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소에서 벗어난 진정한 해방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고-
문정20 방면 선무 권희정
살다 보면 많은 일을 겪는다. 난관에 부딪혔을 때 극복하는 사람이 있지만 자포자기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어려운 일에 처하면 상처받고 움츠러들며 심지어는 일 자체에 회의를 느끼며 살았다. 이런 나에게 나치 강제 수용소에 끌려가 겪은 체험을 적은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삶에 큰 동기를 줬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인간의 존엄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는 곳이다. 신경학자이자 심리학자인 프랭클은 나치에 의해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자신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오게 된다. 이곳에 도착한 사람 중 90%는 가스실에서 죽고, 일할 수 있는 10% 사람만 살아남는다. 그는 모든 털은 깎여지고 오직 안경과 허리띠만 남은 채 수용소 생활을 시작한다. 하루하루가 고문과 노역이고 언제라도 가스실에 끌려갈 수 있는 상황. 프랭클은 ‘꼭 살아서 죽음보다 못한 수용소의 생활과 사람들 심리를 세상에 알려야겠다’라는 사명감으로 견딘다. 부종과 동상으로 터진 발을 신발에 짓이겨 넣고 하루하루를 버티며 수감자들의 심리를 살핀다. 수용소는 과거의 지위와 영광은 고사하고 이름도 없이 수감 번호만으로 정체성을 찾아야 하기에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내면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수감자의 심리 상태는 3단계로 나누어진다. 1단계는 수용소에 잡혀 온 충격과 언제 올지 모르는 죽음의 ‘공포’다. 하지만 이러한 공포는 며칠이 지나면 ‘무감각’의 2단계가 된다. 시체 앞에서도 수프를 먹고, 맨발로 수 km의 눈길을 걸어온 동료가 있는데도 빵 조각을 떼어먹느라 정신이 없는 수감자들은 도덕이나 윤리, 규범보다는 오직 생존에만 관심이 있는 상태가 된다. 몸이 약해져 일할 수 없게 되면 언제든 가스실로 가야 하는 공포의 일상에서도 사소한 것 하나가 행복이 된다. 건강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깨진 유리 조각으로 면도하며 생존을 이어가거나, 잠들기 전에 이를 잡고, 일을 마치고 수프에 콩알을 공평하게 넣어주는 줄에서 배식받을 때의 즐거움 등 죽음의 상황에서도 행복을 느낀다. 수감자들은 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해 종교나 예술 활동을 하고, 행복한 과거를 회상하며 시간을 보낸다. 이렇게 반복되는 일상에서 어느 날 한 수감자가 전쟁이 한 달 후인 3월 30일에 끝난다는 꿈을 꿨다며 좋아한다. 하지만 29일이 되어도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그는 29일에 발생한 고열로 30일에 죽음을 맞이한다. 또 성탄절 기간부터 새해를 맞이하는 일주일 동안 전염병이 돌거나 사망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프랭클은 사람의 심리가 죽음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는 발견을 한다. 그래서 그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 미래 어느 강당에서 현재의 수용소 이야기를 하는 자신을 상상하거나 아내와 즐거웠던 기억을 회상하며 부단히 노력한다.
프랭클은 어느 날 자신이 가스실로 갈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자 친구에게 유언을 남긴다. “내가 만약 아내에게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면, ‘내가 매일 같이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그녀를 사랑했다는 것을, 그녀와 짧은 결혼생활이 이 세상 모든 것보다 심지어 여기서 겪은 그 모든 일보다 나에게 의미가 있었다’라고 전해주게”라고 하는데, 가족과 미래에 대한 희망 그리고 삶의 의미가 시련 속에서 얼마나 큰 버팀목이 되었는지 알 수 있다. 3단계는 수용소를 나간 후의 ‘비통과 환멸’ 상태다. 수감자들은 그토록 바라던 자유를 얻고도 덤덤했으며, 주변 사람들의 상투적인 위로와 진심으로 이해해 주지 않는 상황에 실망한다. 또 삶의 버팀목이었던 미래가 혹독하게 견뎌야 하는 현실임을 알게 되면서 더욱 비통해진다.
입도치성을 모시고, 겁액을 풀기 위해 시작한 나의 수도는 어느 순간 의무감이 되었고, 수도하며 겪는 어려움은 두려움이 되었다. 때로는 본분을 망각한 채 체통을 저버리는 일도 있었다. 때때로 찾아오는 회의감은 평범한 삶과 수도 사이의 갈림길에서 고민하게 했다. 그러나 이 책은 삶의 의미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책에 묘사된 수용소 생활은 너무 끔찍해 현실에 일어난 일이라는 게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큰 어려움 없이 살아온 내 삶과는 큰 차이가 있다. 하지만 시련 앞에 극복할지 아니면 자포자기하며 살지는 자신에게 달렸다는 점은 나나 프랭클이나 차이가 없다. 수용소라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삶의 의미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포기하기도, 주인공처럼 버티기도 하는 힘이 되는 것이다. 끔찍한 수용소 안에서도 어떤 삶을 살지 선택하는 자유는 자신에게 있었다. 같은 수감자이면서도 동료를 감시하는 카포가 되어 폭력을 일삼고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기도 하고, 하루 한 번뿐인 식사 시간을 못 지키면 한 조각의 빵과 한 그릇의 수프조차도 얻지 못하고 굶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자기 빵 한 조각을 남겨 굶은 동료에게 주는 사람도 있었다. 신앙이 있었던 프랭클은 하느님은 물론 죽은 가족도 심지어는 살아 있는 사람도 늘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고 믿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과 사람의 존엄성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프랭클이 생존 본능만 있는 수용소에서 찾게 된 진정한 삶의 의미는 ‘인간 존엄성’이었다. 수용소에서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것이었지 생존이 아니었다. 진정 두려운 것은 하느님이었다. 1997년 93세의 나이로 사망한 프랭클이 상제님을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마음속 하느님과 상제님이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프랭클은 수용소에서 나온 이후 경험한 것을 토대로 ‘로고 테라피(의미요법)’라는 심리치료를 개발한다. ‘의미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라며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치료법을 내놓았다.
그는 ‘삶의 의미’를 찾는 세 가지 방법을 얘기한다. 첫째는 자녀를 돌보거나 공부하는 등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둘째는 사랑하는 가족을 만나기 위해 끝까지 살아남았던 수감자처럼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만남을 가질 때’, 셋째는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할 때’라고 말하며 시련 속에 오는 고통을 인간적인 성취와 자신을 발전시키는 계기로 삼으라고 한다. 또 인생을 두 번째 사는 것처럼 살라고 말한다. 지금 나 자신이 하려고 하는 잘못된 행동(예를 들어 화를 내는 행동)이 첫 번째 인생에서 그릇되게 했던 행동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반성하고 성장시키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프랭클은 자신을 애정 어린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아직 인생에 이루지 못한 일이 있고 그 일을 이룰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고,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면 어떤 곤경 속에서도 참고 견딜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 말에서 “하늘이 사람을 낼 때에 헤아릴 수 없는 공력을 들이나니라 … 이같이 공을 들여 어렵게 태어난 것을 생각할 때 꿈같은 한 세상을 어찌 잠시인들 헛되게 보내리오”라는 『전경』구절이 떠올랐다. 또한 “권선무는 선각들이 많은 정성을 들여 만난 일꾼이에요”라는 선각의 말씀과 함께 노쇠하신 부모님 얼굴도 생각이 났다. 내가 태어나고 살아가는 모든 것이 은의 속에 있으며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는 사랑스러운 존재가 나인 것이다. 부끄럽지만 나는 프랭클과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내 믿음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를 믿고 마음을 정직히 하는 자는 하늘도 두려워하느니라”, “이제 범사에 성공이 없음은 한마음을 가진 자가 없는 까닭이라. 한마음만을 가지면 안 되는 일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무슨 일을 대하든지 한마음을 갖지 못한 것을 한할 것이로다. 안 되리라는 생각을 품지 말라”라는 상제님 말씀처럼 믿음으로 어떤 시련에도 끝까지 극복하고자 한다면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곁엔 항상 대순진리가 있고, 선각들과 선령신, 천지신명과 상제님의 보살핌이 있으니. 수용소에 있던 사람 중에는 원망으로 일상을 보내거나 시간만 축내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난관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고 자신을 성장시킨 사람도 있다. 나도 프랭클처럼 자신을 성장시키고 많은 사람을 굴레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후로는 천지가 성공하는 때라.”라는 『전경』구절에서 천지가 성공하는 때 말라 떨어질 것인지 아니면 큰 열매를 맺을지는 의로운 사람에게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늘의 일에 동참하여 참된 결실을 이루는 것이 지금까지 받은 은혜에 보은하는 길이며 내 인생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사실 수용소는 내 안에 있지 환경에 있지 않다. 어려움은 결실을 위한 과정이다. 내 뜻대로 안 된다고 투정할 필요가 없다. 하늘과 자신을 믿고 앞으로 나가면 된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하나뿐인 인생을, 어찌 보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소중한 삶을, 나를 얽매이게 하는 수용소에서 벗어나 모두가 진정한 해방을 얻을 수 있는 날을 바라며 오늘도 의미 있는 삶을 살고자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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