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별 보기
   daesoon.org  
대순155년(2025) 9월

이전호 다음호

 

도전님 훈시 전경 속 이야기 종단소식 이슈터치 대순광장 고전에세이 분당제생병원 자원봉사자 모집 특별기획 생각이 있는 풍경 대순캠프 대순문예공모전 알립니다

전경 속 이야기 : 칠월칠석(七月七夕)과 칠성경(七星經)

칠월칠석(七月七夕)과 칠성경(七星經)

 

 

교무부 이정만

 


종도들에게 칠성경을 외우게 하시고 도주께서 대원사에 들어가셔서 백일 도수를 마치셨도다. 마치신 날이 바로 신유년(1921) 七월 칠석날이라, 그때에야 종도들이 칠성경을 외운 뜻을 깨달으니라. 그들을 보시고 도주께서 “이곳이 바로 상제께서 천지신명을 심판한 곳이니라. 아직 응기하여 있는 것을 내가 풀었노라”고 말씀하셨도다. (교운 2장 21절)

 

  교운 2장 21절은 도주님께서 신유(1921)년에 모악산 대원사에서 행하신 백일(음력 3월 26일~7월 7일) 도수를 보신 일에 관하여 기록한 성구이다. 여기서 종도들은 도주님께서 공부에 들어가시기 전에 자신들에게 칠성경을 외우게 한 연유를 모르다가 공부가 칠월칠석날에 마친 것을 알고서 그 까닭을 알게 되었다고 나타난다. 이를 통해 칠월칠석과 칠성경이 어떤 관련성이 있음을 짐작하게 된다. 이에 우리나라 전통문화 속에서 칠월칠석과 칠성경의 연관성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이 구절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칠월칠석의 유래와 풍속


  칠월칠석은 음력 7월 7일로 견우(牽牛)와 직녀(織女)가 까치와 까마귀들이 놓은 오작교(烏鵲橋)에서 1년에 한 번씩 만난다는 전설이 있는 날이다. 이 이야기는 중국 한대(漢代)의 괴담(怪談)을 기록한 『재해기(齋諧記)』에 처음 나타나는데, 평안남도 남포시 덕흥리의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 우리나라에는 삼국 시대 이래로 널리 유포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01 이 전설은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견우성(牽牛星)과 직녀성(織女星)이 가까워지는 별자리의 이동 현상을 보고 생겨났다. 이 두 별은 태양 황도상(黃道上)의 운행 때문에 가을 초저녁에는 서쪽 하늘에 보이고, 겨울에는 태양과 함께 낮에 떠 있으며, 봄 초저녁에는 동쪽 하늘에 나타나고, 칠석날이 되면 두 별은 매우 가까워진 상태로 하늘의 천장 부근, 즉 우리의 머리 바로 위에 머물게 되므로 마치 일 년에 한 번씩 만나는 것처럼 보인다.  
  견우ㆍ직녀 이야기에서 유래된 칠석날을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로부터 길일(吉日)로 여겨 명절로 삼고 여러 세시풍속 행사를 하였다.02 이날의 풍속으로는 기교나 재주가 있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걸교(乞巧)03가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부녀자들이 길쌈을 더 잘할 수 있도록 직녀성에 비는 일이었다. 이는 직녀를 하늘에서 바느질을 관장하는 신격(神格)으로 여기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04  
  민간에서는 칠석날에 직녀성 외에도 북두칠성에 기원하는 칠성고사(七星告祀) 풍습도 있었다. 주로 부녀자들이 장독대에 상을 차리고 이 고사를 지냈는데, 자신보다는 가족들의 수명장수와 평안을 기원했다. 고사의 명칭은 칠석고사(七夕告祀), 칠석제(七夕祭), 칠성제(七星祭) 등으로도 불렸다.05 


 ▲ 서천저산길쌈놀이, 출처: 나만의 문화유산 해설사


 
  칠석날의 칠성고사와 같이 북두칠성에 사람의 수명장수를 기원하는 우리나라의 칠성 신앙은 고인돌에 새겨진 북두칠성 모양을 통해 선사 시대로부터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06 이러한 칠성 신앙은 삼국 시대에 불교와 도교가 들어오면서 도ㆍ불교적 성수 신앙의 요소가 혼합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이후 고려를 거쳐 조선 시대로 면면히 전승되었다.07 조선 후기에는 민간에서 매우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다.08 조선 후기에 접어들어 민간에서 행해지던 칠성 신앙은 불교에서 수용하면서 사찰에서도 이루어지게 된다.09 이러한 변화로 인해 사찰에서는 칠성신을 독립적으로 모신 칠성각(七星閣)을 건립하게 되는데, 이는 17세기 후반부터 시작되었으며 19세기 초기부터는 전국 사찰에 유행처럼 번졌다.10
  이 같은 불교 칠성 신앙의 역사로 보았을 때, 사찰에서 칠석날에 칠성 기도를 드리는 풍습이 보편화된 시기는 칠성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장소인 칠성각이 전국적으로 건립되던 19세기 경일 것으로 추측된다. 이 무렵에 시작된 칠석날의 풍습은 조선 후기에 칠석날이면 나라 곳곳의 사찰들이 재를 올리느라 밤을 낮인 양 밝혔다고 전해지는 이야기를 통해 추측해 본다면, 당시에 그 행사 규모가 상당히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11 이렇듯 조선 후기에는 민간이나 불교 사찰 모두에서 칠석날의 칠성 신앙과 관련한 풍속이 활발히 전개되었다고 보인다.

 

 

칠석날에 외운 칠성경


  칠성경은 본래 도교의 경전으로 북두칠성이 인간의 길흉화복을 맡았다고 하여, 제사를 지내거나 개인적인 소원을 빌 때 사용되었다.12 칠성경은 우리나라에서 고려 중엽쯤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당시에 국태민안을 기원하기 위해 재초(齋醮)13를 지냈는데, 그 가운데 북두칠성에 대한 제사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전기에는 재초를 주관하던 소격서에서 관리를 선발할 때 보는 시험 과목 가운데 칠성경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임진왜란(1592년)이 끝난 후에는 소격서가 완전히 폐지되는 등 국가적으로 도교가 큰 탄압을 받아 위축된 상황 속에서도, 칠성경은 민간에서 면면히 전승되었다.14
  도교의 경전류를 모은 『정통도장(正統道藏)』에 실린 칠성경 중에서 조선 후기에 가장 널리 유통되어 사용된 것은 『태상현령북두본명연생진경(太上玄靈北斗本命延生眞經)』15(이하 『연생진경』)이다. 『연생진경』은 원래는 도교 경전이었지만 도교와 불교가 습합 과정을 거치던 시기인 조선 후기에는 도교와 불교의 칠성 신앙을 혼용한 형태로 사찰에서 많이 제작되어 사용되었다.16
  칠성경이 사찰의 칠성 기도에 사용되었다는 점은 1864년 삼각산 도선암에서 간행된 『연생진경』 발문(跋文)17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 발문에는 기존의 칠성 기도에 사용하던 『연명경』18이 낡아서 완성대사(翫性大師)가 수명장수를 기원하며 천우에게 새로운 연명경판을 새길 것을 부탁하여 도선암의 『연생진경』이 만들어진 것이라는 내용이 있다. 이를 통해 1864년 이전과 이후에 『연생진경』이 도선암의 칠성 기도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칠성경은 당시 칠성 기도에 많이 사용되었으므로 사람들이 칠성 기도를 많이 드리던 칠석날에도 역시 많이 외웠을 것으로 보인다.
  상제님께서 1908년경 천지공사를 보실 때 활용하셨던 칠성경은 『연생진경』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중국 도교의 『도장』에 기록된 『연생진경』의 북두주(北斗呪)와 상제님에게서 도주님을 통해 계승된 대순진리회의 ‘칠성주(七星呪)’ 주문을 비교해 보면, 크게 3가지 차이점이 나타나고 나머지는 모두 같을 정도로 주문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 차이점 3가지를 보면, 첫째는 『연생진경』 북두주의 첫머리에 없는 ‘칠성여래 대제군’이 칠성주에는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문곡(文曲)’의 위치가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연생진경』의 북두주에서는 ‘거문(巨門) 녹존(祿存) 문곡(文曲) 염정(廉貞)’의 순서로 되어 있는데 칠성주에서는 상제님의 공사가 반영되어 ‘문곡 거문 녹존 염정’의 순서로 바뀌어져 있다. 셋째는 여섯 군데에서의 한자가 바뀌었다는 점이다.19 도주님께서 종도들에게 외우게 하셨던 칠성경(칠성주)20은 상제님께서 만드신 칠성경이 봉서(封書)를 통해 전해진 주문일 것이다.


▲ 덕흥리 고분벽화 앞칸남벽 견우직녀도 부분, 출처: 동북아역사재단



  칠월칠석과 칠성경의 관련성을 살펴보기 위해서 이상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견우ㆍ직녀의 전설에서 유래한 칠월칠석은 우리나라의 큰 명절로 여러 세시풍속 행사가 있었다. 그 풍속 중에는 북두칠성에 가족의 수명장수를 기원하는 칠성 기도가 있었다. 북두칠성에 소원을 비는 우리의 칠성 신앙의 풍습은 선사 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후 삼국 시대와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 시대까지 민간에서 면면히 전승되었고, 조선 후기에는 민간에서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행해졌다. 민간에서 성행하던 칠성 신앙은 조선 후기에 불교에서도 수용함으로써 사찰에서도 이루어지게 된다. 민간과 사찰에서 칠성 신앙의 풍속은 연중 이루어졌지만, 특히 길한 숫자 7이 중복된 날인 칠석날에 많이 행해졌다.
  조선 후기에 많이 유통되어 사용되었던 칠성경은 도교의 칠성경인 『연생진경』이었다. 칠석날에 칠성 기도를 드릴 때는 이 칠성경을 외웠으므로 칠석날은 칠성경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전국 사찰에서 칠석날 행사가 큰 규모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칠석날에 칠성경을 외우며 칠성신에게 기도를 드리는 풍습은 당시 널리 행해졌을 것이므로 도주님의 종도들 또한 이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도주님께서 백일 도수에 들어가시기 전에 칠성경(칠성주)을 외우게 했을 때는 종도들이 그 연유를 몰랐지만, 칠성경을 외우던 풍습이 있는 칠석날에 공부를 마치자, 그 뜻을 깨닫게 된 것이다.
  도주님께서 종도들에게 칠성경(칠성주)을 외우게 하셨던 이유는 무엇일까? 상제님께서 후천 선경 세상을 여시기 위해 신명계의 체계와 질서를 새롭게 정하신 공사를 도주님께서 50년 동안의 공부를 통해 풀어나가셨는데, 백일 도수는 50년 공부 중 하나이다. 칠성경은 선천에서 사람들의 수명 복록과 관련이 있었으며 상제님께서는 후천의 도수에 맞추어 기존의 칠성경을 새롭게 변경하여 만드셨다. 그렇다면 도주님께서 종도들로 하여금 칠성경(칠성주)을 외우도록 하신 일은 상제님께서 장차 천하 창생들이 후천의 복록과 수명을 누릴 수 있도록 보신 공사를 실현시키기 위한 백일 도수의 일환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01 김일권, 『고구려 별자리와 신화』 (경기: 사계절출판사, 2008), pp.69-70 참고; 김철웅, 「고려시대의 칠석(七夕)과 칠석제(七夕祭)」, 『민속학연구』 32 (2013), pp.83-87 참고.
02 칠월칠석에 대한 풍습은 《대순회보》 73호 (2007)에 실린 「아름다운 세시풍속: 칠월 칠석(七月七夕)」 참고.
03 걸(乞)은 ‘빌다’, 교(巧)는 ‘솜씨나 재주가 있다’라는 뜻이다. 걸교는 지방에 따라 걸짐, 걸교전(乞巧奠)이라고도 한다. 걸교의 제를 지내는 일은 중국 한나라 때부터 행해졌으며, 당나라 때 주변 민족들에 전파되었다. 하지만 우리나라 칠석 풍속은 중국의 것과는 다르다고 한다.
04 김영태, 『옛마을 세시ㆍ절기 풍속』 (경기: 한국학술정보, 2009), p.314 참고.
05 국립민속박물관, 「칠성고사(七星告祀)」, 『한국민속대백과사전: 가정신앙Ⅱ』 (2011), pp.684-689 참고.
06 김일권, 「별자리형 바위구멍에 대한 고찰」, 『고문화』 51 (1998), pp.123-156 참고; 우장문, 「고인돌을 만든 사람들의 사유에 관한 연구: 덮개돌의 굼을 중심으로」, 『선사와 고대』 29 (2008), pp.159-177 참고; 김만태, 「성수신앙의 일환으로서 북두칠성의 신앙적 화현 양상」, 『東方學志』 159 (2012), pp.134-152 참고.
07 김만태, 앞의 글, pp.151-166 참고. 
08 정진희, 『치성광여래 신앙과 도상으로 살펴본 한반도 점성 신앙』 (경기: 양사재, 2021), pp.156-157 참고; 김낙필, 「조선후기 민간도교의 윤리사상」, 『한국문화』 12 (1991), p.431 참고.
09 김용태, 「조선후기 불교와 민간신앙의 공존 양상: 산신ㆍ칠성 신앙의 불교화」, 『불교학연구』 61 (2019), p.98 참고.
10 김현준, 『사찰, 그 속에 깃든 의미』(서울: 교보문고, 1991), p.315 참고.
11 불교조계종 홈페이지, 「칠월 칠석의 유래와 불교적 의미」 참고.
http://jogyebuddhism.or.kr/bbs/board.php?bo_table=yuljong_qna&wr_id=1896
12 박상규, 「대순 신앙의 주문 변화: 고증을 중심으로」, 『대순사상논총』 44 (2023), p.10 참고; 차선근, 「상생의 길: 칠성주의 ‘문곡’과 ‘육순’」, 《대순회보》 237호 (2020), p.71 참고.
13 도사(道士)가 당사자를 대신하여 재앙을 멀리하고 복을 구하기 위해 제신(諸神)에게 빌어 주는 도교 제례 의식.
14 김낙필, 앞의 글, pp.430-431 참고.
15 노자를 의미하는 태상노군이 동한 원년(東漢 元年, 155년) 1월 7일에 촉나라 땅에 강림하여 장천사(張天師)에게 일러준 내용을 받아 기록하여 경전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정진희, 「조선후기 칠성신앙의 도불습합(道佛習合) 연구」, 『정신문화연구』 42 (2019), p.92 참고.
16 정진희, 앞의 책, pp.157-158 참고.
17 책의 끝에 본문 내용의 대강(大綱)이나 간행 경위에 관한 사항을 간략하게 적은 글.
18 당시에는 도교의 『연생진경』을 불교 경전인 『연명경』으로 부르는 오류가 종종 있었는데, 이는 당시의 도ㆍ불 습합 현상 때문에 생긴 것이다. 정진희, 앞의 글, pp.90-91 참고.
19 북두주의 上朝金闕,  巨門, 高上玉皇, 大周天界, 六淳, 急急에서 굵은 글씨의 한자가 각각 上照金闕, 巨文, 高尙玉皇, 大周天際, 六旬, 喼喼의 굵은 글씨의 한자로 바뀌었다. 차선근, 앞의 글, pp.72-74 참고.
20 교운 2장 42절에 무극도 당시에 ‘칠성주’가 주문으로 쓰였다는 기록이 나타나는데, ‘칠성주’라는 주문의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관련글 더보기 인쇄

Copyright (C) 2009 DAESOONJINRIHOE All Rights Reserved.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강천로 882 대순진리회 교무부 tel : 031-887-9301 mail : gyomubu@daesoon.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