. “夫人之性 有仁義禮智信五者而已 五者之外 無他性 情有喜怒哀懼愛惡慾 七者而已 七者之外 無他情 四端只是善情之別名 言七情則四端在其中矣 非若人心道心之相對立名也 … 然則四端專言道心 七情合人心道心而言之也 與人心道心之自分兩邊者 豈不泂然不同乎” 25 최영진 외, 『한국철학사』, 새문사, 2010, pp.170~171 참조. 26 『栗谷全書』 卷14, 「人心道心圖說」, p.282. “道心 純是天理 故有善而無惡 人心 也有天理 也有人欲 故有善有惡. 如當食而食 當衣而衣 聖賢所不免 此則天理也 因食色之念而流而爲惡者 此則人欲也” 27 최영진 외, 위의 책, pp.172~173 참조. 28 최영진 외, 위의 책, p.173 참조. 29 교법 2장 26절. 30 성백효 역주, 『서경집전』, 전통문화연구회, 1998, p.13. “然二帝三王之治 本於道 二帝三王之道 本於心 得其心 則道與治 固可得而言矣. 何者 精一執中 堯舜禹相授之心法也. 建中建極 商湯周武相傳之心法也 曰德 曰仁 曰敬 曰誠 言雖殊 而理則一 無非所以明此心之妙也” 31 “류 찬명이 어느 날 상제를 모시고 있을 때 상제로부터 요・순(堯舜)의 도가 다시 나타나리라는 말씀을 들었다고 전하는도다.”(교운 1장 46절.) 32 김수길 역, 위의 책, p.20. “其見於經則允執厥中者 堯之所以授舜也. 人心 惟危 道心 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者 舜之所以授禹也” 33 김수길 역, 위의 책, p.144.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34 中者 不偏不倚無過不及之名 (金秀吉 譯, 위의 책, p.72.) 35 金秀吉 譯, 위의 책, pp.144~145. “喜怒哀樂 情也 其未發 則性也 無所偏倚故 謂之中. 發皆中節 情之正也 無所乖戾故 謂之和. 大本者 天命之性 天下之理 皆由此出 道之體也 達道者 循性之謂 天下古今之所共由 道之用也” 36 김수길 역, 위의 책, pp.181~182. “中庸者 不偏不倚 無過不及而常之理 乃天命所當然 精微之極致也” 37 ‘중용’에서 ‘중’과 ‘용’ 각각의 개념과 관련된 논의는 신정근의 『중용, 극단의 시대를 넘어 균형의 시대로』, pp.49~61 참조. 38 신정근, 『중용, 극단의 시대를 넘어 균형의 시대로』, 사계절, 2010, p.50. 39 교법 1장 23절. 40 행록 3장 44절. 41 대순진리회교무부, 『대순진리회요람』, 대순진리회출판부, 2010, p.16. 42 행록 3장 49절. 43 교법 3장 4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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