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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속 역사인물 소개 : 진시황(秦始皇)
진시황(秦始皇)
상제님께서「의약 · 복서 · 종수지문」의 책, 땅에 묻으시고「진시황의 해원(解冤)공사」보셔
姜相年 <硏究委員> 그는 BC 259년 조(趙)에 인질로가 있던 장양왕(藏襄王)의 아들로 조의 도성 한단에서 태어났다. 그의 모친은 원래 거상(巨商) 여불위(呂不韋)의 애첩이었으므로 부친은 여불위라는 설도 있다. 그는 법가(法家)의 인물을 기용하여 국정을 보좌하게 하고 6국〈한, 위, 조, 초, 연, 제(韓, 魏, 趙, 楚, 燕, 薺)〉를 정복하여 17년만인 39세 때에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을 구축 하였다. 통일을 완성한 그는 삼황오제(三皇五帝)의 공덕을 한 몸에 겸하였다는 뜻에서 황제(皇帝)라는 칭호를 썼다. 이사는 진시황을 도와 진 나라를 일으키기도 했지만, 멸망에 이르게 하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지나친 권력욕이 스스로를 죽였던 것이다. 진시황제는 이사의 의견에 따라 봉건제를 폐지하고 군현제도(郡縣制度)를 실시하여 지방의 관리를 모두 중앙에서 파견 시켜 통치하였다. 또 내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전국의 호족 12만호를 함양으로 이주시키고, 필요 없는 성곽을 모두 파괴하는 동시에 민간의 무기를 몰수하여 12개의 거대한 동상을 만들어 반대세력의 대두를 방지하였다. 한편 사상의 통일을 기하기 위하여 분서갱유(焚書坑儒)를 하는 등 중앙집권을 위한 여러 가지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러면 시황제를 연상시키는 분서갱유(焚書坑儒), 여산릉(驪山陵)과 아방궁(阿房宮), 만리장성(萬里長城)등을 살펴보자.
숭상 이사는 순우월의 발언에 반론을 제기하여 옛 것을 빙자하여 현세를 비판하고 인심을 교란시키는 행위는 용서할 수 없다고 비난하며 극단적인 탄압책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주장의 내용은 「진나라 역사 이외의 다른 서적은 모두 불살라 없앨 것, 다시 옛 시서(詩書)에 대하여 의논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고, 옛 것을 옳게 여기고 현재를 비판하는 자는 그 일족을 멸할 것」등이었다. 이 분서정책에 대하여 유생들은 크게 불만을 품고 시황제를 비판하였다. 이들 비판세력을 누르기 위한 강경한 탄압정책이 취해졌다. 마침내 유생들을 생매장하는 「갱유(坑儒)」사건이 발생하였다. 갱유는 사실상 사상적 배경에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발단이 된 것은 방사(方士, 선술로써 불로 장수약을 구하는 자들을 말함)들의 배신행위 때문이다. 일설에 의하면 서복은 불사약을 구할 수가 없었고, 그대로 돌아가면 죽음을 당할 것이 확실하였기 때문에 그 길로 동남동녀와 함께 일본으로 돌아가서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것을 보여주듯 지금 일본 각지에는 서복의 묘가 있다. 또 B.C 212년 어느 날 불사약을 못 구하여 책임 추궁을 두려워한 두 사람의 방사 후생(候生), 노생(盧生)이 시황제를 헐뜯고 도망해 버렸다. 시황제는 크게 노하여 자기를 비방하는 자는 주로 유생들이라는 것을 알고 이와 관련된 유생 406명을 체포하여 구덩이를 파고 생매장하였다.
36년의 오랜 세월에 걸친 이 대공사는 서안시(西安市)동쪽 섬서 성의 임동(臨童)으로부터 동쪽으로 5~6㎞되는 지점에 실시되었는데 여산릉이라고 하며 시황릉이라고도 부른다. 또 시황제의 절대적 권위를 상징하기 위하여 능묘 안의 돔식 천장에는 진주로 아로새긴 일월성신(日月星辰)이 반짝이고, 지면에는 수은을 이용한 하천과 호수가 만들어져 천문, 지리 형세의 천하가 펼쳐져 있었다. 또 실내에는 문무백관의 자리가 차례대로 펼쳐져 있고, 고래기름에 의해 점등되었다. 묘실에는 활을 장치해놓아 도굴자가 침입하면 즉시 화살이 쏟아지는 구조로 되어있다. 기록에 의하면 이 공사에 무려 5만 명의 죄수가 동원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만리장성 공사에 동원된 병사와 인부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비극적 전설을 낳고 있다.
▲ 네마리 말이 끄는 마차가 달릴 수 있는 만리장성
사마천의 사기 「진시황본기」는 진의 멸망 원인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진나라가 멸망한 원인은 백성에게 인의(仁義)의 정치를 베풀지 않은 것과 공격하는 측인 반란군과 지키는 측인 진 왕조 사이에 세력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진시황이 분서할 때 남긴 책이 의약 · 복서 · 종수의 책이므로, 해원시대를 맞이하여 불사약을 구하지 못한 채 51세로 갑작스런 죽음을 당한 진시황의 원을 상제께서 풀어 주시는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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