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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력과 차력약
교무부 박종식
상제께서 김 병욱이 차력약을 먹고자 하기에 “네가 약을 먹고 차력하여 태전을 지겠느냐. 길품을 팔겠느냐. 난리를 치겠느냐. 그것은 사약이니라”고 이르시고 그런 생각을 버리게 하셨도다. (교법 3장 14절)
위성구에 등장하는 김병욱 종도가 상제님을 모셨던 시기에 관해 『전경』에서 처음 나타난 내용은 1903(계묘)년 3월로 기록되어 있다.01 따라서 위 구절의 일화는 1903년 이후의 일로 추정된다. 당시 김병욱 종도는 차력약을 먹고자 했는데, 상제님께서는 군 장교였던 김병욱에게 있어서 그 행위가 태전(駄錢: 짐을 운반하고 삯을 받는 일)을 지거나 길품(남이 갈 길을 대신 가고 삯을 받는 일)을 팔 것이 아니고 난리를 칠 것도 아니며, 결국 쓸 곳이 없으니, 차력약은 사약이라고 경계하셨다. 차력이나 차력약은 현대에는 거의 사라진 말이지만, 당시 사회에서는 널리 사용되던 용어였다. 여기서 상제님께서는 어떠한 연유로 차력과 관련해 이러한 말씀을 하셨을까? 이를 알아보기 위하여 차력과 차력약의 기원과 의미, 그리고 당시의 사회적 배경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차력(借力)과 차력약(借力藥)
차력은 문자 그대로 ‘힘을 빌린다’라는 말로, 일반적으로 약이나 신령의 힘을 빌려 몸과 기운을 굳세게 하거나 그렇게 얻은 힘을 뜻한다. 즉 차력은 약이나 신의 힘을 빌려 능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그 목적은 인간의 수준을 넘어서는 육체적 힘을 발휘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는 도교에서 인간의 몸에 강신(降神: 신이 내림)하게 하여 신적인 힘을 발휘하는 기존의 술법(術法)에, 차력약을 복용하여 인간의 몸 자체를 변화시켜 힘을 발휘하겠다는 생각에서 만들어낸 술법이었다.02 차력은 기문둔갑(奇門遁甲), 둔갑장신(遁甲藏身) 등의 환술(幻術: 남의 눈을 속이는 기술)의 하나로 사용되었다.03 위 성구에 나타난 것처럼 차력약을 먹고 힘을 쓰는 차력이라는 용어가 문헌상으로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1856)이 쓴 대표적인 백과사전식 문집인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04에 나타난다. 이 책의 인사편(人事篇) 기예류(技藝類)의 ‘잡기(雜技)’에 대한 기록에는 “귀신의 힘이나 허깨비를 빌려오는 것”을 가리키는 환술의 하나로 기록돼 있다.05 여기서 차력은 1852년 경상도 남부 지역인 일월산 등지의 산적들이 약과 술법을 함께 사용하는 방식으로 시작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효력이 실제로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았으나 이후 각지의 민란 세력이 민심을 선동하여 난을 일으킬 때 사용하는 수단 중 하나로 활용했다고 전해진다.06 차력을 하는 사람은 차력장사(借力壯士)나 차력요한(借力妖漢), 차력환술인(借力幻術人) 등으로 불렸다.07 이러한 차력의 종류는 신차력(神借力)ㆍ수차력(水借力)ㆍ기차력(氣借力)ㆍ약차력(藥借力) 등으로 분류된다.08 신차력은 스스로 접신(接神)을 통해 정신력을 극대화하고, 거기에 걸맞은 신(神)적인 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수차력은 물속에 철분이나 동(銅)이 많이 있어 그것이 몸에 들어가면 근육이나 뼈가 쇠처럼 튼튼해진다는 소박한 관념에서 생겨난 것이다. 기차력은 인위적인 호흡법으로, 10초 단위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그 횟수를 정확히 기억하면서 총 1,000회의 수행을 통해 괴력을 발휘하는 것이다.09 약차력은 위의 『전경』 구절에서 언급된 것으로 차력약을 먹고 얻는 차력을 말한다. 차력약은 인간의 수준을 넘는 힘을 얻기 위해 만들어진 약이다. 이는 그런 힘을 내는 신이 잘 내리게 하고 인간의 몸을 신선에 가깝게 만들기 위해 개발되었다. 차력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의약(醫藥) 분야에 나타나는데, 전통적으로 사용되던 신향(信香)에다가 금정석(金精石: 수운모)과 은정석(銀精石: 백운모)이라는 두 약재와 태음현정석(太陰玄精石: 붉은빛을 띠는 돌소금)이라는 약재까지 합쳐진 삼정환(三精丸)을 대표적으로 말한다.10 이 외에도 차력약의 성분에는 중금속이나 구리 등의 물질이 포함되었으며, 그 복용법에는 수은을 담배 연기처럼 연소시켜 흡입하는 방법도 사용되었다. 이때 구리 성분으로 인해 혈뇨나 혈변을 겪는 사례도 있었다. 또한, 우황이나 사향, 천산갑의 혈액, 호랑이의 앞발 등 다양한 약재가 첨가되었으며, 약재 중 대부분은 별도의 조제 과정을 거쳐서 쓰였다.11 이러한 차력약과 차력에 대한 언급은 1855년에 조재삼(趙在三, 1808~1866)이 순조(純祖) 때 저술한 백과사전식 문집인 『송남잡지(松南雜識)』에도 나타난다. 여기서 허약한 사람도 차력약을 100일간 복용하고, 힘을 발휘할 때 주문을 외우면 누각을 뛰어넘고 천근의 무게를 들 수 있는 괴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12
차력이 유행하게 된 사회적 배경
차력과 차력약은 조선 사회에서 19세기 중반에 갑자기 등장하여 20세기 전반까지 상당히 유행했다. 그 이유는 당시 민간에서 개인적으로는 건강과 장수, 난치병 치료, 괴력 발휘 등의 사적인 욕망을 해소하려는 목적으로 사람의 몸을 변화시키려는 시도로 나타났다고 보인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당시 민중들이 고통스럽던 현실을 타개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13 이와 관련하여 조선 말기 도자기 공인(貢人)이었던 지규식(池圭植, 1851~?)이 저술한 『하재일기(荷齋日記)』14에는 “담양 김 판관이 계속 찾아와서 차력약(借力藥)을 복용하는 일을 이야기하였다.”15라고 하였다. 여기서 종5품 관직의 판관조차 차력약에 대한 관심이 깊었음을 알 수 있고 당시 민중을 넘어 사회 전반에 퍼져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실제로 차력약을 통한 모반사건이 여러 차례 일어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사건 기록서인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16을 살펴보면, 1853년에 신석범 고변사건(申錫範告變事件)이 나타난다. 여기서 주범 중 한 사람인 최봉주가 차력약을 판매하며 민란을 모의하다 실패한 후 관헌이 그에게 심문하기를, “차력약으로 힘을 얻어 어디에 쓰려고 한 것이냐? … 이는 그것으로 사람을 유인하여 도리에 어긋난 변란을 일으키려는 마음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17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차력은 조선의 사회질서를 무너뜨리고 역모를 꾀하는 ‘불순한’ 세력들이 사람들을 현혹시켜서 불러 모으고 결집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세력들은 차력을 관군에 대항할 수 있는 실질적인 무력으로 활용하려고 했다.18 이러한 차력은 일부 동학(東學)교도에게서도 나타난다. 1893년 보은집회에 모인 동학교도들을 회유하기 위해 정부가 발표한 「통유동학도문(通諭東學徒文)」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무리를 모아 가르치는 것을 본 자가 말하길, 이른바 동학이라는 것은 그 글이 단지 21자뿐인데, 어리석은 남자와 여자일지라도 주문을 많이 외워 공부가 이루어지면 비바람을 마음대로 부리고 차력술과 축지법을 할 수 있으며, 교인들이 선행을 쌓고 죽으면 좋은 곳으로 간다고 하였다.”19 이를 통해, 동학교도 사이에 차력을 비롯한 다양한 술법이 언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국가의 지배층은 민란을 일으키는 데 유인책으로 활용된 차력과 같은 술수를 잠재적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한편, 그 민란을 진압하는 데에도 차력을 활용하려던 역설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예컨대, 동학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홍주(洪州) 목사 이승우(李勝宇, 1841~1914)는 동학을 따르지 않는 지역 주민들과 차력 수행자들을 규합하여 군기와 군량을 확보하고, 성(城) 안에 1만여 명의 군사를 집결시켰다. 그 결과, 수많은 동학군이 감히 성을 공격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20 이처럼 차력은 당시 민란 세력과 민란을 진압하려는 관군 모두에게 활용되기도 하였는데, 이를 통해 차력은 민란이라는 정치적 분쟁과 동학 등 종교 분야만이 아니라 사회 일반에까지 널리 확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말에는 차력약의 처방을 쉽게 구할 수 있을 정도로 유행하고, 일반인들이 새로운 약재를 개발하고 그 약재의 소문이 퍼지는 일도 일어나게 된다.21
지금까지 『전경』 구절에 나타난 차력과 차력약의 기원과 의미, 이에 수반된 사회적 배경을 알아보았다. 위 성구에서 김병욱이 차력약을 먹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김병욱은 동학군을 체포한 공로로 군 장교로 승진하고 부(富)를 축적한 인물로 평가된다.22 그가 동학군과 전투했던 경험이 있었던 점을 고려해 볼 때 차력과 차력약이 민간에 널리 유포되어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김병욱은 차력약이 지닌 신비한 힘에 대한 동경심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정황을 아셨을 상제님께서 김병욱을 보시며 차력약이 효과가 없고 무익할 뿐 아니라 죽음에까지 이를 수 있는 약임을 알려주시고 꾸짖으신 것으로 이해된다. 특히 성구에서 상제님께서 “그것은 사약이니라”라고 하신 말씀은 차력약의 사용이 생명에 위협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사약’에 비유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시 차력약의 약방문에 인간이 섭취해서는 안 되는 중금속 같은 유해 물질이 포함되어 있었던 사실을 고려할 때, 그 약을 먹으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차력약은 현대의학의 발달로 중금속이나 구리 등을 사용하는 비과학적이고 미신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리고 차력은 사회가 안정되고 질서가 확립되어 유명무실해졌다.23 일찍이 상제님께서는 “너희들이 항상 도술을 배우기를 원하나 지금 가르쳐 주어도 그것은 바위에 물주기와 같아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으로 흘러가니라. 필요할 때가 되면 열어주리니 마음을 부지런히 하여 힘쓸지니라”(교법 2장 12절)라는 말씀을 하셨다. 이는 차력과 같은 기이한 술수에 마음을 뺏기지 말고 오직 마음을 바르게 하는 수도에 전념하라고 가르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도인은 도통을 향해 어떠한 헛된 유혹에도 정신을 뺏기지 말고 마음을 부지런히 닦는 수도의 본분을 다해야겠다.
01 행록 2장 20절. 02 최성운, 「차력, 강신(降神)과 약물을 통한 인간 몸의 변환과 신적 세계의 구현」, 《인문학연구》 61 (2011), pp.117-118 참고. 03 기문둔갑(奇門遁甲)은 기문으로도 불리며 음양의 변화에 따라 몸을 숨기고 길흉을 택하는 도교적 용병술을 뜻하며, 둔갑장신(遁甲藏身)은 남에게 보이지 않게 여러 가지 술법을 써서 몸을 숨기거나 동물 혹은 바위나 나무 등으로 변신하는 도술을 말한다. 그리고 환술(幻術)은 곡예와 묘기 등과 결합한 불가사의한 광경을 보여주는 기예를 가리킨다. 『네이버 지식백과』 참고. 04 역사ㆍ천문ㆍ지리ㆍ불교ㆍ서학ㆍ병법ㆍ광물ㆍ초목 등에 관한 분야를 망라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 05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인사편 기예류 잡기(人事篇 技藝類 雜技)」 “彼賊借鬼力借鬼幻者”, 『한국고전DB』. 06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인사편 기예류 잡기(人事篇 技藝類 雜技)」, 『한국고전DB』; 영양현 일월산 산적사건에서 사용된 차력이 어떤 것인지는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약과 강신(降神) 둘 모두를 사용한 것인지 아니면 그중 하나만 사용한 것인지가 명확하지 않다. 최성운, 앞의 글, p.119 참고. 07 같은 글, p.124 참고. 08 김영만, 박태근, 「전통차력의 현대적 해석」, 《한국체육과학회지》 20 (2024), pp.285-292 참고. 09 김영만, 『한국 전통무예에 깃든 정신과 철학』, (서울: 글샘, 2020), pp.367-381 참고. 10 최성운, 앞의 글, p.125 참고. 11 김영만, 앞의 책, pp.371-375 참고. 12 조재삼, 『교감 국역 송남잡지 6』, 강민구 옮김 (서울: 소명출판, 2008), p.141 참고. 13 최성운, 앞의 글, pp.117-119 참고. 14 사옹원 분원(分院)의 공인(貢人)이었던 지규식(池圭植)이 1891년 1월 1일부터 1911년 6월 29일까지 20여 년에 걸쳐 작성한 일기이다. 『한국민족대백과사전』 참고. 15 『하재일기(荷齋日記)』 1, 「신묘음청록(辛卯陰晴錄)」, 신묘년(1891) 10월 17일 “覃陽金判官, 連日來訪, 以借力服藥事爲言.” 『한국고전종합 DB』. 16 조선시대 중죄인의 조사ㆍ판결서를 모아 엮은 국가기관에서 편찬한 추국 기록 문서이다. 『한국민족대백과사전』 참고. 17 “用藥求力之, 將伺用,…製藥誘人, 尤可見悖亂之心.” 『추안급국안(推案及鞠案)』 28권 계축년(1853, 철종 4), 김수정(金守禎)ㆍ홍영근(洪榮瑾) 심문 기록, 10월 24일 최봉주, 심문 기록; 최성운, 같은 글, pp.167-168 재인용. 18 최성운, 앞의 글, p.127 참고. 19 「통유동학도문(通諭東學徒文)」, 『한국사총설DB』. 20 『김약제일기(金若濟日記)』 제3권 10월 4일, “惟獨洪牧李勝宇, 自初聚不道人與借力人, 廣造軍器精畜糧軍額, 近萬聚於城中, 而道人近百萬圍之, 而以道人勢力, 不敢攻城.” 『한국근대사료DB』. 21 최성운, 앞의 글, p.172 참고. 22 강대성, 「전경 속 이야기: 김병욱의 영귀(榮貴)」, 《대순회보》 277 (2024), pp.38-43 참고. 23 김영만, 박태근, 앞의 글, p.293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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