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주님의 귀국 기착지 서산 태안
교무부 이정만
도주께서 정사년 四월에 친계 가족을 거느리고 만주를 떠나 뱃길로 태인으로 향하셨던바 도중에 폭풍을 맞아 배는 서산 태안에 닿으니라. 이곳을 두루 다니면서 살폈으되 상제께서 가르치신 곳이 아닌 듯하여…. (교운 2장 9절)
도주님께서 봉천명(奉天命)하신 지 9년 만인 정사(1917)년 2월에 상제님의 삼계 대순(三界大巡)의 진리를 감오(感悟)하시고 공부를 계속하시던 중에 “태인(泰仁)에 가서 나를 찾으라”라는 계시를 받으셨다. 이후 4월에 도주님께서는 그 계시를 받들어 만주를 떠나 뱃길로 고국으로 향하셨다. 위의 『전경』 구절은 그 과정에서 배가 폭풍으로 서산(瑞山)에 닿아 태안을 둘러보신 성적(聖蹟)에 관한 기록이다. 도전님께서는 이 일에 관하여 “도주님께서 … 도를 펴시려고 물길을 통해 조선으로 나오셔서 태안을 거쳐 태인으로 가셨다. 도주님께서 겪으신 자체는 지나가며 모두 겪어야 하는 것을 겪으신 것이다.”01라고 하셨다. 도주님께서 수로를 이용해 귀국하시다가 서산에 닿아 태안을 거쳐 가신 일련의 모든 행보가 필연적인 일이었다는 의미다. 따라서 그와 관련된 도주님의 발자취를 추적해 보는 것은 도주님의 생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번에 그 연구의 하나로 도주님께서 승선하셨던 귀국선이 닿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서산시 성연면(聖淵面)의 옛 포구 일대를 중심으로 답사하였다. 『전경』에는 도주님께서 타셨던 배가 닿았던 지역을 ‘서산 태안’으로 기록하고 있다. 지금은 서산시와 태안군이 분리되어 있지만, 도주님 귀국 당시에는 서산군02에 속한 태안면03이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도주님께서 풍랑을 만나 다다른 지역을 서산시 성연면의 포구로 추정하는 것은 이에 관해 도전님의 말씀을 모셨던 지금은 작고하신 어느 임원의 다음과 같은 증언 때문이다.
옥황상제님께서 봉천에서 성연에 오셨습니다. 성연면이 있거든요. 인천하고 서산하고 여객선이 다니는 선창이 있거든요. 거기를 다니셨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거기서 서산으로 태안으로 가셨다고 합니다. 태안이 클 태 자 편안할 안 자 아닙니까. 그래서 아마 태안에 계셨지 않았나 싶습니다.04
위의 증언을 통해, 도주님께서 승선하셨던 배가 닿았던 지역을 추정할 수 있는 두 가지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첫 번째는 그 지역이 서산의 성연면이라는 점이고, 두 번째는 서산과 인천으로 오가던 배가 드나들던 선창(船艙: 물가에 다리처럼 만들어 배가 닿을 수 있게 한 곳)이 있던 지역이라는 점이다. 이런 단서들을 통해, 서산시 성연면에 속한 마을들 가운데 정사(1917)년에 배가 드나들었던 지역을 조사하였다. 그 결과 성연면의 9개 리 가운데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과거에 명천리와 해성리 두 지역에 포구가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 도주님의 서산 태안 추정지(출처: 네이버 지도 위에 별도 표기)
여주에서 출발하여 차로 2시간쯤 가면 서산 IC에 다다른다. 서산(瑞山)은 ‘상서롭다’라는 뜻의 ‘서(瑞)’라는 지명에서 암시하듯 명당 터로 전해지는 지역 중의 하나다. 풍수지리상으로 선녀가 비파를 타는 형상인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과 금학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인 ‘금학포란형(金鶴抱卵形)’의 형세다.05 게다가 서산의 중심지는 선녀가 산다는 선경의 의미를 담고 있는 옥녀봉의 아래 자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옥녀봉이 있는 지역은 강원도 고성, 경남 함양, 전북 진안 등 7~8군데 뿐이라고 한다.06 서산 IC에서 차로 10여 분 더 가면, 성연면에 있는 두 개의 포구 중 하나인 옛 명천포구 부근의 명천3리 마을회관에 도착한다. 눈앞에 펼쳐진 주변 풍경은 그저 평범한 농촌 마을이다. 이 마을 유래에 대한 사전지식 없이 얼핏 본다면, 배가 분주히 드나들던 옛 바닷가 마을의 모습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주변을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보면 이 마을이 예전에 포구가 있었던 장소였음을 짐작게 하는 흔적들이 발견된다. 먼저 ‘명천3리 삼거리’ 버스정류장 앞에 세워진 표지석에 새겨진 ‘배터삼거리’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과거 이 인근에 배 터가 있었음을 짐작게 한다. 또한 여기에서 북쪽 해성리 방향으로 가는 도로 이름이 ‘선창길’이라는 점도 과거 이 부근에 선착장이 있었음을 알게 하는 흔적이다. 명천3리 마을회관에서 선창길을 따라 도보로 10분 정도 가면 옛 명천포구가 있던 장소07에 다다른다. 그 지점에 명천포구에 관한 유래가 기록된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명천포구는 조선 시대에 인천항과 서울 한강으로 배가 오가며 나라에 세금으로 내던 곡물을 운반하던 포구였다. 또한, 8ㆍ15 광복이 되고 2~3년 후에는 명천항과 인천항을 오가는 주 교통수단으로 화물선과 여객선이 운항함으로서 그 당시 육로교통의 불편을 해소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면서 대성황을 이루었던 포구였다. 그러나 1975년경부터 서산 지역에 육로교통이 발달하면서 이 포구의 배 운항이 중단되었고, 이후 1984년 11월에 간척지 사업으로 대호방조제가 축조되면서 포구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였다.08
▲ 명천포구 입간판(촬영: 2024년 6월)
▲ 18세기 중엽에 제작된 서산 지역 조선지도(출처: 해동지도 상 p.108), (1) 성연면, (2) 명천창(조세로 올릴 곡물을 보관하던 명천리에 있던 창고)
명천포구에서 선창길을 따라 다시 10여 분 걸어가면 성연면의 또 다른 포구가 있었던 장소가 나온다. 여기는 행정구역상 해성리인데 명천리 지역과 아주 인접한 마을이다. 이 지점에는 명천포구처럼 과거에 포구가 있던 장소였음을 식별할 수 있는 안내판은 없다. 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성연면 선창길 137’ 일대가 과거 해성리 선착장이 있던 장소다. 그 기간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이 포구에도 활발하게 배가 드나들었고, 1970년대 후반경에 이 포구의 여객선도 끊겼다고 한다.09 그렇다면 도주님께서 승선하셨던 배가 닿았던 지점은 어디일까? 명천리와 해성리 두 군데의 포구 모두 가능하지만, 명천포구가 더 유력해 보인다. 명천포구에는 조선 시대부터 인천항과 서울 한강으로 배가 드나들었고, 『서산시지』에 의하면, 1920년대에도 인천항을 왕래하는 정기여객선이 매일 또는 격일로 운행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0 또한, 옛 포구가 있던 지점에 고증을 통해 세운 안내판이 여기에만 있다는 점도 그런 가능성을 더해준다. 해성리 포구는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일정 기간 여객선들이 활발히 드나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증언자가 경험한 시기가 도주님께서 귀국하신 이후의 1930년대 경이고 문헌상으로도 이 포구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도주님께서 귀국할 당시인 정사(1917)년에 해성리에 포구가 있었는지 명확히 알기가 어렵다.
▲ 해성리 포구 추정지. 전봇대 우측으로 선착장이 있었다고 전한다. (촬영: 2024년 6월)
도주님께서 풍랑을 만나 닿은 곳으로 추정되는 위치는 성연면의 명천포구이며 이후 가신 지역은 남서쪽 방향에 있는 태안이었다. 도전님께서 “우리의 일은 모든 과정을 겪어야 한다. 안면도(安眠島)는 우리 도인들로서는 뜻이 깊은 곳이다. 도주님께서 봉천(奉天)에서 귀국하셔서 처음에 크게 편안하다는 뜻을 지닌 태안(泰安)에 닿으셨는데 천리포, 만리포를 거쳐 첫발을 디디신 곳이 편안하게 쉰다는 뜻을 지닌 안면도이다.”11라고 말씀하셨다. 태안을 살펴보신 도주님께서 다음으로 가신 지역은 현재의 태안군 소원면 의항리의 천리포, 모항리의 만리포이다. 이후 도주님께서는 안면도로 향하셨다. 이번 답사를 통해 얻은 성과는 도주님께서 귀국할 당시 배가 도착했던 가장 유력한 장소로 추정할 수 있는 곳이 서산시 성연면의 명천 포구였음을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돌아오는 길에 옛 포구 지역을 바라보고 있자니, 도주님께서 승선하신 배가 바다에서 거센 풍랑을 만나 헤쳐 가는 모습이 떠올랐다. 상제님께서 구제창생하시려는 뜻을 받들어 행하신 도주님의 수많은 공부 하나하나가 이처럼 고난을 극복하면서 이루어 내셨던 일이었다. 도주님의 크나큰 수고로움으로 전해진 숭고한 도를 깊이 깨달아 정성을 다해 받들어 나가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01 「도전님 훈시」(1989. 5. 8). 02 서산군은 기존의 서산군, 태안군, 해미군으로 분리되어 있던 3개 군이 1914년 일제가 전국적인 행정구역 통폐합을 진행하여 통합되어 만들어진 지역이다. 03 태안(지금의 태안읍)은 고려 충렬왕(忠烈王, 1236~1308) 24년(1298)에 소태(蘇泰)라는 지명이 개칭되면서 비롯된 지역으로, 본래 오랫동안 태안군의 군청 소재지로 발달하여 온 중심지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행정구역이 개편될 때 종래의 태안군이 서산군에 폐합(廢合)됨으로서 태안읍은 서산군에 속한 태안면으로 격하되었다. 태안면은 1973년 7월에 면에서 읍으로 승격된다. 그러므로 『전경』 1판이 발행된 1974년 당시를 기준으로 한다면, 태안은 서산군에 속한 태안읍을 가리킨다. 04 故 성기석 교감 인터뷰 (2004. 5. 12). 05 『서산시지』에는 금학포란형을 ‘금계(金鷄)가 알을 품고 있는 형상’으로 보고 있는데, 필자가 보기에는 ‘금학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 적절할 것 같아서 수정하였다. 06 서산시청 홈페이지, 「서산의 역사와 유래」 참고. 07 입간판이 세워진 위치는 ‘성연면 선창길 58’ 부근이다. 08 명천포구 지점에 세워진 입간판 내용 참고. 09 마을 주민 정경분(1925년生) 씨 인터뷰(2014. 4. 7); 마을 주민 박정자(1942년生) 씨 인터뷰(2014. 4. 7); 마을 주민 임간난(1936년生) 씨 인터뷰(2024. 6. 7). 10 서산시지 편찬위원회, 『서산시지 제4권-서산의 산업과 경제』 (대전: 청오 인쇄소, 2002), p.213 참고. 11 「도전님 훈시」(1988.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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