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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155년(2025)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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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문예공모전 : 나를 되살려 준 어머니의 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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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순문예 : 산문 장려

 

나를 되살려 준 어머니의 정성

 

 

원평1-1 방면 평도인 우영진

 



  제가 4살 때, 머리를 다쳐 입원한 형을 어머니께서 돌보느라, 할머니 손에 잠깐 맡겨진 적이 있습니다. 당시 할머니께서 깜빡하고 저를 길에 버려 두고 가셔서 길에 4시간가량을 혼자 있게 되었는데, 홀로 남겨진 무서움은 어디로 가고 단지, 줄지어 기어가는 개미와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느꼈던, 세상에 갑자기 툭 떨어진 듯한 어리둥절함만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나중에 어머니께서 그 사실을 아시고 너무 놀라셨지만 한편으로 어떻게 어린 애가 그럴 수 있나 싶어서 이러쿵저러쿵 관여하지 않고 혼자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둬 키웠다고 나중에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저는 또래의 아이들과는 달리 학원도 다니지 않고 부모님 밭일 도와드리며 평상에 드러누워 공상이나 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무작위로 배정되어 입학한 중학교는 면학 분위기가 좋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어떻게 학생들이 저럴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고, 선생님들께 죄송한 마음에 나라도 수업을 잘 들으려고 노력했는데 그런 모습이 눈에 띄었나 봅니다. 어느 날 과학 선생님이 저를 차에 태우고 지역 내 과학고등학교에 데리고 가서 여기를 꼭 가라고 말씀하셨고, 망설임 없이 시험을 준비하고 턱걸이로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담임 선생님께서 책 두 권을 선물로 주셨는데 노자의 『도덕경』과 소련의 어느 과학자의 자서전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아니 훨씬 이전부터 제 인생 여정은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전 교육이 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 과학고에 진학하여 경쟁 환경에 놓이게 되었는데, 상위권 학생들의 우쭐대는 모습에 자극받아, 내가 잘 해서 모범이 되겠다고 마음을 먹고 밤잠을 줄여가며 학업에 매달린 결과 카이스트에 무시험 전형으로 합격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친구들이 우쭐댄 것이 아니라 제 눈에 그렇게 보인 것이고 ‘제’ 모습을 본 것일 뿐인데 그렇게 생각하고 악착같이 매달린게 여간 우습지 않습니다. 당시 카이스트는 일주일에 며칠은 밤을 새워서 실험하고 리포트를 써야 했는데, 한가한 어린 시절을 보낸 덕분에 새롭게 뭔가를 배우는 재미가 있어서 대부분 시간을 강의실과 도서관에서 지내면서 대학 시절을 보냈습니다.
  학문하는 즐거움은 잠시였고 대학원에 들어가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머리를 쓰는 일을 하면 머리가 너무 아팠습니다. 대학병원의 MRI 검사 결과 별 다른 이상이 없었고, 한의원에서 침도 맞고 약도 지어 먹었지만, 차도가 없었습니다. 결국 학업을 그만둘 생각을 하게 되었고, 어머니께서는 출가도 승낙하셨습니다. 어릴 때 부산의 큰 절 주지 스님이 저를 달라고 한 적이 있을 정도로 불가와 인연이 깊은 집안이었으니까요.
  그 무렵에 ‘도’를 접하면서 학업은 그대로 유지하게 되었지만, 대학원 연구실에서 하는 일은 무엇 하나 순조롭게 진행되는 법이 없었습니다. 선후배들이 기피하는 새롭고 힘든 일을 도맡아 하였지만 별다른 결실 없이 시간만 흘렀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내 성과를 위해 뭘 하기보다는 남들 하는 일을 돕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후배들 연구를 도와주는 일에 많은 시간을 쏟았습니다. 제 일을 하는 게 아니라면 머리도 아프지 않았고 좋은 아이디어도 잘 떠올랐는데, 제가 머리를 쓰는 일을 하면서 맺은 척이 그렇게 작용한 것이라고 인식하는 데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교화를 들을 때 거부감도 없었고 졸리지도 않았지만, 안타깝게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머리로 듣고 제 수준으로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도서관에 틀어박혀 차원을 뛰어넘는 지식의 스펙트럼을 즐기면서 전공 서적 보듯이 『전경』을 보았습니다. 모든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상제님과 도주님, 도전님 세 분의 연원(淵源)의 마음에는 조금도 다가서지 못하고 한 다리만 ‘도’에 걸친 채 세월이 흘렀습니다.
  대학원에서 과제로 맺은 인연과 주어진 상황은 저를 지역의 벤처 회사로 이끌었고, 열심히 일하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몇 년 만에 회사는 대기업으로 성장하였고, 저는 최초 및 최연소 등의 타이틀을 얻으며 승승장구했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어느 졸업식에서 “connect the dots(과거의 경험이 현재와 미래를 연결한다는 의미)”라고 얘기했듯이, 대학 시절 남들이 기피하던 일을 했던 저의 도트(dot)들이 연결되어 인정받게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또한 우리 대순진리회의 훈회, 수칙을 응용해 업무 지침을 만들어 조직을 관리하다 보니 따르는 사람들도 많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대기업이라는 환경은 자유로움과 새로움을 추구하는 저와는 맞지 않았고, 주위 관계에서 드러나는 업보를 인식하고 바꿔 나가지 못하다 보니 마음은 죽을 것 같이 고통스러운, 기실 안수정등(岸樹井藤)에 매달려 있는 불안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넝쿨에 매달려 달콤한 ‘꿀’을 맛보던 중 얼마 전 축구 꿈나무인 중학생 아들을 지원하기 위해 서울로 계획에 없던 이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우연하게도 출퇴근길에 방면 회관이 있었고 임원분이 항상 계셨습니다. 인사드릴 때마다 ‘불편한’ 진실을 말씀하시니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부족하나마 처음으로 돌아가 포덕ㆍ교화ㆍ수도의 기본 사업을 다시 실천한 것 같습니다. 회사에서는 남들이 보기에 자연스럽게 퇴직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져 임원직을 그만두고 좀 더 자유로운 환경으로 이직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구운몽』에서 육관대사가 돌난간을 두드린 듯, 왜 모든 교화가 새롭게 들릴까요. 그 사이 모든 교화가 업데이트 되었을까요. 마음의 가뭄을 적시는 봄비 같은 눈물이 계속 흐릅니다.
  伐柯伐柯 其則不遠(벌가벌가 기측불원)




  이십 대 중반 꽃다운 나이에 이미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어머니께서는 경상도 어느 절 산령각(山靈閣)에 들어가 생남불공(生男佛供)을 드리기 시작하셨습니다. 삼천 배 또 삼천 배… 무엇이 그리 간절했는지 정성을 들이다가 쓰러지셨는데, 독성(獨聖)께서 현몽하여 일러주신 대로 익모초(益母草)로 몸을 보신하고 나서야 우리 형제를 차례로 가지게 되었습니다. 귀한 아들은 배로 낳아야 한다고 고집하여 제왕절개로 형과 저를 낳으시고, 어려운 환경에서 우리들을 키우기 위한 고생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께서는 형님이 잘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어머니께서 온갖 궂은일을 하며 어렵게 장만한 집을 두 차례나 팔아서 백부의 공장 밑천으로 보태는 바람에 살림살이는 어려웠고, 집안의 겁액까지 끊임없이 작용하다 보니 우리집은 조용한 날이 별로 없었습니다. 우리가 어느 정도 클 때까지도 어머니께서 식모살이 다니며 남이 버린 옷을 갖다 입으셨기 때문에 그런 모습에 화내는 형과 싸우는 일도 많았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진학과 함께 집을 떠나기 전 마지막 모습이 그랬다 보니 어머니께서는 항상 그게 마음이 쓰이셨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떠나서 말도 없고 마음을 닫고 사는 게 아닌가 하는, 그리고 이후 모든 학비를 장학금으로 해결하다 보니 부모로서 해준 것도 없다는 생각에 말입니다. 두 아들이 장성하고 나서는 어머니께서도 중ㆍ고등학교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까지 다니셨고 제대로 배우지 못한 한(恨)은 어느 정도 푸신 것 같습니다만, 여전한 자식 걱정은 정말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연고는 모르겠지만 입도 전부터 항상 남을 잘 되게 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음은 있었으나 방향을 알지 못했고, 심지어 입도 후에도 득의지추(得意之秋)를 깨닫지 못하고 업보가 드러나서 헤매기 시작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른 생각과 행동을 했습니다. 연원(淵源)의 마음을 닮으라는 교화를 들었지만, 저의 정성이 부족하다 보니 줄곧 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 어머니의 마음이 천지의 부모로서 모든 생명을 살피며 정성 들이시고 인간의 모습으로 공사(公事) 보신 마음과 일부 닮은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연원의 발자취를 좇다 보니 어머니의 발자취가 중첩되어 느껴졌고, 마음을 닮으려고 시늉이라도 하다 보니 어머니의 마음이 함께 느껴졌고, 그것이 디딤돌이 되어 미루어 조금씩 닿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처음 기도 용구를 마련할 때 향로에 모래를 구해 넣지 않고 어머니의 향로에서 재를 가져다 채울 때부터 이미 예견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거의 평생을 매일 인(寅)시에 일어나 금강경을 외워 오신 어머니의 투박한 향로, 도자기 붓꽂이에는 재가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양쪽 어깨 위에 부모를 한 분씩 모시고 수미산을 백천 번을 돌아도 부모의 은혜를 다 갚지 못한다 하였는데, 마음가짐이 어리석고 어두워 부모의 은혜도 모르고 사는 중생 가운데 하나로 천지의 부모이신 양위 상제님의 마음을 느껴보려고 한 것이 애초에 참 가소로운 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가끔 집에 들르면 어머니께서 한풀이라도 하듯이 살아온 얘기를 하셨지만, 저는 제 업보에 헤매느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습니다.
  그 긴 세월을, 가정을 이루고 나서는 일 년에 겨우 두어 번 집에 들를 뿐인데, 역시 우둔하게도…. 이제야 검색해서 찾아보니 독성님이 나반존자를 달리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선각들이 우리는 신명계에서 다짐을 하고 왔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어도 역시 그런가 보다 했을 뿐인데, 그 교화가 이렇게 마음에 와닿게 될 줄이야. 지금까지 겨우 겉모습만 갖추고 사람인 양 살아온 것 같습니다.
  어머니께서 간절하게 소원하신 ‘큰’ 아들이 그럴듯한 아파트나 한 채 소유하고 제 가족이나 겨우 살피는 아들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배를 채우고 가족을 돌보는 일은 금수(禽獸)도 하는 행동 아니겠습니까. 채지가(採芝歌)의 “뿌리 없는 저 나무가 지엽 어찌 무성할까”라는 가사에서 일깨워 주듯이, 저는 이번 생에 저의 전생뿐 아니라 직선조ㆍ외선조 집안의 겁액을 함께 다 풀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하고, 또한 진정으로 남을 잘 되게 하는 일에 헌신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어머니.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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