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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단 역사 : 도주님의 공부 행적을 찾아서Ⅲ

도주님의 공부 행적을 찾아서Ⅲ

1930년대 후반~1958년

 

 

교무부 손영배

 

▲ 함안 회문리 회문마을 전경 (원 안이 도주님 생가와 회룡재 터, 2019년 4월 6일 촬영)



  「도주님의 공부 행적을 찾아서 Ⅱ」에서는 1923년부터 1920년대 말 무극도 활동 시기까지 도주님께서 행하신 도수에 의한 공부를 살펴보았다. 이번 글에서는 종교 활동을 중단하신 때부터 1958(무술)년 화천하신 그날까지 공부 행적을 찾아가 보려고 한다. 이 시기에 도주님의  주요 행적은 ‘부산 도본부 설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1948년 부산 도본부 설치 이전과 이후에 있었던 도주님의 행적을 세 기간으로 나누어 보았다. 첫째로 1930년대 후반에서 1948년, 둘째로 1948년부터 1956년, 셋째로 1956년부터 1958년 화천하실 때까지이다. 이때 도주님의 공부 행적은 경남 함안 회문리 회룡재, 부산 보수동 도본부와 산정, 부산 동래 마하사, 충북 괴산군 만동묘, 경남 합천 해인사, 충남 공주 동학사, 경남 하동 쌍계사, 감천도장 정사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1. 무극도 활동 중단과 부활

  무극도 창도 이후 포덕 활동은 일제 강점기라는 사회적 여건 때문에 순탄치 않았다. 당시 도주님께서는 1941년에 들어 도수에 따라 종교 활동을 일시 중단하시고 함안 회문리로 가셔서 회룡재(廻龍齋)에서 쉼 없이 공부를 이어 가셨다. 그리고 1945년 광복과 함께 종교 활동을 부활하셨는데 이 시기의 도주님 행적을 찾아가 보려고 한다.
  무극도는 당시 일본에 의해 종교가 아닌 종교와 유사한 단체(유사종교단체)로 규정되었다.01 일본이 종교를 이렇게 분류한 것은 조선의 종교단체를 통제하고 관리하기 위함이었다.




  1930년대에 들어 일제는 만주사변(1931~1932)과 중일전쟁(1937~1945)을 일으키면서 조선을 일본의 안정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강력한 식민 통치를 하였다. 그리고 한반도를 전쟁에 필요한 인적ㆍ물적 지원을 원활하게 할 수 있는 병참기지로 삼으려 했다. 일본의 대륙침략을 위한 식민 정책으로 한반도 내 종교들은 종교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
  조선총독부에서는 유사종교로 분류한 민족종교 교단들을 해체할 목적으로 집회와 활동을 금지하도록 조처했다. 이에 따라 유사종교단체로 분류한 교단들에 대하여 일본 경찰은 극심한 탄압을 가하였다.02 1936년 6월부터 일제는 유사종교단체의 활동에 대한 금지 조치03를 하였는데 그 영향으로 무극도도 포교, 집회 금지 조치 등의 탄압과 감시를 받았다.04
  무극도는 1936년까지 공개적으로 종교 활동을 하였지만, 일제의 탄압에 따라 1936년 비공개적인 종교 활동으로 전환하여 1941년까지 지속하였다. 1941년 사실상 사상 검증에 해당하는 치안유지법05이 개정 발효되자 신도들을 보호하고자 비밀리에 진행하였던 종교 활동까지 멈추어야 했다.06 이러한 사회적 여건으로 도주님께서는 종도들을 모으시고 인덕 도수와 잠복 도수라고 말씀하시며 “그대들은 포덕하여 제민하였도다. 각자는 집으로 돌아가서 부모 처자를 공양하되 찾을 날을 기다리라”라고 하신 후 종교 활동을 중단하셨다.07
  이후 도주님께서는 고향인 회문리에 가셔서 마련된 회룡재에서 말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공부를 계속 이어 가셨다. 혹독한 추위가 엄습했던 어느 날 도주님께서는 회룡재 공부방에 불을 때지 않고 공부하셨다. 공부하실 때 동상에 걸려 피가 맺히고 발이 붓는 고통에도 동요하지 않으시고 공부에 전념하셨다고 한다.08 그리고 이곳을 중심으로 전국 명산대천을 두루 다니시며 수행도 하셨다. 이처럼 도주님께서는 고난 속에서도 개의치 않고 회룡재를 중심으로 도수에 의한 공부를 쉼 없이 진행하셨다.09
  무극도의 종교 활동이 부활한 시기는 8.15 광복 이후였다. 1945(을유)년 7월 6일(양력 8월 13일) 도주님께서 회문리를 떠나려는 이용직 종도에게 “오늘 무슨 큰일이 일어나고 도수가 바꿔지리라.”10라고 말씀하셨다. 이틀이 지난 7월 8일(양력 8월 15일)에 일본이 패전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왔다.11 광복과 함께 새로운 도수를 맞이한 도주님께서는 중단했던 종교 활동을 부활하셨다. 이때부터 도주님께서는 1948년 9월에 부산 보수동에 도본부를 설치하기 전까지 종교 활동의 중심지로 회문리에서 도수에 의한 공부와 포교 활동을 진행하셨다. 그래서 회문리 회룡재를 회룡도장12이라고도 하였다.

 

 

2. 산정에서의 공부와 편력 수도


  1948(무자)년 회문리에서 부산으로 오신 도주님께서는 도본부를 보수동에 설치하시고, 도본부와 가까운 곳에서 공부하셨는데 그곳을 ‘산정’이라고 명명하셨다. 산정에서 공부하시며 때때로 부산 마하사, 충북 괴산 만동묘, 경남 합천 해인사, 충남 공주 동학사, 경남 하동 쌍계사 등을 순행하시며 공부하셨다.
  도주님께서는 부산 보수동에 도본부를 1948년 9월에 설치하셨다. 보수동 도장은 2층 목조 주택으로 규모가 작아 보수도정(寶水道庭)이라고 했다.13 도주님께서는 공부를 행하시기 위해 보수동 도장 뒷산 중턱에 공부처인 산정을 마련하시고 쉼 없는 공부를 이어가셨다.


▲ 머리 숙인 여래좌상 (마하사 응진전 목조석가여래 좌상, 부산 범어사 성보박물관 전시, 2013년 7월 26일 촬영)



  1949(기축)년 겨울 보수동 산정에서 공부하시던 도주님께서는 동래 마하사(摩訶寺)로 가셨다. 마하사에 도착하신 후 방 한 칸을 구하여 49일을 한 도수로 하여 정화수 24그릇을 받들고 공부를 행하셨다. 공부가 거의 끝나갈 무렵 승려와 시종자에게 “법당의 불상을 자세히 보았느냐”라고 물으심에 사람들이 가보니 법당의 불상이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14 마하사에서 공부를 마치시고 보수동 도장으로 오신 도주님께서는 상제님께서 내장산에서 읊으셨던 한시15를 인용하시고 “상제께서 짜 놓으신 도수를 내가 풀어 나가노라”고 말씀하셨다.16
  1951(신묘)년 3월에 도전님께서는 도주님으로부터 만동묘(萬東廟, 현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 소재)에 가보고 오라는 분부를 받으셨다. 도주님께서는 만동묘 건물은 없고 빈터만 남아 있다는 보고를 들으신 후 도전님께 화양동에 거처할 곳을 마련하라고 하셨다가17 이로부터 3년 뒤인 1954(갑오)년 3월에 도주님께서 안상익 외 4명을 대동하고 만동묘 유지를 두루 살펴보셨는데 그날 밤중에 폭풍과 뇌성벽력이 크게 일어났다. 다음날 첨성대 아래쪽 암벽의 좌편에 닫혀 있던 석문이 갈라지며 ‘만력어필 옥조빙호(萬曆御筆⽟藻氷壺)’의 글귀가 나타났다고 한다. 이곳 만동묘는 상제님께서 황극신을 옮겨오는 공사에 등장하는 곳이기도 하다.18 이러한 점에서 만동묘 빈터를 두루 살펴보신 도주님의 행적은 상제님의 공사와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 비례부동과 옥조빙호 석문(충북 괴산 화양계곡의 첨성대 아래 석벽, 2018년 10월 23일 촬영)


 
  산정에서 공부하시던 도주님께서는 1954(갑오)년 가을에 도전님 외 여러 사람과 함께 경남 합천 해인사(海印寺)로 가셨다. 이곳에서 사흘 동안 공부를 하셨는데 공부하신 장소는 해인사 관음전 심검당 뒤편의 다로경권실이었다. 공부를 마치신 후 “사명당(四溟堂)의 입적실에 가서 불공이나 드리고 가리라”라고 말씀이 있어서 도전님과 시봉하던 세 사람이 먼저 그곳을 돌아보고 와서 가시기를 청하니 “너희들이 다녀왔으면 되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백련암과 그 외 여러 암자를 돌아보셨다.19 해인사에서 돌아오신 다음 날 종도들에게 해인(海印)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상제님께서 “나를 잘 믿으면 해인을 가져다주리라”20라고 하셨는데 도주님께서는 “상제께서 해인을 인패라고 말씀하셨다고 하여 어떤 물체로 생각함은 그릇된 생각이니라. 해인은 먼 데 있지 않고 자기 장중(掌中)에 있느니라.”라는 말씀을 남기셨다.21
  도주님께서는 1956(병신)년 3월에 도전님 외 2명을 대동하시고 충남 공주 계룡산에 있는 동학사(東鶴寺)로 가셨다. 이곳은 사찰과 유교 사당이 공존하는 국내의 유일한 절이다.22 도주님께서는 동계사(사당), 삼은각, 숙모전, 동무, 서무를 둘러보시고 숙모전 옆에 있는 염화실에서 7일 동안 공부하셨다. 이 공부에 대하여 도주님께서는 “신명 해원(神明解冤)을 위주한 것이라”라고 일러주셨다.23 동학사는 6.25 때 건물의 상당수가 불에 타서 동무와 서무의 위패들을 한곳에 모아 놓았을 뿐 구분하여 제 위치에 배치하지 못하고 있었다. 염화실에서 공부를 마치고 나오신 도주님께서는 충의지사의 후손들 앞에서 위패를 동무ㆍ서무의 제자리에 맞추어 배치하여 주셨다고 한다.24
  1956(병신)년 8월 도주님께서는 도전님께 경남 하동에 있는 쌍계사(雙磎寺)로 갈 터이니 배종하라고 분부하셨다. 쌍계사에 이르러 주지의 안내를 받으시고 정하신 바에 따라 청학루 위쪽에 있는 영주각(瀛洲閣)의 정결한 방에서 공부를 하셨다. 이곳에서 7일 동안 공부하시고 생각하였던 바와는 달리 쉽게 마쳤다고 하시며 “趙鼎山來智異應 一布衣來白日寒(조정산이 오니 지리산이 응하고, 한 겹 베옷 입고 오니 한 낮인데 차구나!)”25라는 말씀을 남기셨다. 쌍계사는 일명 ‘삼신산 쌍계사’로 불리기도 한다. 삼신산은 봉래산과 영주산과 방장산을 말한다. 그래서 쌍계사에는 영주, 봉래, 방장의 이름으로 건물의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데 도주님께서 공부하신 곳은 영주각이었다.


 ▲ 지리산 쌍계사 영주각 (2013년 11월 9일 촬영)


 
  지금까지 보수동 도장 시기에 도주님께서 행하셨던 공부 행적을 살펴보았다. 이 시기에 도주님께서는 산정에서 공부하시며 때때로 전국의 여러 곳을 다니시며 상제님께서 짜놓으신 도수를 풀어가는 공부를 행하셨다. 보수동 도장에서 감천도장으로 공부처를 옮기신 이후에는 도장을 중심으로 공부를 하셨다.

 

 

3. 시학ㆍ시법 공부와 유명에 의한 종통계승


  도주님께서는 보수동 도장에서 감천도장으로 도본부를 옮기신 후 50년 동안 해오신 도수에 의한 공부를 이곳에서 마치셨다. 보수동에서 감천으로 이주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본래 보수동 도장 주변에는 3,000여 세대의 도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보수동에서 남서쪽 약 2km 떨어진 감천으로 도본부와 도인들의 터전을 옮기는 것은 대대적인 일이었다. 1956(을미)년 8월부터 감천도장 주변에 새로 집을 지으며 이주를 시작하였다. 도인들의 이주가 어느 정도 마무리 되어가던 이해 11월 초하룻날 도주님께서는 도전님의 시봉을 받으시며 감천으로 공부처를 옮기셨다.26 도주님께서는 이곳을 구덕정사(九德精舍)라고 명명하셨고 공부를 이어가시며 도의 제반 업무도 보셨다.
  도주님께서 처음 감천도장으로 오셨을 때 건물은 정사 한 채뿐이었다. 이에 도주님께서는 도전님께 대강전 건립을 명하셨다. 다음 해인 1957년 4월경에 대강전이 완공되었다. 대강전은 2층으로 지어졌는데, 대강전 2층에는 영대27와 법당 그리고 도인들의 수도 공부방이 있었고 1층은 도인들의 수도 공부방으로 공간이 마련되었다.
  1957(정유)년 4월에 도주님께서 감천도장 대강전에 15신위를 모시고 영대봉안치성을 올리셨다. 무극도장과 감천도장은 모셔진 신위에 차이가 있다. 무극도장의 경우에는 영전 3층 영대에 상제님을, 그 옆 건물인 성전(도솔궁)에는 옥황상제님과 천지신명이 따로 봉안되었다. 이와 달리 감천도장 대강전의 경우에는 진법주와 동일하게 15신위를 모두 봉안하였다. 이렇게 영대에 봉안된 신위에 차이가 있는 것은 아마도 도주님께서 도수에 의한 공부를 행하심에 따라 나타난 변천 과정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 1960년대 감천도장(북문 쪽 전경 )



  이해 11월 도주님께서는 도인들의 각종 수도 방법과 의식 행사 및 준칙을 정하신 후 시학ㆍ시법 공부를 시행하도록 명하셨다.28 이 공부는 36명이 한 개의 공부반을 이루고 하루 동안 지정된 장소에서 소정의 주문을 봉송하는 것이다. 시학ㆍ시법 공부는 도주님께서 50년 공부의 결과로써 이룩하신 진법의 수도 법방이다.
도전님께서는 시학ㆍ시법 공부를 ‘생명보다 중요한 공부’라 표현하시며 “앞으로 후천의 천지도수가 이 공부에 의해서 제약을 받는다.”29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 공부가 바로 진법이다. 참 진(眞)자 진법(眞法)이며, 진칠 진(陣)자 진법(陣法)이다. … 시학공부는 1년 12달, 24절후와 72후를 사람이 맡아 지켜나가는 것”30이라 하시며 “도(道)란 천지도수가 돌아가는 운로(運路)이다. 이것을 도(道)라 하는데, … 매일 공부해 나가는 것이 바로 이것 천지도수를 돌리는 것이다.”31라고 하셨다. 이렇게 시학ㆍ시법 공부는 1년 12달, 24절후와 72후 등 신명이 맡아 행하던 하늘의 법을 신명과 함께 사람이 참여하여 행하는 천지도수를 돌리는 공부이기 때문에 ‘진법’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시학ㆍ시법 공부의 역사적 과정을 보면 도주님께서는 1957년 감천도장 대강전 영대에 15신위를 봉안하신 후에 시학ㆍ시법 공부 시행을 명하셨고, 공부가 시작될 때 1958(무술)년 3월 3일까지 불면 불휴하시며 백일 도수를 보셨다.32 이러한 시학ㆍ시법 공부 시행의 전후 과정을 통해 15신위가 봉안되지 않고서는 공부가 이루어질 수 없었음을 알 수 있으며 영대에 15신위를 봉안하는 것이 공부 시행의 조건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도주님께서 시학ㆍ시법 공부의 시행과 함께 화천하시기 3일 전까지 행하신 백일 도수의 뜻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게 된다.
  1958(무술)년 2월 하순에 도주님께서는 “박한경을 도전(都典)으로 임명하니 그는 총도전이니라. 종전의 시봉 도전과는 전혀 다르니라”33라고 최고 간부 전원이 모인 자리에서 분부하셨다. 총도전은 도주님의 뒤를 이어 태극도를 이끌어갈 ‘최고 책임자’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백일 도수를 마치신 도주님께서는 3월 6일 최고 간부 전원을 문밖에 서 있게 하시고 도전님을 가까이에 오게 하셨다. 도전님의 머리에 손을 얹으시고 도의 운영 전반을 맡도록 유명을 내리시며 “오십 년 공부 종필(五十年工夫終畢)이며 지기 금지 사월래(至氣今至四月來)가 금년이다. 나는 간다. 내가 없다고 조금도 낙심하지 말고 행하여 오던 대로 잘 행해 나가라”34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유명으로 종통을 전하신 도주님께서는 미시(13~15시)에 화천하셨다.
  이상으로 3회에 걸쳐 도주님의 50년 공부 행적을 살펴보았다. 도주님께서는 1909(기유)년부터 1958(무술)년 50년 동안 상제님께서 짜 놓으신 도수를 풀어나가는 공부를 행하셨다. 50년 공부의 역사적 과정에서 도주님께서는 종지ㆍ신조ㆍ목적과 각종 수도 방법과 의식 행사 및 준칙을 정하시고 시학ㆍ시법 공부를 시행할 수 있도록 하셨다. 이렇듯 도주님의 50년 공부는 도인들에게 상제님의 해원상생의 대도를 닦을 수 있는 수도의 길을 열어 주셨다는 것에서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01 “1915년에 조선총독부가 발표한 「포교규칙(布敎規則)」에서는 신도(神道), 불교, 기독교만을 종교로 인정하고, 유교는 사회규범이나 도덕으로, 그리고 천도교(天道敎)나 보천교(普天敎), 대종교(大倧敎)와 같은 신종교들은 종교유사단체로 규정하였다. 유사종교로 지목된 종교들에 관한 업무는 경무국 담당으로 처리하고, 민족운동 단체 또는 비밀정치단체로 지목하여 항상 감시하였다.” 「유사종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02 박상규, 「무극도 창도와 해산시기」, 『대순종학』 3, (2022), pp.15-16 참조.
03 “총독부가 ‘유사종교단체’로 지칭한 신종교들에 대한 통제와 탄압은 1935년부터 본격화했다. 이러한 탄압은 주로 총독부 사회과와 일제 경찰들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총독부 사회과에서는 이에 대한 단속 방침을 마련하기 위하여 1936년 6월 10일부터 2일간 ‘종교유사단체 취체회의’를 소집하고 있다.” 「宗敎類似團體 取締會議」, 《매일신보》 1936년 6월 9일.
04 「安東無極敎도 切集會禁⽌」, 《매일신보》 1936. 6. 30 참조.
05 치안유지법이 1941년 3월 10일 개정되면서 법률 조항 65조로 확대되었다. 치안유지법에 따르면 단체를 만들거나 가입한 사람은 최대 10년의 징역 또는 금고형을 받을 수 있었다.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단체뿐만 아니라 유사종교에까지 일제 탄압의 영향력이 미쳤다.
06 박상규, 앞의 글, p.20.
07 교운 2장 43절.
08 신상미, 「답사기: 도주님 생가와 회룡재」, 《대순회보》 110호 (2010), p.61 참조.
09 교운 2장 44절 참조.
10 교운 2장 46절.
11 이 시기에 국제 정세를 보면 1945년 8월 6일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 한 발, 9일 나가사키에 한 발을 떨어뜨렸다. 일본은 8월 14일 방공호에서 최고 회의를 열고 항복을 결정했다. 그다음 날인 8월 15일 포츠담 선언에 따라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12 “무극도장에서 나오신 뒤, 회문리 회룡재(회룡도장)에 지내시다가 광복 후에 도시인 부산으로 나오셨다. 나중 한국전쟁 때 회룡도장은 불이 나서 사라지고 말았다.”라고 하신 ‘「도전님 훈시」 (1989. 6. 25)’에서 ‘회룡재’를 ‘회룡도장’이라고도 표현하심을 볼 수 있다.
13 「도전님 훈시」 (1988. 12. 5).
14 교운 2장 47절 참조.
15 행록 2장 5절, “世界有而此山出 紀運金天藏物華 應須祖宗太昊伏 道人何事多佛歌.”
16 교운 2장 48절.
17 교운 2장 49절 참조.
18 공사 3장 22절 참조.
19 교운 2장 54절.
20 교운 1장 6절.
21 교운 2장 55절 참조.
22 동학사(東鶴寺)는 우리나라에서 불교 건물인 절과 유교 건물인 동계사(東雞祠) 사당이 공존하고 있는 유일한 사찰이다. 이곳에는 신라 충신 박제상과 류차달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동계사,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 등 고려 충신의 위패가 모셔진 삼은각, 단종이 모셔진 숙모전과 생육신이 모셔진 동무와 사육신이 모셔진 서무가 있다.
23 교운 2장 57절.
24 종단역사연구팀, 「전경지명답사기: 계룡산 동학사」, 《대순회보》 198호 (2017), p.73 참조.
25 교운 2장 60절.
26 「도전님 훈시」 (1989. 6. 25) 참조.
27 “무자(1948)년에 본부를 보수동에 설치하고 해 나오다가 을미(1955)년에 영대를 봉안했다. 병신(1956)년에 도인이 많아지니 감천으로 옮겨서 대강전 올리고 영대를 봉안했다.” 「도전님 훈시」 (1989. 6. 25).
28 교운 2장 62절 참조.
29 「도전님 훈시」 (1992. 3. 18).
30 「도전님 훈시」 (1991. 7. 6).
31 「도전님 훈시」 (1991. 9. 25).
32 교운 2장 66절.
33 교운 2장 64절.
34 교운 2장 6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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