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호 전경속 역사인물 : 율곡(栗谷) 이이

율곡(栗谷) 이이

 

         

<연구소 제공>

          

  이이의 자는 숙헌(叔獻)이며,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이다. 시호는 문성(文成)으로 강릉 오죽헌에서 출생하였다.

  사헌부 감찰을 지낸 이원수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유명한 사임당 신씨이다. 1548년(명종 3) 진사시에 합격하고, 16세에 어머니를 여의었으며,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다가 다음해에 하산하여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의 딸과 혼인하고, 다음해 예안의 도산(陶山)으로 이황(李滉)을 방문하였다. 그 해 별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였다. 26세 때에는 아버지마저 여의게 되었다.

  그는 일선 정치에 대한 폭 넓은 경험과 정치적 식견을 통해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40세 무렵부터는 정국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 당시『동호문답(東湖問答)』, 『만언봉사(萬言封事)』, 『성학집요(聖學輯要)』등을 지어 국정 전반에 관한 개혁안을 왕에게 제시하였고, 성혼과 「이기사단칠정 인심도심설(理氣四端七情 人心道心說)」에 대해 논쟁하기도 하였다.
  1576(선조 9)무렵 동인과 서인의 대립 갈등이 심화되면서 그의 중재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더구나 건의한 개혁안이 선조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인 파주 율곡리로 낙향하였다. 그때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저술하고 해주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건립하여 제자교육에 힘썼으며 향약과 사창법(社倉法)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산적한 현안을 그대로 좌시할 수 없어, 45세 때 대사간의 임명을 받아들여 복간하였다.
  이때 왕에게「시무육조(時務六條)」를 지어 바치는 한편 경연에서 「10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활발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조가 이이의 개혁안에 대해 계속 미온적인 태도를 취함에 따라 그가 주장한 개혁안은 별다른 성과를 거둘 수 없었으며, 동인·서인간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면서 그때까지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려고 노력한 그가 동인 측에 의해 서인으로 지목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이어서 동인이 장악한 삼사(三司)의 강력한 탄핵이 뒤따르자 48세 때 관직을 버리고 율곡으로 돌아왔으며, 다음해 서울의 대사동(大寺洞)집에서 죽었다.

  파주의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고 문묘에 종향되었으며,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과 강릉 송담서원(松潭書院)등 전국 20여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이이가 생애 전반에 걸쳐 깊게 몰두한 학문은 성리학이었다.

  이이는 『발(發)하는 것은 기(氣)이며 발(發)하는 것은 까닭이 이(理)』라고 하여 「기발이승(氣發理乘)」의 한 길만을 주장하면서 사단칠정이 모두 이것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라고 하였다. 단지 칠정은 정(情)의 전부이며, 사단은 칠정 중에서 선한 것만을 가려내 말한 것이라고 하여 칠정이 사단을 포함한다는「칠정포사단(七情包四端)」의 논리를 전개하여 기대승의 사단칠정론에 찬동하였다. 이이의 경우 이와 기는 논리적으로는 구별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사물에 있어 이는 기의 주재(主宰)역할을 하고 기는 이의 재료가 된다는 점에서 양자를 불리(不離)의 관계에서 파악하고, 하나이며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이들의 관계를 「이기지묘(理氣之妙)」라고 표현하였다. 즉 변화하고 제한적인 기국(氣局)속에는 항상 보편적 이(理通)가 존재한다는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을 제시하였다.
  이이는 자기가 살던 16세기의 조선 사회를 건국 뒤 정비된 각종 제도가 무너져 가는 「중쇠기(中衰期)」라고 진단하고서, 시급한 국가의 재정비를 위해 일대 경장(更張)이 요구되는 시대라고 판단하였다.

  『만언봉사』에 의하면 「정치에 있어서는 때를 아는 것이 소중하고 일에 있어서는 실질적인 것에 힘쓰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때에 알맞게 한다(時宜)는 것은 때에 따라 변통을 하고 법을 마련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즉 시대가 바뀌면 법의 제도도 맞지 않기 때문에 현실에 맞게 제도를 개혁해야 하며, 이러한 변통을 통해 경장이 이루어져야 안민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경장의 구체적인 방법은 국가의 통치체제 정비를 통해 기강을 확립하고, 공안(貢案)과 군정(軍政)등 부세(賦稅)제도의 개혁을 통해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경장론은 동·서인의 분쟁 격화와 선조의 소극적인 태도로 말미암아, 당대에는 거의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그의 정치사상은 시의를 좇아 실공(實功)과 실효를 강조한 현실적 면모를 보이는데, 진리란 현실 문제와 직결된 것이고 그것을 떠나서 별도로 구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한 점에서 일관되게 주장한 이기론, 즉 이(理)와 기(氣)를 불리(不離)의 관계에서 파악한 율곡 성리설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이의 학문과 사상은 주정(朱程)의 도학사상을 중추로 삼았으므로 그의 모든 학문과 경륜은 여기에서 발원하고 있다. 그러나 주정을 따르는 당시의 일반 유학자들의 주정의 말이라 하면 절대시하여 한마디의 훼손도 못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었던 시대에 그는 성호원의 물음에 답하는 글에서 『주자의 소견에도 잘못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 학풍이 당당했고 자주성이 뚜렷하였다.

  정계와 학계 그리고 사회를 통하여 기울어져 가는 현상을 바로잡아 유교적 이상세계를 건설하려고 무한한 노력을 경주했던 이가 바로 이이였다.
  『전경』(행록 1장 32절)을 보면 율곡이 『이순신에게는 두률천독(두보의 시를 천번을 읽으라)을 이르고, 이항복에게는 슬프지 않는 울음에 고춧가루를 싼 수건이 좋다』라 한 구절이 있다. 

  또한 상제께서 이율곡이 퇴계 이황에게 보낸 시를 인용하신 구절이 나와 있다.

 

 溪分洙泗派 峰秀武夷山 (계분수사파 봉수무이산)

시내는 수사 물결로 갈리우고 봉우리는 무이산이 빼어나도다.

襟懷開霽月 談笑止狂瀾 (금회개제월 담소지광란)

마음은 환히 개인 달 같고 담소는 미친 물결 그치게 하네.

活計經千卷 行裝屋數間 (활계경천권 행장옥수간)

살아가는 데는 경전 천여권이며 나고 듦에 두 어칸 집뿐이로다.

小臣救聞道 非偸半日閑 (소신구문도 비투반일한)

이내 몸도 듣기를 구하려 함이지 반나절의 한가로움 취함이 아니로다.

 

  이 시는 이이가 지은 『예안 땅을 지나다가 퇴계 이황 선생을 뵙고 율시 1수를 올리다.』라는 시이다. 그러나 원문은 상제께서 읽어 주신 시와는 조금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즉, 위시의 5, 6구가 원문에서는 3, 4구에 배치되어 있으며 장(裝), 신(臣), 한(閑)이 원문에서는 각각 장(藏), 자(子), 간(閒)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