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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단 역사 : 도주님의 공부 행적을 찾아서Ⅱ

도주님의 공부 행적을 찾아서Ⅱ

1923~1920년대 말

 

 

교무부 손영배

 

▲ 함안 반구정 (2013년 4월 촬영)



 「도주님의 공부 행적을 찾아서Ⅰ」에서는 1917(정사)년 4월 귀국하신 이후부터 1922(임술)년까지 도주님께서 하신 공부가 상제님과의 연관성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살펴보았다. 이번 글에서는 1923년부터 1920년대 말 무극도 활동 시기까지 도주님께서 밟아오신 길을 찾아가 보려고 한다. 이 기간에 도주님의 행적에서 핵심은 ‘무극도 창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도주님의 공부를 1925년 무극도 창도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보았다. 이 시기에 도주님의 행적은 경남 함안 회문리, 밀양 종남산 세천동, 청도 유천, 청도 적천사, 밀양 종남산 영성정, 함안 반구정, 전북 구태인 도창현, 김제 통사동 재실, 충남 태안 안면도, 서울 도염동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무극도 창도 이전의 공부 행적


  1923(계해)년 1월에 경남 함안 회문리로 가신 도주님께서는 밀양과 청도를 오가시며, 2년여 동안 둔 도수ㆍ단 도수ㆍ폐백 도수 등을 행하셨다. 공부하신 장소는 둔 도수를 보신 경남 밀양 세천동 김병문(金炳文)의 집, 단 도수를 보신 경남 청도 유천 박동락(朴東洛)의 집과 적천사 도솔암 그리고 폐백 도수를 보신 밀양 종남산 영성정과 함안 반구정 등이다. 이 시기에 도주님께서 쉼 없이 행해오신 공부 행적을 차례차례 좇아가 보려 한다.


▲ 경남 밀양 종남산의 세천마을 입구 표지석(좌)과 김병문의 집(우) (2013년 4월 촬영)



  1923(계해)년 1월에 고향인 함안 회문리에 잠시 머무신 후 도주님께서는 경남 밀양 종남산 세천동에 있는 김병문의 집에 가셨다. 밀양 종남산은 회문리 북동쪽으로 약 30km 떨어져 있는 곳으로 부북면, 상남면, 초동면을 끼고 있다. 종남산 남쪽으로 상남면 세천마을이 있는데 이곳에 종도 김병문이 살고 있었다. 회문리를 떠나오신 도주님께서는 이곳에서 공부하셨는데 그 공부가 둔 도수였다. 이곳에서 둔 도수를 1923년과 1924년 두 번 행하셨다. 먼저 1923년의 공부는 1월부터 3월까지 3개월 동안 이루어졌다. 이때 공부하시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많은 종이에 글을 쓰셨는데 종이가 강한 바람에도 날리지 않았다고 전해온다. 당시 도주님을 시봉한 사람은 배문걸(1905~2004)01이었다고 한다.
  1923년 3월까지 둔 도수를 보신 후에 도주님께서는 4월에 함안 회문리로 되돌아가셔서 6월까지 머무신 것으로 보인다. 그곳에서 포교 조직을 새롭게 정비하시며 주선원(周旋元)과 주선원보(周旋元補)란 두 직책02을 마련하셨다. 두 직책은 도주님의 가르침을 전하며 도의 업무 전반을 담당하는 역할이었다. 그리고 상제님의 화천 치성을 모시기 전날인 6월 23일, 도주님께서는 회문리에 모였던 종도들에게 “금년이 이재신원(利在新元) 계해년이라”고 말씀을 하신 후 「전교(傳敎)」를 내리셨다.03 「전교」의 대략적인 내용은 역사 속에서 성군과 성인의 도가 일어나고 쇠퇴한 천지 도수의 흐름을 밝혀주신 것이다.
  도주님께서는 6월 상제님의 화천 치성을 마치신 후에 청도 유천의 박동락의 집으로 향하신 것 같다. 청도 유천은 회문리에서 북동쪽으로 백 리(40km) 정도 떨어진 곳이다. 박동락의 집에서 9월까지 공부를 행하셨는데 이를 단 도수라고 한다. 이때 행하신 공부법이 진인 보두법(眞人步斗法)이었다.04 이 보두법은 단이나 평편한 땅에 북두칠성의 별자리를 바닥에 그려놓고 우보(禹步)로 걸음을 밟아 나가며 보두주(步斗呪)를 읽는 수행법이다. 공사 3장 39절을 보면 “我得長生飛太淸… 一氣混沌看我形”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구절이 보두주이다, 자세한 의미를 알 수는 없지만 상제님께서는 도교에서 사용하는 보두주의 순서와는 반대로 써놓으셨다.05
  이해(1923) 9월에 청도 박동락의 집에서 단 도수를 마치신 도주님께서는 이곳에서 약 10km 떨어진 적천사 도솔암으로 가셨다. 도솔암 칠성각 뒤편에 돌단을 쌓고 그 위에서 공부하셨는데 이 공부도 단 도수라고 한다. 이 공부는 10월부터 다음 해(1924) 2월 중순까지 4개월 동안 행해졌다. 공부하실 때 돌단에 24방위를 정하고 그 방위에 천지신명을 응기케 하시며 단 도수를 행하셨다. 공부 시간은 저녁 7시부터 다음 날 아침 6시까지였다. 낮 동안에는 공부 때 사용하실 글을 적으셨다.06


▲ 도솔암 옛 칠성각 자리에 위치한 삼성각 (2014년 종단역사사진전 2차)



  연속된 두 번의 단 도수는 차이가 있다. 진인 보두법으로 행하신 단 도수는 북두칠성과 관련된 공부이지만 도솔암에서 행하신 단 도수는 24방위를 담당하는 신장인 육정육갑신과 관련된 공부였다. 우레와 바람을 일으키고 귀신을 물리치며 24방위를 관장하는 육정육갑신장은 칼로 무장한 신장으로서 북두칠성의 통솔을 받는다고 한다. 이러한 점에서 청도에서 이루어진 두 번의 단 도수는 그 내용과 공부 방법에서 큰 차이를 보이면서도 두 공부가 연결되어 있다는 연속성 속에서 바라볼 수 있을 듯싶다.07
  1924(갑자)년 2월 중순쯤 적천사에서 공부를 마치신 도주님께서는 다시 밀양 세천 김병문의 집으로 가셨다. 그곳에서 다시 둔 도수를 행하셨다. 공부를 행하신 시기는 2월 중순에서 4월경으로 추정된다. 1923년에 이어 이곳에서 공부를 또 하신 것이다. 첫 번째 공부와 마찬가지로 두 번째 둔 도수 때에도 많은 종이에 글을 쓰시며 공부하신 것으로 여겨진다.
  1924년 4월 도주님께서는 전북 구태인 도창현으로 가셨다. 이곳에서 도장 터를 마련하시고 치성을 올리셨다. 이 치성은 도장 건립을 위해 마련된 도장 터에서 행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교운 2장 29절에는 “치성을 끝내고 칼을 자루에서 뽑아 들고 육정신을 외우시면서 보두법을 행하고 종남산 세천에서 공부할 때 써놓았던 여러 글 종이를 불사르셨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구절에서 칼을 들고 육정신을 외우신 것은  적천사 도솔암의 단 도수 때 등장했던 24방위를 담당하는 육정육갑신과의 관련성으로 짐작되고, 보두법은 청도 유천에서의 진인 보두법과 동일한 수행법이며 종남산 세천에서 써놓았던 글 종이를 불사르셨다는 것은 둔 도수와의 연관성을 생각나게 한다. 이러한 점에서 태인 도장 치성 후에 도주님께서 행하셨던 의식은 이들 공부들이 무극도 창도와 관련이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후 도주님께서는 5월에 경남 밀양 종남산으로 가셨다. 종남산을 올라 영성정(靈聖亭)에 이르러 그곳에서 공부하셨는데 그 공부를 폐백 도수(幣帛度數)라 하셨다. 영성정에서 5월부터 9월까지 5개월 동안 공부하셨으며 공부 시간은 밤 10시부터 다음 날 아침 6시까지였다. 그리고 경남 함안 반구정(伴鷗亭)으로 옮겨 공부를 이어서 행하시고 10월에 마치셨다.08 원래 폐백은 공경의 마음을 담아 주고받는 예물을 뜻하는 것으로 이 폐백을 전할 때는 예법 절차에 따라서 행해졌다. 이렇듯 도주님께서 하신 폐백 도수는 폐백의 뜻에 비추어 보면 절차에 따라 상제님께 예로서 폐백을 올리는 공부라고 여겨진다. 함안 반구정에서 폐백 도수를 마치신 도주님께서는 1924(갑자)년 11월에 전북 구태인 도창현에 가셨다.
1925(을축)년 봄 도주님께서는 태인 도장에 계시다가 전북 부안 변산으로 가셨다. 그곳에서 육정(六丁)신장을 불러 응하게 하며 공부하셨다. 육정신은 육갑신(六甲神)과 함께 우레와 바람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일까? 도주님께서 변산에서 공부하실 때 변산에 뇌성벽력이 크게 일고 산천이 진동하는 듯했다고 전해온다.09

 

 

무극도 창도와 쉼 없이 이어진 공부


  1925년 4월 도주님께서는 전북 구태인 도창현에 도장을 짓고 무극도(无極道)를 창도하셨다. 무극도를 창도하시며 강증산 성사를 영대에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상제(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上帝)’로 봉안하셨다. 이것은 강증산 성사께서 구천상제이심을 밝혀 놓으신 것이다. 그리고 상제님의 대순하신 진리를 온 세상에 선포하기 위해 종지(宗旨)를 밝히시고 수도인들의 수행을 위해 신조(信條) 및 목적(目的)을 정하셨다. 현재 종단에서는 도주님께서 정해주신 ‘종지ㆍ신조ㆍ목적’을 따르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무극도 창도는 우리 종단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다.
  무극도장에는 상제님을 봉안한 영전(靈殿)과 천지신명을 봉안한 성전(聖殿) 그리고 그 밖에 부속 건물이 있었다.10 영전의 3층에 있는 영대에는 상제님을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상제’로 모시고 있었다. 그리고 성전의 4층 도솔궁에는 옥황상제님, 3층에는 칠성대제, 2층에는 그 외의 천지신명들이 봉안되어 있었다. 이렇게 상제님과 천지신명을 봉안한 것은 도주님의 공부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도주님께서는 상제님의 성골을 모시고 공부하셨고 그 후 둔 도수, 단 도수, 폐백 도수를 행하신 것은 무극도 도장에 상제님과 천지신명을 봉안하시기 위해 정성을 들이신 공부로 이해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 1936년 『정읍군지(井邑郡誌)』에 수록된 무극도장 전경 (왼쪽 큰 건물이 도솔궁, 오른쪽 큰 건물이 영대)


 
   도주님께서는 도인들이 상제님의 진리를 수행할 수 있도록 봉축주(奉祝呪)ㆍ진법주(眞法呪) 등 여러 주문을 쓰셨다.11 도주님께서 무극도를 창도하시며 도인들의 수행 의례로 주문을 정해주신 것은 도수에 의한 공부를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도인들의 수도를 격려하기 위해 각도문(覺道文)과 포유문(布喩文)을 반포하셨다. 각도문 끝부분의 내용을 보면 “오직 우리는 가르침을 받드는 후학으로 대도를 빛내고, 대덕을 계승하며, 대업을 넓힘으로써 청화 오만 년 용화선경에 모두 함께 오른다면 천만다행일 것이다.”12라고 하시며 후천 5만 년 용화세계에 함께 가자는 뜻을 표현하셨다.
  도수에 따른 도주님의 공부는 무극도 창도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당시 행하신 공부를 살펴보면 1925년 봄에 부안 변산에서의 공부, 1926년 봄에 담뱃대 도수, 1926년 여름 서울 도염동에서의 공부, 1927년 9월에 통사동 재실에서의 주(籌)를 놓는 공부 등이 있다.
  1926(병인)년 봄 도주님께서는 담뱃대 도수를 보셨다. 이후에 담뱃대의 담배통과 물부리에 크고 작은 태극을 그려 넣어 여러 개의 담뱃대를 만드셨다. 그런 다음 여러 종도에게 직위에 따라 등급별로 나누어 주셨으며 일반 신도들에게는 제각기 담배통과 물부리 사이에 끼워져 있는 설대 위에 태극을 그려 넣도록 하셨다.13 이해 여름에 도주님께서 태인과 서울 도염동에 오르내리시며 서울에서 공부하셨는데 당시 공부의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14
  1927(정묘)년 9월 태인 도장에 머무시던 도주님께서 배문걸을 데리고 통사동 재실로 가셔서 그곳에서 주(籌)를 놓는 공부를 하셨다. 9월부터 석 달 동안 행하시고 그 이후에도 계속하셨다고 한다. 주는 산가지[숫가지]를 놓고 셈을 하는 방식이다. 공부하실 때 주판 재질은 오동나무였고, 산가지 재료는 대나무였다. 도주님께서 주 놓는 공부하실 때 산가지 놓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으며 산가지가 이리저리 옮겨질 때마다 불빛이 번쩍였다고 한다.15
  도주님께서는 토지를 해원하고 제민하기 위해 안면도와 원산도에서 제민 사업을 도우시며 안면도 창기리의 재실 홍일우(洪一宇)에서 공부하셨다.16 1925년 진업단 창설로부터 시작된 이 공부는 제민 사업과 함께 진행하신 것으로 이전의 공부와 다른 모습이다. 특히 홍일우 공부와 함께 진행된 제민 사업은 우리 종단의 3대 중요사업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안면도와 원산도에서 추진된 제민 사업은 갯벌을 농토와 염전으로 개발하는 일이었다. 안면도의 창기방조제와 참새골방조제 두 곳과 원산도의 신촌방조제와 사창방조제 두 곳에서 사업이 진행되었다. 이 사업에 도주님께서는 헌금과 구태인 일대의 개간지에서 생산된 곡물 300석을 투입하셨다. 이 네 곳의 사업 중 두 곳(참새골방조제와 신촌방조제)은 1928년도에 완공하였고 나머지 두 곳(창기방조제와 사창방조제)은 풍랑이 심해 사업을 완료하지 못하였다.17 하지만 제민 사업으로 안면도에는 많은 농토가 만들어지고 원산도에는 수천 평의 염전도 생겨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었다.
  도주님께서 안면도 홍일우에서 공부하실 때 있었던 일화가 전해온다. 도주님께서는 이정률의 아들에게 큰 칼을 주시며 “너의 마음속으로 숨겨 보라”18고 말씀하셨는데, 그는 대밭에 숨길까 생각하는 순간 칼이 없어지는 이적이 일어났다. 이튿날 창기리 촌장이 도주님을 요술쟁이로 신고하여 경관을 이끌고 와 증거로 칼을 찾다가 못 찾고 돌아갔다. 얼마 후 창기리 촌장은 도주님을 찾아와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며 죽어가는 자기 아들을 살려주시길 애원하였다. 도주님께서는 촌장 아들의 방을 들여다보시고 돌아가셨는데 다음날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가슴에 손가락을 대셨다. 그러자 죽은 아들이 깨어나 “나는 한명(限命)이 되어 가니 누구도 원망하지 말라”19라고 가족에게 말을 남겼는데, 도주님께서 손가락을 떼시자 병자가 숨을 거두었다.
  이상으로 1923년부터 1920년대 말 무극도 활동 시기까지의 도주님 행적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1925년 4월 무극도를 창도하시고 종지ㆍ신조ㆍ목적을 선포하신 것은 수도인들에게 상제님의 대순하신 진리를 바르게 수행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이었다. 특히 무극도 창도 이전에 행하셨던 둔 도수와 단 도수가 1924년 4월 태인 도창현에서 올린 치성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또 이 공부들에 등장하는 천지신명들이 무극도를 창도할 때 상제님과 함께 봉안한20 점을 생각하면 도주님께서 행하신 도수가 무극도 창도와 모두 이어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01 배문걸은 함안군 칠서면 구포리 사람으로 도주님의 큰 숙부인 조용의의 맏사위였다. 본명은 배문준(裵文準)으로 당시 영남의 유학자로도 알려져 있었다.
02 1925년경 작성된 『무극대도교개황』에서 무극도 조직 체계를 보면 주선원(周旋元), 주선원보(周旋元補)를 중심으로 찰리(察理), 순동(巡動), 종리(從理) 등의 순으로 되어 있었다. 주선원은 도무 전반을 관리하였고, 주선원보는 주선원을 보좌하거나 대신하여 일을 처리하였다.
03 교운 2장 26절.
04 교운 2장 27절.
05 차선근ㆍ박용철, 「기문둔갑, 그리고 강증산의 종교적 세계」, 『종교연구』 77 (2017), pp.205~206 참조.
06 교운 2장 28절 참조.
07 곽춘근, 「상생의 길: 폐백 도수에 대한 고찰」, 《대순회보》 191호 (2017), p.111 참조.
08 교운 2장 30절 참조.
09 교운 2장 34절 참조.
10 무라야마 지쥰(村山智順), 『조선의 유사종교』, 최길성ㆍ장상언 옮김, (대구: 계명대학교출판부, 1991), p.274 참조.
11 교운 2장 42절 참조.
12 교운 2장 33절 참조.
13 교운 2장 38절.
14 교운 2장 39절 참조.
15 교운 2장 40절 참조.
16 교운 2장 35절 참조.
17 교운 2장 35절; 사업이 완료되지 않은 곳은 일본 마상 회사(馬上會社)가 사업을 이어서 성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18 교운 2장 36절.
19 교운 2장 37절.
20 이종훈, 백종택, 장근환, 윤재근, 「논단: 교운 2장 연구」, 《대순회보》 15 (1989),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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