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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주님의 공부 행적을 찾아서Ⅰ
1917~1922년
교무부 손영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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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면도 정당리 느락골 우일재 터 (2018년 10월 17일 촬영)
도주님께서는 50년 동안 끊임없이 공부를 이어 나가셨는데 때로는 이 행적들이 궁금할 때가 있다. 교운 2장에는 도주님께서 여러 장소에서 행하셨던 공부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행하셨던 공부들이 어느 곳에서 얼마 동안 머무시며 이루어졌는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이러한 궁금증을 풀어 보기 위해 도주님의 공부 행적을 세 시기로 나누어 간략하게 알아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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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주님의 50년 공부는 봉천명[1909(기유)년 4월 28일에 만주 봉천으로 가심]하신 때부터이지만 이글에서는 귀국 이후의 시기부터 시작점으로 하였다. 먼저 1917년 4월 귀국 이후부터 시작하여 1922년까지, 그다음으로 1923년에서 1920년대 말 무극도 활동 시기까지, 마지막으로는 1941년에서 1958년 화천하실 때까지 도주님의 행적을 구분하였다. 이번 글에서는 1917년 도주님께서 고국으로 귀국하신 이후부터 1922년 통사동 재실에서 하신 공부까지의 행적을 살펴보려고 한다. 먼저 첫 시기를 1917년부터 1922년으로 정한 이유는 도주님의 행적이 상제님의 공사 행적과 깊은 연관성을 가진 것으로 생각되어서이다. 이 시기 도주님의 공부는 크게 두 가지 행적이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종통 계승과 관련된 행적이고, 다른 하나는 상제님의 공사와의 연관성 속에서 행해졌던 공부들이다. 당시 도주님께서는 안면도 우일재, 모악산 대원사, 정읍 마동, 통사동 재실, 부안 변산 등에서 공부하셨다.
.jpg) ▲ 안면도 정당리 느락골 우일재 터 (2018년 10월 17일 촬영)
종통 계승의 행적
도주님께서는 만주 봉천에서 입산 공부하신 지 9년이 되는 1917(정사)년 2월 10일에 상제님의 삼계 대순하신 진리에 감오득도하시고 종통계승의 계시를 받으셨다.01 이후 계속해서 공부하시던 중 상제님으로부터 “왜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느냐. 태인에 가서 나를 찾으라.”02라는 명에 따라 고국으로 귀국하셨다. 이미 화천하신 상제님께서 도주님께 ‘나를 찾으라’고 하신 의미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은 도주님의 행적 속에 잘 나타나 있다. 1917년 4월 도주님께서는 계시에 따라 만주에서 배를 타고 고국으로 귀국하셨다. 오시는 도중에 풍랑을 만나 충청도 서산 태안에 하선하셨는데, 여러 곳을 둘러보신 후 안면도 창기리에 이르러셨다. 도주님의 가족들도 귀국하여 창기리에 머무셨던 것으로 확인된다. 도주님께서는 안면도 이곳에 거처를 마련하신 후 정당리에 공부처를 정하셨는데, 그곳이 ‘우일재(宇一齋)’이다. 도주님께서는 우일재에서 1917(정사)년 5~6월경부터 1918(무오)년 9월까지 대략 1년여 동안 머무시면서 공부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우일재는 창기리에서 5km 떨어진 정당리 느락골에 있었다. 느락골은 양쪽 산등성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부채꼴 모양인데 중간쯤 평지에 우일재가 있었다. 지금은 논으로 바뀌어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우일재에서 공부하실 때 안면도 사람 30여 명이 도주님을 진심으로 좇았다. 그리고 이들 중 이정률이 도주님을 지극 정성으로 모시며 따랐다.03 도주님의 안면도 행적에 대하여 도전님께서는 “안면도는 편안할 안(安), 졸 면(眠) 즉 잠시 쉬어가시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농사지을 때도 잠시 쉬었다가 일하지 않습니까. 잠깐 쉬고 전라도 태인(泰仁)으로 가야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꼭 필요한 과정으로, 안면도는 반드시 경유를 하셔야 되는 곳이었습니다.”04라고 말씀하셨다. 우일재에서 1년여를 공부하시던 도주님께서는 1918년 9월경에 안면도를 떠나 김제 원평으로 가셨다. 그곳으로 가신 이유는 “김제 원평에 가라.”는 상제님의 계시에 따른 것이었다. 우일재에서 상제님께 치성을 올리신 후 도주님께서는 김제 원평으로 가셨다. 원평에 도착하신 도주님께서는 원평과 그 일대를 둘러보시며 황새마을에도 들르셨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원평과 가까웠던 황새마을은 이전에는 태인군에 속해 있었다. 도주님께서는 원평을 거쳐 구릿골 동곡 약방을 비롯하여 상제님의 공사가 있었던 여러 곳을 둘러보셨다. 도주님께서의 이러한 행보에 대하여 『전경』에는 “상제님께서 9년 동안 이룩하신 공사를 밟으신 것이고 ‘김제 원평에 가라’는 명에 좇은 것이라”05라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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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악산 대원사 (2018년 11월 9일 촬영)
원평 주변에는 상제님의 공사 행적이 깃든 곳들이 있다. 가깝게는 상제님과 차경석 종도가 처음 만났던 용암리 수침이 있고 그 위쪽으로 동곡 약방과 상제님을 따랐던 여러 종도의 집이 있다. 그리고 동곡 약방이 있는 구릿골 동쪽으로 약 1km 걸어가면 모악산 금산사가 나타난다. 원평에서 남쪽으로 가면 태인이고 남서쪽으로 가면 상제님의 강세지인 객망리 마을이다. 당시 원평에는 상제님의 종도였던 이치복이 1917년부터 그곳에서 종도들 중 유일하게 포교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당시 상제님의 가족과도 왕래하고 있었다.06 구릿골 동곡 약방을 둘러보신 도주님께서는 이해(1918) 10월 모악산 대원사로 걸음을 옮기셨다. 이곳에 1919년 1월 초순까지 약 3개월 정도 머무르셨다. 대원사는 상제님께서 1901(신축)년 5월부터 49일 동안 공부하시며 천지대도를 여신 곳이다. 도주님께서 방문하셨을 당시 상제님의 공부에 수발을 들었던 승려 박금곡(朴錦谷, ?~1937. 11.)이 생존해 있을 때였다.07 이곳 대원사에서 도주님께서는 동행했던 종도들에게 “개벽 후 후천 5만 년의 도수를 나는 펴고 너는 득도하니 그 아니 좋을시구.”08라는 말씀을 남기셨다. 1919년 1월 15일(정월 보름) 도주님께서는 상제님의 종도였던 이치복의 안내를 받으시며 정읍 우순면 마동으로 가셔서 상제님의 가족을 만나셨다. 정읍 마동의 거처는 1908(무신)년에 상제님께서 누이동생인 선돌부인에게 마련해 주신 곳이다.09 이때 선돌부인은 을미(1895년)생인 도주님을 반겨 맞으시며 “상제님께서 재세 시에 늘 을미생이 정월 보름에 찾을 것이로다.”10라고 하신 상제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그리고 상제님으로부터 받았던 봉서를 도주님께 전하고 당부하신 일이 잘 이행되었다며 안도하였다. 봉서는 삼계대권을 가지고 천지공사를 행하셨던 상제님의 유지(遺旨)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종통 계승의 객관성을 보여주는 실질적인 증거이기도 하다. 도주님께서는 봉서를 받으신 후 그달 말까지 보름 동안 그곳에 머무셨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태인에 가서 나를 찾으라.”라는 상제님의 계시는 도주님의 종통계승과 연관된 뜻이 담긴 말씀으로 짐작된다. 귀국 후 안면도 우일재에서 공부하시던 도주님께서는 상제님으로부터 “김제 원평에 가라.”라는 명을 다시 받으시고 이후 상제님의 종도였던 이치복과 함께 정읍 마동을 찾아가셨다. 도주님의 이와 같은 행적은 상제님께서 9년 동안 이룩하신 공사를 밟으신 것이었으며 상제님께서 준비해 놓으셨던 봉서를 수령하시기 위한 행적이었다. 또한 ‘계시와 봉서’로 이어진 행적은 도주님의 종통계승을 확증하는 여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도전님께서는 “우리 도의 연원(淵源)은 구천상제님의 계시와 봉서를 받으셔서 종통을 세우신 도주님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왔습니다.”11라고 하시며 ‘계시와 봉서’가 종통계승과 직접 연관된 일임을 말씀하신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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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읍 마동 김기부의 집 (2003년 10월 23일 촬영)
천지공사와의 연관성 속에서 행하신 공부
1919년 2월이 되는 날에 도주님께서는 정읍 마동에서 원평 황새마을에 친계 가족들이 거처하고 있는 집으로 가셨다. 황새마을은 원평 중심가와 1km 떨어진 곳으로 원평을 생활권으로 하는 지역이었다. 황새마을에는 도주님께서 친계 가족들이 거처할 수 있도록 미리 마련하신 집이 있었다. 이 집은 도주님께서 대원사에 머무실 때(1918년 10월경) 이정률에게 구하도록 한 곳이었다. 1919년 이후 황새마을은 포덕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고 이에 따라 도인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도주님께서는 황새마을에서 3km 떨어진 통사동에 있는 전의 이씨(全義李氏) 문중 재실에 공부처를 마련하셨다. 이 재실은 『전경』에 통사동 재실로 기록되어 있다. 통사동 재실은 좌우의 산이 병풍처럼 감싸 안고 있는 장소로 인적이 드문 한적한 곳이었다.12 1919년부터 1922년까지 이곳에서 도수에 따라 공부하시며 때때로 종도들과 함께 치성을 모셨다. 이 시기의 공부로는 둔궤를 모시고 행하신 공부와 상제님의 성골을 모시고 행하셨던 공부가 있다. 그리고 도주님께서는 이곳에서 공부하시며 모악산 금산사를 찾아가시거나 부안 변산 굴바위와 모악산 대원사에 가셔서 공부하기도 하셨다. 당시 도주님의 공부는 상제님의 공사 행적과 중첩되어 있어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음을 추측하게 한다. 1919년 7월 15일(보름)에 도주님께서는 통사동 재실에서 공부하시다가 금산사에 다녀오셨다. 이때 도주님께서는 종도들에게 “오늘이 백종일(百種日)이니 인간 백종의 허물을 청산하는 날이니라. 인숙무죄(人孰無罪)요 개과하면 족하니라.”13라는 말씀을 하셨다. 금산사는 큰 솥 위에 미륵금불을 모신 미륵전이 있는 곳이다. 상제님께서는 이 미륵금불을 양산도(兩山道)라고 이름하셨다.14 양산도는 솥 위에 조성된 미륵불의 모습에서 증산(甑山)이신 상제님과 정산(鼎山)이신 도주님을 비유하여 양산(兩山)의 진리[도]라 말한 것이다.15 도주님의 금산사 행보는 상제님의 공사 행적을 밟으신 것이다. 같은 해(1919) 9월은 도주님께서 둔궤를 통사동 재실에 모시고 공부를 시작하신 때이다. 이 둔궤는 상제님께서 동곡 약방을 설치하실 때 공사를 보셨던 성물이다. 둔궤를 모셔 오게 된 과정을 살펴보면 도주님께서 통사동 재실에서 공부하실 때 하루는 선돌부인이 찾아와 “구릿골 약방에 비치하셨던 둔궤가 천지도수의 조화둔궤라, 하루바삐 그것을 찾도록 함이 어떠하겠나이까.”16라고 도주님께 아뢰었다. 도주님께서는 둔궤가 보천교 본부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시고 1919년 9월 4일에 통사동 재실로 둔궤를 모셔 오셨다.17 원래 이 궤는 상제님께서 동곡 약방을 설치하실 때 만들어져 공사가 행해졌다. 도주님께서는 이것을 통사동 재실에 모신 후 공부에 진력하셨다. 공부하시다가 하루는 종도들에게 “오도자 금불문 고불문지도야(吾道者今不聞古不聞之道也)라 믿고 닦기가 어려우니라.”18 하시고 무극대운의 해원상생 대도의 진리를 설법하셨다. 이해(1919)에 통사동 재실에서 공부하시다가 부안 변산으로 가셔서 공부하셨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0월~11월경으로 추측된다. 도주님께서 공부하셨던 장소는 부안 변산 굴바위였다. 이때 공부하시면서 따르고자 하는 신도들에게 상제님의 대순하신 진리를 설법하셨는데 그 수가 이백 명이 넘었다고 한다.19 부안 변산은 상제님께서 각 처에 정기를 뽑아 합치는 공사를 보실 때, 순창 회문산의 혈수와 대비되는 24혈이 변산에 있어 해왕(海王)의 도수에 응한다고 하시며 “회문산은 산군(山君), 변산은 해왕(海王)이니라.”20라고 말씀하셨던 곳이다. 또 변산에 있는 개암사에 가셔서 개벽과 관련하여 공사를 행하실 때 “이제 청수 한 동이에 성냥 한 갑을 넣으면 천지가 수국(水國)이 될지니라. 개벽이란 이렇게 쉬우니 그리 알지어다. 만일 이것을 때가 이르기 전에 쓰면 재해만 끼칠 뿐이니 그렇게 믿고 기다려라.”21라는 말씀을 하셨다. 이러한 변산에서 도주님께서 공부하시며 설법으로 상제님의 대순하신 진리를 밝혀주셨다는 것은 상제님 공사와의 연속성을 생각해 보게 한다. 변산에서 공부를 마치고 통사동 재실로 돌아오신 도주님께서는 불면 불식하며 공부를 이어 나가셨다. 1920(경신)년 2월 17일 공부하시는 중에 천둥소리가 크게 울리면서 잠겨 있던 둔궤가 저절로 열렸다. 둔궤 속에는 호피 한 장과 반쯤 핀 국화 한 송이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으며 양피(羊血) 스물넉 점이 궤에 찍혀 있었고 오강록(烏江錄) 팔문둔갑(八門遁甲) 설문(舌門)이란 글자가 궤에 쓰여 있었다.22 상제님께서 약방을 설치하신 후 행하셨던 공사의 내용23이 궤 안에 그대로 담겨 있었다. 그 후 둔궤를 모시고 쉼 없이 공부를 이어 나가시던 도주님께서는 함안 반구정(伴鷗亭)에서 공부하실 때 둔궤를 그곳에 옮기셨다. 1921(신유)년 3월 하순 통사동 재실에서 공부하시던 도주님께서는 백일 도수의 공부를 위해 대원사에 가셨다. 7월 7일에 백일 도수를 마치시고 이곳에서 상제님께서 행하신 49일 공부에 관하여 종도들에게 “이곳이 바로 상제께서 천지신명을 심판한 곳이니라. 아직 응기하여 있는 것을 내가 풀었노라.”24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상제님의 49일 공부가 천지신명을 심판하신 공사였음을 처음으로 밝혀주신 것이다. 그리고 “아직 응기하여 있는 것을 내가 풀었노라.”라는 말씀에서 상제님의 49일 공부와 도주님의 백일 도수가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도주님의 공부가 상제님의 공사와 연속되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같은 해(1921) 9월 5일 도주님께서는 통사동 재실로 상제님의 성골을 모셔 오셨다. 상제님의 성골은 동곡 약방 뒷산(구성산) 산자락(장탯날)에 초빈으로 되어 있었다. 상제님께서는 화천하시며 “죽은 후에는 묶지도 말고 널 속에 그대로 넣어두는 것이 옳으니라.”25라고 말씀을 남기셨다. 이렇게 초빈되어 있던 상제님의 성골을 통사동 재실에 모셔 올 수 있었다. 이때 갑자기 뇌성이 일고 번개가 번쩍였다. 성골을 모신 지 15일 되는 날이 상제님께서 강세하신 9월 19일로 도주님께서는 종도들과 함께 통사동 재실에서 치성을 올리셨다. 이날 재실에 모여 치성을 올리신 후에 도주님께서 “시시묵송 공산리 야야한청 잠실중 분명조화 성공일 요순우왕 일체동(時時黙誦空山裡 夜夜閑聽潛室中 分明造化成功日 堯舜禹王一切同)이라.”26라고 말씀하셨다. 도주님께서는 성골을 모시고 매일 밤낮으로 치성을 올리시며 도수에 따른 공부를 이어 나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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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사동 재실, <대순회보> 59호, 타블로이드판 11면
1922(임술)년 통사동 재실에서 공부하시던 도주님께서는 어느 날 종도들에게 “임술년 섣달에 이르면 납월 도수에 북현무 도수(北玄武度數)가 닥쳐서 금전이 아니면 일이 풀리지 않을 것이라.”27라는 말씀을 하셨다. 이해 12월 30일 새벽 2시에 문공신이 통사동 재실에 들어와 난동을 부리고 상제님의 성골과 금품을 훔쳐 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납월 도수와 북현무 도수가 닥치며 도주님께서 상제님의 성골을 모시고 행하셨던 공부는 마치게 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도주님의 공부 행적은 상제님의 공사와 직간접적으로 중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양산도의 이치가 담긴 모악산 금산사 미륵전에 방문, 동곡 약방이 설치될 때 비치하였던 둔궤를 모시고 행하신 공부, 해왕의 도수가 응해있던 변산에서 하신 공부, 상제님께서 천지대도를 여셨던 대원사에서 하신 백일 공부, 통사동 재실에서 상제님의 성골을 모시고 행하신 공부 등의 도주님 행적에서 상제님의 공사와 관련이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지금까지 도주님께서 1917(정사)년 4월 귀국하신 이후부터 1922(임술)년까지 공부하신 행적을 간략히 정리해 보았다. 이 시기에 도주님께서 행하셨던 공부 행적은 종통 계승과의 연관성 그리고 상제님께서 9년 동안 이룩하신 천지 공사와의 연속성 속에서 보게 되면 그 의미를 좀 더 폭넓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음 글에는 1923년에서 1920년대 말 무극도 활동 시기까지 무극도 창도 전후의 공부 행적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한다.
01 『대순진리회요람』, p.12 참조. 02 교운 2장 8절. 03 교운 2장 9절 참조. 04 「도전님 훈시」 (1989. 5. 8). 05 교운 2장 10절. 06 신상미. 「부안 사람 이치복」, 《대순회보》 265호 (2023), p.45 참조. 07 ‘행록 2장 13절’에서 “그 후 어느 날 금곡이 상제를 정중하게 시좌하더니 상제께 저의 일을 말씀하여 주시기를 청원하였도다. 상제께서 가라사대 ‘그대는 전생이 월광대사(月光大師)인바 그 후신으로서 대원사에 오게 되었느니라. 그대가 할 일은 이 절을 중수하는 것이고 내가 그대의 수명을 연장시켜 주리니 九十세가 넘어서 입적하리라’ 하시니라.”라고 되어 있고, ‘박용철, 「대순논단: 대원사(大院寺) 공부의 이해에 나타난 종통(宗統)의 천부성(天賦性)에 대한 고찰」, 《대순회보》 68호 (2007)’에서 박금곡이 ‘1937년 11월’에 입적한 것으로 표기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도주님께서 대원사로 찾아가셨을 때 박금곡이 살아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08 교운 2장 11절. 09 이정만, 「전경 지명 답사기: 정읍 마동」, 《대순회보》 208호 (2018), p.89 참조. 10 교운 2장 13절. 11 《대순회보》 5호, 「도전님 훈시: 종통은 도의 생명」. 12 연구소, 「지명 이야기: 통사동 재실」, 《대순회보》 59호 (1998), p.11 참조. 13 교운 2장 15절. 14 예시 15절 참조. 15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로 오라’고 하심은 미륵불과 솥의 양산(兩山)의 진리(眞理)를 밝혀 주신 것이다.” (『대순지침』, p.14.)라고 하신 도전님 말씀에서 양산도의 이치를 알 수 있다. 16 교운 2장 14절. 17 교운 2장 17절 참조. 18 교운 2장 18절. 19 교운 2장 19절 참조. 20 공사 3장 6절. 21 공사 2장 27절. 22 교운 2장 20절 참조. 23 공사 2장 9절, “… 궤 안에 ‘팔문둔갑(八門遁甲)’이라 쓰고 그 글자 위에 ‘설문(舌門)’ 두 자를 낙인하신 후 그 글자 주위에는 二十四점을 홍색으로 찍고 약방에 통감(通鑑)ㆍ서전(書傳) 각 한 질씩 비치하였도다.” 24 교운 2장 21절. 25 행록 5장 35절. 26 교운 2장 23절: 기척 없는 산속에서 때때로 소리 없이 읊조리며 깊고 깊은 밤 고요한 방에서 한가로이 듣는다. 분명히 조화로 일을 이루는 날에 요ㆍ순ㆍ우왕의 도와 하나가 되리라. 27 교운 2장 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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