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이화에 관한 오해와 이해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최치봉
1. 서론
‘무위이화(無爲而化)’는 고전(古典)의 구절이 일상어로 사용되는 대표적 사례이다. 즉 고전에 나타난 철학적 혹은 사상적 바탕을 가진 용어의 뜻이 일상어로 변용되면서 다양한 뜻을 가지게 된 것이다.
1) 힘들이지 않아도 저절로 변하여 잘 이루어짐.01 2) 하는 일 없는 듯해도 교화가 됨.02 3)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아도 일이 저절로 이루어진다.03
사전적 정의로 드러나는 일상어로서 무위이화의 의미는 어떤 일에 대하여 애쓰거나 힘쓰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주로 낙관론적 삶의 자세를 언급하는 데 사용된다. 근래의 블로그나 SNS상에서 무위이화는 정치에 관한 비평이나 삶에서의 욕심을 내려놓는 것에 비유되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일상어로의 정의는 자칫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삶이나, 인생에 대한 방관적 태도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 애쓰지 않고도 이루어진다는 것은 특히 수도의 측면에서 볼 때, 나의 노력과 상관없이 모든 일이 상제님의 덕화로 풀릴 것이라는 방관적 자세와 나아가 이미 운수를 받을 이는 정해져 있다는 운명론적 혹은 정명론(定命論)적 시각으로 편향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무위이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위해 일상어의 측면에서 벗어나 본래 의미를 반추해볼 필요가 있으며, 나아가 고전에서의 본래 의미가 대순사상에서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변용되어 다른 의미를 도출하고 있는지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본 글에서는 우선 도가의 『노자』와 유가의 『논어』에서 무위이화에 관한 사상적 배경을 살펴보고, 대순사상에서 무위이화의 의미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2. 도가의 ‘무위이민자화(無爲而民自化)’
현재 일상어로 사용되고 있는 무위이화는 『노자』 통행본 57장의 “아무위이민자화(我無爲而民自化)”의 준말이다. 해당 장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정(正)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기(奇)로 군사를 부리며, 일을 만들지 않음으로써 천하를 취한다. … 그러므로 성인이 이르기를, 내가 무위하니 백성들이 스스로 교화되고(我無爲而民自化), 내가 고요함을 좋아하니 백성들이 스스로 바르게 되며, 내가 일을 만들지 않으니 백성들이 스스로 넉넉해지며, 내가 무욕하니 백성들이 스스로 순박해진다고 했다.04 내가 감정에 휩쓸리지 않으니 백성은 저절로 맑아진다.05
『노자』는 나라를 다스릴 때는 ‘정(正, 정상적인 수단)’에 의지하고, 군사를 움직일 때는 ‘기(奇, 비정상적인 수단)’에 의지하며,06 천하를 얻을 때는 ‘무사(無事)’에 의지해야 한다고 한다. 세 가지 중 노자의 방점은 무사에 있다. 위정자가 전쟁과 같은 국가적 사업을 많이 시행할수록 백성의 삶은 괴로워지기 때문이다. 노자는 세상에 가혹한 법령과 금지하는 법규가 많을수록 국가는 더 혼란에 빠진다고 보았다. 또한 사람들의 지식이 많아지고 기술이 발달할수록 희귀한 재물이 더 생겨나며, 희귀하고 부족한 물건이 늘어날수록 도적은 많아진다고 보았다.07 이에 노자는 성인의 말을 빌려 무위(無爲), 호정(好靜), 무사(無事), 무욕(無欲), 무정(無情)할 것을 언급한다. 곧 위정자에게 나라나 백성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이루어지는 모든 인위적 행위를 자제하라고 당부하는 것이다.
노자의 시각에서 위정자가 백성들에게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세세히 간섭하는 것은 백성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백성을 어떻게 통제하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위정자 스스로가 욕심과 사사로운 정을 버리고 마음의 흔들림이 없는 고요한 가운데서 인위적인 행위나 일을 하지 않아야 하는 것에 있다. 즉 위정자 스스로가 청정한 가운데 욕심이 없으면, 백성이 스스로 교화되고 다스려질 뿐만 아니라 천하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위이화는 이러한 노자의 사상 가운데서 발췌되어 사용되는 용어이다. 무위함이란 인위적 작위(作爲)가 없음을 뜻한다. 도가에서 말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은 인공을 가하지 않은 그대로의 자연을 말한다. 『노자』 25장의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으며,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08에서의 자연은 도의 본래 모습을 말하고 있다. 즉, 작위는 노자에서 언급되는 도(道)나 자연(自然)과 상반된 개념으로, 우주의 이법이나 최고 원리에 반하여 이루어지는 인간의 부자연성을 말한다. 그리하여 도가에는 도(道)가 그대로 드러난 상태를 무위자연으로 보았고, 인간은 만물의 자연스러운 성장과 발전을 도울 뿐, 감히 함부로 작위 하지 않을 것을 역설한다.09
3. 유가의 ‘무위이치(無爲而治)’
앞서 살펴보았듯이 무위이화의 어원은 위정자의 정치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리하여 『노자』의 ‘무위이민자화(無爲而民自化)’에서 보이는 함의를 바탕으로 유가에서 유사한 사상을 찾아보자면 『논어』의 ‘무위이치’를 언급할 수 있다.
공자가 말하길, 무위로 다스리신 자는 순임금일 것이다. 무엇을 하였겠는가? 몸을 공손히 하고 바르게 남면10하였을 뿐이다.11
주자(朱子)는 해당 구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무위로 다스렸다는 것은 성인의 덕이 성대함에 백성이 교화되어서 작위하는 바가 있음을 기다리지 않는 것이다. 유독 순임금만을 일컬은 것은, 요임금의 뒤를 이었고 또 인재를 얻어 여러 직책을 맡겼는데, 이 때문에 더욱 유위의 자취를 볼 수 없어서이다. 몸을 공손히 한다는 것은 성인의 경덕(敬德, 공경하는 덕)의 모양이니, 이미 작위하는 바가 없으면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은 것일 뿐이다.”12
무위이치에 관해 주자가 말하는 정치와 덕의 관계는 위정자가 덕으로써 정치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전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자신이 덕을 닦으면 사람들이 자연히 감화되어 위정자가 작위하기 전에 백성들이 스스로 덕을 행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들을 감화하는 것은 정치나 정사(政事)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위정자의 덕에 있다. 정(政)은 사람들의 부정을 바로잡는 것이기 때문에 작위함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백성들에 온전한 삶과 위민(爲民)의 실현은 좋은 정치가 아니라 위정자의 덕으로 실현되는 것이다.13 그리하여 『논어』에서 무위이치란 위정자 자신의 덕을 닦아 경덕을 드러내면 사람들은 자연히 감화되어 위정자가 작위하지 않아도 다스려진다는 것이 된다. 『논어』에서 그 ‘무위로 다스린 자’의 대표적 인물로 순임금을 제시하고 있으며, 위정자의 자리에 있으면서 작위하지 않고 여러 인재에게 정사를 맡김을 무위라고 보고 있다. 제왕학에 관한 대표적 고전인 『정관정요(貞觀政要)』에서도 이와 같은 논지로 무위를 논하고 있다.
신이 듣건대, “신하를 아는 사람은 군주만 한 이가 없고 아들을 아는 사람은 아버지만 한 이가 없다.”고 하니, 아버지가 그 아들을 알지 못하면 한 가정을 화목하게 할 수 없고, 군주가 그 신하를 알지 못하면 온 나라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온 나라가 다 편안하면 한 사람(天子, 위정자)에게 경사스러운 일이 있게 되어, 반드시 충성스럽고 어진 신하가 보필함을 힘입게 되고 뛰어난 사람들이 관직에 있으면 여러 공적이 쌓여 하는 일이 없어도 교화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ㆍ순ㆍ문왕ㆍ무왕이 앞 시대에서 칭송된 것은 모두 사람을 알아보는 데에 명철하여 많은 선비가 조정에 가득했기 때문입니다.14
위정자가 덕을 가지면 뛰어난 인재들이 모여들게 되고, 이에 따라 위정자는 작위의 정치와 정사를 하지 않더라도 자연히 백성의 교화가 이루어지게 된다고 보고 있다. 『정관정요』에서는 이러한 논지에서 위정자는 마땅히 인재를 알아보고 덕이 있는 신하를 등용해야 함을 언급하고 있다. 유학의 목적은 명덕(明德)을 밝혀 백성을 새롭게 하고, 지극한 선함에 머무는 것이다. 이는 곧 『대학』의 삼강령(三綱領)이며, 팔조목(八條目)인 “격물→치지→성의→정심→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순서에 따라 이루어진다. ‘치국’을 해야 하는 위정자가 정심ㆍ수신을 이루지 못하고 덕을 밝히지 못하게 되면 위정자로서 그의 행위는 작위에서 이루어지는 유위의 정치가 되어 혼란을 초래한다.15 즉 선한 다스림인 ‘무위이치’를 이루지 못한 것이 된다.
위정자에게 덕이 있으면, 곧 덕이 있는 신하들이 스스로 모여든다. 이는 모든 별이 하늘의 중추인 북진(北辰, 북극성)을 향하는 것과 같다. 중심의 별은 움직이지 않고 모든 별이 자연스럽게 이를 향하는 것처럼,16 역대의 왕들은 순임금을 표본으로 하여 자신의 덕을 닦아 무위로 백성을 교화하는 ‘무위이치’를 이루고자 하였다.
4. 대순사상의 ‘무위이화(無爲而化)’
『전경』에서는 ‘무위이화’와 ‘무위화’17가 언급된다. 『전경』을 중심으로 무위이화를 이해할 때 이는 사의(四義)와 신도(神道)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생ㆍ장ㆍ염ㆍ장(生長斂藏)의 사의(四義)를 쓰나니 이것이 곧 무위이화(無爲而化)니라. (교법 3장 27절)
신도(神道)로써 크고 작은 일을 다스리면 현묘 불측한 공이 이룩되나니 이것이 곧 무위화니라. 신도를 바로잡아 모든 일을 도의에 맞추어서 한량없는 선경의 운수를 정하리니 제 도수가 돌아 닿는 대로 새 기틀이 열리리라. (예시 73절)
위의 구절들을 살펴보면, 신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다스림(治)’은 현묘하고 미루어 헤아릴 수 없는 공적을 이루게 된다. 또한 “다스림의 기준을 도의에 맞춘다”는 것은 생장염장의 사의에 부합하여 이루어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생ㆍ장ㆍ염ㆍ장의 사의는 각각 시생(始生)ㆍ장양(長養)ㆍ성숙(成熟)ㆍ수장(收藏)을 뜻하며,18 천도(天道)로 말하면 원형이정이 되고, 지도(地道)로 말하면 춘하추동이 되며, 인도(人道)로 말하면 인예의지가 된다. 이러한 사의를 써 삼계를 다스리는 주체는 마땅히 신앙의 대상이신 구천상제님이시다.
정리하면, 구천상제님께서 사의를 기준으로 신도를 통해 삼계를 다스리는데, 이 다스림은 작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무위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또한 이 무위의 공적은 현묘하여 범인(凡人)이 미루어 짐작할 수 없는 것으로, 우주의 만유가 유형과 무형으로 화성(化成)19됨이 구천상제님의 덕화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한다.20 고전과 비교할 때, 전체적인 개념에 있어서는 주체가 대상에게 ‘무위로 화’한다는 뜻으로 의미가 상통한다고 볼 수 있지만, 대순사상에서 말하는 무위이화의 ‘화(化)’는 앞서 도가와 유가에서 말하는 교화(敎化)가 아니라 조화(造化)임을 유념해야 한다. 이외에도 기존의 도가와 유가에서 말하는 무위이화와 대순의 무위이화는 주체와 대상의 범주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도가와 유가에서의 무위의 주체는 사람인 위정자이고 교화의 대상 역시 사람인 백성을 가리킨다. 즉 사람이 사람에게 행하는 교화는 무위의 덕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언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대순사상의 무위이화는 우주의 만유를 생성하고 기르는 최고신의 조화가 무위함을 언급한 것이다. 즉 조화의 주체는 구천상제님이시고 조화의 대상은 사람을 포함한 우주 만유의 삼라만상이 된다.
종도들이 걱정하는 일을 상제께 고하면 그 걱정은 항상 무위이화로 풀렸도다. 그러나 고한 뒤에 다시 걱정하면 상제께서 “내가 이미 알았으니 무슨 염려가 있느냐”고 종도들을 위로하셨도다.(행록 4장 52절)
위의 구절에서 무위이화는 일상어로 이해될 수도 있다.21 일상어로 이해하면, 종도들이 상제님께 알린 걱정은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그 일이 해결됨을 말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종도들이 상제님께 알린 걱정과 문제들을 상제님이 인지하고 직접 풀어주시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천지를 무위로 조화하듯이 상제님께서 무위의 조화로 인사의 일을 해결해 주신 것이라 할 수 있다. 종도들의 걱정이 무위이화로 풀렸다는 구절에서 생각해볼 점은, 종도들의 걱정이 과연 “개인의 삿된 걱정이었겠는가?” 하는 것이다. 『노자』에서 성인은 무위(無爲), 무사(無事), 무욕(無欲)을 바탕으로 교화한다고 하였고, 공자나 주자 역시 성인은 무위로 다스린다고 하였다. 성인도 이러할진대 하물며 상제님께서 개인의 욕망이나 사사로운 일을 해결해 주셨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상제님께서 하신 여러 공사는 무위로 이루어진 일이며, 천지공사 역시 사적인 것이 아니고 만유를 살리기 위한 것이다. 그리하여 상제님은 작위가 아닌 무위로 행하시므로, 상제님의 조화로 인사의 일이 해결되었다면 그것은 종도가 바름을 행하기 위한 측면이자, 상제님의 천지공사를 받들어 행하는 가운데 생겨난 걱정을 해결해 주신 것으로 볼 수 있다.
5. 결론
대순사상에서 무위이화는 비록 고전에서 유래한 용어이지만, 주체와 대상의 범주에서 도가와 유가와는 다른 개념임을 살펴보았다. 도가와 유가의 무위이화는 위정자가 백성을 향한 교화나 다스림이 무위의 덕으로 실현되는 이상적인 정치형태를 말하고 있는 반면, 대순사상에서는 상제님의 ‘무위한 조화’ 혹은 ‘무위의 조화’를 통해 삼계의 삼라만상이 생성함을 말한다. 즉, 최고신의 세상을 향한 조화가 무위로 일어남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무위이화를 수도인의 측면으로 가져와 의미를 확장하면, 사람이 사람에게 행하는 교화(敎化)는 무위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을 가진다. 여기서 교화는 자연 그대로 도의 순수성을 지켜나가라는 도가의 개념이나 백성들을 새롭게 하여 선에 머물게 하는 유가의 개념이 아니라, 대순진리 즉 상제님의 천지공사와 상생의 진리를 체득하고 전파함을 말한다. 천지공사의 내용을 순회ㆍ연포하는 것이 ‘천지의 대순’이며,22 천지공사를 널리 알리는 것이 덕을 펴는 것이다.23 그러므로 상제님의 천지공사를 받들어 나아가는 수도자의 입장에서는 천지공사의 기준에 맞는 수도를 행함과 동시에 이를 널리 알리려는 덕을 가져야 한다. 천지공사는 무위의 것이므로, 이를 받들어 알리는 과정에도 무사(無私)24하여 사념(私念),25 사정(私情),26 사심(私心)27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수도과정에서 항상 상제님께 심고(心告)를 드린다. 하지만 우리는 복권 당첨과 같은 사사로운 욕심을 고하지는 않는다. 수도인이라면 이는 말하지 않아도 이치에 맞지 않음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앞서 언급한 “종도들이 걱정하는 일을 상제께 고하면 그 걱정은 항상 무위이화로 풀렸도다.”의 구절에 보이는 무위이화와 심고의 관계를 공과 사 그리고 대사(大事)와 소사(小事)의 관점에서 깊이 생각해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졸음운전을 하면서도, 나는 상제님께 심고를 드렸으니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 마음을 놓고 덕화만을 바라고 있다면 그것은 과연 올바른 행동이겠는가? 도전님께서는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사람으로서 할 일은 사람이 하고 나서 상제님 덕화를 바래야 한다. … 덕화라고 할 일이 아니고 인사(人事)는 인사(人事)로 처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것까지 상제님께 의존하면 안 된다. 병을 낫게 하고, 재수있게 해주고, 위험을 모면하게 해주는 그런 도가 아니다. 우리의 목적은 도통이다. 작은 것을 받고 말 것이냐! … 덕화(德化)만 믿고 나가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소소한 데 덕화를 생각하여 마음을 쓰면 신명들에게 미움을 살 것이다.28
심고를 통해 덕화를 입는 것과 일이 무위이화로 풀리는 것은 마땅히 도전님의 말씀을 통해 이해해야 한다. 물론 기복 신앙의 측면은 모든 종교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이는 대순진리에 대해 아직 생소하고 천지공사의 공적인 측면과 도통이라는 대순진리회의 목적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초심자를 대상으로 한 방편으로 언급되어야 한다. 대순진리의 실천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삶에 있어서 이를 구현하고자 하는 수도인은 마땅히 일상의 일에서 자신의 노력으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한편 천지공사를 받드는 공적인 일에서는 상제님의 덕화를 믿어 간절히 심고 드리고, 그 행함에 최선을 다하면 무위이화로 풀리게 된다. 상제님께서는 생장염장의 사의로 이루어지는 우주 법칙을 무위하게 조화하신다. 여기에는 삿된 욕망이나 사사로운 정이 끼어들 틈이 없다. “가르치고 이끌어서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라는 교화의 넓은 의미에서 우리는 타인을 교화할 때, 작위적인 교화가 아니라 무사(無私)에 바탕을 둔 무위이화의 교화29를 실천해야 한다. 상제님께서 ‘무위의 조화’로 이룩하신 천지공사를 받들고 따르기 위해서는 수도인 역시 ‘무위의 교화’를 통한 덕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심고에 있어서도 이런 삿됨이 없는 수도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걱정을 고할 때, 비로소 상제님께서 무위이화로 풀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01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https://stdict.korean.go.kr/). 02 전관수, 『한시어사전』 (서울: 국학자료원, 2007). 03 조기형, 이상억, 『한자성어ㆍ고사명언구사전』 (서울: 이담북스, 2011). 04 『노자』 통행본 57장, “以正治邦, 以奇用兵, 以無事取天下. … 故聖人云, 我無爲而民自化, 我好靜而民自正, 我無事而民自富, 我無欲而民自樸, 我無情而民自淸.” 05 돈황(敦煌)본 『노자』에는 “我無情而民自淸”의 구절이 추가되어 있다. 06 “以正治邦, 以奇用兵” 이 두 구절은 『한서』 「예문지」의 병서략조에서는 권모술수의 종류에 관해 설명하고 있는데, 이 두 구절로 시작한다. 기와 정은 병가에서 사용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리링, 김갑수 역, 『노자-실증적 『노자』읽기』 (경기 파주: 글항아리, 2019), p.346. 07 리링, 위의 책, pp.344-345 참조. 08 『노자』 통행본 25장,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 09 『노자』 통행본 64장, “以輔萬物之自然, 而不敢爲.” 10 남면(南面) : 임금의 자리에 오르거나 임금이 되어 나라를 다스린다는 뜻으로, 임금이 남쪽을 향해 신하와 대면한 일에서 유래한다. 11 『논어』, 「衛靈公」, “子曰, 無爲而治者, 其舜也. 與夫何爲哉. 恭己正南面而已矣.” 12 성백효, 『현토완역 논어집주』 (서울: 전통문화연구회, 2011), pp.437-438. 13 『주자어류』, 제23권 5조목, “或問‘爲政以德’. 曰: ‘爲政以德’, 不是欲以德去爲政, 亦不是塊然全無所作爲, 但德修於己而人自感化. 然感化不在政事上, 卻在德上. 蓋政者, 所以正人之不正, 豈無所作爲. 但人所以歸往, 乃以其德耳. 故不待作爲, 而天下歸之, 如衆星之拱北極也.” 14 『정관정요집론(2)』, 7편 「論擇官」, “臣聞知臣, 莫若君, 知子, 莫若父, 父不能知其子, 則無以睦一家, 君不能知其臣, 則無以齊萬國. 萬國咸寧, 一人有慶, 必藉忠良作弼, 俊乂在官, 則庶績其凝, 無爲而化矣. 故堯舜文武, 見稱前載, 咸以知人則哲, 多士盈朝.” 15 공자의 무위이치는 주나라의 덕치를 강조한 것이다. 『尙書』, 「蔡仲之命」, “皇天無親, 惟德是輔. 民心無常, 惟惠之懷. 爲善不同, 同歸于治. 爲惡不同, 同歸于亂.(하늘은 멀고 가까운 자가 따로 없고, 오직 덕이 있는 자만을 돕는다. 백성들의 마음은 일정하지 않고, 오직 덕을 베푸는 자만을 마음에 품는다. 선한 일 하는 것은 다르지만, 모두 안정한 다스림에 이를 것이요, 악한 짓 하는 것은 다르지만 모두 어지러움에 이를 것이다.)” 16 『주자어류』, 제23권 7조목, “‘爲政以德’者, 不是把德去爲政, 是自家有這德, 人自歸仰, 如衆星拱北辰. … 極星也, 惟此一處不動. 衆星於北辰, 亦是自然環向, 非有意於共之也.” 17 ‘무위화’는 기존에 없던 용어이다. ‘무위의 조화’라는 뜻에서 이(而)를 생략한 것인지, 오기인지는 지금으로써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해당 구절은 『대순전경』(6판)에서 ‘무위이화(無爲以化)’로 『선도진경』(2판)에는 ‘무위이화(한글)’로 표기되어 있다. 특히, 『대순전경』의 ‘以’는 『전경』에서 ‘而’로 표기한 것과 차이를 보이는데, ‘以’는 “~써, ~로, ~에 따라”의 뜻으로 이를 직역하면 “무위하여 조화한다.”라는 뜻이 된다. 하지만 『전경』의 말이을 이(而)는 ‘~하여’의 뜻을 가지므로 “무위로서 조화한다.”가 된다. 의미상으로는 서로 큰 차이가 없다. 명확한 의미 전달로는 ‘以’가 더 나아 보이지만, 무위이화라는 고전의 용어를 사용한 관행적 측면에서 ‘而’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18 「도전님 훈시」, 1977년 김옥자 교감 필기본 (교무부 내부 자료). 19 길러서 자라게 함. 20 『대순진리회요람』, p.7. 21 교무부, 「해원상생, ‘무위이화’로 이루어지리라」, 《대순회보》 143호 (2013), “무위이화(無爲而化)는 일반적으로 힘들이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지는 현상을 말한다.” 22 『전경』, 교운 1장 64절. 23 『대순치침』, p.21. 24 『대순치침』, p.19, “포덕(布德)은 ‘덕을 편다’는 말이니 겸허(謙虛)와 지혜의 덕으로 사(私)로 인하여 공(公)을 해치지 말고 보은의 길을 열어 주는 것이다.”, p.84, “모든 도인들은 처사에서 무편무사(無偏無私)하고 공명정대하여 욕됨이 없게 하라.”, p.93, “수도를 잘하고 잘못함은 자의(自意)에 있으나, 운수를 받는 것은 사가 없고 공에 지극한(無私至公) 인도(人道)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25 『대순치침』, p.69, “조상을 받들고 신명(神明) 앞에 치성을 드리는 일에도 정성의 예를 갖추어야 하므로 사념(私念)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공경심을 가져야 한다.” 26 『대순치침』, p.82, “임원들이 수반들을 대순진리로 지도교화함으로써 도인들은 일정 일동이 사정(私情)에 치우쳐 경거망동한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다.” 27 『대순치침』, p.93, “사(私)는 인심이요 공(公)은 도심(道心)이니, 도심(道心)이 지극하면 사심(私心)은 일어나지 못하느니라.” 28 「도전님 훈시」 1989. 11. 21. 29 인존이나 도통군자의 경지에서의 화(化)는 조화로 볼 수도 있지만, 본 글은 고전의 관점에서 현재 수도에 관한 내용을 살펴본 것이기 때문에, 교화를 중심으로 해석하였다.
|