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의 이해
글 윤승용*
Ⅰ. 이슬람 이해를 위한 시선
1) 이슬람 순례를 시작하며
이슬람은 570년경 아라비아 메카에서 태어나 632년에 사망한 예언자 무함마드가 알라(Allah)의 계시를 받아 형성한 유일신 신앙의 종교이다. 유럽 서남부 이베리아반도에서 아프리카 북부를 거쳐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잇는 중동의 중심인 아라비아 반도를 지나 아시아 인도네시아에 이르기까지 3개 대륙에 광범위하게 걸쳐 분포하고 있다. 종교로서 세계성과 보편성이 가장 뛰어나고 세계인구 1/4에 해당하는 15억 명 신자를 가진 기독교 다음의 세계 2위의 종교이다. 이슬람을 모르고는 우리가 인류 문화를 안다고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로 인류문명에 끼친 영향도 적지 않다. 세계사적으로도 고대 희랍문명을 중세 천 년간 보존하여 유럽에 전달함으로써 근대문명을 싹트게 했을 뿐 아니라 16세기 해상 무역 통로가 열리기 이전까지만 해도 동서 문명의 교량역을 담당하며 중세 찬란한 문명의 꽃을 피웠던 종교이다. 이같이 광대한 영역과 오래된 역사를 고려한다면 지역과 문화권에 따른 상당히 다양한 이슬람 모습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여기서 이런 다양한 모습들을 모두 소개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해서 이슬람 신앙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것들만 골라 소개하고 다음 기회가 있으면 지역과 문화권별로 별도 소개하기로 한다.
한국사회에서도 매일같이 자살폭탄 테러, 참수형 같은 이슬람의 부정적인 뉴스가 쏟아져 나온다. 특히, 2001년 미국 뉴욕시에서 있었던 이슬람 과격파인 알카에다의 9.11 테러사건을 보고 이슬람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이 더욱 심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부정적인 것들이 이슬람의 전부가 아니다. 이슬람의 부정적인 뉴스의 많은 부분들은 중동과 이해관계가 많은 미국과 유럽이 그리고 이슬람 발생이후 천 년간 대립해 온 기독교가 의도적으로 생산해낸 이미지일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할 필요가 있다. 이슬람의 삶 전체를 이해한다면 이런 것들이 단순한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본래 이슬람 신앙은 그렇게 반문명적인 것도 아니고 그렇게 패권주의적인 것도 아니다. 그저 기독교인과 서구문화와는 다른 생활양식일 뿐이다. 이 같이 다르다는 것만 가지고 무조건 이슬람을 부정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그리고 지구촌 15억 명의 종교와 문화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균형 잡힌 교양인이 되기도, 중동 오일달러 시장을 보존하기도, 글로벌 리더가 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슬람 명칭에 있어서도 혼선이 있다. 무함마드가 일으킨 종교라고 하여 유럽인들은 그것을 무함마드교라고 부르고 있으나 이는 기독교를 예수교로 부를 수 있는 것과 같은 차원에서 생각한 잘못된 명칭이다. 이슬람이라는 종교는 무함마드가 시작한 것이 아니고 옛날 인류의 시조인 아담 시대부터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아담 이래 수많은 예언자들이 출현해 왔으나 무함마드야 말로 최고의 마지막 예언자라는 것이다. 또한 이슬람교를 중국에서는 전래 당시 대식국의 이름을 따서 회족의 종교라는 의미에서 회회교, 회교라고 부르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도 과거 그런 명칭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것 역시 정확한 명칭은 아니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이슬람교도들이 부르고 있는 명칭인 이슬람이라고 부르는 것이 온당하다.
한국은 세계에서 이슬람교도 수가 비교적 적은 나라 가운데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살고 있는 무슬림은 14만 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4만 명은 외국인이 아닌 한국인이다. 서울 이태원 말고도 부산·대구·대전 등 대도시에는 무슬림 사원인 모스크가 하나씩 있다. 그리고 한국 사회의 고령화와 외국인 노동자 증가세를 고려해 볼 때, 앞으로 이 숫자는 더 늘어날 것이 분명하다. 최근 이들을 통해서 한국에 이슬람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고 하여 개신교를 비롯한 한국종교계에서는 이슬람에 대한 이해와 이들에 대한 선교대책에도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2) 종교, 국가, 문화로서의 이슬람
이슬람이란 아랍어 에서 파생된 이슬라마의 명사형이다. 즉 모든 피조물인 무슬림(Muslim)들이 알라에게 완전한 복종과 순종을 할 때만이 완전한 평화가 깃들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슬람이라는 말은 이 같은 문자적 의미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실제로는 종교뿐 아니라 그 종교를 토대로 구축된 문화 전체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과거 약 1천3백여 년간 이슬람교도들이 형성해온 종교는 물론이고 정치, 경제, 법률, 과학, 예술 그리고 교도들의 풍속과 관습도 함께 포함된다. 그러므로 이슬람은 유대교, 기독교와 같은 유일신 신앙의 종교이지만 서구적인 개념의 신앙영역만의 종교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유교와 같이 삶의 양식으로서의 의미를 가지는 종교이고, 아직도 많은 곳에서는 국가나 사회구조를 이루는 원리를 제공하는 역할도 한다.
종교로서의 이슬람은 알라가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계시한 『쿠란』과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Hadith)』를 근간으로 하는 신앙과 실천체계이다. 이 종교를 따르는 무슬림들은 평화, 평등, 단결, 선린을 기본적인 신조로 하여 서로 형제애를 돈독히 하고 알라 앞에 누구나 평등하다는 것을 굳게 믿는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특별한 성직자나 사제와 같은 성직 체계도 없고, 국적, 언어, 피부색, 빈부귀천도 상관하지 않으며, 오직 알라에 대한 신앙적 믿음과 실천만을 강조한다. 이슬람 신비주의인 수피즘을 제외하고는 이슬람 각 종파가 정치투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국가로서의 이슬람은 『쿠란』이 계시한 와 후계자들이 기회 있을 때마다 각지에서 수정한 그 성법을 토대로 삼은 정치적 실체이다. 말하자면 초기 이슬람은 정치와 종교의 결합체였다. 이슬람이 이러한 정치적 실체였기 때문에 발생 이후 한 세기도 채 지나지 않아 중동지역 전체와 북아프리카 전체를 포함한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이는 이슬람 신앙의 불가사의한 폭발력을 증명하는 좋은 사례로 활용된다. 초기 이슬람 국가는 당시 8세기경 중동에서 양대 세력을 이루고 있던 비잔틴제국과 페르시아제국을 정복함으로써 성장하였으며, 지금도 그곳이 이슬람의 중심지역이다.
문화로서의 이슬람은 아랍인들이 창조한 것이 아니다. 그 문화를 보급하는 데에 아랍어가 절대적으로 기여한 것이지만 아랍인들은 이슬람 문화 창조에는 큰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이슬람 문화는 고대 셈족, 고대 그리스, 중세 인도, 페르시아와 같은 서로 다른 여러 민족문화를 잘 결합한 합성물이다. 그 문화는 이슬람이 정복한 민족들, 즉 개종한 무슬림들이 주체가 되어 형성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8세기 중엽부터 12세기에 이르기까지 약 4백 년 동안 이 종합문화는 체계적인 짜임새는 없었으나 양과 질적인 면에서 그 당시 인류 최고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스 문화를 흡수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페르시아, 중국, 인도 문화의 영향을 받아 형성한 이 문화가 유럽 근대 문화를 배태시킨 기반을 제공하였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같이 이슬람은 종교, 정치, 문화의 세 가지가 한꺼번에 뭉뚱그려진 생활양식이기 때문에 도대체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설명해야만 하는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더구나 이러한 어려움은 이슬람이 타 종교에 비해 생활 전반과 연계되어 있는 종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상대적으로 다른 세계종교에 비해 생소한 종교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이슬람이라고 하면, 아라비아 사막의 종교로서 술을 먹지 못하게 하고 부인을 4명까지 둘 수 있는 일부다처제를 인정한다든가 여성을 격리시키는 하렘이라는 제도가 있고,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등의 몇 가지 피상적인 지식을 떠올려 보는 정도다. 그러나 이슬람은 결코 그렇게 간단한 종교가 아니다. 8세기부터 1천 년간 서구의 기독교를 압도하고 당시 인류 문명에서 최대 황금 문명을 이룩한 종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슬람에 대해 피상적인 이해로만 그치는 이유는, 이슬람을 경계하기 위해 이슬람을 호전적인 종교로 묘사한 서구의 입장을 비판 없이 수용한 것에 기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3) 유대교, 기독교와의 관계
앞서 언급한 대로 이슬람의 기본교리를 살펴볼 때 이슬람은 유대 기독교적 전통 위에 형성된 종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오늘날 이슬람, 유대교, 기독교가 서로 이교도로써 이단시하는 근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문화전통을 중심으로 하는 설명도 가능하겠지만 가장 손쉬운 방법은 기독교의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설명하는 방법일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고, 죄의 중보자로, 신국을 건설할 메시아로 보고 언젠가는 이 땅에 재림하여 천년왕국을 건설한다는 교리를 가지고 있다.
우선 유대교에서는 예수를 약속된 메시아인 그리스도로 보지 않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슬람에서도 예수를 신의 아들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위대한 예언자 중 한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다. 예수가 중심인 기독교에서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설을 주장하면서 예수를 신의 아들임과 동시에 하느님과 동격의 신으로도 간주한다. 그러나 이슬람에서는 어디까지나 예수를 하느님의 사도로서 존경하지만 전 인류의 죄를 구속한 십자가와 그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쿠란』에 의하면 하느님은 유일하여 하느님 이외 기적을 행할 어떤 분도 없다고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3위일체설과 같은 것이 존재할 수 없는 그야말로 아주 완전한 일신교의 신앙이다. 기독교와의 또 다른 차이점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설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를 통해서 죄의 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 데 반해 이슬람은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어떠한 매개체도 있을 수 없으며, 하느님이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을 공평하게 만들었다. 그 때문에 인간은 원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판단에 따라 행동할 신성한 권한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슬람에서는 무함마드를 마지막 예언자이고 완전한 인간임을 강조한다. 이것은 종래 예언자가 전달한 계시내용이 낡고 시대사조에 뒤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신은 인류사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새로운 지표가 될 수 있는 계시내용을 무함마드를 통해 내리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즉 무함마드는 종래의 예언자들을 부정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그들을 보완하기 위해 왔다며, 최후 심판일까지 인류사를 관장할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유대교의 신앙모델인 모세를 비롯한 예수 등 이전의 모든 예언자들을 신앙상으로 인정한다.
2. 이슬람의 기본경전: 『쿠란』과 『하디스』
이슬람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본경전인 과 『하디스(Hadith)』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쿠란』은 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계시된 신의 말씀을 모은 것으로 아랍어로 씌여진 장단 11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알라의 사도인 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을 수록한 것이 『하디스』이다.
‘쿠란’이란 말은 본래 ‘낭송하다’, ‘읽는다’라는 동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읽어야 할 것’, ‘낭송되어야 할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쿠란』은 높은 소리로 낭송되어야 하는 경전이다. 『쿠란』을 나타내는 말로서 라는 말이 있지만 그것은 ‘씌어진 것에 관형사 알(al)을 첨가한 것으로 성전을 의미한다. 『쿠란』의 체제는 쑤라(Surah)라고 불리는 장단 114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장은 와 아야(Ayah, 절)로 구분되어 있다. 간단한 장에서는 루쿠라는 구분방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짧은 장들과는 달리 긴 장의 경우에는 한 번에 계시된 것만 아니고 때로는 계시된 시간과 장소가 다른 것도 포함되어 있다. 즉 어떤 장의 첫 부분은 메카에서, 마지막 부분은 메디나에서 계시된 장도 포함되어 있다는 말이다. 약 90여 장에 걸친 메카 시대의 계시는 대체로 짧고 날카로우며, 열렬한 격정에 넘쳐 정열적인 형식을 취하고, 그 내용은 신의 유일성과 그 속성, 인간의 도덕적 의무, 미래 심판 일에 대해 반복하고 있다. 그것에 대하여 이슬람 공동체인 움마 건설기인 메디나 시대(622~633년)의 계시인 20여 장은 대체로 길고 입법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그 시기에는 신학적인 신조, 공식예배, 단식, 순례, 성월에 관한 의례적인 규칙 등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 장에는 술·돈육·도박 금지 등의 법률들이 포함되고, 희사·성전 등의 경제적·군사적 규정, 살인·복수·도둑질·고리대금·결혼·이혼·간통·상속·노예해방 등에 관한 민법적·형법적인 규정도 포함되고 있다.
성전 『쿠란』은 이슬람 문화의 기초가 되며 이슬람교도들의 생활기준이 된다. 이슬람교도들에 의하면 『쿠란』은 모든 문제에 관련한 규정을 포함하는 성전이다. 그러나 이슬람 발생 후 끊임없이 제국세력이 대외적으로 신속한 발전을 함에 따라 종족과 문화적 계통이 다른 많은 이민족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래서 정치는 물론 재정, 치안유지, 전쟁, 기타 모든 문제를 처리할 기준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쿠란』을 정확하게 해석할 필요가 있어 아랍 언어학과 아랍 문법학의 발달을 촉진하게 되었던 것이다. 『쿠란』을 연구하여 그것을 교의와 율법에 따라 체계화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보조 자료와 학문들이 고안되어 관련 해석학이 발생하고 발전하게 되었다. 그 해석학의 발전은 바로 이슬람의 신학 발전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모든 문제의 처리기준을 찾는 데는 『쿠란』의 해석학이 절대 필요했겠지만 『쿠란』만으로는 그 문제가 처리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언자의 말, 행위, 암묵적인 승인사항 등의 기록을 수집하여 『쿠란』에 적당한 처리규정이 없는 경우에 보조적으로 문제처리를 하는 기준으로 활용하였다. 그렇게 형성된 것이 『하디스』이며, 이는 쿠란 해석의 제1보조물로서 이슬람 법학자들에 의하면 『쿠란』에 다음가는 권위가 인정된다.
예언자의 언행에 대해서는 예언자의 처 아이샤와 교우 아부 후라이라(Abu Hurairah) 등에 의해 수천 사례가 전해지지만 9세기에서 10세기에 걸쳐 표준이 되는 여섯 가지 『하디스』가 편찬되었다. 예언자가 죽은 지 3백 년 지난 후에는 약 60만 가지의 전승이 유포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일군의 학자들이 믿을 수 있는 것만 모아 기록에 남기게 되었다. 그때 기준으로 삼은 것이 사건이나 말의 유래를 믿을 수 있는 인물을 통해 예언자의 친구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가 어떤가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각각의 전승은 “아무개가 그것을 아무개로부터 듣고…, 내가 그것을 아무개로부터 들었다”는 식으로 사설처럼 면면히 이어진 형식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전승은 전승과정을 언급한 와 전승내용인 마튼(matn)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하디스』 편찬자들은 전승내용을 신의 계시를 반복하는 것과 순수한 예언자의 말로 구분하였고 또 신빙성 정도에 따라서도 분류하여 정리하였다.
3. 이슬람의 기본 교의
1) 교의 형성의 근원
이슬람 교의는 계시서인 『쿠란』, 예언자의 언행과 관습인 <순나>, 공동체의 일치를 의미하는 개인의 창조적 사상인 <이즈티하드>라는 네 가지 근원적인 원리에 기초하고 있다. 또한 이런 교리를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체계화한 이슬람의 도 그 기반은 마찬가지이다.
이슬람의 근본 가르침이 되는 첫째 자료는 천사 가브리엘에 의해 무함마드에게 계시된 신의 말씀인 『쿠란』이다. 그리고 그 1차 보조자료는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이라는 뜻을 가진 순나다. 이 순나는 본래 이슬람 이전 아랍 사람들의 전통과 관습을 의미하였으나 이슬람 형성 후에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모범, 즉 언행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러한 예언자의 언행을 기록한 것이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하디스』이고, 이것이 바로 순나의 기본 자료가 된다. 다음은 이슬람 사회가 확장됨에 따라 개인적이고 지역적인 견해차를 줄이기 위해 8세기 정도에 도입된 것이 이즈마로 이슬람의 율법과 신앙생활을 표준화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 이즈마의 원뜻은 ‘공동체의 동의 혹은 견해의 일치’를 의미하지만 실재하는 『쿠란』과 전승내용들을 구체적으로 확정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그래서 8세기부터의 이즈마는 정통파 이슬람 신앙에 있어서는 사실상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같이 이즈마가 중요하게 된 것은 이슬람 신앙이 그만큼 경직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공동체의 동의를 얻은 것들은 이미 규정된 것으로 생각하여 그것에 대해 더 이상 의문을 품지 않는 분위기가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노력하다’의 의미를 가진 이즈티하드는 즉 이성에 의한 유추로서 알게 되는 원리이다. 이는 이슬람 신앙을 해석하고 사고하는 인식의 기초가 되며, 새로운 이즈마를 가능하게 하는 근거가 된다. 그러나 이슬람 초기에는 지나치게 개인적인 견해에 치우쳐 도리어 신앙 상에 혼란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8세기에 이르러 이즈티하드는 개인적인 견해를 뛰어넘은 『쿠란』과 『하디스』에 기초한 공식적인 연역적 설명, 즉 끼야스로 대치되어 갔지만 사회에 이즈마가 점차 정착됨에 따라 사실상 이즈티하드의 문은 닫혀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 가잘리와 같은 뛰어난 무슬림 사상가들은 새로운 이즈티하드의 권리를 주장하기도 하였으며, 그 후 18세기 이후의 개혁가들은 근대 사상사조의 영향을 받아 이즈티하드 권리를 확장시켰다.
2) 六信과 五行
이슬람의 가르침에는 신(信)과 행(行)의 두 부분이 있다. 이슬람 신도라면 믿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믿음에 따른 기초적인 실행이 수반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믿음을 아랍어로 이라 하고, 실행을 아랍어로 이바다트(Ibadit)라고 한다. 이만에는 신, 천사, 성전(聖典), 예언자, 최후의 심판, 정명 등 육신(信)이 있고 이바다트에는 신앙고백, 예배, 단식, 희사, 순례의 오행(行)이 있다. 이것이 바로 이슬람에서 말하는 육신(六信)과 오행(五行)이다. 또한 오행을 무슬림의 신앙생활에서 다섯 개 기둥이라 하여 오주(五柱)라고도 한다. 여기에서 기본인 덕행(아흐산)을 항시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한다.
육신 중에 그 첫째가 절대 유일신 알라에 대한 믿음이며, 다른 어떤 중간자도 존재할 수 없다는 대원칙이 강조된다. 그래서 『쿠란』 112장에는 “영원하신 하느님, 그는 오직 한 분이시다. 그는 낳음을 당한 적도 없고, 태어나지도 않았고, 그를 낳은 자도 없느니라”라고 하였다. 유대교의 신 야훼도 유일신이지만 유대인만의 신이다. 그러나 알라는 그런 선민적인 신이 아니고 신의 피조물인 삼라만상의 신이다. 이러한 유일신에 대한 거듭된 강조는 이슬람 신앙의 큰 특징이라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알라 이외의 어떤 사람이나 동물도 신격화할 수 없다. 이슬람이라는 명칭에서도 나타난 바와 같이 알라에 대한 복종만이 요구된다. 즉 이슬람교에서 우상숭배는 절대 금물이다. 그래서 모스크에는 어떤 사람이나 동물의 형상도 두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모스크 장식은 기하학적 무늬로서만 이루어져 있다.
둘째가 천사에 대한 믿음이다. 이슬람도 타 종교의 경우와 같이 천사에 대한 신앙이 있다. 천사는 알라에 봉사하는 일종의 청정한 영매로 그 역할이 다양하다. 천사의 수는 무수히 많으나 그 중에 『쿠란』에 나와 있는 천사는 가브리엘과 미카엘뿐이다. 가브리엘은 최상의 천사로서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계시를 전하였고, 미카엘은 천지에 대한 신의 명령을 실행에 옮기고 풍우를 보내는 천사로서 등장한다. 그 외에도 전승에 의하면 최후 심판날에 나팔을 부는 역할을 부여받은 이스라필, 인간이 죽을 때 최후의 숨을 거두러 오는 죽음의 천사 이스라일 등이 있다. 신의 사자 역할을 하는 것이 천사의 중요한 임무이지만 신의 옥좌를 떠받쳐준다든가 천국과 지옥문을 지킨다든가 인간과 신 사이에서 중개역을 맡는 일도 한다.
셋째는 성전(聖典)을 믿는다. 신이 인류에게 내린 계시서인 성전은 전체 140여 개이며, 그 성전 중에 가장 신성한 것은 모세에게 내린 오경, 다윗의 시편, 예수의 복음서와 무함마드의 『쿠란』의 4종이다. 그 중에 『쿠란』은 신의 뜻을 제대로 전달한 가장 완전한 것이라고 한다. 이슬람교도들은 『쿠란』과 함께 다른 계시서들도 믿고 있어 유대교, 조로아스터교, 기독교와 같이 계시서를 가진 사람들을 특별히 ‘경전을 가진 사람들(people of the Book)’이라고 부른다. 이같이 『쿠란』 이전에도 많은 계시서가 있었지만 이슬람의 기본입장은 『쿠란』 이외의 경전들은 신의 계시가 전달되는 과정에서 수정되고 왜곡된 것이라서 불완전한 입장이다.
넷째, 이슬람교는 계시서인 『쿠란』과 더불어 그 계시서를 받은 예언자 또는 신의 사도의 존재를 믿는다. 알라는 자신의 의도를 인간에게 전하기 위해서 아담 이래 많은 예언자를 세상에 보냈다. 『쿠란』에 언급되어 있는 예언자만도 25명이나 된다. 특히 아담, 노아, 아브라함, 모세, 예수, 무함마드 등 여섯 예언자를 위대한 예언자로 받아드린다. 그 중 무함마드는 예언자들 중 최후의 예언자, 최고의 예언자이다. 그는 신의 특별한 사명을 부여받고 있기 때문에 이슬람에 있어서는 특별한 지위를 갖는다. 그러나 그는 예언자이고 신의 사도이기는 하지만 그 한계를 넘어서는 신의 아들은 아니다. 또한 신인(神人) 양성을 갖지도 않는다. 무함마드의 기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 성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기적과 같은 것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런 점에 근거하여 신자들은 이슬람교가 가장 거짓이 적고 또한 최고의 현실적인 종교라고 주장한다.
다섯째, 이슬람교도 다른 종교와 같이 최후심판을 믿는다. 그 믿음은 경전, 예언자, 최후심판, 부활 등과 같이 유대교와 기독교에도 연결되는 것이다. 무슬림들이 내세와 최후의 심판일, 부활을 믿는 것은 내세란 현세의 연결로 계속된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세는 현세에 있었던 인간 행위의 보상의 장이 된다. 그와 더불어 『쿠란』은 천국과 지옥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즉 천국은 신자들이 보석을 가득 박은 옥좌에 기대앉으면 영원한 젊음을 부여받은 시동들이 맑은 술과 최상의 음식을 바치는 등 아라비아의 황량한 사막과는 전혀 다른 나뭇잎이 무성한 낙원으로 묘사되는 반면에, 지옥은 불 속에서 무서운 고통을 당하는 곳으로 묘사되고 있다.
여섯째, 정명(正命)을 믿는다. 즉 인간의 행위와 운명은 신이 정하는 바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럼에도 인간은 스스로 노력해야 하며, 그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 천지 대자연 중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알라의 뜻에 따르기 때문에 알라의 지배를 받는 운명에 처해 있다. 이러한 정명관은 결코 나쁜 의미로의 숙명관과는 다르다. 보다 적극적인 의미로 자기 노력과 정신적 향상이 전제된 정명관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상의 여섯 가지 믿음과 함께 무슬림이 반드시 지켜야 할 다섯 가지 실천이 있다. 이슬람이 구축한 정치체제와 문화는 수백 년의 긴 세월을 거치는 동안 꽤나 많이 변해왔지만 이슬람의 신앙, 의무, 도덕기준 등의 체계는 거의 변치 않은 채로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이 체계의 바탕에서 부동한 것은 믿음, 예배, 희사, 단식, 순례의 다섯 가지다. 이는 모든 무슬림이 실천해야 할 종교상의 의무로 되어 있다.
그 첫째가 신앙고백(Shahada, 샤하다)이다. 신자가 되려는 자는 “알라 이외는 신은 없다.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도다”라고 선서한다. 이러한 신앙고백으로써 ‘신은 유일하며 무함마드가 신의 사도라는 것’을 선언한 것이 되고, 그 밖에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신념을 동시에 받아들이는 것이 된다. 『쿠란』이 신의 말씀이라는 것, 천사가 신의 중개자라는 것, 인간에게 언젠가는 최후심판의 날이 온다는 것 등이다. 일단 신앙을 선서했으면 다시 철회할 수는 없다. 배교에 대한 벌은 죽음뿐이다. 샤하다의 가장 큰 장점은 간결하고 외우기 쉬우며 아주 간편한 데 있다. 따라서 신자가 될 때도 의식을 맡는 특별한 사람도 필요 없고, 기독교에서와 같이 세례라든가 성찬이라든가 하는 성사도 없고, 교리문답과 같은 까다로운 교의상의 문제도 수반하지 않는다. 흔히 사제나 승려라고 불리는 성직 계층조차 없다. 다만 울라마라고 불리는 이슬람 학자만이 있을 뿐이다.
둘째는 알라에게 올리는 예배이다. 무슬림에게 예배는 가장 중요한 종교적 의무이다. 예배를 통해 신을 찬양하고 자기의 존재와 자기가 소유한 모든 것에 대해 신에게 감사한다. 예배에는 개인적·내면적 기도인 ‘두아’와 공식예배인 ‘살라트’라는 두 종류가 있다. 두아는 개인적인 소원성취를 빌어도 무방하지만 살라트는 신자 모두에게 의무적으로 요구되는 공식적인 예배형식이다. 무슬림은 이슬람 초기부터 매일 5회씩 귀중한 이 의무를 수행한다. 아침 동이 틀 때, 정오, 오후 늦게, 일몰 직후, 취침 전에 한다. 무슬림은 예배를 올릴 때 몸을 깨끗이 해야 한다. 예배는 집안, 옥외 작업장, 그 밖에 어떤 장소에서 거행해도 동등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다만 일주일에 한 번 금요일 정오에는 신자가 한자리에 모여 금요예배를 거행한다. 이 합동예배는 예배인도자인 이맘에 의해 행해지며, 통상예배 이외에 설교자(대개 이맘)가 신과 무함마드를 찬양하는 문구를 외우기도 하고 일반적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금요예배는 대체로 모스크 안에서 이루어진다. 대부분의 모스크는 무함마드가 살던 주거형태의 원형을 모방하고 있어 대개 안뜰을 둘러싼 삼방(三方)에 회랑을 두르고 나머지 한쪽에 예배용 홀을 설치하고 있다. 또한 예배는 메카 신전을 향해 거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모스크는 단순한 예배장만은 아니다. 중요한 교육시설이기도 하고 법정으로 사용되는 일도 있다. 그리고 여행자들에게 목을 축이게도 하고 나그네의 피로도 풀게 해주는 곳이다.
셋째는 희사(喜捨)이다. 자기가 갖고 있는 일부 재산을 남에게 희사하면 나머지 재산은 정화받는다고 믿고 있다. 희사에는 자유의사에 의해 하는 사다까(Sadaqah)와 제도적인 의 두 종류가 있다. 자카트의 어원은 아랍어 자카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발전’, ‘개발’의 뜻이다. 그 원뜻과 함께 마음을 정화하고 정의를 실천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자카트는 세금이 아니고 ‘신에 대한 대여’라고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국가에 의해 징수되는 이슬람을 위해 갖가지 목적에 사용된 일종의 세금이다. 이 돈으로 빈민이나 과부 또는 고아를 구제하고, 노예가 자유를 사는 것을 돕고, 성전을 위한 병사를 양성하는 데에 사용한다.
넷째는 단식이다. 『쿠란』은 이에 대해 “너희들 믿는 자여, 단식도 너희가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규율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단식기간은 이슬람력 9월인 라마단이다. 라마단은 무함마드가 『쿠란』의 계시를 최초로 받은 달이며, 예언자의 군대가 메카의 적에 대해 첫 승리를 거둔 달이기도 하다. 이슬람력은 음력이기 때문에 태양력을 기준으로 본다면 라마단월은 1년 중의 어느 계절이나 될 수 있다. 이 단식의 의무는 어린이, 병자, 오랜 여행을 하고 있는 자를 제외한 모든 무슬림에게 적용되고 있다. 단식에는 라마단의 30일 동안의 낮 시간이 모두 해당된다. 흰 실과 까만 실이 분간될 정도로 날이 밝았을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그들은 음식을 일체 금하고 이성 접촉도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슬림들은 단식을 함으로써 자기의 육체를 단련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이해하여 좀 더 자비롭게 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단식기간은 그해에 저지른 모든 죄를 보상하는 기간이다. 엄격하게 규제된 단식의 고통이 끝난 후 완전히 축제기분이 된다. 축제는 3일간 계속되며, 사람들은 새 옷을 입고 친구들과 축복의 인사말을 교환한다. 축제를 위해 특별요리가 만들어지고 각 가정마다 특별한 장식도 한다.
다섯째는 이슬람 이전부터 아랍인의 전통이었던 매우 중요한 관습인 메카로의 순례다. 무슬림은 모두 일생에 한 번은 예언자가 최초의 계시를 받은 메카로 거룩한 여행을 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카바 신전에의 순례는 하지(Haji)라고 불리며 1년 중 어느 계절에 해도 뜻 있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정규적인 순례는 1년에 1회 라마단의 2개월 후인 ‘두울하지’의 달에 행해진다. 모든 지역에서 무수한 신자가 메카로 모여듦으로써 이슬람에서만 있을 수 있는 동포애가 싹튼다. 같은 복장을 한 순례자들은 신 앞에서는 빈부귀천, 인종에 관계없이 평등하다는 것을 새삼 상기하게 된다. 또 순례 때문에 여러 지역에서 온 다양한 온갖 사람들과 접촉하게 됨으로써 문화교류가 이루어졌고, 이것이 이슬람제국을 통일하고 강화하는 데에 큰 힘이 되었다. 메카에 들어간 순례자들은 곧장 카바 신전에 가서 그 ‘검은 돌’에 입을 맞춘다. 그 후 신을 찬양하는 각종 기도문을 외우면서 신전 주위를 일곱 번 돈다.
이 다섯 가지 실천규범 이외에도 무슬림 사회를 보전하기 위해 신앙적 성전을 치르는 지하드라는 사회적 교리가 있는데 혹자는 그것을 포함하여 여섯 가지 실천규범이 있다고도 한다. 이상과 같은 육신오행과 더불어 이슬람에서는 예배드릴 때나 일상생활을 할 때 반드시 신을 생각하라고 가르친다. 이것이 바로 이슬람의 이흐산(덕행)의 기본이다. 항시 신과 일체가 될 때 이슬람 신앙이 완성된다고 보는 것이다.
4. 샤리아(shari’ah, 이슬람 성법)
믿음, 예배, 희사, 단식, 순례로 이루어진 이슬람의 오행은 무슬림의 행동을 규제하는 복잡한 이슬람 법 즉, 샤리아의 근간이 된다. 모든 사람들이 따라야 할 밝은 길이라는 의미를 가진 샤리아의 법체계는 이슬람 사회의 가장 특징적인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법과 종교가 확연히 분리되어 있는 서구사회와는 달리 이슬람 사회는 이 둘을 하나의 규범체계 속에 넣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인간과 신의 관계와 동일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 이 샤리아를 형성하는 근원은 『쿠란』, 예언자의 언행인 『하디스』, 사회 전체를 대표하는 신학자들의 의견일치인 이즈마, 과거의 결정에 기초가 되는 원리에 입각한 유추인 끼야스 등 네 가지이다.
무슬림 지도자들에 의해 형성되어온 샤리아의 개념은 교리, 신앙실천, 이슬람 법학 등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 특히 종교적 의미에서는 신이 정한 바 이슬람교도로 하여금 현세에서 그의 종교적 확신을 실천하도록 하는 행위의 길과 내세에서 신의 사람으로 누리게 될 길을 규정한 것이다. 그래서 샤리아는 무슬림의 일상생활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된다. 초기 이슬람에서는 법률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을 구별하지 않았다. 성전 『쿠란』에도, 그 보조 자료인 『하디스』에도 그 양면이 혼재되어 있다. 이슬람에서 이 양자를 구분하기 시작한 것은 이슬람 발생 이후 약 1세기 정도 경과한 뒤였다. 학문이라는 의미를 가진 일므(ilm)라는 말이 신학을 의미하는 말이 되고, 이해를 의미하는 피그(figh)라는 말이 신학에 기초한 법률이라는 말로서 사용되었다. 정치와 통치관계의 규칙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까눈(Qanun)을 종교적 계시법과 구별한 것은 훨씬 이후의 일이다.
샤리아의 내용은 신앙생활은 물론 이슬람 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과 도덕, 예의, 행동의 지침과 인간 상호간의 권리, 의무 등 모든 계율을 망라하고 있다. 이같이 전 영역에 걸쳐 있는 이슬람 법체계는 크게 신앙예식법과 사회생활법으로 대별될 수 있다. 신앙예식법에는 주로 육신이 이에 해당되고, 사회생활법에는 민사와 형사에 속하는 이슬람 사회의 독특한 실체법과 절차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샤리아의 사회생활법을 세분하면 사회기본법, 대인법, 재산관계법, 형법, 절차법 등이다.
첫째로, 기본법은 일종의 헌법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통치자, 정부, 성전에 관한 사항이다. 통치자에 대해서 우선 살펴보면, 통치자를 일반적으로 이맘이라고 하는데 그 원뜻은 이슬람 신앙생활 및 의식에 있어서 모범적인 지도자라는 뜻이다. 그리고 국가의 최고 지도자를 대이맘이라 하고, 교회의식을 인도하는 자를 소이맘이라고 하였다. 또한 아미르라는 통치형태가 있는데 이는 규모가 작은 국가를 다스리는 통치형태에서의 토후를 말한다. 그 밖에도 오스만 터키의 지도자들을 술탄(Sultan)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둘째 내용은 대인법으로서 혼인과 이혼, 친자와 양자 부양 등에 관한 규범이다. 샤리아에 의하면 혼인 전에 당사자가 만나는 것은 금지된다. 결혼 시에는 남자측이 결혼 지참금을 전달해야 한다. 혼인에는 남녀가 지켜야 할 여러 조건이 필요한데 조건상 결격사유가 있을 때에는 이혼이 가능하다. 그리고 한쪽이 배교한 경우, 부부 중 한쪽이 의무를 이행치 않는 경우에도 이혼이 가능하다. 다음은 양육의 문제인데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양육시기에 따라 부모의 책임이 달라지는 특색이 있다.
셋째는 재산에 관한 법이다. 샤리아는 재산법을 물권법과 채권법으로 분류하지 않고 각 사례별로 다루고 있다. 즉 매매, 임대차, 담보물권, 선매권, 희사, 보증, 차용 등의 사례들에 관한 사항을 각각이 규정하고 있다.
넷째는 형법이다. 샤리아에서 형법은 알라가 규정한 일체의 금지된 행위를 범한 범법자들에게 형벌을 가하는 규범을 말한다. 형벌의 근거와 방식을 기준으로 끼사스(Quisas), 후두드(Hudud), 타에지르(Taezir) 등으로 구분하고 있으며, 죄목으로는 살인, 상해, 배교, 간통죄, 무고죄, 절도죄, 음주죄, 분열조장죄 등으로 구분한다.
다섯째는 절차법이다. 샤리아의 절차법은 실체법상의 권리와 의무를 실현시키기 위한 절차를 정하고 있다. 이 법에 의하면 법관, 심판관, 무프티(Mufti)는 이슬람 법학자 중에서 학식과 덕망이 있는 인물을 선임하고, 이들에게 샤리아의 해석에 관련한 여러 이설에 대해 유권적인 해석을 내리게 한다. 그리고 이 법에는 소송절차, 화해, 증거와 증인, 상소, 소송대리인 등에 관한 것을 규정하고 있다.
5. 이슬람의 종파
이슬람은 아주 간결하고 단일한 교의를 가지고 있지만 정치체제와 결합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 관계로 분열이 없을 수는 없다. 이슬람은 신앙뿐 아니라 사회·정치제도까지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이슬람 역사에서 중요한 종파들은 항시 정치적인 측면에서 출발하나 나중에는 하나의 종파로서 정착한 것이 많다. 그러나 다른 종교에 비해서는 분열된 종파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1) 하와이르즈(Khawàrij)파
우선 하와리즈파다. 최초의 이슬람 종파이다. 하와리즈란 움마를 떠난 사람들 혹은 분리된 자들이란 뜻이다. 할리파 우스만이 살해당한 이후 예언자의 사위인 알리와 시리아의 총독인 무아위야 간의 투쟁이 있었다. 그 와중에 초기에는 알리를 지지하였으나 양자가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하자 성스러운 움마의 주도권을 협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알리의 진영을 박차고 나간 데서 비롯된다. 이들의 기본교리는, 중대한 과오나 죄를 범하고도 참회하지 않는 집단이나 개인은 무슬림이 아니며, 신앙에 의로운 행위가 수반되지 않는 단순한 신앙고백으로는 무슬림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의 이러한 이상적 실천론은 현실에서 과격성을 띠게 되었다. 그리고 만민평등이라는 아랍부족주의의 원칙이 종교에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신앙상으로 고결하다면 아랍인이 아닌 흑인노예까지도 할리파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 파는 시아파의 혈통주의적 계승원칙과 주류파의 방관자적 태도를 모두 반대하였다. 그들은 당시 우마이야조의 할리파들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기성세력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 특히 비아랍계 무슬림인 마왈리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이 파는 지나치게 이상적이라서 현실에 정착하지 못하고 결국 9, 10세기에는 그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그 이후 반정부세력의 주도권은 시아파로 넘어가게 된다. 처음으로 교리문제를 제기한 이들은 누가 가장 훌륭한 무슬림인가 하는 논쟁을 일으키다가 결국 여러 파로 갈라져 결국 세력이 위축되었다. 그 중 가장 온건한 한 분파인 이바디야파가 오늘날 북아프리카, 오만 및 잔비르 등에 잔존하고 있다. 이들은 다른 하와리즈와 비슷하나 사람을 죽이는 것은 전시에만 한정한다는 온건한 주장을 펴고 있다는 점이 다른 하와리즈파와 다른 점이다.
2) 시아(Shia)파
다음은 시아파이다. 시아파는 이슬람의 주류인 순니파와 더불어 현재 잔존하고 있는 중요한 종파이다. 이들은 하와리즈파가 알리 진영을 떠난 것과는 달리 그 진영에 끝까지 남아 알리를 지지한 파이다. 알리를 따르는 무리라는 뜻인 시아 알리(Shia Alli)라는 데서 유래하였다. 그런데, 알리가 죽은 후에도 알리 세력의 근거지였던 쿠파의 무슬림들은 알리의 후손이 할리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680년에 알리의 아들이자 예언자의 외손자인 후세인이 그 지지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서 쿠파로 가던 도중 무아위야군에게 잡혀 살해당했다. 후세인이 살해되자 시아파는 그를 순교자로 규정하고 그를 살해한 우마이야조를 잔악무도한 정권이라면서 반정부투쟁을 전개한다. 이 후세인의 죽음은 무슬림에게 수난극의 주제가 되었으며 특히 아프가니스탄, 인도 등지의 순니파 대중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어 현재에도 타지야(taziah)라는 수난극을 지금도 행하기도 한다. 이 수난극에서 무슬림들은 정서적인 열광 속에서 자기 가슴을 치거나 자기 몸에 상처를 내는 등으로 후세인의 죽음을 재현하려고 한다.
예언자의 후손만이 할리파의 자격이 있다고 본 시아파는 교조의 후계자들인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을 할리파직의 찬탈자로 규정함으로써 주류파에 대한 노골적인 도전을 하였다. 그러나 초기에는 신학, 법학, 종교의식 등 모든 면에서 순니파와 구별되는 점이 별로 없었다. 즉 주류파의 신앙에 대한 도전이라기보다 오히려 움마 지배층에 대한 도전의 성격이 강했다. 이렇게 계속된 정치적 도전은 후세인의 죽음을 계기로 묵타르(Muktar)가 후세인의 배다른 동생 하나피야(Hanafiya)의 이름으로 684년 쿠파에서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그 성격이 많이 변하게 된다. 이 반란에 아랍인의 차별정책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던 마왈리들이 대거 참여하였고, 이를 계기로 시아의 정치운동은 정치적 불만이 많은 비아랍 무슬림들과 연계되었던 것이다. 당시 묵타르의 참모로 활동한 마왈리 출신 은 시아파에 비아랍적인 성향을 띠게 한 비아랍계 무슬림의 대표자였다. 그들은 시아 신앙에 자기들이 믿고 있던 마니교의 구세주 신앙을 도입시켜 죽은 하나피야가 죽지 않고 단지 잠시 숨어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구세주가 되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이 나중에 시아파의 주류인 열두 이맘파의 사상에 흘러가 ‘숨은 이맘 사상’으로 정착되었다.
이들은 주류파에서 중요시하며 경직되어간 이즈마의 개념을 거절하고 어느 시대나 신으로부터 자기의 종을 올바르게 인도할 책임을 맡는 완벽한 이맘이 존재한다고 믿게 되었다. 따라서 그 이맘은 신에 의해 임명된 통치자이며, 동시에 그들의 스승이었다. 즉 그는 예언자의 대권을 이어받았으므로 죄를 범할 수도 없고 과오를 저지를 수도 없는 무오성을 지닌다고 하였다. 순니파의 할리파와 비교하면 시아의 이맘은 순니 할리파가 가진 세속권에다가 울라마를 능가하는 율법의 절대적 해석권까지 물려받은 셈이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시아파의 공통적인 요소다. 따라서 알리와 예언자의 딸 파티마의 후손에게만 이맘 계승권이 있는 시아파에서는 그 자손 가운데 누구를 이맘으로 보는가에 따라 여러 분파가 나타난다. 그 중 다섯 이맘파, 일곱 이맘파, 열두 이맘파가 두드러진 분파이다.
우선 시아파의 주류인 열두 이맘파는 시아파의 열두 번째 이맘인 무함마드 알 문타자르(al-Muntazar)가 자손을 남기지 않고 어려서 사마라시의 성원(聖院) 속으로 사라지자 그를 숨은 이맘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 숨은 이맘은 언젠가 마흐디(Mahdi, 구세주)가 되어 이 세상에 돌아와 진정한 이슬람 세상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 파는 1502년 이란의 사파위 조에 의해 국교로 공인받았다. 이 조의 국왕 샤(Shah)는 숨은 이맘의 대리인으로서 역할을 하였고, 신학자들은 그의 대변인으로서 신자들과의 중개역을 맡았다.
다음으로 후세인의 손자 자이드(Zaid)를 이맘으로 믿는 다섯 이맘파가 있다. 이 파는 숨은 이맘을 믿지도 않으며, 자기 신앙을 숨길 수 있는 타끼야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리고 시아파 가운데서는 가장 순니파에 가까운 파다. 이와는 달리 극단적인 과격성을 지니고 있는 일곱 이맘파가 있다. 이들은 여섯 번째 이맘인 자파르의 아들 이스마일을 일곱 번째 이맘으로 믿기 때문에 이스마일파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파에는 중·근동의 여러 전통적 신앙요소들이 유입되어 있기 때문에 같은 시아인 열두 이맘파에서는 이단시한다. 그리고 그들의 활동은 비공개적이라서 교리의 발전과정과 활동들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들은 『쿠란』 구절 속에 깊은 뜻이 숨어 있다고 보고 참된 이슬람 신앙은 숨은 진리에서 찾는 데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파의 비밀 선교 요원들의 대 활약으로 10세기 초에 바그다드의 순니 할리파를 위협하는 대제국, 즉 파티마 조를 북아프리카에 세웠다. 그리고 이 파에 관련된 일군이 카스피 해 남부에 있는 험악한 산악지역인 알라무트(Alamut)를 근거지로 하여 또 새로운 종단을 조직하였다. 이 종단이 바로 서구에 잘 알려진 암살단(Assassin)파로서 반대파 지도자들을 무조건 암살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들의 근거지는 1260년 몽고군의 침입에 의해 비록 함락되었지만 오늘날에도 아가칸(Agakhan)이라고 불리는 이맘의 지도 아래 동아프리카, 인도, 파키스탄 등에 추종자를 갖고 있다. 이 밖에도 이븐 누사리가 9세기 말에 창단한 기독교적 색채가 짙은 누사이르(Musair)파, 파티마 조 7대 할리파인 알 하킴(1021년 사망)을 바로 신의 화신으로 본 드루즈파, 앞서 설명한 카르마트파 등이 시아파에서 분파된 것이다.
3) 순니파
우리가 이슬람이라고 말할 경우 그것은 통상 정통 주류파의 순니파를 말한다. 따라서 순니란 종파로서의 의미보다도 타 종파 특히 시아파와 구별할 때만 사용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무슬림의 90% 정도가 순니이기 때문에 그들을 별도 명칭으로 부를 필요가 없다. 그러나 시아파가 이란을 배경으로 하여 순니파가 인정할 수 없는 교리 해석을 견지하기 때문에 양자를 구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순니라는 명칭은 아랍어 ‘순나(Sunnah)의 백성’ 즉 전승주의자들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간단히 주류신앙의 형성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초기에 형성된 하와리지와 시아파가 움마의 주도권과 관련해서 분리해나갔으나 대부분 신도들은 정치적으로는 중립적 태도를 취하였다. 이 중립적인 태도를 교리로 표출한 파가 무르지이(murji’i)파다. 이 파가 이슬람 주류신앙의 형성에 모태가 된다. 그들은 무슬림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심이라며, 과오를 범했다고 해서 비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 후 하와리즈와 시아파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투쟁하기 위해 무르지이파를 개혁한 것이 무타질라파였다. 이 파는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종파라기보다 『쿠란』을 그리스 철학으로 해설하고자 하는 일군의 신학파라고 보는 것이 맞다. 그래서 순니와 시아 신앙 모두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무타질라파의 도전에 대해 전승주의적 입장에 있었던 주류파 신앙은 그들의 신조를 체계화하고 구체화함으로써 대항해 나갔다. 그 대표적 학자가 바로 알 아샤리였다. 그는 원래 무타질라파로 출발했으나 나중에 주류파 신학을 체계화시킨 순니 신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는 신의 용모에 대한 어떤 물음도 허용하지 않으면서도 운명의 정설에 대해서는 주류파의 이전의 신앙상의 강경입장을 다소 완화시켰다. 또한 중죄를 범했다고 해서 비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며, 참회할 경우 그 용서는 신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이 알 아샤리의 이론체계는 셀주크 조의 명 재상인 니잠 알 물크의 힘에 의해 순니의 이슬람 신학이론으로 확립되었다. 니잠 알 물크는 바그다드에 니잠미아 학원을 설립하여 아샤리 신학체계를 널리 보급하였다. 이 학원에서 아샤리 신학체계를 발전시켜 순니 신학을 완전히 확립한 인물은 바로 이슬람의 최대 신학자 알 가잘리다. 그는 라는 저서를 통해 20여 개의 관련항목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철학자의 논리가 부당함을 밝혔다. 알 가잘리는 이슬람의 신비주의인 수피즘을 주류파의 신앙에 자리 잡게 함으로써 중세 이슬람의 형성에 큰 공헌을 하였다. 이 수피즘은 교리 이해를 통한 지식 위주의 신앙에 반대하여 어떻게 하면 신에 가까이 갈 수 있는가를 따지는 종교 체험적 신앙을 강조한다. 이들은 기독교, 불교 등에서 나타난 금욕적 신앙생활을 받아들여 신지학적, 범신적 단계를 거쳐 12세기경에 제 조류의 융합으로 일어났다. 그 후 13세기에는 수도원이 발전하여 종단으로 정착하였다. 그는 그리스 철학, 이슬람 신학, 수피즘을 종합하여 순니 신학의 기반을 마련한 셈이 되었다.
4) 관련 종교들
19세기에 들어서자 시아파에서 반 성직운동이 나타났다. 이 운동을 주도한 사이드 알리 무함마드라는 이가 자기 스스로를 ‘신에 이르는 문’이라는 뜻인 ‘밥(Bab)’이라고 하고 메시아로 자처하였다. 그러나 1806년 그는 시아파의 울라마들의 격렬한 반발에 부딪혀 결국 처형당하였다. 그가 처형당한 후 그의 두 제자인 소브헤 아잘과 바하 알라가 각각 새로운 종교단체를 설립하였다. 특히 바하 알라는 인도주의적 평화주의와 보편주의를 표방하고 이슬람과는 별개의 독자적인 종교를 만들었다. 이 바하이 신앙은 20세기 초 북아메리카 등에서 상당한 추종자를 얻었다.
그리고 19세기 후반에 인도 펀잡 지방에서도 글람 아미드라는 인물이 신의 예언자로 자처하였다. 그들은 초기에는 기독교 선교사들에 대항하여 이슬람을 옹호하였으나 나중에는 이슬람의 근대주의자 아미드 칸이 주장한 “펜에 의한 지하드”의 교의를 받아들여 이슬람을 중심으로 모든 종교를 종합화하려 하였다. 그는 자신이 예언자의 현현일 뿐 아니라 예수의 재림이며, 힌두교의 크리슈나라고 하였다. 그러나 1914년 이 아미드파는 계승문제로 분열이 일어났다. 그 주류파는 현재 파키스탄에서 자유로운 활동을 하고 있으며, 서방과 아프리카 선교활동에도 적극적이다. 이후 미국 블랙 무슬림운동은 이슬람의 평등주의와 사회정의의 원리를 받아들여 백인에 대항한 사회저항운동이었다. 여기에 추종자들은 미국을 흑인 주권주와 백인 주권주로 분리할 것을 요구하며, 이슬람교의 엄격한 사회관습의 일부를 생활화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운동을 지도한 실리야 무함마드는 영감 받은 예언자임을 자칭하고, 현대 무함마드의 부활 교리를 억눌린자의 재생의 교리로 해석했다. 그리고 이 운동의 또 다른 한 사람이 1965년에 암살된 말콤 엑스였다. 그 밖에도 이슬람교와 힌두교를 종합한 시크교가 있다.
*윤승용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